2015.12.26 함월산 산행을 마치고, 기림사 후문으로 입장...
기림사(祇林寺)
6세기 무렵 천축국(지금의 인도)에서 온 광유대사(성인) 일행이
임정사(林井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원효대사가 중창하고 머무르면서 기림사(祇林寺)로 바꾸었다.
기림사는 석가모니 생존 때 세웠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치다가 1862년(철종 13년)의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잿더미가 된 후, 그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 등의 시주를 받아 중건에 들어가 가을에 복원했다.
그 뒤 1878년(고종 15년)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이 다시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9월 1일부터는 30본산의 하나,
1924년 11월 20일부터는 31본산의 하나였을 만큼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던 거찰이었으나,근래 들어 불국사에 소속된 말사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현재 기림사는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당우를 이루고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명부전, 삼성각, 관음전, 산신각, 주지실, 종무소,
요사채, 산문, 대방 등과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그리고, 이 절에는 또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방서에도 그 기록이 있다.
명부전
삼성각
삼천불전(三千佛殿)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순조18년)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이다.
안에는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이는 항상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기림사에는 원래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하는데…
명안수(明眼水), 장군수(將軍水), 화정수(華井水), 감로수(甘露水), 오탁수(嗚琢水) 등
다섯 종류의 샘물을 말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감로수와 화정수만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요사체
관음전
범종루
응진전(應眞殿)과 삼층석탑
응진전(應眞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 214호
기림사 내에 있는 건물로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의 건물로 단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에는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건축양식을 볼 때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18세기 이후)의 건물이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경북 유형문화재 제 205호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 전체적인 모습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현재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 있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놓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있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 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로 이루어진 머리장식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2개에서 1개로 줄어들고, 지붕돌받침이 4단인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약사전(藥師殿) 경북 문화재자료 제 252호
대적광전 동쪽에 있는 약사전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불당이다.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 5년(1654)에 고쳐 세운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 833호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대적광전內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비로자나삼불회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 958호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와 아미타불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삼불회도(毘盧遮那三佛會圖) 보물 제 1611호
대적광전의 후불탱화로 봉안, 중앙에 비로자나불회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회도, 오른쪽에 아미타불회도가 배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삼불회도는 석가모니불화(중앙)·약사불화(좌)·아미타불화(우)로 구성된 삼세불화와
비로자나불화(중앙)·노사나불화(좌)·석가모니불화(우)로 구성된 삼신불화가 일반적이지만,
이 불화에서는 비로자나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화로 이루어져 있어
삼세불화와 삼신불화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 남송대부터 나타난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 16세기 불상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어,
불화 중에서 기림사 불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속하기 때문에 자료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 삼불회도는 한 화면에 많은 존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중앙의 주불을 중심으로 점차 화면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상승하면서
높은 존격에서 낮은 존격으로 배치하고, 인물의 표현도 점점 작아지게 하여
화면에서 원근감과 입체적인 공간감을 살리고 있다.
색채에서 후대에 일부 개채의 흔적이 보이지만,
황토색의 바탕에 홍색· 녹색· 노란색· 하늘색· 초록색 등이 적적하게
조화를 이루어 부처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화는 천오· 금명· 최훈· 적조· 지순· 조한· 임한 등의 화원이 참여하여 1718년(숙종 44)에 그렸는데,
천오와 임한은 18세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들로 기림사 불화의 진가를 짐작케 한다.
진남루(鎭南樓) 경북 문화재자료 제 251호
대적광전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호국 사찰로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진남루(鎭南樓)는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성보박물관
매월당영당(梅月堂影堂)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
매월당은 경주 남산 용장골에 조그만 산실을 짖고 7년을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에 사당이 있었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가 당을 개축하여 위판(位板)을 봉인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후에 금령에 의해 훼절되니, 고종15년(1878)에 이를 애석히 여긴 경주유림이 기림사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주었다.
최근(1996년)에 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자, 경주유림의 요청으로 경주시가 시비를 들여
절 담장 안에 새로 사당을 지었으며, 강릉김씨 종친에서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그려져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 하였다.
사천왕문
기림사 일주문
일주문 현판 "含月山祇林寺(함월산 기림사)"은
영남 서예계의 거목인 심천(心泉) 한영구(韓永久, 1940~) 선생의 글씨다.
'일반산행.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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