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법화경강해-09
♧속박과 자유에 대하여♧
강의: "말이란 들을 만한 사람이 있는데도 하지않으면 사람을 잃고,
들을 수없는 사람에게 하면 말을 잃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의 생애에서 최후로 가장 중요한 말씀을, 그리고 가장 망설이던 말씀을
하시려는 때가 되어서 이처럼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법을 듣기 위하여 모인 청중들의 수준을 나타내는 경문 가운데
"더 이상의 번뇌가 없고 모든 존재의 속박도 없어서 마음이 자유로워진 사람들이다."
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해탈이나, 자유자재나,
걸림 없음의 무애와 같은 말을 곧잘 씁니다.
수행이 높아지면 그만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로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래 무엇에도 구속될수 없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사실은 자유자재한 인간의 본 생명을 뜻하기도 하는데
그 본래의 생명대로 살지 못하고 너무도 강력한 구속을 받으며 삽니다.
더욱이 구속을 받으면서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채 살아 가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속박의 문제에 대하여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나는 자유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 한사람 수갑을 차고 있지 않으며, 끈으로 묶여 있지도 않다.
그러나 조금만 다가가서 보면 그대는 지나치게 많은 끈으로 묶여 있다.
그것이 그대를 어떤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게다가 거의가 모순된 방향으로 잡아 당긴다.
그것이 분열된 인격을 만들어내고 단편화된 인격을 만들어 낸다.
그대는 이 끈을 사랑이라 부를지 모른다.
그대는 이 끈을 야심, 욕망, 질투, 미움이라 부를수도 있다.
뭐라고 부르든 다를게 없다.
그것은 모두 끈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든 그것들은 모두 끈이 된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마음만이 자유가 뭔지를 안다.
외부에서 보면 누구나 자유롭게 보인다.
허나 깨달은 이가 말하고 있는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끈이다.
그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끈을 볼수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집착, 아내나 남편, 자식에 대한집착,
친구와 적들에 대한 집착들을 볼 수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저격되었을 때였다.
지나(jinnah)는 나라를 둘로 나눠 이슬람 독립국을 만들기위해 평생동안 간디와 싸워온 남자였다.
그가 정원에 앉아 신문을 보는데, 비서가 급히 달려와 간디가 저격 당해 사망했다고 알려왔다.
비서는 지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사실은 바로 그 순간 지나도 죽었던 것이다.
그는 병이 들어 다시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는 여러번 질문을 받았다.
"왜 그렇게 병이 들었죠? 당신의 건강은 더할 나위없이 좋았는데, 간디의 뉴스가..."
지나가 말했다.
"이제와서 보니 적과의 사이에서도 일종의 관계가 존재하는 걸 알겠다.
간디가 없다면 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간디가 힌두교에게 저격 당하면 나 역시 언제라도 이슬람 교도에게 저격 당할 수 있다."
그는 간디가 저격당할 때 까지는 집 주변에 호위병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
"이슬람교도가 내 생명을 위협한다고 생각만해도 어이없다.
나는 그들을 위해 싸워 왔으며, 그들에게 독립된 국가를 주기위해 고분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간디가 죽던 그날, 그는 즉시 집주변에 호위병을 두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그에게 그토록 큰 충격 이었는지는 아무도 이해할수 없다.
"간디가 죽었으니 마당히 기뻐해야 옳다.
그러나 내 눈은 눈물로 가득차 있다.
간디가 없어짐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와의 싸움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내 인생의 반이 끝나고 말았다.
이제 나는 불구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두번 다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몇 달 뒤 죽었다.
자기 주변을 둘러보면 수 많은 끈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거의 그물과도 같다.
만일 끈이 하나라면, 그 끈을 잘라내 자유롭게 되는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끈은 무수히 많다.
그대의 인격 전체는 그러한 끈으로 이루어졌다.
이 끈들이 그대를 포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끈들은 슬픔과 고뇌를 생산할 뿐, 자기 존엄성과 주체성을 갖는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 끈을 버리게 되면
마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잘라내는 듯한 느낌이 엄습한다.
그 끈들은 그대의 제2의 본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사랑과 애착의 관계도 끈이지만, 미움의 관계도 무서운 끈 입니다.
부처님에게 이 최고의 가르침인 법화경을 듣기위해서 법석(法席)에 모인
대중들의 정신적의 수준은 경전에서 밝힌대로
"더이상의 번뇌가 없고 모든 존재의 속박도 없어서 마음이 자유로워진 사람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속이 후련한 대중들입니까.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란 라즈니쉬가 말한 것처럼 끈으로 묶이고 구속된 것이
이미 제2의 본성이 되어 끈으로 묶였다는 사실마저 의식하지 못하고 그 굴레 속에서 살아갑니다.
혹시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잘라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볼때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대 자유를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인간의본 모습입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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