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23-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이상의 교설은 근본교설에서 말하고 있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설명입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설명한 두 교설이 나타내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교설은 현상계를 괴로움으로 규정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며[유전문(流轉門)],
그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알아 소멸[환멸문(還滅門)]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이연기를 설한 연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교설을 살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즉, 이상에서 설한 사성제와 십이연기라는 것은 현상계에 대한 교설로서,
‘현상의 세계가 있다’라고 하는 전제 아래 설해진 교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남[타인]이 있으며, 객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이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괴로움’을 설할 수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을 설할 수 있고,
괴로움에서 소멸된 상태를 설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설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이상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범부 중생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이 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성제에서 인정한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가?
공(空)의 입장에서는 현상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던 바와 같습니다.
즉,현상계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고 정의한 뒤 오온이 개공이라는 것,
그리고, 이어 십이처와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반야심경에서는 현상계에 대한 단순한 겉모습을 살펴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현상계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습, 즉, 공상(空相)에 대해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이 공상에 의거해 본다면, 역시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사실도 인정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에 있어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현상의 일체 세계가 철저히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 공하고, 현상의 세계가 모두 공하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괴로움이 없는 마당에 괴로움의 원인과 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앞에서 오온개공이라 하였고,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체의 현상계를 부정한 공의 바탕 아래에서는
사성제나 십이연기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공이라고 하는 연유인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 수행인 육바라밀 중에서, 지혜,
즉, ‘반야바라밀’은 바로 이 점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즉, 현실을 괴로움으로 인정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근본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사성제, 십이연기라는 교설의 주요 목표라면,
대승불교의 공 사상에서는 본래 ‘나’가 없고, ‘현상계’가 없다는 것[空]을
올바로 철견(哲見)하여, 괴로움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無自性(무자성)], 인연의 가합상 [緣起(연기)]임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無執着(무집착))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괴로움[苦(고)]이 본래 없다는 것을 올바로 알기에, 괴로움의 원인[集(집)],
소멸[滅(멸)], 소멸에 이르는 길[道(도)]에도 집착하여 끄달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올바로 철견했을[照見] 때 진정으로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 두 극단을 분별(無分別(무분별))하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한쪽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 중관(中觀)의 실천적인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반야바라밀을 통한 대자유의 깨달음에의 길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이치로 인해 『반야경』의 핵심을 공(空)이라 하는 것이며,
공의 모습이 바로 연기(緣起)이고, 공이며 연기이기에 스스로의 자성이 없어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할 바가 없다는 무집착(無執着)을 올바로 알아,
생사와 열반 어느 한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대자유의 중도(中道)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가르침이 대승의 반야 공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공의 본질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므로,
단편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성(空性) =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무분별(無分別)= 무집착(無執着)
= 중도(中道)라는 공식을 조심스레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일체의 물질, 정신적인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공의 입장에서 삶을 조명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일체의 집착에 끄달리지 않고, 놓고 가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놓고 가는 삶, 비우는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방하착(放下着) 방하착(放下着)하는 것입니다.
방하착이란. 공의 실천이며 연기법의 실천이고 중도와 무집착, 무소득, 무자성의 온전한 실천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방하착 해야 한다는 이유는, 일체 애욕과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잡고 있는 일체가 다 공이며 연기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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