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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무비스님의 법화경강해-48

무비스님의 법화경강해-48

 

 법화행자는 부처님과 함께하는 이다♧

 

경문: "약왕보살이여, 여래가 열반한 후에 이 경을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고 공양하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하는 이는 여래께서 곧 그 옷으로 덮어 주실뿐만 아니라,

다른세계에 계신 부처님까지 호념(護念)하시니라.

이 사람은 여래와 함께 잠을 자며, 여래께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이가 되느니라."

 

강의: 여래란 곧 바르고 참된 이치[眞理]를 가르치신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불상을 조성하고 복장에 경전을 넣어서 점안 (點眼)을 하므로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불탑(佛塔)을 만들어서 불사리 대신에 경전을 탑에 넣어 모심으로

불탑으로 경배하게 되는 사실도 그러한 이치입니다.


특히 모든 경전중에서 왕이라고 일컫는 이 법화경의 소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옛 조사의 선게(禪偈)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함께 자고, 아침마다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다

[야야포불안(夜夜抱佛眼)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의 경문에도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는 사람은 여래와 함께 잠을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그 사실을 극명하게 가르친 그 가르침으로 인하여,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고 스스로 부처님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바르게 깨달은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경전에는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이 다 같이 말씀하시는 바' 라고 표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지역과 민족이 다르다고 하여

그 가르침이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시의에 맞추거나 근기와 수준에 맞춘 방편의 말일뿐입니다.

 

법화경이라야 깨달음에 가깝다

 

경문: "약왕보살이여, 재가보살이거나 출가보살이거나 만약 이 법화경을 보고,

듣고, 읽고, 외우고, 쓰고, 지니고, 공양하지 않는 사람은 실은 보살도를 잘 행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이 경을 보고, 듣는 이는 보살도를 잘 행하는 것이 됨이니라.

불도를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 법화경을 보거나 듣거나 하여 믿고 해석하며

수지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최상의 깨달음에 다가선 것이니라."


"약왕보살이여,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목이 말라 물을 구하고자

높은 언덕에서 우물을 팔때, 마른흙이 나오면 물이 아직 먼 줄을 아느니라.

파기를 쉬지 아니하여 젖은 흙이 나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진흙이 나오면 반드시 물이 가까이 있는 줄을 알리라.

보살도 이와 같아서 만일 이 법화경을 듣지 못학 이해하지도 못하며,

닦아 익히지도 못했다면 이 사람은 최상의 깨달음에서 아직도 머니라.


그러나 만약 이 경을 듣고 이해한다면, 최상의 깨달음이 가까우니라.

왜냐하면 모든 보살들의 최상의 깨달음이 이 경에 속해있기 때문이니라.

이 경은 방편문을 열어서 [개방편문(開方便門)] 진실의 상()을 보이느니라[시진실상(示眞實相)].

이 법화경의 법장(法藏)은 깊고도 견고하며, 아득히 멀어서 능히 으르는 사람이 없느니라.

이제 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여 성취시키고자 열어 보이시느니라."

 

강의: 법화경을 수지 .독송. 해설. 공양하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고,

법화경을 수지. 독송해야만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법화경이라야만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법화경은 깨달음을 조금도 남김없이 한껏 드러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일체 감정과 모순과 번뇌들을 다 가진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그대로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아는 일입니다.


보살들의 최상의 깨달음이 이 법화경에 속해 있기때문에

법화경이라야 깨달음에 다가선다고 합니다.

법화경을 손에 넣는 것은, 마치 우물을 팔때 젖은 흙을 만나서

곧 물을 얻을 수 있는 사실과 같다고 합니다.

법화경의 대지(大旨)를 흔히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하나

위의 경문에 나온 방편문을 열어서[개방편문開方便門]

진실의 상()을 보인다[시진실상示眞實相]는 말로 표현해도

매우 좋을 듯 하나는 생각을 합니다.


법화경을 설하기 전의 모든 경전은 거의가 방편이라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가르침이며,

또한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방안에 있는 진실상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3아승지겁을 지나면서 10, 10, 10행 등등 52단계를 거쳐야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다고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중생들의 수준을 감안 하여

점차 성숙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 법화경은 바로 진실을 말씀 하셨습니다


, "아무런 수행도 필요치 않다. 현재 이대로 완전한 부처님이다.

몸에는 병고가 있어서 매일매일 신음을 하고 살아가는 그대로가 부처님이다.

마음에는 온갖 번뇌가 들끓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과 시기, 질투와 음해 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 몹쓸 인간도 그대로 부처님이다.

그립고 아쉬움으로 잠 못 이루고 몸부림치는 밤을 견뎌야 하는

그런 사람도 그 모습그대로 부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교도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부처님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입니다.

모든 생명 모든 사람들, 아니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님들 입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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