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법화경강해-49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경문: "약왕보살이여, 여래가 열반하신 후에 사부 대중들을 위하여
이 법화경을 설하시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법화경을 설하고자 하는 이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 대중들을 위해 이 경을 설할 수 있으리라.
여래의 방이란 일체 중생을 감싸는 대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더럽고 화평한 인욕심이요,
여래의 자리란 모든것이 공(空)하다는 도리이니라.
이러한 경지에 안주하여 게으르지 말고 대중들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하지니라."
강의: 법사의 조건, 포교사의 조건, 또는 스님의 조건, 불자의 조건이라고 할 내용입니다.
설사 법화경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펴고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넉넉한 자비심으로 대하는 것과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참고 견디는 자세를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명예와 이익의 문제를 만나서 유혹에 흔들리지않고 참고 견디어
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것입니다.
참으로 자비심과 인욕심은 수행자의 기본입니다.
모든것은 공이다
끝으로 모든것이 공한 도리를 마음 깊이 체득하여 일체 인간사와
세상사에 초연한 자세를 가질 수 있을때, 비로서 여래의 자리에 앉아 포교하고
설법하고 스님으로 행세할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칼이나 몽둥이, 기와나 돌로 때리고 해칠지라도
부처님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라고 하였습니다.
리처드 칼슨이라는 사람은 공(空)의 생활화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쳐가는 일들에 대해 마음 쓰지 말라.
이것은 내가 최근 들어 채택한 최신 방법이다.
'스쳐간다'는 말 그대로, 좋은 것과 나쁜것, 쾌감과 고통, 동의와 거절, 성취와 실수,
명성과 치욕과 같은 모든일들은 우리들의 인생에 잠시 다가왔다가는 사라진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으며,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일들도 지금은 끝난 상태이다.
이전부터 가져왔던 생각들에도 모두 시작과 끝이 있어으며,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과 기분 역시 살아오면서 계속 끊임없이 변화돼 왔다.
한 가지 감정만이 우리의 마음을 꿰차고 들어앉는 일은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 슬픔, 질투, 우울, 분노, 사랑, 수치심,
명예와 같은 모든 감정들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정답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아는 거라곤, 결국 모든것이 무(無)로 사라진 것이다.
이 진실을 삶에 받아들일때, 비로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모험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실망하곤 한다.
기쁨을 경험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법은 없다.
고통을 겪게 될 때, 당장 그것이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것 또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인생은 늘 희망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불행은 자연스런 흐름에 저항할 때 생기는 침전물이다.
인생이 여러 가지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잔뜩 흐려진 마음을 맑게 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현재의 한 순간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리고 그 자리는 계속되는 또 다른 순간들로 메워진다.
흥겹고 즐거운 시간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일랑 맘껏 누려라.
하지만 결국 그 순간에도 다른 일이 다가오고 있으며,
다른 모습의 순간들로 대체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명심할 일이다.
스쳐가는 모든 일들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개의치 않게 되면,
변화 무상쌍한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도 평화를 느낄수 있다.
어떠한 고통이나 불쾌한 상황 역시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러한 인식을 마음에 새겨두면, 역경에 직면한 순간에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항상 이렇게 하는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참으로 쉽게 풀어 쓴 공의 생활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실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 앞마당을 스쳐간 수많은 빛과 그림자들, 지금은 어디에 갔나요?
오로지 지금의 빛이 있을뿐 입니다.
지금의 그림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화는, 그러면서도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그런 빛과 그림자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그것들은 실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우리들 인생의 앞마당을 스쳐간 그 수많은 빛과 그림자들 또한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쁨의 빛, 영광의 빛, 승리의 빛, 즐거움의 빛,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슬픔의 그림자, 오욕의 그림자, 패배의 그림자, 외로움의 그림자, 아픔의 그림자,
고통의그림자, 분노의 그림자들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길 없습니다.
실로 있는 것인가, 없는것인가?
눈앞에 보일 듯한 빛과 그림자들, 어쩌면 잡힐 듯 하지만
본래로 없는 것이기에 손에 잡힐리 없습니다.
기쁨의 빛과 슬픔의 그림자, 만남의 빛과 헤어짐의 그림자, 영광의 빛과 오욕의 그림자,
이득의 빛과 손해의 그림자, 합격의 빛과 낙방의 그림자, 선의 빛과 악의 그림자,
고통의 빛과 즐거움의 그림자, 모두들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언제나 한결같은 텅 빈 인생의 앞마당 뿐입니다.
되돌아보세요.
10대 때의 그 수많은 빛과 그림자들, 즉 기쁨과 슬픔들, 영광과 오욕들,
명예와 부귀들, 사랑과 미움들, 20대 때의 그 수많은 빛과 그림자들,
즉 기쁨과 슬픔들, 영광과 오욕들, 명예와 부귀들, 사랑과 미움들,
그리고 30대, 40대. 50대 때의 그 수많은 빛과 그림자들,
즉 기쁨과 슬픔들, 영광과 오욕들, 명예와 부귀들, 사랑과 미움들,
그 모두들 지금은 어디에 갔습니까?
오로지 무(無)이며, 공(空)일 뿐입니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무사노(無老死) 무노사진(無老死盡)'
삶도 죽음도 모두가 공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꿰뚫고 깃털처럼 가볍게 살아가는 자세가
곧 여래의 자리에 앉은 것이라고 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기본은 모든 존재의 공한 이치를 터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여래의 자리에 앉는 것이란 이러한 기본적 토대 위에서
수행도 교화도 설법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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