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2.6.10
코스: 호미곶(시점)-대보2리마을-대보항-구만1리마을-구만2리방파제-독수리바위-월보.서상만 시비-대동배2리마을
-대동배1리마을-구룡소-발산2리마을-발산항-장군바위-발산1리마을-흥환1리마을-흥환리보건소(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3.34km (두루누비기준 12.9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25분
▶ 갈때 : 개금집에서 노포동.동부시외버스터미널으로~ 포항行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포항시외버스터미널방향/버스정류장에서 포항900번 버스타고 구룡포항 일본인가옥거리/버스정류장에 하차,
포항9000번 버스타고 호미곶해맞이광장/버스정류장에 하차, 시점까지 도보 이동
▶ 올때 : 같은날 포항16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15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대한 탐방기는 별도 포스팅 참조)
해파랑길 14코스,15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
해파랑길 14코스,15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는 호미곶등대 앞에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14코스,15코스 종합안내판 우측 앞에 있는 15코스 스탬프를 찍고,
(10:10) 호미곶 해맞이광장 동편 해안가를 따라 진행하면서 해파랑길 15코스는 시작된다.
***호미곶면 대보리***
대보리는 남쪽으로는 강사리, 서쪽으로 구만리와 경계를 이룬다.
한내와 번디기의 일부, 그리고 ‘장기벌내’ 가에 형성된 자연부락으로 공공기관이 밀집한 호미곶면의 중심지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천의 ‘대’와 보천의 ‘보’, 각각 앞 자를 따서 ‘대보’라 칭했다.
한내는 1592년 남평문씨와 김해김씨가 하천을 이용해 농업을 이루면서 개척됐다.
한내골에는 약 30년 주기로 대홍수가 발생했다고 하여 조선 말엽부터 ‘대천’이라 불렀다.
이러한 연유로 1973년 대보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보들은 수리안전답으로 변했다.
벌내·보천은 1624년 경주최씨, 진양하씨, 남원양씨가 개척한 마을로 ‘장기벌내’에 속한다.
3성비가 있는 제당은 포항시 민속신앙 유적으로 지정돼 있으며, 조선시대 나라에서 내린
가선대부 효자 하세만의 정효각과 하상천의 순효각이 있다.
하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호미기맥의 고금산과 장기갑 등대는 일제 탄압 100년의 풍파를 견뎌낸 현장이기도 하다.
국립등대박물관, 해맞이광장, 상생의 손, 영원의 불, 연오랑세오녀상, 새천년기념관 등이 있다.
불종골은 임진왜란 당시 마을에 불이 나면 종을 울렸던 곳이라 하여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에도
소방용 종각이 있어 ‘종로’라고도 했다.
약 200년 전, 이성용 선비는 ‘신동’이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장기벌내, 근대의 대보2리였으나
행정구역 개편 시 대보3리로 분동했다.
'호미곶길' 해변도로를 따라가다 '국립 등대박물관' 옆을 지나고~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를 지난다.
(이때 뭣에 홀렸는지??? 청포도 시비 사진 찍는것을 깜박했다.)
(10:20) 해양경찰 호미곶 파출소를 지나고~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쉼터를 우측에 끼고 진행하다 대보 2·3리 어촌계를 연달아 지난다.
(10:23) 대보항
이후 대보항을 따라 잠시 나가면, 민물이 바다로 나가는 곳이
대보리에서 구만리로 바뀌는 경계다.
***구만리***
구만리는 호미곶의 끝자락에 해당하며 장곡 봉수대가 있었던 봉화봉 북쪽의 마을이다.
고대 선인들이 오래전부터 살았던 곳으로 추측되나, 조산 말엽인 1890년, 경주이씨와 김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만리란 이름이 붙은 연유는 범꼬리 부위 지형이 굽이친 곳,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귀만’, 구릉지가 많다고 하여 ‘구만’이라 불렸다 하기도 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한 영의정 황보인의 손자 서를 충복 단량이 항아리 속에 숨겨 이곳까지 도망 와서 보니
앞이 바다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그만 가게 되었다'라는 데서 유래한다는 등 다양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섭슬 끝의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백미3말을 못 먹고 간다’는 목장보슬말의 유래가 있어 ‘섭슬골’이라고도 한다.
고대 농경사회를 이룬 구만들은 포항시 ‘유물산포지’로 지정돼 있으며, 매년 ‘보리누름’이라는 문학제도 이어진다.
영일군 동해면에 속하다 이후 구룡포읍을 거쳐 호미곶면으로 편입되었다.
보내·벌내·보천은 북쪽 어귀에 형성된 마을로 ‘영일벌내’에 속한다.
예부터 서당이 있었고 이후 1924년 보명사립학교, 1939년 심상소학교가 설립됐으며
현재는 대보초등학교가 있는 교육의 중심지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보항의 어업기지로 정어리기름 공장이 많았으며 북 방파제도 있다.
정족·솥발이개는 1590년 망씨 부인이 일으킨 마을로, 농촌 부엌에 있는 솥같이 생긴 지형의 발 부분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정족(鼎足)으로 불렸고, 웅굴개는 솥발이개 북쪽 해안에 있었던 작은 마을로
전설이 서린 웅굴('우물'의 사투리)이 있어 웅굴개라 불렸다.
큰개는 웅굴개 북쪽 해안마을로 계곡 및 구릉의 차가 커 ‘큰개’라 불렸고, 풍랑과 유속이 심한 교석초가 있다.
마고 할멈의 전설이 있으며 갑신정변의 주인공인 김옥균의 왼팔이 수장된 곳이다.
구포는 해안에 풍파가 심해 고기(청어)가 자주 밀려 나오는데 까꾸리(갈고리의 사투리)로 끌었다 해서
까꾸리개라고도 한다.
해안 낭시 끝에는 일제 침략의 흔적인 쾌응환 조난 기념비가 있다.
주변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바뀌는 악어, 물개, 거북이 변신 바위와 독수리바위의 전설이 있으며
영일만의 낙조가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곶의 서편마을은 ‘앞구만’이라 하여 낙조와 기암절벽 한 창파 포구에 경치가 장관이라 하여
‘분월포’ 또는 ‘부느리개’라고 불린다.
신동은 198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큰 마을 남쪽에 새집들이 들어서면서 ‘신동’이라 부르고 있다.
(10:30) 구만1리 어촌계 공동작업장을 지나고~
좌측으로 군부대 펜스와 평행하여 해안 도로를 따라 나가다 보면,
멀리 앞쪽으로 포항제철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미 둘레길 이정표가 '독수리 바위'까지 0.6km 남았다고 알려준다.
(10:45) 구만2리항
갈림길 좌측 400m 안쪽에 '흑구문학관'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흑구문학관(黑鷗文學館)
일제 강점기 때 영미문학을 소개해 한국 문단의 지평을 넓힌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흑구(黑鷗) 한세광(韓世光: 1909~1979)을 기리는 문학관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1948년 포항에 정착하여 포항 수산대학에 재직하면서 영일만과 청보리밭 등 자연을 소재로
생명과 인생에 대해 관조하는 다수의 수필을 남겼다.
대표작 수필 ‘보리’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보리가 지천으로 널린 호미곶 구만리가 탄생지다.
포항시에서는 2012년 5월 옛 마을회관에 흑구 문학관을 조성하였으나 전시 내용물의 빈약과 외딴곳에 위치한
지리적 문제로 탐방객이 거의 없어 방치된 상태로 놓여 있다고 한다.
이후 '구만길' 2차선 도로로 들어서서 구만 2리 수산물 간이 집하장을 지나고~
(10:47)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곳 우측 사각정자쉼터 아래에 독수리 바위가 있다.
사각정자 옆의 '수산강습소 실습선 쾌응환 조난 기념비'
1907년 7월 일본 수산 강습소(현 동경 수산대) 실습선 쾌응환이 어업 실습을 위해 영일만으로 출항하여
항해하던 중, 태풍으로 대보면 구만리 앞바다 암초에 좌초되어 기사 1명, 학생 3명이 사망하는 해난사고가 발생하여,
사체는 사고 해안에서 화장하고 목재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나 훼손, 1926년 11월 수산 강습소 졸업생들이
구만리 396-3번지에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으나, 1945년 광복과 동시에 훼손 방치되어 오다가 1971년 재일교포
한영출씨가 당시 영일군 문화원장의 자문과 주민들의 협조로 구만리 491-2번지에 재건되었다가, 2004년 11월
대보-구만리간 해안 도로공사 부지에 편입되어 현 위치로 옮겨 재건됨
지난 1967년 고 박일천은 `일월향지`를 통해 `장기갑 등대의 괴이`라는 제목 아래 고종 광무 50년인 1901년
일본 실습선 `응웅환`의 표류와 등대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당시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러일 전쟁을 준비하는 등 세력 확장에 나선 가운데 나가사키상선학교 실습선
응웅환에 교사와 생도 30여 명을 승선시켜 우리 해역의 해류와 어족, 수심 등을 조사하고 다녔다.
하지만 영일만 장기곶을 지나가다 암초에 부딪혀 조난을 당해 승선자 전원이 익사(이는 착오이며 사망자는 4명)하는
사고를 당했다.
일제는 조선이 연안 해난 시설을 갖추지 않아 일어난 인재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생트집을 잡았다.
이에 못이긴 조정은 국비로 일본인에게 공사를 맡겨 우리 지역에서 최고, 최초의 등대를 세우게 됐다.
이에 일대의 주민들은 `(국토의)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르니 등대가 무너지면 불바다가 된다`며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 일본은 등대수로 본토의 살해 혐의 죄수를 임명해 유배의 벌로 삼았는데 피해자의 아들이 복수에 나서
그와 가족들을 살해한 참극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조난비 좌측의 테크계단길을 내려서면 작은 방파제전망대 아래에 '독수리 바위'가 있는데~
까꾸리개로 불리는 이곳 '구포'는 포항 일대에서 가장 바람과 파도가 거친 곳으로, 예전에는 풍파가 심하면
청어떼가 갯바위까지 떠밀려와 까꾸리(갈고리)로 쓸어 담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방파제전망대 바닥에는 독수리 트릭아트가 그려져 있다.
계단을 지키는 소맷돌, 독수리바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석조 계단에서는 입구를 지키는 돌사자 석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석상을 '소맷돌'이라고 하는데, 자연이 만든 호미곶 바다계단 길에도 마치 소맷돌과 같이
계단 옆을 지키고 있는 독수리바위가 있다.
지역 주민들은 이 바위를 두고 부리를 벌린 독수리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독수리바위'라고 불러왔으며,
독수리바위와 해 질 녘 풍경의 조화는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오게 할 만큼 뛰어난 절경을 뽐낸다.
이 독수리바위는 자갈이 굳어져 만들어진 역암과 모래가 굳어져 만들어진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바다계단을 이루는 암석의 특징과 똑같으며, 알고 보면 자연이 바다계단과 소맷돌을 조각하는데
동일한 석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이 독수리바위를 만드는데 사용한 재료는 자갈과 모래가 물속에서 굳어진 암석이다.
자연은 이러한 암석들을 바닷속에서 꺼내 파도와 날씨로 조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조각 작업으로 독수리바위가 만들어졌는데, 이때 입자가 작은 모래로 구성된 부분이
자갈로 이루어진 부분보다 쉽게 깎이게 되어 독수리 부리와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바위를 구성하는 입자의 크기에 따라 깎이는 정도가 다른 현상을 '차별침식'이라고 한다.
갯메꽃...
(10:50) '구만길' 도로를 따라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송엽국...
천년초...
(10:56) 호미숲해맞이터 조성 표지석
‘호랑이 꼬리에 나무를 심자’란 슬로건과 함께 결성된 ‘영일 호미수회(迎日虎尾樹會)’에서 세운 표지석이다.
'호미숲해맞이터' 끝 바닷가 전망대에 '악어바위'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 해변에 '악어'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악어바위
호미곶 서쪽 끝에 있는 '호미숲해맞이터' 앞 바다에는 기다란 모양의 바위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마치 바다에서 악어 한 마리가 기어 나와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악어바위'라 불린다.
악어바위를 이루는 암층은 자갈로 이루어진 흑갈색 암석과 모래로 이루어진 노란색 암석이며,
주변 암석 중에서 가장 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바다계단을 이루는 암층과 같은데, 자연이 바다계단과 소맷돌을 조각하는 데 동일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멀리 앞쪽으로 포스코/포항제철을 바라보고...
(11:05) 구만2리항
우측 해안에 오래전에 사용된듯한? 파손된 작은 방파제를 지난다.
(11:12) 해파랑길 종합 안내도
예전에는 이곳까지가 14코스로, 구간 길이가 17.4km로 표시되어 있다.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호미 둘레길) 안내판
이곳에서 둘레길 4코스 '호미길'과 3코스 '구룡소길'이 갈린다.
월보 서상만 시비(月甫 徐相萬 詩碑)
나 죽어서
나 죽어서 분월포에 가야 하리 / 천천히 걸어서 대동배로 가든지 / 호미곶 등대불빛 따라가다 /
보리능선 질러가는 / 구만리 밖 내 사라질 빈자리 / 거기 찰박찰박 / 바닷물도 달빛을 끌어당겨 /
비백으로 출렁이는 곳 / 다 떠나고 / 아무도 그곳에 살지 않아도 / 저녁이면 치자빛 노을을 품고 /
덧없이 홀로 앉아 / 밤하늘 芬月(분월)을 무시로 안아보는 / 나 꼭 돌아가 그곳에 / 늙은 그림자 비탈에 뉘일터
서상만 시인은 1941년 호미곶 구만리에서 출생하여, 다소 늦은 나이에 문단에 문단에 등단,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풀잎’, ‘불혹’ 등이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11:14) 이곳에서 해파랑길은 직진 터널방향이 아닌 우측으로 내려선다.
구만2리 '동구만'항
(11:16) 최근에 조성한 듯한 비포장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시멘트포장 탐방로가 이어지고~
이어 돌길이 나타나고~
위험지역에는 '테크탐방로'가 길게 조성되어 있다.
(11:25) 모아이상 바위
거대한 입석바위인데, 영락없는 사람 얼굴 형상의 아파치 추장의 얼굴과 비슷하게 보인다.
남미의 칠레 이스터섬(Easter Island)에 있는 모아이석상 얼굴과 닮았다고 하여 '모아이상 바위'로 이름 붙여졌다고~
대동배리가 지척으로 다가온다.
대동배리(大冬背里)
영일만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전형적인 어촌마을로 ‘대동배마을’과 ‘장천마을’이 있다.
학달비산의 유래와 ‘구룡소의 전설, 그리고 ’학달비의 팔경‘의 풍광이 있는 곳이다.
대동배는 신라시대 ‘동을배곶(冬乙背串)’이라 칭해 봉수대의 이름으로 사용됐다.
1664년, 조정의 관리인 김상구(호 이필)가 이곳에 정착해 작시한 '동해순토학달비라(東海舜土鶴達飛)'는
시구에 연유해 처음에는 학달비(鶴達飛)라 했다.
마을의 형상이 먼바다에서 보면 날아가는 학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또 1679년 박현섭이라는 어부가 마을뒷산이 달비 같다하여 ‘한달비(大達飛)’라 부르다가 1914년 대동배로 통칭했다.
여름에는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된 모감주나무에 꽃이 만발하면 마치 황금비가 내리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며,
노암식수, 구룡소 등의 명승지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돈이 흔해 개가 지화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생길만큼 부촌으로 일본 유학생이 많았다.
장천은 250여 년 전, 원주원씨, 제주고씨, 달성서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했다.
장곡(노루골)에서 흘러내리는 긴 하천의 이름에 연유하며 ‘장천’ 또는 ‘장내’라 하였다.
또한 양지(흥해)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 물을 길어 가기도 했는데 물맛이 좋아 ‘정천’이라고도 하다가
마찬가지 1914년에는 ‘대동배’로 통칭했다.
해안 갯바위에 쌓인 갈매기 분이 백옥 같아 붙어진 옥바위, 땅버들· 해당화가 자생하는 기암절벽의 풍광이 절경이다.
약 300년 수령의 팽나무 제당은 포항시 민속신앙 유적으로 지정돼 있으며, 동제 때 풍어제를 지내기도 한다.
(11:40) 대동배2리항
해파랑길 갈림길
해파랑길은 이정표가 가르키는 구룡소 방향이 아닌 좌측이다.
개울 우측의 '대동2리' 마을회관을 보며 진행하고~
929번 지방도로인 '호미로'로 나가서, 우측 작은다리를 건너고~
(11:43) '대동배2리' 표지석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초입에 '호미둘레길' 3코스 중 '소나무숲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소나무 숲길
이 구간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제3코스인 구룡소길과 연결되는 숲속 솔향과 바다향이 가득한
소나무 숲길로 지방도 제929번 도로의 위험요소를 피해 조성된 소나무 숲길 구간입니다.
팽나무 고목 옆으로 들어서서, 완만한 숲속 등로를 따라 오른다.
은근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올라서서
(11:56) 오늘구간 최고 고도인 103m봉을 넘고~
'103m봉(GPS상 99m)'을 지나면 평탄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고~
그렇게 숲길을 벗어나 바닷가 마을 어귀에 옛날식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우물물이 고여 있지만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지않나 싶다.
(12:07) '대동배교회'옆 버스정류장을 지나 '929번 호미로'를 따라 진행이다.
대동배1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12:11) 대동배1리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방파제끝 차량 통행방지봉, 우측에 '구룡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갯메꽃...
모래지치...
갯까치수염...
돌가시나무...
벌노랑이...
(12:21) 테크계단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잠시후 갈림길을 만나고~
해파랑길은 좌측으로 이어지지만, 우측해변에 있는 '구룡소전망대'로 간다.
(12:25) 구룡소전망대 & 안내문
구룡소
구룡소(九龍沼)
호미곶면 대동배는 한반도의 최동단지역인 호랑이 꼬리인 호미반도권에서 매우 경치가 좋은 곳이다.
옛날에는 '동해안의 영일만에서 매우 경치가 좋은 곳이다.
옛날에는 '학달비(鶴達飛) 마을'이라 불리었는데, 바다에서 보면 대동배 마을의 형상이 마치 학(鶴)이
날아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용히 굽이돌아 이루어진 아늑한 포구의 노적암 서쪽 300m 지점에는 동을배봉이 우뚝하게 선 해안 절벽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 용 아홉 마리가 등천했다는 전설이 고려 충렬왕 때부터 전해지고 있는 구룡소가 있다.
구룡소는 높이 40~50m 정도, 둘레 100여 m의 움푹 패어 있는 자연만이 빚어낼 수 있는 기암절벽이다.
용이 살았다는 소(沼)는 맑은 바닷물이 드나들고, 바닥이 평평한 곳에 깔린 여러 형상의 바위에는
에메랄드빛 맑은 물이 출렁이고 있어 웅장함과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할 때 뚫어진 9개의 굴이 있으며, 그중에는 5리가량의 깊은 굴도 있어 유명한 도승들이
그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
파도가 칠 때 굴의 입구로 흰 거품과 같은 바닷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듯하고,
물을 뿜어낼 때 우렁찬 울림소리는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아 이 구룡소(九龍沼)를 아주 신성한 곳으로 믿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나 풍어제, 출어제를 지내기도 하고 굿을 할 때도 있으며
이곳을 구룡소, 용추, 용수리, 용치미기라 칭한다.
잠시 숨한번 돌리고, 구룡소전망대에서 되돌아나와 급경사 돌계단길을 올라
산허리로 난 해파랑길을 이어가니 우측 낭떠러지로 추락을 막는 로프길이 이어진다.
진행도중 구룡소 다시 한번 더 바라보고~
이후 군부대 해안초소를 지나 해변으로 내려서니, 잠시 해변길이 이어지다가
또 다시 좌측의 산허리로 해파랑길은 이어지는데~
(적당한 곳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맘모스빵과 션한 캔커피를 함께하는 30분 중식시간을 가지고~)
다시 송림숲 산길을 따라 야자매트길을 지나, 미끄러운 침목 계단길을 따라
(13:20) 해변으로 내려선다.
네이버 지도를 보니, 이 부근이 호미곶면 구만리와 동해면 발산리가 갈리는 면계로 짐작된다.
발산리(發山里)
동해면 흥환리 북쪽, 호미곶면 대동배리 남쪽에 자리 잡은 어촌마을로 1리인 '발산'과 2리인 '여사' 등
2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발산(發山)
봄이 되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골짜기에 꽃이 만발한다고 해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하는데,
지형이 바랑처럼 생겼다 하여 바랑골 또는 발미골이라고도 한다.
남동쪽 홍환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는 봉우재에는 옛 발산 봉수대 터가 있고, 동쪽 골짜기에는 발산 못이 있다.
80년 역사의 발산 교회가 있으며, 이 마을 주민의 약 80%가 이 기독교 신자이다.
여사(余士)
신라가 망한 후 한을 품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선비 행세를 하며 살았다고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인데, 마을 입구에 선돌이 있어 이 마을 역사를 말해준다.
호미곶면 강사리와 경계를 이루는 봉오재(180m)에는 옛 사지 봉수대 터가 있다.
마을 뒷산 어부 보안림에 1992년 천연기념물 371호로 지정된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이후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길을 지나고~
땅채송화...
돌가시나무...
갯메꽃...
(13:30) 걷기좋은 해변 돌길이 시작되는데~
이곳은 파도가 많이 치는 날에는 탐방로위로 파도가 몰려들므로 진행하기가 만만치 않은 구간이다.
드디어 발산2리가 지척으로 다가온다.
(13:35) 모감주군락지까지 0.5km 남았다는 둘레길 이정표를 지난다.
개양귀비...
(13:42) 발산2리항
(13:45)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
발산2리 마을회관을 지나고~
마을 앞쪽 우측의 개울에 걸쳐져 있는 철제다리를 건너 우측 해변으로 해파랑길은 이어진다.
(13:50) 장군바위 안내판과 그 앞으로 입석바위가 보인다.
장군바위
방파제 아래 바윗길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고~
이곳 역시도 파도가 많이 치는 날에는 탐방로위로 파도가 몰려들므로 진행하기가 만만치 않은 구간이다.
땅채송화...
(14:05) 기기묘묘한 해식절벽(海蝕絶壁)을 좌측으로 보며 진행하고~
해식절벽(海蝕絶壁, sea cliff)은 해식애(海蝕崖)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산지가 해안까지 연결된 암석해안에서 잘 볼 수 있다.
바다로부터 오는 계속되는 침식은 암석의 연약한 부분을 따라서 해식동굴을 만들기도 하며
오랜기간 동안 파도의 영향을 받고 나면 해식동굴은 무너져 절벽이 후퇴한다.
암석의 강한부분이 따로 남아있는 경우 해안선 가까운곳에 시스택(Sea stack)이라 부르는 작은바위섬으로 남기도 한다.
해식절벽의 규모는 육지를 이루는 암석의 종류, 바다의 상태 등에 따라 결정되며 지구에서 가장 높은
해식절벽은 하와이제도의 몰로카이(Molokai)섬에 위치한 칼라우파파(Kalaupapa)에 있는 절벽으로
해수면으로부터 무려 1,010m나 솟아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규모가 큰 해식애는 동해안 곳곳에 많이 나타난다.
또 다시 해안가 바윗길 탐방로를 따라 진행이다.
(14:11) 시멘트 포장길로 올라와 흥환리해수욕장 1.8km로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를 지난다.
(14:15) 발산1리항
발산1리어민복지센타를 지나고~
그렇게 발산1리을 지나면 흥환리로 들어서게 된다.
흥환리(興串里)
공개산(241m)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발원되어 영일만으로 흐르는 하천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마을로
흥환1리인 배일, 피고지, 주막(酒幕), 흥환2리인 진골[長谷], 장태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시작하여 눌태리를 거쳐 이 마을까지 연결된 옛 장기목장성의 흔적이 말봉재(140m)
일원에 남아 있다.
배일[興洞]
마을 앞바다에 밸(불가사리)이 많이 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흔히 아랫배일이라고 불리는
피고지 위쪽에 있으므로 웃배일이라고도 한다.
피고지[稜串]
옛날 이곳에 있었던 목장에서 가끔 말을 도살할 때 피를 본다 하여, 혹은 옛날 이 지역에
피를 많이 재배하였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목장에서 뛰쳐나온 말을 골목으로 몰아넣어 붙잡은 곳이라 하여 '말골목'이라고도 하며,
웃배일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아랫배일 또는 아랫각단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안곶으로도 불렀었다.
매년 9월 9일 마을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주막[酒幕]
옛날 행인이 묵어가던 주막이 있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며, 지형이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과
닮았다고 하여 연화(連化)라고도 한다.
흥환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있으며, 매년 12월에 마을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다.
진골[辰谷]
긴 골짜기에 위치한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아랫진골이라고도 한다.
매년 삼월 삼짇날 고씨 할배신위를 모시고 동제를 지낸다.
장태
옛날 장이 섰던 곳이라 하여 불린 명칭이다.
매년 삼월 삼짇날 마을 제당에서 골목할매를 모시고 동제를 모신다.
(14:20) 좌측으로 비각과, '흥환리 말목장성 탐방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말목장성
조선시대 감목관을 파견해 말을 키우던 국영목장의 돌 울타리로 동배곶 목장이라고도 한다.
구룡포 돌문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호미반도를 가로지르는 약 7.6km에 축조돼 현재 5.6km가 남아 있으며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세계 최대의 규모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구룡포 돌문에서 당시 말의 출입을 통제하던 문지기 2명이 있었고
구룡포읍 삼정리에 관아인 목아문이 있었다.
말목장성 탐방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국영목장의 돌 울타리를 탐방할 수 있도록 만든 등산로이다.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느낄 수 있다.
장기 목장성
동을배환의 장기목장은 울산 목장에 소속되었으며,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이며
마성(馬城)주의 4190把(발, 약 6.3km)이며 삼정동(三政洞)에 목아문(牧衙門)을 설치하여 말을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국의 마정(馬政)은 병조(兵曹) 및 사복시(司僕寺)에서 관장을 하였고, 지방 마정은 관찰사 밑에
감목관(監牧官 종6품)이란 실무 담당자를 두어 관리토록 하였다.
강사리에 있는 해봉사(海蓬寺)의 명월암(明月庵)에서 말 목장을 위한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좌측) 울목김부찰노연영세불망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의 친형)의 비각 신축을 위해 터고르기를 하던 중 발견된 이 비석에는
[울목김부찰 노연 영세불망(蔚牧金副察魯淵永世不忘)...]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가로 32cm 높이 75cm 두께 22cm 크기의 이 비석은 연대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비석이 발견된 인근에
흥인군 이최응과 목장을 관장하던 감목관(監牧官) 민치억의 공을 기리는 불망비가 세워져 있어
같은 시대인 1882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비석에는 울목(蔚牧) 이라는 명문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볼 때 이는 군마 등 말을 키우던 장기 목장성이
울산 목장의 관할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 흥인군 공덕비
흥인군 이최응: 1815(순조15)∼1882(고종19) 조선말기의 문신, 자는 양백(量佰),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에 봉해졌으며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으나
쇄국정치를 반대하여 대원군과 반목이 심했다.
1873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 공덕비의 내용은 장기 목장성에 속한 7마을(七防)이 있었는데 모리배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들여
천여 백성이 살아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흥인 대감께서 특별히 백성들의 뜻을 살피셔서 조그마한 잘못도 밝히고 많이 거둬들인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 버리며, 그 근원을 뿌리 뽑아 버리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고,
목장 전체가 편안하게 되어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다.
※ 흥인군 이최응은 하루도 뇌물을 받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는데, 선정을 베풀었다는 점은 의심스럽다.
(우측) 감목관 민치억 공덕비
감목관 조선시대의 외관직(外官職), 지방의 목장(牧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원으로
대개 부사(府使) 첨사(僉使)가 겸직하였다.
30개월을 만기로 하는 종 6품관으로 광서 8년(光緖八年), 1882년(고종 19년)에 세워졌다.
(14:26) 흥환리방파제 테트라포드 옆을 지나고~
(14:28) 흥환1리 마을을 지난다.
이후 직진의 다리 방향으로 나가도 되고, 약간 우측의 아치교를 건너서
흥환보건진료소 앞으로 진행해도 무방하게 보인다.
흥환마을을 지나는데 민가에 묶여있는 이 녀석이 얼마나 살같게 구는지~
(집에 있는 우리 짱이 녀석 생각도 나고~) 이놈과 함께 한참을 놀다가 간다.
이후 아치교를 건너지않고 직진방향의 다리를 건너고~
(14:35) 흥환리보건소앞 흥환마트가 오늘 해파랑길 15구간의 종점이다.
15코스 종점이자 16코스 시점인 흥환리보건소 주위에는 해파랑길 종합안내판은 보이지 않고,
스탬프는 흥환리보건소앞 흥환마트 출입구 우측에 설치되어있다.
흥환마트가 예전에는 백년손님마트였는데 상호가 바뀌었다.
해파랑길 포항16코스 흥환리보건소에서 해안가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시작된다.
(흥환리보건소는 지금 증축공사중이다.)
오늘 1차로 목표했던 해파랑길 15구간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15코스 스탬프 찍고~
걱정했던 다리 상태도 아직 별 이상도 없고~
배낭을 내리고 흥환마트에서 션한 라떼 한병 구입해서 마시고
10분 쉬었다가 해파랑길 16구간을 연속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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