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천수경강해-11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得戒定道)”
대자대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원컨대 저희들이 계(戒)와 정(定)의 길을 빨리 얻기를 바라옵니다.
계정도 또는 계족도 옛날책에는 이렇게도 되어 있죠.
계정의 길이죠. 계정의 길이라면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오분향(五分香)의 길이다. 이렇게 볼수가 있습니다.
요건 염불이다 보니까 시험식을 통해서 생략이 됐습니다.
계정 하면 계정혜 삼학이며, 삼학을 통해서 해탈을 하며 그 해탈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유할수 있는 해탈지견의 길로 나아가는것. 이것이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궁극의 목적이다.
관세음보살님께 이러한것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를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음보살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많은데,
여기에 천수경에서 바라는 원이 얼마나 해당이 되는지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得願寂山)”
계정혜 길을 밟아서 가다보면 원적산(願寂山) 이란곳에 올라간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네요.
원컨대 저희들이 원적이라는 산에 빨리 오르게 해주십시오.
원적이라 하는 것은 스님들이 열반에 드셨을 때를 원적이라 표현도 합니다만은,
그것은 온갖 번뇌가 완전무결하게 완전히 사라졌다. 멸진되었다, 그래서 들고 일어나고
시끄럽게 흔들리던 그런 모든 상황들이 고요해졌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그런 것을 나타내기 쉬운 것은 없죠.
아무리 시시비비가 많고 잘잘못이 많다 하더라도 죽어버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게 끝이에요. 그야말로 원적입니다.
어떤 시시비비가 일어나더라도 돌아가신 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남아있는 사람들의 일이라 돌아가신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우리가 가끔 그런 입장을 나의 입장으로 돌이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지고 홀가분해요.
비록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고 또 후대에 자기 살림살이가 된다면
정말 살아 있어도 홀가분하게 깃털처럼 가볍게 인생을 살수가 있고,
그때쯤 되면 설사 죽음을 맞이한다하더라도 죽음이라 하는 일이 그야말로 여행 갔던 사람이
고향에 돌아오는 것 같이 정말 안도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될 것입니다.
도가 높으신 이들은 대개 죽음을 그렇게 맞이하죠. 그랬을 때 죽음의 문제는 두려움의 문제가 아닙니다.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라면 죽음도 아니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는 그 사람에게는 아니죠.
근래에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열반에 드는 것을 봤습니다.
특히 금년에 많은 분들을 보았는데 그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정말 어떤 경전을
한권 읽는 것보다 더 그러한 문제를 깊이 사유하는 것이 더 가슴에 와 닿고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원적이라는 것은 사실 그런 의미는 아니죠.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새서 그런 이야기가 발전이 되었습니다마는 여기는 그야말로 이렇게
씩씩하고, 강하고, 아주 힘차게, 살아있으면서 "모든 부질없는 생각과 행동과 말들이
완전무결하게 원만히 고요해진 그런 마음상태" 이걸 원적이라 합니다.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향이 완전무결하게 나의 살림살이가 됐다면
그 사람이 무슨 망상이 있고 무슨 시끄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게 원적산이죠.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南無大悲觀世音 願我速會無爲舍)”
원적산에 가면 집이 한 채 있어요. 그 집 이름이 무위사(無爲舍)야.
마음이 원적이 되었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을 해도,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하고,
정말 열심히 원력을 가지고 살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위죠. 함이 없는 일입니다.
그 집에서는 집이 한 채 꼭 있다는 이야기는 되어있으나, 그 말은 상징적인 이야기고요.
정말 모든 번뇌 망상이 다 사라진 원적의 입장이라면 그의 삶은 일체가
다 해독하는 것이 없는, 하는것이 없이, 열심히 하는 그런 삶이 되겠습니다.
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 첫 문절에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閒道人)'
그러죠. 배울것 다 배우고, 더 이상 더 배울것이 없고, 할것 다하고, 더 이상 할것이 없는,
많이 배워서 또 많이 해서 배울것이 없다. 할것이 없다 하는것이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어떤 흔적도 남아 있는것이 아니죠.
배우는것이 없고, 배우는것 없이 배우고, 무엇을해도,
어떤행위를 해도 그 행위는 하는 것 없이 하고, 하되 또 하는것이 없는
그런 마음의 흔적과 어떤 미련과 또 마음의 자취가 전혀없는 그런 행위입니다.
이걸 무위니 절약이니 무악이니 이런 표현을 하는거죠.
뭐 손발 다 묶고, 눈귀 다 막고, 아무것도 목석(木石)처럼 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런건 외도들이나 생각하는 것이고, 정상적인 불법의 소견으로는 정말 더 열심히
불교를 알면 알수록, 더 활발하게, 더 열심히, 더 씩씩하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소중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해주기위해서 열심히 사는것,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더 열심히 사는 그런 삶을 표방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되 마음으로부터 어떤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고 하는것,
함이 없는상태, 함이없는 상태에서 열심히 하는것, 말은 쉽습니다만은 아주 어려운 일이죠.
이러한 삶을 이뤄가고 있는 사람이 사는곳이 무위사 무위의 집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 같이 저희들이 빨리 모이기를 원하옵니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南無大悲觀世音 願我早同法性身)”
저희들이 빨리 법성신(法性身)과 하나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법성신, 진리(眞理)의 몸이죠. 우리 모두가 궁극에 가서는 진리의 몸이 되어 지이다.
이것이 관음보살님께 기도하는 발원(發願)이다. 이렇게 말씀 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연결해서 살펴보면 처음에 모든 가르침을 빨리 알고,
가르침을 알아서는 지혜의 눈을 얻고, 지혜의 눈을 얻은 뒤에는 일체중생들을 제도하고,
일체중생들을 제도해서는 또 좋은 방편을 얻고, 그래서 그방편을 통해서 반야선을 타고 고해를 건너가고,
고해를 건너가서는 길이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향의 길이더라.
그 길을 따라서 쭉 가다보면 산이 하나있는데 그산은 원적산이더라.
그 원적산에 올라가니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집은 무위사더라.
무위사에 들어가서는 무엇을 하느냐 하면은 우리모두가 진리의 몸으로 살아가자.
다같이 진리의 몸이 되어 주십시오.
그대로 홀연히 진리로 사는것, 그게 어디 강을 건너고 산에오르고
모두 무슨 통지문을 보고 쭉모여드는 그런 형국이 아니고,
모두가 각자 앉은 그 자리에서 진리를 체득했을때 그것을 원아조동법성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원 이라고 하는것은 다른말로 별원이라고 표현하는데 천수경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죠.
'經典講解'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비스님의 천수경강해-13 (0) | 2016.08.18 |
---|---|
무비스님의 천수경강해-12 (0) | 2016.08.10 |
무비스님의 천수경강해-10 (0) | 2016.07.27 |
무비스님의 천수경강해-09 (0) | 2016.07.20 |
무비스님의 천수경강해-08 (0) | 2016.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