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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반야심경 강해 19-부증불감(不增不減)

반야심경 강해 19-부증불감(不增不減)

 

 

마지막으로,()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미 원만 구족되어 있으나,

우리의 분별심이 부족하고 적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차별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면을 봅시다.

본래 물질에는 내 것, 네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이것은 내 것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있기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보시하면 아깝고,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보시를 하게 되면 그만큼 나에게 복덕이 쌓이게 된다는 것은 모릅니다.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항상 부유합니다.

다른 이를 위한 이타심을 내어 올바로 회향할 수 있는 마음이 있기에,

인연 따라 법계를 떠돌아 다니는 물질들이 많이 모여들게 마련인 것입니다.

연못에 물이 그저 고여만 있어 빠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물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항상 새로운 물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시에 인색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가난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가 가진 본성의 원만 구족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 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고, 부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그를 부유하고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가, 아니면 욕심내는 삶을 사는가,

이 마음 자세가 우리를 가난하게 혹은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재산 하나 없이도 당당히 살아나갈 수 있는

원만 구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풍족하면 그만입니다.

‘나다, 혹은 ‘너다’하고, 너와 나를 갈라놓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상(我相), 아집(我執) 때문에 ‘내 것’이라는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아상이 없는 곳에 네 것, 내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어디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상을 깨고 보면 ‘내 것’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사라졌을 때 이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만 원의 돈이 있다고 합시다.

이 돈은 많은 돈입니까, 아니면 적은 돈입니까?

대답하자면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돈이겠지요.

 

, 어떤 이에게는 많은 돈이며, 어떤 이에게는 적은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백만 원을 가지고, 평범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재벌들에게 백만 원의 돈은,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는 작은 돈일 수 있습니다.

본래 백만 원이란 돈에, 많다, 혹은 적다라는 고정된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백만원은, 한없이 가난한 인도나 북한의 불쌍한 가정에서라면,

수억 원과도 맞먹는 값어치가 있으며, 대재벌에게 있어서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몇 천원, 몇 만원과도 같은 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백 만원 이지만 인연 따라, 어떠한 이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한없는 양의 돈이 되어 늘어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줄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늘고 주는 것이지,

백 만원이라는 돈 자체에 어떤 증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공성(空性)의 세계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이렇듯,‘내 것’이라는 소유도, 부증불감의 세계에서,()의 측면에서 보면,

증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보아 내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전체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이지요.

좀 더 쉬운 비유를 든다면, 내가 돈 만원을 가지고 있을 때,

오천원을 배우자에게 준다면 내 돈은 줄어들었지만,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늘어난 것입니다.

 

, 우리 가족 전체로 본다면 부증불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와 배우자를 가르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증감이 있게 마련이며,

배우자에게 오천원을 주었을 때 괴롭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습니다.

둘은 하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증불감이며,

내 것이 없어져도 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내 것이 곧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관련지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를 우리의 가족처럼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즉 사회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고 ‘하나’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바로 사회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한 부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我相)에 있으며, 아상이 있기에 인상(人相)이 있는 것입니다.

,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하고 가르는 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집니다.

내 것이 줄어들면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가 나와 다르지 않거늘 무엇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의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했을 때,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하며,

자비는 너와 내가 진정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천행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