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2.9.22
코스: 추암역(시점)-하수종말처리장-호해정/전천-동해역-용정삼거리-한섬해변
-고불개해변-가세해변-하평해변-묵호역(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4.08km (두루누비기준 13.6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
▶ 갈때 : 삼척~동해32구간 마치고, 33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33구간 들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 올때 : 삼척~동해 33구간 마치고, 현지 숙박으로 인해 33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추암역'/ 해파랑길 33코스,34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
해파랑길 33코스,34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는 '추암해변' 뒤편 '추암역' 표시판앞에 세워져있다.
해파랑길 32구간(후반부) 진행을 마치고, 물 한잔하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후
(12:50) 해파랑길 33코스 출발 스탬프 찍고,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켜고
추암철도 가도교 아래로 향하면서 해파랑길 33코스는 시작된다.
추암철도 가도교를 통과하고~
삼척선(三陟線)
동해시 동해역과 삼척시 삼척역을 연결하는 동해북부선의 지선 철도로,
삼척 시멘트 공장의 진입 수요 증가에 따라 1944년 완공된 12.9㎞의 철도다.
2003년 무인 배치인 추암역을 삼척해변역으로 개명하였다.
2007년 삼척-정동진 간 전용 관광열차인 바다열차가 개통, 1일 3~4회 운행되고 있고,
앞으로 동해남부선 일부인 포항-삼척 구간이 완공되면 흡수될 예정이다.
동해에서 삼척까지 놓인 삼척선 철로에 아직 여객을 태운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무연탄을 실은 기차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무연탄으로 발전하는 유일한 발전소인 동해 화력 발전소로 가는 화물 열차이다. 국내산 무연탄을 사용해서 수입 대체 효과도 높이고 탄광 지역의 경제 활성화도 돕는 역할을 한다.
무연탄은 태백 지역에서 철도로 실어 나른다고 한다.
(12:52) 굴다리를 지나 공단 순환로인 '추암길'에서 우회전이다.
'추암해변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해파랑길 33코스는 동해시에서 조성한 '동해 둘레길 코스' 중 '해물금길'과 같이 간다.
해물금길은 '해 뜨는 수평선'을 의미하며 동해시의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길로,
행정구역으로는 제일 북단 망상동 기곡 마을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진, 어달, 묵호진, 발한, 향로, 천곡, 용정, 송정, 북평동과 최남단 추암동을 잇는
남북 연장 약 24.4km 길이의 구간의 길입니다.
삶의 풍물화첩, 선현의 유작들 그리고 경이로운 해안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
해물금길!
(12:56) '동해 자유무역지역 관리원'을 지나고~
자유무역지역(自由貿易地域)
자유무역지역은 자유로운 제조·물류·유통 및 무역활동 등이 보장되는 자유무역지역을
지정·운영함으로써 외국인 투자의 유치, 무역의 진흥, 국제물류의 원활화 및 지역개발 등을
촉진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2000년 7월 '마산 수출자유지역'과 '이리 수출자유지역'이 '마산 자유무역지역'과
'익산 자유무역지역'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군산자유무역지역이 새롭게 지정되었다.
2002년 대불자유무역지역, 2004년 부산항, 광양항, 인천항, 인천국제공항이 추가 지정되었다.
2005년에는 동해, 율촌, 2009년에는 김제, 울산, 평택·당진항, 포항항을 새로 지정됐다.
전방으로 '한국동서발전 동해화력발전처' 공장 굴뚝이 보이고~
우측으로 거대한 규모의 공장 건물이 이어지는데, '한전산업개발 동해사업소'라고 한다.
(13:06) 좌측의 '동해 화력발전'과 우측의 '한전 산업개발'을 공중에서 연결하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밑을 지나간다.
'한전 산업개발' 정문 옆을 지나고~
'동해 북평산단 공공폐수처리장' 정문을 지난다.
(13:10) 해파랑길은 도로를 버리고 우측 폐수종말 처리장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이정표에는 '동해역' 방향으로 표시하고 있다.
직진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거리를 단축하여 '동해역'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진행하면 '동해 비경' 중 하나라는 '호해정·할미바위'를 볼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동해 북평산단 공공폐수처리장' 정문 안으로 들어서고~
이후 해파랑길은 '동해 북평산단 공공폐수처리장' 사무동 앞을 지나고,
(13:13) 후문을 통과하자말자 우회전이다.
이후 해파랑길은 바다 쪽으로 내려서서 공중으로 컨베이어 벨트가 연결된 공장을 향해 진행이다.
시멘트 포장길이 끝이나고 비포장 임도길이 시작된다.
(13:17) 임도 끝 지점에 도착하니, '해파랑길 33-34코스' 안내도와
좌측 '조양산'으로 조성된 테크 계단길이 시작되고~
테크 계단길에 올라서니 우측의 '전천'이 동해와 만나는 기수역과
건너편의 동해항 남부두와 방파제가 조망된다.
털개구리자리...
미국쑥부쟁이...
(13:25) '을미대' 표지석을 지난다.
을미대(乙未臺)의 구체적인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호해암석(湖海巖石) 위 경치 좋은 곳에
을미생 십수 인이 을미년에 세운 비석인 듯하다.
(13:27) 큰 바위 위에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동해 비경 중 하나인 '마고암'이다.
(본인이 찍은 사진이 많이 흔들려 다음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할미바위[麻姑岩, 마고암]
제주도의 돌하르방 전설과 유사한,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는
애절한 사연의 '할미바위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다른 설화로 심술궂은 마귀 할미가 바닷속으로 굴러 떨어뜨린 바위를
마을 사람들이 제를 지내고 다시 올려놓았더니 용왕님이 벼락을 내려
그 마귀 할미를 벌하였다 하여 이 바위를 할미바위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바위는 한 사람 혹은 두세 명이 힘을 합쳐 흔들면 흔들리지만
여러 사람이 바위를 떨어뜨리려 흔들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 이 바위를 흔들면서 소원을 빌면 아들을 점지해 주지만,
부정하거나 정성이 부족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설화도 전하고 있다.
'동해 팔경'에는 이곳 할미바위·호해정 외에도 촛대바위, 용추폭포, 무릉반석, 망상해수욕장,
천곡 황금박쥐동굴, 만경대, 초록봉을 꼽고 있다.
할미바위 앞에는 할머니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포토존과 겸하게 세워져 있고,
뒷면에는 '마고암의 전설'이란 시조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麻姑岩(마고암) 傳說(전설) - 崔潤祥(최윤상)
下壓滄溟上戴天(하압창명상대천) 아래로는 바다를 진압하며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乾坤大處坐巍然(건곤대처좌외연) 광활한 천지에 높이 우뚝 앉아 있어
依俙宿跡麻姑似(의희숙적마고사) 편안한 자취가 마치 마고와 같으니
幻出千年石是仙(환출천년석시선) 선녀가 천년 뒤에 홀연히 나타나 돌이 되었구나
(13:29) 할미바위에서 약 30여 m 내려서니 '호해정'이다.
湖海亭(호해정)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최덕규 선생 외 39인이 '住春契(주춘계)'를 조직해
1947년 4월에, 동해시 북평동 九美山(구미산) 갯목 할미바위 아래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湖海亭(호해정)을 세웠다.
호해정 앞으로는 전천(箭川) 강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군자의 품위를 드리운 듯한
두타산의 모습이 잡힐 듯하며, 옆으로 드리워진 동해항의 힘찬 박진감이 넘쳐난다.
특히 동천일광이 아니라 서산낙조를 바라볼 수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
중앙 '호해정' 현판은 석재(石齋) 최중희 글씨고,
좌측 天下怪石(천하괴석)은 완당(추사) 김정희 글씨며,
우측 風俗詠蘬(풍속영귀)는 만제 홍낙섭 선생의 글씨다.
'호해정' 안의 '관동명구' 현판
1963년 발행된 삼척읍지 '진주지'에 실린 1960년대 호해정의 풍경을 묘사한 글을 보면,
"해 돋는 곳과 신선이 사는 곳이 바로 저기인 양 수많은 돛단배가 오락가락하고 하늘이 끝이 없으며,
모든 경치가 거울에 비치듯이 아름답고, 어부의 노랫소리 화음을 이룰 때 고기떼와 물새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솔솔 바람에 비단 같은 물결이 일어나 거울같이 맑은 한 마을"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참으로 그림 같은 경치였을 것이다.
지금은 1979년 동해항이 개항되고, 전천과 동해 주변에 '쌍용시멘트'가 들어서면서
옛 정취를 잃어버려 아쉽다
이곳 호해정과 이름은 같으나 또 다른 유명한 호해정으로, 강릉 경포호 북쪽 언덕 위의
호해정을 들 수 있는데,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에도 나오는 호해정으로 1754년(영조 30)
진사 신정복이 건립한 정자이다.
(13:33) 전천 강변 '갯목길'에 내려서면, 전천 건너편에 '쌍용양회'가 자리하고~
쌍용양회북평공장
쌍용양회공업은 1962년 세워진 시멘트 전문 생산 업체다.
창업자 김성곤 회장은 국회의원과 공화당 재정위원장(1965년)을 지낸 인물로
쌍용양회공업을 토대로 쌍용그룹을 일궜다.
동해, 영월, 북평, 광양 등 4곳의 시멘트 공장에서 연간 약 150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며
이 가운데 약 50%를 수출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시멘트 제조 회사다.
金成坤과 1971년 10·2 항명
김종필을 견제하라고 내세운 공화당 당권파 4인방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의
세력이 너무 세지자, 박정희는 1971년 6월 4일 개각을 단행하면서 김종필을 총리로,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김종필을 견제하라고 4인방을 만들어 놓고, 그 4인방을 견제하려고 김종필을 총리로 등용한 것이다.
오치성을 기용한 것은 4인방의 정부 내 인맥을 물갈이하기 위해서였다.
오치성이 '윗선'으로부터 받은 밀명은 지방 관청과 경찰서 내의 4인방 인맥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김성곤이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야당이 실미도 사건(북한 침투 부대의 반란) 등을 이유로
오치성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김성곤은 박정희의 지시를 거역하고 야당과 합세해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오치성이 장관이 된 지 4개월 만의 일이다(10·2 항명 파동).
쌍용그룹 창업자이기도 한 김성곤 의원은 공화당 재정 부장으로 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뽑아내면서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지만, 주군에게 항명하는 순간
정치생명은 종을 쳐야 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시켜 실세 4인을 비롯하여 해임에 찬성 표를 던진 의원들을
색출하여 잡아다 반죽음이 되도록 만들었다.
김성곤 의원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저수염을 나이 어린 정보부 요원에게
반쪽이 뽑히는 고문을 당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정치를 접는 건 고사하고 목숨 부지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아들에게 죽어도 정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성곤은 조선 건국 이후로 웬만해선 정치권에 발을 담그지 않는 이 땅 재벌들의
금기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정권에까지 깊숙이 발을 담그며 물질과 권력을 추구해나갔다.
결국 콧수염이 뽑히는 치욕을 당하며 재벌 정치가 김성곤은 무대에서 퇴장하였고,
그 뒤 고문 후유증을 겪다가 1975년 6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3:35) 전천과 송정해변의 개항 전의 추억사진이 전시된 곳을 지난다.
'전천'을 우측에 두고 해파랑길은 이어지고~
전천(箭川)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 무릉계곡에서 발원하여 북평동을 거쳐
동해시 구호동, 송정동에서 동해 바다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임진왜란때 치열했던 두타산성 싸움에서 화살이 가득 떠내려와 이때부터
화살 전(箭)자를 써서 전천이라 불렀는데, ‘전천’이 바다로 합류하는 지점은
1979년 동해항이 개항되기 전에는 명사십리 백사장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이었다고 한다.
멀리 '백두대간'의 준령들이 전천의 발원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실제로 '전천'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두타산 아래의 용추폭포와 무릉계곡에서
한 지류가 시작되고, 또 다른 지류는 동해시의 식수원인 달방 저수지이다.
이후 '동해시 해양레포츠 센터'를 지나고~
좌측 편에 '만경대 500m' 안내판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놓치고 말았다.
안내판을 보았으면 동해 팔경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만경대'로 올랐을텐데
만경대를 못 보고 온점이 못내 아쉽다.
만경대(萬景臺) (한국관광공사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萬景臺(만경대)
1613년(광해군 5)에 첨정(僉正)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훈(金勳)이 건립하여
이 정자에서 소요하며 말년을 보냈다 한다.
정자 서쪽으로는 두타산, 동쪽으로는 동해항, 아래로는 동해시의 젖줄인
전천(箭川)이 굽이쳐 흘러, 삼척의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는 경관을 자랑해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660년(현종 원년)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이 주변 경관에 감탄하여 ‘만경(萬景)’이라 하였는데
그 후부터 '만경대'라 불렀고, 동해 비경 중 제6경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786년(정조 20) 부사 유한준이 시를 읊어 현판으로 남겼고, 1872년(고종 9) 중수하였을 때
공조판서 김원식이 상량문을 짓고, 한성부윤 이남식이 ‘해상명구(海上名區)’라는 현판을 남겼다.
1924년 다시 중건하였을 때 당대의 명필로 꼽혔던 옥람(玉藍) 한일동(韓溢東)이 쓴
‘만경대(萬景臺)’라는 글씨로 액판을 만들었다.
(13:40) '전천' 옆으로 조성된 우레탄 길을 따라서 간다.
(13:46) '북평 육교' 우측으로 해파랑길은 이어지고~
해파랑길은 '동해역' 방향으로 계속 '전천'변을 따라서 간다.
(13:53) '북평고가도' 밑을 지나고~
이후 자전거 길은 좌측으로 벗어나 앞쪽 '북평교'를 통해 전천을 건너가지만,
해파랑길은 계속 직진의 우레탄 길을 따라 나간다.
(13:55) '북평교' 역시 다리 아래를 통해서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이 지점에서 동해시 구미동에서 북평동으로 넘어간다.
지역의 이름인 북평이 "삼척 북쪽의 평야"라는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북평은 삼척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1980년 삼척군의 북평읍과 명주군의 묵호읍을 떼내어
동해시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전천'으로 합류하는 지류 위 테크 다리를 건너고~
좌측 위로 바람개비가 줄지어 있는 다리를 건너간다.
(14:11) 해파랑길은 '전천'을 가로지르고 있는 '보도교'를 건너고~
원래는 '전천'을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놓여있었으나, 자전거 통행을 위해
징검다리 위에 보도교를 덧대어 설치하였다.
그렇게 보도교를 건너면 해파랑길은 좌회전하여 국궁장 옆을 지난다.
'전천변'에는 위로 쭉쭉 뻗은 미루나무(양버들)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데,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하는 동요가 되뇌어진다.
어릴 적 도로변이나 하천변에 많이 있었던 미루나무는 포플러라고도 많이 부르던 나무로
양버들, 백양나무 등 서로 구별되는 나무들이 있지만 모두 사시나무속에 속한다고 한다.
빨리 자라는 만큼 나무가 물러서 젓가락, 도시락 등을 만드는데 많이 사용했었다.
일제 강점기 미국에 건너온 버드나무라고 미류나무라고 했다가 미루나무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찬밥 취급받으며 많이 사라진 나무인데, 화력발전소나 가정용 연료로 사용하는
목재 펠렛이나 버섯 재배용으로 많은 수요가 있어서 중국에서 많은 양을 수입한다고 한다.
(14:15) '삼척선' 철교 앞에서 해파랑길은 우회전하고~
이제부터는 동해시 송정동으로 들어간다.
이후 해파랑길은 삼척선과 나란히 옆길을 진행하여,
'42번 서동로'를 건너 철교 옆 좁은 길로 들어선다.
머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하는 컨베이어 벨트는 동해항에서 삼화동 시멘트 공장까지
전천 강변을 따라 설치된 8Km에 이르는 엄청난 길이의 시멘트 수송용 컨베이어 벨트이다.
좌측으로 '삼척선'과 우측의 '동해 송정 일반산업단지' 사잇길로 해파랑길은 이어지고~
LS 전선 동해 공장은 지금 한창 건설 중이고, 2023년 완공 예정인 새 공장에는
172미터의 전력 케이블 생산 타워(VCV타워)도 들어선다고 한다.
63 빌딩 높이라고 하니 동해시의 랜드마크가 될 것 같다.
(14:21) 해파랑길 33-34 코스 안내도가 있는 해파랑길 쉼터를 지나고~
이후 해파랑길은 '삼척선' 철길과 'LS 전선 동해 공장' 사이 샛길로 계속 이어진다.
(14:37) '나안 건널목' 옆을 지나면서, 좌측의 삼척선이 지나는 건널목을 바라보고~
요즘은 보기 힘든 철도 건널목이다.
기차가 오면 땡땡 땡땡하는 소리와 함께 차단기가 내려가고,
건널목 지킴이 아저씨가 나오셔서 깃발을 흔들며
기차에 이상 없다는 신호를 보내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해파랑길은계속 '삼척선' 우측 샛길을 따라서 간다.
(14:47) '동해역' 앞을 지나고~
동해역
동해시 동해역길 69(송정동)에 위치한 동해역은 영동선이라는 간선에
묵호항선과 삼척선, 북평선 등 지선이 뻗어 나가는 철도교통의 중심으로,
영동선을 타는 모든 무궁화호와 바다열차가 이 역에 정차한다.
2020년 3월부터는 일반열차와 고속 열차인 KTX의 시종착 역으로 계획되어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운행이 잠정 연기되고 있다고 한다.
동해역은 1980년 동해시가 출범하기 전까지는 삼척군 북평읍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평역(北坪驛)이었는데, 주민들은 '송정역'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송정촌 사적비'
(본인이 찍은 사진이 많이 흔들려 다음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송정동에서 '송정'이란 지명은 삼척군 도화면의 지역으로서,
솔난데·솔난곳·송생처(松生處)라고 하다가 변하여
송라정(松羅亭·松羅汀·松蘿亭)·송정(松亭) 또는 송음(松陰)·송호(松湖)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골말, 앞, 담안, 서당구비, 사장, 앞섬 마을들이 병합하여
송정리(松亭里)라고 하여 북삼면(북평읍)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에 명주군 묵호읍 일원과 삼척군 북평읍 일원을 통합 동해시가 되면서
용정 1·2리를 병합하여 리를 동으로 고치고, 송정동으로 행정구역 확정되었다.
행정동인 송정동은 법정동인 송정동과 용정동(북삼동 관할구역 제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해역' 앞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해항'이 위치한다.
동해항(東海港)
동해시에 있는 항구로, 강원 영동 지방의 지하자원 개발을 촉진하고 대규모 시멘트 공장 건설에
따른 시멘트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건설된 항구로서, 강원도 내 최대 무역 항만이다.
입지조건상 천연항이 아니라 인공굴입항(人工掘入港)으로 1975년부터 개발공사를 시작하여
1979년에 개항하였고, 1998년 11월에 금강산 관광선이 취항하여 2001년 6월까지 운항함으로써
관광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86년 항구명이 북평항(北坪港)에서 동해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항은 시멘트를 취급하는 북부두, 잡화를 취급하는 중앙부두, 석탄·유류부두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해파랑길은 영동선 선로 옆으로 난 '동해역 길'을 따라서 간다.
(14:55) '용정 삼거리'
'용정 삼거리'에서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이정표의 '한섬 해변' 방향으로 간다.
'용정 삼거리'를 지나면서 '송정동'에서 '용정동'으로 경계가 바뀐다.
동해시 용정동(龍井洞)
동해시 동남부에 위치하는 법정동으로, 주위에 송정동(松亭洞), 효가동(孝街洞),
나안동(羅雁洞), 천곡동(泉谷洞)과 접한다.
동북쪽에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추(龍追)가 있고, 마을의 안산(案山)인
구미동의 봉우리에서 용미(龍尾)가 나와 달렸다고 하여 용장(龍場)이라고 하다가
변하여 용정(龍井·龍亭)이라고 하였다.
'동해 체력단련장' 표지판이 있는 '동해시민공원' 앞에서 좌측으로 진행하고~
(15:00) '청정바다의 낭만! 명사십리 망상해변 &
망상오토캠핑 리조트'를 알리는 굴다리 밑을 지난다.
'용정 굴다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고,
'해안로'와 '중앙선' 철로 사이에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서 간다.
'석산' 늦둥이...
탐방로 우측 편에는 '영동선'이, 그 너머로 '동해 체력단련장'에서
라운딩을 즐기는 골퍼들이 보인다.
(15:19) '감추사' 표지석
'감추교'를 통해 '영동선'을 건너고~
우측 해안가에 '감추사'가 자리하고 있다.
감추사(甘湫寺)
창건설화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창건했다고 한다.
백제 무왕과 결혼한 선화공주가 백풍병(白風病)이라는 병에 걸려 여러 약을 써보았으나
낫지 않자, 전라북도 익산시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에 머물던 법사 지명(知命)이
동해안 감추(甘湫)로 가라고 권하였다.
이에 공주는 감추로 가서 자연동굴에 불상을 모시고 매일 낙산 용소(龍沼)에서 목욕재계를 하는 등
3년 동안 기도를 하였다.
공주가 마침내 병을 고치고 부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 바로 감추사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폐사로 있던 것을 1902년 절을 세우고 신건암(新建庵) 또는
대은사분암(大恩寺分庵)이라고 하였다.
1959년 해일이 덮쳐 석실과 불상이 유실되었으며, 1965년 인학(仁學)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관음전과 삼성각·용왕각·요사채가 있다.
창건 당시의 절터는 찾을 수 없고 선화공주의 전설이 서린 석굴만 남아 있다.
절 입구에는 1979년 조성된 오층 석탑이 있는데, 한 여신도가 죽을 때 자신의 아들
박복수(朴福壽)에게 유언을 남겨 만들었다고 전한다.
바닷가에 가까워 주변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절 입구 샘물에서는
약수가 흘러 넘쳐 늘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
※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첫째인 선덕여왕의 동생이다.
서동[뒤에 백제 무왕이 됨]이 선화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서동요'를 부르게 했다.
「善花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선화공주님이/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남 몰래 정을 통하여 두고/
薯童房乙(서동방을) 서동 서방을/
夜矣卵乙抱遣去如(야의란을포견거여) 밤에 몰래 안고 간다」
(15:24) '감추 해변'
'감추 해변'에서 행정리는 '용정동'에서 동해시청이 위치하고 있는
'천곡동'으로 바뀌는데, 천곡동은 고불개해변까지다.
동해시 천곡동(泉谷洞)
북쪽에 낮은 구릉이 둘러 있고, 남쪽에 낮은 산 너머 북평동·용정동이 있으며,
서쪽에 초록봉(531.4m)이 솟아 있고, 동쪽은 동해에 닿는 동해시의 중심지로,
천곡동과 평릉동의 2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냉천(찬물내기)·항골(항곡)·묘골(묘곡)·덕골(덕곡)을 병합하여
천곡리(泉谷里)라고 하여 북삼면(북평읍)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합해 동해시로 승격할 때 북평읍 중 천곡리와 평릉리를 합해
천곡동(泉谷洞)이라 하였다.
『동해시 지명유래지』에 의하면 천곡은 본래 찬물내기(冷泉) · 덕골(德谷) · 향골(項谷) ·
묘골(苗谷)의 4개 자연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천곡에는 샘실이 있었는데 그것을 한자화해서 천곡(泉谷)이라 하였다.
'감추 해변'에서 '한섬 해변'으로 이어지는 테크 탐방로
한섬 해변 데크길에 설치된 "리드미컬 게이트"라는 조형물이다.
조금씩 각도를 틀어서 제작했을 기술자들의 노고가 느껴지는 시설물이다.
'제임스본드섬' 안내판
(15:30) '한섬 해변'
'한섬 해변'
동해 시청에서 도보로 15분, 차량으로 5분 이내 위치에 펼쳐져 있는 ‘한섬 해변’은
조그마한 야산과 이어지며 푸른 동해가 펼쳐져 있다.
규모가 작은 한섬해변은 인근 다른 유명 해변과 달리 한적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주로 지역 주민들이 여유 있게 바다를 즐기기 위해 찾는 '동해의 숨은 명소' 해변이다.
그러나 해당 해수욕장은 '해수욕 금지구역'으로 인명구조원이나 관리자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에 유의하여야 한다.
'행복한 섬 길' 안내판
우측 멀리 '감추산'이 해안선으로 흘러내리는 끝에 있는 입석 바위
(일명: 제임스본드 섬)이 시선을 끈다.
이후 '한섬해안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15:35) 좌측 위로 '관해정'을 지난다.
'관해정'
1923년에 유림 62명이 송림계(松林契)를 조직하고 후진을 가르치는
강도소(講道所)로 쓰기 위하여 화랑포 위에 영호정(映湖亭)을 세웠는데,
북평항(동해항) 확장 부지가 되어 1975년 이곳으로 옮기고
정자 이름도 '관해정'으로 개명하였다.
'관해정'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 서도의 맥을 이은 최후의 인물로 알려진
'석재 최중희' 선생이 쓴 글씨로 유명하다.
석재 최중희(崔中熙, 1896~1990)는 강릉인으로 송정 토박이인
만재(晩齋) 홍락섭(洪樂燮) 선생의 문하에서 서예를 익혀 해서와 행서에 능했다.
호해정, 영사재, 관해정, 동해비각 등을 썼다.
(15:38) 전망대 쉼터를 지나고~
이후 울창한 해송 숲길을 지나다 보면, 우측 아래로 조그만 항구가 보이는데
'한섬 방파제'를 끼고 있는 '천곡항'이다.
(15:41) 군부대 초소 앞을 지나 잠시 내려서서 '철책보전구간'을 지나고~
철책보전구간
이 철조망은 1968년 11월 울진삼척지역에 북한 비정규군 침투사건을 계기로
동해안 경계를 목적으로 군에서 설치하여 운영하여왔으나, 최근 남북 평화분위기 확산으로
행복한 섬길 조성사업을 위하여 2021년 6월에 철책을 철거하고 분단의 아픔과
안보교육의 현장을 기억하고자 일부를 남겨놓은 것이다.
또 다른 전망대 쉼터를 지난다.
(15:45) '얼굴 바위' 갈림길을 만나고~
우측 아래 해변에 있는 '얼굴 바위'를 보러간다.
'얼굴 바위' 찾아보기~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올라와서 우측으로 진행하여 '군부대초소'를 지나고~
등로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려서는 곳에서
우측의 '동해 기도원'과 '하평 해변' 방향으로 내려선다.
(15:51) 고불개 해변이 펼쳐지고~
고불개 해변 북쪽에는 멋진 '호랑이 바위'가 보인다.
고불개해변
동해 시청에서 약 500m 거리에 있어, 도심과 가깝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어촌마을로
다른 유명 관광지와 다르게 소박하고 한적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불개해안 주변에 널린 기암괴석들이 일품인 곳이다.
갯바위에 해초와 이끼류가 자라면서 더욱 환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그 바위들을 파도가 때리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풍경이 가히 장관이다.
산 밑에 홀로 우뚝 선 바위 옆으로 펼쳐진 널찍한 '평바위'는 낚시꾼들 사이에선
감성돔 포인트로 소문나 있다.
고불개 해변은 산으로 둘러싸인 비밀의 해변 같다.
모래사장이 있기는 하지만 기암괴석이 주인공인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좌측으로 보이는 바위가 호랑이 바위 포토존이다.
(15:56) '초소 전망대'를 만나고~
배낭을 내리고 지나온 '한섬 해변' 편의점에서 구입한 바나나우유에다
땅콩샌드위치를 먹으며 5분간 휴식이다.
해파랑길 33구간 종점인 '묵호항'이 조망된다.
(16:03) '가세 해변'으로 내려서고~
(16:05) 해파랑길 33-34코스 안내판을 지난다.
좌측으로 '영동선' 선로와 우측의 시누대 사이로 탐방로가 이어지고~
낭떠러지 해변으로 이어지는 테크 탐방로를 따라 진행이다.
이어지는 해안 절경에 감탄하며 진행이다.
(16:15) '하평 해변'으로 내려서고~
'하평 해변'
동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차량으로 10분 이내의
동해시 사천면 하평리에 위치해 있는 ‘하평해변’은 조용하고 한적한 해변이다.
길이 200m, 폭 20m의 규모로 하얀 백사장과 함께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뒷불 해변과 이어지는 백사장 뒤로는 해송림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하평해변’은 둥근 해변에 갯바위들이 멋진 절경으로 늘어서 있는데, 이 바위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 거센 파도를 막아주고 아이들이 편안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바위에는 종종 홍합이 붙어있거나 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
따개비들이 널려있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어 생태체험을 하기에도 좋다.
(16:18) 해파랑길 33-34코스 안내판을 지난다.
'부곡동 돌담마을' 해변 좌측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올라,
'부곡동 돌담마을 해안 숲' 공원을 지난다.
(본인이 찍은 사진이 많이 흔들려 다음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부곡동 돌담마을 해안 숲 공원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진행된 항만과 철도 등의 개발로 인해
사라졌던 해안 숲을 복권기금으로 조성된 녹색자금을 지원받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공원에는 두 기의 돌탑 외에도 노천공연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매년 초여름
‘묵호등대 논골담길 축제’ 때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 공원을 지나면서부터 평릉동에서 부곡동으로 리명이 바뀐다.
동해시 부곡동(釜谷洞)
강원도 동해시의 중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남쪽은 천곡동에 닿고, 북쪽은 묵호 시가지에 이어진다.
강릉군 망상면(묵호읍)의 지역으로서, 가매말·개말·개맬 또는 부곡(釜谷)이라고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두동·승지골(승지동)을 병합하여 부곡리(釜谷里)라고 부르다가
1980년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합해 동해시로 승격할 때 묵호읍 중 부곡동이 독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부곡 복개로'를 따라가다, (16:23) 좌측의 '묵호항선' 밑을 지나는
굴다리로 들어서니 양편 벽면에 그림을 타일 모자이크로 전시하고 있다.
굴다리를 지나 우회전하여, '부곡 흑염소' 음식점 앞에서
좌측으로 꺽어 '향로봉길'을 따라서 간다.
(16:28) '묵호항역' 정문을 지나고~
묵호항역
묵호항 인근에 위치한 화물역으로, 원래 이름은 ‘묵호역’이었으나
영동선이 강릉역까지 연장되면서 묵호역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기존의 역은 ‘묵호항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개통 당시에는 여객 취급도 했으나 동해~옥계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화물만 취급하게 되었으며, 주로 수입용 무연탄 및 양회 화물을 취급하고 있다.
역은 강원도 동해시 부곡동에 있으며, 묵호항은 묵호항역보다 묵호역에 더 가깝다.
'묵호대교'가 묵호선 선로 위를 가로지르는 곳을 지난다.
부곡동에서 발한동으로 들어서는 셈이다.
발한동(發翰洞)
동쪽에 묵호항과 동해가 펼쳐져 있으며, 서쪽에 낮은 산들이 둘러 있다.
남쪽에 낮은 구릉이 둘러싸고 있고, 북쪽에 사뭇재가 둘러싸고 있다.
강릉군 망상면(묵호읍)의 지역으로서 발란이·발한(發韓/發翰)이라고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거리묵호·골말·붉은언덕·새마을·사뭇골· 양짓말·
지리골·동호리(東湖里)를 합하여 발한리(發翰里)라고 하였다.
1980년에 동해시가 되면서 발한동과 향로동(香爐洞)으로 나뉘었다가
1998년에 향로동을 통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직진의 '향로봉길'이 끝나는 곳에서 (16:36) 우측 굴다리 밑을 지나서
영동선 선로를 좌측에 두고 골목길을 따라서 간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전형적인 철로 뒷골목의 풍경이다.
(16:49) '묵호역 사거리'
(16:50) 우측 옷 수선 가게 앞 전봇대 옆에 해파랑길 33구간 스탬프 박스가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33코스 진행 중간중간에 종합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정작 있어야 할 33코스 종점에는 종합안내판은 없고 스탬프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오늘 2차로 목표했던 해파랑길 33구간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33코스 완료 스탬프 찍고,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끄고~
묵호역사거리 앞 해파랑길 34코스 스탬프앞에서 오늘의 트레킹을 종료한다.
해파랑길을 진행하다보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24시간 운영하는 찜질방과
게스트하우스가 거의 드문데 이 곳 묵호항에는 24시간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오늘은 해파랑길 처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다.
묵호항 주변의 '무코바란' 게스트하우스에서 1박(20,000원)하고
아침 일찍 해파랑길 34코스를 진행하기로 한다.
'무코바란' 게스트하우스는 34코스 진행방향으로 발한삼거리에서
조금만 진행하면 도로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인 게스트하우스가 대부분 그렇듯 도미토리 형식으로
홀로 방이 아니고 집단으로 되어 있어 좁고 공동화장실이지만,
따뜻한 잠자리와 가성비 좋은 '무코바란' 게스트하우스다.
체크인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왈~
"묵호항주변 식당이 저녁 6시 30분까지만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샤워후 주변 식당에서 뼈해장국과 소주1병하며 저녁식사를 마치고
편의점의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해파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파랑길 강릉35구간 (1) | 2022.10.08 |
---|---|
해파랑길 삼척~동해 34구간 (1) | 2022.10.08 |
해파랑길 삼척~동해 32구간 (후반부) (0) | 2022.10.08 |
해파랑길 삼척~동해32구간 (전반부) (1) | 2022.09.02 |
해파랑길 삼척~동해31구간 (0) | 2022.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