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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포항14구간

답사일자: 2022.2.25

코스: 구룡포항/일본인가옥거리.탐방-일본인가옥거리.(시점)-구룡포해수욕장-구룡포주상절리

-삼정마을-삼정항-관풍대-석병1리마을-석병1리항-동쪽땅끝마을-석병2리항-강사1리마을(우회노선)

-다무포고래마을-강사2리마을-강사3리(우회노선)-대보마을-호미곶(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7.77km (두루누비기준 14.1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20분

 

▶ 갈때 : 개금집에서 노포동.동부시외버스터미널으로~ 포항行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포항시외버스터미널/버스정류장에서 포항900번 버스타고 구룡포항 일본인가옥거리/버스정류장에 하차,

시점까지 도보 이동.

▶ 올때 : 호미곶해맞이광장/버스정류장에서 포항9000번 버스타고 구룡포항 일본인가옥거리/버스정류장에 하차,

포항900번 버스 환승하여 포항시외버스터미널 하차,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사상/서부터미널行 버스이용,

부산.사상/서부터미널 하차, 지하철2호선타고 개금집으로 귀가.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가 해파랑길 14코스 시점에 있기때문에 먼저 둘러본다.

 

 

(08:30)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九龍浦 日本人家屋路)

 

동해 최대의 어업전진기지였던 구룡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축항하고

동해권역의 어업을 관할하면서 일본인들의 유입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현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가 위치한 거리에는 병원과 백화 상점, 요리점, 여관 등이 늘어서고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지역 상권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남아 있던 일본 가옥들은 각종 개발과정에서 철거되고 오랜 세월 동안 훼손되면서

과거 우리 민족에게 아팠던 역사의 산 증거물이 사라져가는 실정을 맞았다.

이에 포항시는 지역 내 가옥을 보수 정비하여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풍요했던 생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에 의해 착취되었던 우리 경제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조성했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정비 사업을 통해 457m 거리에 있는 28동의 건물을 보수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는 2012년 12월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도심 활성화 사업의 우수 사례로 선정됐다.

 

 

 

구룡포 공원 입구 계단 돌기둥

 

이곳 공원 입구 계단과 돌기둥들은 1944년도 일본인들이 세웠으며,

돌기둥은 좌측 61개 우측 59개 등 모두 120개가 있었다.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구룡포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떠난 이후 구룡포 주민들은 시멘트를 발라 기록된 이름을 모두 덮어버리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세웠다.

그 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다시 앞뒤를 돌려세운 돌기둥에 새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이와 아라 - 2017, 박준상

 

지역명 '구룡포'에서 알 수 있듯이 열 마리 용 중 승천하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을

스토리텔링한 용이 소년과 그의 친구 아라 소녀.

멀리 보이는 바다는 소년의 푸른 꿈을 상징하며 고깃배를 타고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을 서정적으로 담고 있다. 

 

 

 

용(龍)의 승천- 새빛 구룡포

 

구룡포항

191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한 어촌마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3년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일본인 수산업자가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제안하여,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들면서

큰 배가 정박할 새로운 항이 생기자 일본인 어부들이 대거 구룡포로 몰려왔다.

지금은 동해남부의 조업하는 어선들의 집결지로서 수많은 어선들이 출항하고 회항하는

경북 지방 최대의 동해안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구룡포항은 과메기의 본고장으로 청어, 정어리, 꽁치 등을 잡는 어선이 많고, 전국서 생산량이

가장 많은 구룡포 대게와 과메기로 유명하다. 

 

 

구룡포

구룡포읍 병포리 해안 절벽에 구룡산맥(九龍山脈)이 흘러오다 멈춘 곳에 기암용문(奇巖龍門)이 있는데

구룡승천지지(九龍昇天之池), 또는 구룡소(九龍沼)라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 현감(長縣監)이 각 마을을 순찰하던 중 용주리(龍珠里: 현 구룡포6리,

옛 지명은 사라리(沙羅里))를 지날 때 별안간 천둥과 폭풍우가 휘몰아쳐 민가로 대피하였는데,

그 비바람을 뚫고 사라리 해안에서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그중 한 마리가 바다로 떨어지자

폭우가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때 형산강이 형제산에 막혀 있었기 때문에 장마만 지면 안강지역은 물론

경주에 이르기까지 물이 고여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해결하려고 경순왕과 왕자가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그 마지막 날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왕자에게 말했다.

"네게 이 주문을 줄 테니 초아흐렛날 형제산 밑에 가서 외어라, 그러면 너는 구렁이가 될 것이다.

구렁이가 된 너를 보고 용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너는 용이 될 것이다.

그때 하늘로 오르면서 꼬리로 산의 중허리를 쳐라, 산이 갈라지고 물이 흐를 것이다."

구렁이가 된 왕자는 용이라고 불러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구렁이 봐라!'라고 외치며 도망칠 뿐 한 사람도 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자가 낙심을 하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업고 가다가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하여

"자꾸 울면 저 구렁이가 널 잡아먹는다!"하고 겁을 주었다.

그러자 울고 있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더니 "할머니 구렁이가 아니라 용이야 용!"하고 소리쳤다.

그 말 끝에 왕자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면서 꼬리로 힘껏 형제산 허리를 쳤다.

천지가 진동하면서 산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경주 일대에 괴었던 물이 빠져 강을 이루었다.

그 강이 지금의 형산강이고, 그때 떨어져 나간 산등성이가 날아가서 장기곶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용이 쳐서 만든 땅이라 하여 구룡포라 불렀다고도 한다. 

 

 

 

충혼탑과 충혼각

 

이곳 충혼탑은 6.25전쟁 등 대한민국을 수호하시다 장렬히 산화하신 포항(당시 영일) 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0년 건립하였으나 당시 열악한 재정상황 등으로

탑신의 받침대가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설치한 구조물로 그 위에 충혼탑이 설치되어 오다가

2007년 9월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재건립된 현충시설물이다. 

 

 

 

용왕당(龍王堂)

 

이 용왕당은 구룡포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조업을 기원하기 위한 제당이다.

일반적으로 용왕당에는 여신인 '용신 할머니', '용왕 부인'을 모시는 것이 보통이나,

구룡포 용왕당은 남신인 '사해용왕'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용왕당 건물은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정착하며 건립했던 신사를 철거하고 1956년 건립하였다.

이후 건물이 낡고 노후가 심하여 2008년 철거하고 새로이 한옥 건물로 신축하였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十河 彌三郞頌德碑)

 

이 비는 일본인 '十河 彌三郞'(도가와 야스브로)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라고 한다.

'도가와 야스브로'는 일제강점기에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 개설 등에 관여한 사람으로,

일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전인 1944년경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송덕비는 패전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후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하여 현재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일본인가옥거리' 서쪽방향 

 

'일본인가옥거리' 동쪽방향 

 

추억의 느린우체통/ 6개월후에 배달이 된다고~ 

 

'구룡포 100년, 옛 구룡포 시가도'

 

구룡포 근대 역사관 

 

이 가옥은 1920년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서 이주해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 가옥이다.

하시모토 내외와 3남 4녀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해방 후 개인주택으로 사용되어 오던 가옥을

2010년 포항시가 매입하여,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부츠단, 고다츠, 란마, 후스마, 도코노마 등 100여 년 전 모습들이 잘 남아 있으며

당시 생활 모습을 다양한 전시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ㆍ의장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1층에는 하시모토의 집무실이 있어서 끊임없이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집무실 외 딸들의 방, 하시모도 부부가 사용한 안방, 부엌과 식당 등이 있었다.

2층에는 세 개의 방이 후스마로 분리되어 있는데, 많은 손님이 왔을 때는 후스마를 떼어낸 뒤 2층 전체를 사용했다. 

 

 

 

그렇게 일본인가옥거리를 대강 둘러보고, 일본인가옥거리 동편 진입로로 나서면,

해파랑길 14코스 출발지점 앞이다. 

 

(08:50)  해파랑길 13코스,14코스 종합안내판 우측 아래에 있는 14코스 스탬프를 찍고,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입구에서 해안도로따라 진행하면서 해파랑길 14코스는 시작된다. 

 

(08:56)  도로갈림길 

 

도로안내판에 해파랑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는것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본다. 

호미곶이 좌측으로 안내되고 있지만, 해파랑길은 직진 방향으로 계속 나간다. 

 

 

 

뒤돌아본 구룡포항 

 

(09:01)  구룡포리어촌계 공동작업장을 지나고~ 

 

(09:02)  대현식당이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해안가로 간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이정표 

 

해파랑길 14코스는 '호미반도 해안둘레길(호미 둘레길)'의 5코스 중 일부에 해당한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호미 둘레길)'은 한반도 최동단지역으로 영일만을 끼고 동쪽으로 쭉 뻗은 트레킹 로드이다.

서쪽의 동해면과 동쪽의 호미곶면, 구룡포읍, 장기면에 걸쳐 있다. 

연오랑세오녀의 터전인 청림 일월 (도기야)을 시점으로 호미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동해면 도구해변과

선바우길을 지나 구룡소를 거쳐 호미곶 해맞이 광장까지 4개 코스의 25km 구간과,

호미곶에서 구룡포항, 양포항을 거쳐 경주와의 경계인 장기면 두원리까지의 해파랑길 13, 14코스로 연결되는

33.6km를 합하여 전체 길이는 58.6km에 달한다. 

 

 

 

(09:04)  도로 좌측 언덕 위에 있는 흰색 등대를 지나고~ 

 

(09:07)  구룡포6리마을 

 

구룡포6리 해변 

 

이후 해파랑길은 구룡포6리 해안끝 지점에서 도로로 다시 나간다.  (09:09)

 

구룡포해수욕장이 지척으로 다가온다. 

 

(09:14)  구룡포해수욕장 

 

하루에 일만 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다는 반달형의 구룡포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벨벳융단처럼 부드럽다.

이곳에서 7월말경에 '오징어 맨손 잡기 체험 및 구룡포 해변축제'가 열리는데, 오징어나 방어를 직접 잡아

회를 떠먹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09:18)  구룡포7리마을 

 

구룡포7리는 약 200년 전 이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뜻에서 새골이라 했는데,

1942년 읍 승격 시에 마을을 크게 번창시킨다는 뜻에서 대신리(大新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룡포해수욕장이 있으며, 수산물 가공업체인 동원식품(주)구룡포공장이 입주해 있다. 

 

 

 

(09:20)  구룡포7리교를 건너고~ 

 

다리를 건넌후 우측으로 나가서, 화장실 좌측 도로를 따라 좌틀하여 도로를 따라 오르면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09:23)  전망쉼터

 

구룡포 주상절리는 전망쉼터에 올라 해안 아래쪽으로 가야 볼 수가 있다.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리는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 판상절리와 주상절리로 나뉘는데, 주상절리는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굳는 속도에 따라 단면의 형태가 사각형 내지 육각형의 다면체 돌기둥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화산암 암맥이나, 응결응회암 등에서 주로 생긴다.

주상절리의 방향은 냉각이 진행되는 방향과 일치하는데 용암이 지표로 분출하여 급속히 냉각될 때

아래로는 지표면, 위로는 공기와 접촉하여 냉각이 이뤄짐으로써 형성된다.

구룡포 주상절리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화산이 폭발하는 모양을 연상할 수 있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할 때 사선으로 용암이 분출하면서 주상절리가 형성되어 있어 흡사 당시 용암 폭발 지점과

분출 장면이 그대로 사진에 담긴 듯 멈추어 있어 신기함이 그지없다. 

 

 

 

'주상절리 제2전망대' 우측 아래로 덱 계단길을 따라 내려가서 주상절리를 확인하고~

 

다시 덱 계단길을 되돌아 올라와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09:43)  삼정마을 

 

삼정리(三政里)

남쪽으로 구룡포리와 북쪽으로 석병리에 접해 있는 바닷가의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로서,

1리에 해당하는 범진과 2,3리에 해당하는 삼정 등 2개의 자연부락을 관할하고 있다.

옛 목장성내에 목관공해 유지가 있다.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 하여, 또 다른 일설에는 마을의 지세가 좋아

3정승이 날 것 같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라 한다.

마을 서북쪽에는 고분이 산재한 순능(순능재라고도함)이란 이름의 야산이 있는데, 한때 이곳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가 20여 년 전 이 마을이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자 3년마다 벌이는 별신굿을 한 즉

이 재를 깎은데 원인이 있다 하므로 다시 조림을 한 일화가 있다. 

 

 

 

삼정마을 벽화 

 

삼정해변 

 

(09:49)  현내1교를 지나면 '삼정2리'다. 

 

관풍대가 0.2km 앞에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09:51)  삼정항 

 

(09:53)  삼정섬&관풍대(觀風臺) 

 

삼정2리(三政2里) 동쪽 바다에는 소나무가 무성한 섬이 하나 있는데, 삼정섬이라고 불리는 이 섬은

관풍대(觀風臺)라고도 하며,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 한다.

지금은 섬까지 방파제 육교가 연결되어 있어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 

 

 

 

삼정섬 '관풍대' 절경을 구경하기 위해 섬 위로 가 볼 생각이었으나,

입구에 출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섬에 오르기가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다리건너 관풍대에 들어갈수 있었는데,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하여 왠만한곳에는

관람불가나 출입을 통제시켜 관광다운 관광을 하기 힘들어졌다. 

 

 

 

(09:54)  삼정2리마을 

 

삼정3리 방파제

 

(09:57)  삼정3리항 

 

(09:59)  삼정3리마을 '육각정자쉼터' 

 

(10:02)  포스코 구룡포수련원을 지난다. 

 

'해국 단지 조성지' 

 

저멀리 가야할 석병리가 눈앞에 조망되고~ 

 

(10:06)  '두일포' 표지석이 있는 석병1리마을 

 

석병리(石屛里)

남쪽으로 삼정리와, 북쪽으로 대보면 강사리에 접해 있는 해안 마을로서,

두일포와 석병 2개의 자연부락이 1리와 2리를 이루고 있다.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석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남쪽에는 길게 바다 쪽으로 뻗은 송림을 배경으로 하여 폐교된 석병 초등학교 터가 있다.

마을 남동쪽 바닷가에는 병풍 모양을 하고, 끝이 뾰족 한 아흔아홉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하여

'아흔아홉 골짜기'라고도 불리는 병풍바위가 있다.

진등 동쪽에는 흔히 '봉우재'라고 부르는 대곶 봉수대(大串熢燧臺) 터가 있다.

이 봉수는 남쪽으로 뇌성산봉수, 북쪽으로 사지봉수에 응하였다 한다. 

 

 

 

두일포 표지석 뒤편 노적바위에 있는 기념비

 

1968년 구룡포 예비군 중대 11소대가 전국 예비군 경진대회에서 우승하여 표창을 받은 기념으로,

1969년에 세운 '전국 최우수 예비군 소대 기념비'가 노적바우 옆에 세워져 있다. 

 

 

 

석병1리방파제 

 

(10:09)  스피드낚시점과 낚시제일슈퍼 앞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나간다. 

 

(10:12)  석병1리마을 

 

(10:14)  석병1리항 

 

두일포(斗日浦)

조선 숙종 때의 명유(名儒)인 송시열 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말(斗: 원통 모양의 곡식 등을 재는 도구로, 10되 분량이다)을 엎어 놓은 것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日) 자형을 이루고 있어, 두일포라 부르게 했다 하며, 흔히 '들포' 라고도 부른다. 

 

 다음과 같은 유래가 내려오는데~

우암 송시열이 1675년(숙종 1)에 덕원(德源)에 유배되었다가 웅천을 거쳐 1676년경에 두일포가 있는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동리 입구 큰 나무 옆에 있는 노적봉같이 생긴 바위 및 백사장에서 울분을 삭이며

흰모래를 말(斗)에 담아 뿌리며 세월을 보냈다 하여 두일포라는 동리명이 붙여졌다고 유래되고 있다.

행정구역 상의 공식 명칭은 천혜의 돌이 병풍처럼 생겼다 하여 석병리라고 지었다 한다. 

 

 

 

이후 해파랑길은 직진방향으로 축양장이 있어 좌틀하여 조릿대숲을 지나~  (10:14)

 

(10:15)  정면으로 대게마트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다시 해안가 도로로 내려서서 해안가를 따라 진행한다.  (10:18)

 

갈매기가 먹이다툼으로 요란하다. 

 

그렇게 해안도로를 따르다 우측으로 보이는 축양장 끝에 둥근 조형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한반도 동쪽 땅끝이다.  (10:23)

 

현재 이곳은 개인 사유지로 중간에 양식장이 자리 잡고 있고, 통로를 겸한 방파제 위의 철문은

잠겨 있어서 땅끝 표지석이 있는 갯바위까지 가기는 어렵다. 

 

 

 

한반도의 동쪽 땅끝 석병리(石屛里)

섬을 제외한 우리나라 극단의 위치로, 최서단은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산하루마을로,

최남단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땅끝마을(갈두마을, 북위 34° 17' 38’)로,

그리고 최동단은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로 알려져 있다.

간혹 제일 동쪽을 정동진(正東津)을 떠 올리는 사람이 많으나, 정동진은 한양(漢陽)의 광화문에서

정동쪽 끝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구룡포 석병리가 최동단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구본 모양의 동그란 돌에 우리나라 지도를 양각하고,

기단에 ‘한반도 동쪽 땅끝/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 동경(경도) 129° 35' 10",

북위(위도) 36° 02' 51’을 새겨 놓았다.

한반도 최동단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지만 두일포의 초라한 모습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남쪽 땅끝마을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전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해남의 자부심이 되어 있고,

서쪽 땅끝마을도 태안군 차원의 대대적인 예산 투자로 시설단장을 하여 홍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에 비해

동쪽 땅끝마을이 소재한 포항에서는 두일포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10:30)  석병1리 정자쉼터 

 

석병리 포토존 

 

석병2리 방파제 

 

(10:41)  석병2리항 

 

(10:49)  '유니의 바다' 카라반 캠핑장을 지나고~ 

 

양어장 배수문 옆을 지나간다.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지는 갈림길에서 직진 방향 좁은 숲길로 들어선다.  (10:53)

 

(10:54)  군부대 건물 앞에서 좌측으로 진행하고~ 

 

(10:56)  군부대 앞 콘크리트도로를 따라서 간다. 

 

가슴이 확 트이는 시원한 망망대해~ 

 

시원한 소나무 숲길을 진행하고~ 

 

(10:59)  929번 지방도로 '일출로'를 따라서 간다. 

 

다무포 고래마을까지 1.55km 남았다.

 

 

 

(11:01)  강사1교를 건너고~ 

 

강사1교를 경계로 행정구역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에서 호미곶면 강사리로 면계가 바뀐다.

 

 

 

(11:03)  강사1리 다목포마을 

 

강사리(江沙里)

북쪽은 대보리(大甫里), 남쪽은 구룡포읍에 경계를 접한다.

서쪽으로 강지봉수대(江只烽燧臺)가 있던 봉오재가 있다.

절골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구룡포와 석병리, 강사1리, 3리 사리를 갈라놓은 어촌과 산촌을 함께 갖는 고장이다.

1리에는 다목포(多木浦)와 강금(江琴), 2리에는 새기와 송림촌, 3리에는 명월리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11:04)  강사1리 다무포 해변

 

다목포(多木浦), 다목계(多木溪)

송림(松林) 우거진 계곡 어귀에 형성된 마을이라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하며, 조선 말엽에 감씨(甘氏)가 정착하면서

외진 곳에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풍자하여 多無浦(다무포)라고도 칭하였다 한다.

서편 계곡을 막아 강사지(江沙池)를 축조하였으며(1982년), 지석묘 1기가 마을 언덕에 남아있다.

 

 

 

강사1리마을의 거울달린 배모형 

 

(11:06)  강사1리마을 해안가로 해파랑길은 이어지는데~ 

 

강사1리마을 해안테크길은 현재 출입통제구역이다. 

 

오늘 시간도 넉넉하고, 기존노선따라 해안가끝 가는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이후 해상데크길은 테크 파손으로 인해 더 이상 갈수가 없다.

 

 

 

(11:12)  경사가 완만한 옹벽 탈출로에 로프를 걸어놓았다. 

 

그렇게 929번 지방도로에 올라서니, 노면에는 '해파랑길 우회노선'이라고 표시해 놓았다. 

 

그렇게 도로를 따르다 오륙도회센터 안내판 앞에서 우측 해안가로 내려간다.  (11:15)

 

(11:18)  해파랑길 우회노선끝지점 안내판 

 

우회한 해파랑길을 바라보고~ 

 

이후 해파랑길은 좌측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다. 

 

(11:21)  강사1리 방파제 

 

(11:23)  강사1리 강금마을

 

강금리(江琴里), 깽금이

강사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지형이 깡깡이(해금을 속되게 이르는 말, 방언으로 '깽금', '깡금') 같다 하여

계금(溪琴), 강금(江琴)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고래 그림 벽화 

 

(11:26)  다무포고래마을 

 

다무포하얀마을이라고도 부르는 강사1리 다무포고래마을은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마을전체를 하얀마을로 만들기위해 지역 예술가와 자원 봉사자들이 참여 하였다. 

 

 

 

(11:27)  다무포고래마을항 

 

양식장에서 바닷물 인입을 위한 대형 호스가 설치된 곳을 지난다. 

 

우측 갯바위에 낚시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11:38)  신동양수산 축양장을 지나고~ 

 

(11:41)  쌍용수산 축양장도 지난다. 

 

강사2리 방파제 

 

강사2리마을이 지척이다. 

 

(11:48)  강사2리마을 

 

강사2리에는 자연마을로 '새기'와 '송림촌'이 있다.

새기, 사기(沙基)는 사지(沙只)라는 뜻의 발음이 와전되어 '새기'라 불려졌다.

마을 앞에 큰 모래더미가 있었다 한다.

가장 큰 자연부락으로서 강사 초등학교(폐교)와 강사교회가 있다.

송림촌(松林村)은 해안방풍림인 번디기 숲속에 산재하는 자연부락이며, 1950년경부터 송림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1.2km에 걸친 해안에 흑송림(黑松林)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다.

 

 

 

(11:49)  강사2리항 

 

'박광훈 시비' 

 

(11:50)  삼거리갈림길에서 우측 해안도로를 따라서 간다. 

 

강사2리 공동작업장 앞을 지나고~ 

 

(11:54)  '다모디 풀빌라 펜션' 앞 삼거리 갈림길 길없음 우회노선안내문 

 

해파랑길 기존노선은 해안가를 따라 진행하는 길인데, 여기도 시설물의 안전문제로 인하여

우회노선을 이용하라고 되어있다.

 

 

 

(11:56)  좌측으로 929번 지방도로로 나가는 길 노면에 해파랑길 이라고 표시해놓았다. 

 

호미반도해안둘레길&영일만남파랑길 화살표 표식기는 여기에서 처음본다. 

 

929번 지방도로따라 이어지는 해파랑길 

 

(12:02)  해송모텔앞에서 우측 해안가로 내려간다. 

 

(12:04)  해파랑길 우회노선 끝지점 

 

좌측에 있는 네스트 코퍼레이션카페앞에서 우회노선은 끝이나고

해파랑길은 좌측 해안가를 따라 진행된다.  (22분 점심&휴식)

 

 

 

잔잔하던 파도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12:28)  해변 우측의 오석 비석 

 

앞면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서 뒷면을 살펴보니, 1988년 1월

경북대학교 수중탐사반이었던 '고 김민지' 추모 비석이다. 

 

 

 

(12:31)  유니의 바다 카라반(호미곶점)과 입구의 수많은 팔랑개비 

 

(12:39)  '퓨전 화장실'이란 특이한 화장실 

 

전통 재래식 통시를 현대식으로 재해석 제작하여 조성해 놓았다. 

 

 

 

드디어 저멀리 오늘구간의 종점인 호미곶이 조망된다. 

 

(12:49)  대보마을 몽돌해변 

 

(12:54)  대보항 

 

(12:54)  호미곶 도로갈림길에서 우측 해안가로 간다. 

 

드디어 호미곶 '상생의 손'이 보이기 시작한다. 

 

(13:06)  호미곶 해맞이 광장 

 

바다 쪽으로 우수(右手) 상생의 손 

 

상생의 손은 새 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의미로,

1999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개월 뒤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 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는 왼손, 바다에는 오른손이 서로 바라보며 있는데, 인류가 화합하고 화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상극이 아닌 상생을 의미한다.

 

 

 

해맞이 광장 중앙 육지의 '상생의 손' 

 

거꾸로가는 시계 

 

'거꾸로 가는 시계'는 현재 시간에서 다음 해 1월 1일 호미곶 일출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초(秒) 단위로 알려주어 '되돌아 봄'과 '나아감'을 제시하는 시계라 한다.

 

 

 

호미곶 등대 

 

(13:10)  해파랑길 포항 14코스,15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 

 

해파랑길 포항 14코스,15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는 호미곶 해맞이광장 중앙을 지나 호미곶등대앞에 위치한다. 

 

 

 

해파랑길 포항 15코스는 호미곶 해맞이광장에서 해안가따라 진행하면서 시작된다. 

 

호미곶 바다계단길

호미곶 해안가에 서서 북쪽이나 남쪽을 바라보면 바다에서 육지로 갈수록 땅이 계단 모양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지형을 '해안단구'라 한다.

해안 단구는 호미곶에서 구룡포를 거쳐 경주까지 잘 발달하고 있다.

특히 호미곶 일대의 해안단구는 다른 곳보다 평평한 땅이 잘 만들어져 있고, 뚜렷하게 나타나므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안단구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목표했던 오늘 구간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14코스 스탬프 찍고~ 그렇게 답사마무리하고, 해맞이광장 주위를 둘러본다.

 

 

호랑이벽화 

 

천년의 눈동자 - 햇빛 채화기와 성화대 

 

천년의 눈동자로 알려진 호미곶 불씨는, 변산반도 일몰 불씨,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씨, 동해바다 독도와

남태평양 피지섬 일출 때 동시에 채화한 것을 합한 것으로 각각 광장 상생의 손 앞에 마련돼 있다.

좌측의 변산반도 불씨는 1999년 12월 31일 서해안 변산반도의 마지막 일몰인 햇빛을 채화하였고,

중앙의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씨는 2000년 1월 1일 영일만 첫 일출의 정기를 모아 채화한 것으로

새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상징적 의미로 켜졌다.

맨 우측의 독도 불씨와 남태평양 피지섬 불씨는 2000년 1월 1일 독도와 피지섬의 일출 때 채화한 것으로

두 불씨를 합하여 불씨 함에 담아 등불을 켰다.

 

 

 

연오랑세오녀상(延烏郞細烏女像) 

 

전국 최고의 가마솥 

 

호미곶 새천년기념관 

 

'호미곶 돌문어' 대형 청동 조각 작품 

 

이후 호미곶해맞이광장/버스정류장으로 이동, 포항9000번 버스타고 일본인가옥거리/버스정류장에 하차 

포항900번 버스 환승하여 포항시외버스터미널 하차,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사상/서부터미널行 버스이용,

부산.사상/서부터미널 하차, 지하철2호선타고 개금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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