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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삼척~동해 32구간 (후반부)

답사일자: 2022.9.22

코스: 맹방해수욕장(시점)-승공해변-한재-오분교차로-오분마을-삼척교-오십천교 (전반부종료구간)

(후반부진행구간) 오십천교-삼척문화회관-죽서루-오십천교-장미공원-삼척교사거리/삼척교

-정라삼거리-삼척항-광진산봉수대-광진항-비치조각공원-후진항-삼척해변-증산해변-이사부사자공원

-삼척시에서 동해시로-추암해변-추암 촛대바위-출렁다리-추암 조각공원-추암역(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전반부 GPS 9.58km 후반부 GPS 14.65km (두루누비기준 22.9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전반부 2시간25분 후반부 5시간

▶ 갈때 : 전날 노포동.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릉行 심야버스(23:30)를 타고,

(04:10)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도착, 터미널 대합실(24시간 개방)에서 대기하다가

(06:25) 삼척行 시외버스 이용하여 삼척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지난번 해파랑길 32구간(전반부) 스톱한 '오십천교'로 도보 이동후 트레킹 시작

▶ 올때 : 같은날 삼척~동해 33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32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오십천교'

지난번 해파랑길 32구간(전반부) 스톱한 '오십천교'에서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켜고

(07:45) 해파랑길 32구간 후반부 시작이다.

'오십천교' 밑을 지나고~

등로 좌측에 있는 '삼척여고'를 지나간다.

(07:56) 오십천변 낭떠러지 앞

이곳에서 해파랑길은 바로 나가지 못하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테크 계단길을 통해 위로 올라간다.

급경사 테크 계단길을 올라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로등을 보니 '삼척 동자' 캐릭터다.

삼척동자(三尺童子)는 키가 3척 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로,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를 가리키는데, 이 삼척동자를 '三陟童子'로 캐릭터화한 듯하다.

이후 절벽 허리로 조성된 테크 탐방로를 따르다 전망대에서 '오십천' 바라보고~

(08:03) 전망대를 지나 테크 탐방로가 좌측과 직진 방향으로 갈리는 삼거리를 만나고~

해파랑길은 직진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좌측 위쪽에 있는 '삼척척주초혼단비'를 보러간다.

그렇게 테크 계단길을 올라서면 좌측 편에 '비각'이 보이고~

바로 목책을 넘어갈 수도 있지만 탐방로를 따라 위쪽에 있는 '경행서원 기적비'를 먼저 보러간다.

'경행서원 기적비'

경행서원기적비(景行書院紀蹟碑)

경행서원은 1631년(인조 9) 삼척부사를 지낸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배향(配享)하기 위하여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위패(位牌)를 모시던 곳이다.

1824년(순조 24) 삼척부사 허목(許穆, 1595~1682)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28년(순조 28) 동해시 송정동으로 이건(移建)한 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고, 위패는 송정동 화랑포(花浪浦) 북쪽에 묻었고,

학위전(學位田)과 서책(書冊)을 비롯한 여러 학구는 삼척향교(三陟鄕校)로 이관되었다.

1980년대 후반 삼척 출신 향토사학자 김진원(金振元)이 중심이 되어 경행서원의 복원을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육향정(六香亭)」을 발행해서 생긴 이익금으로 1989년 10월 이곳 삼양동 남산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워서 제막식을 갖고 가락종친회에서 제사를 올렸다.

기적비는 높이 120㎝, 세로 160㎝, 가로 220㎝ 크기의 돌 벽돌로 만든 기단 위에,

「景行書院紀蹟碑」를 쓴 오석을 올려놓았고, 기단 정면 좌측 위에는 비문(碑文)을 음각하였다.

기단 앞 정면 중앙에는 「省庵金孝元先生 文正公眉叟許穆之壇(성암김효원선생 문정공미수허목지단)」

이란 위패석이 세워져 있고, 위패석 앞에 가로 120㎝, 세로 85㎝ 크기의 상석이 놓여 있다.

경행서원(景行書院)은 조선의 그 지긋지긋한 당파싸움의 원조 김효원을 모신 서원인데,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붕당의 시작은 김효원과 심의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6세기 중엽, 앞선 왕대에 왕대에 공을 세워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훈구파들이 대부분 죽은 뒤,

선조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한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처분을 놓고 강온파로 나뉘었다.

특히 이들은 '이조전랑'[하위직이나 관리들을 추천하고 뽑는 직임]으로 김효원이 추천되자,

명종 비인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이 김효원은 한때 훈구파였다 하여 반대하면서 크게 대립했는데,

강경파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고, 온건파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각각 동인과 서인이라 불렸다.

이황과 조식 등 대학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동인[경상도 출신 다수]과 달리

서인[충청도와 경기도 출신]은 그 위세가 크지 못했다.

양자의 균형을 추구한 이이가 서인 편에 가담하면서부터 서인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했다.

이후 소수파로 지내다가,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북인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부터 서인은 남인과 공조하며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붕당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점차 남인과의 대립이 격해져 현종과 숙종 대의 예송과 환국을 거치며 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했ek.

이후 서인은 숙종대에 노론과 소론으로,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다.

'척주초혼단 비각 및 비석'

척주초혼단비(陟州招魂壇碑)

과거 삼척읍 관내에 살던 무후자(無後者)를 위하여 세운 비다.

1953년 삼척읍 의회에서 각 동리에 흩어져 있던, 후손이 없이 죽은 주민들의 토지를

취합 매각하여 그 자금으로 당저리에 공설시장을 세웠고, 남산에 이들 김오태(金五泰)

이하 57위의 초혼비를 세워 매년 음력 9월 중구일에 삼척읍장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1978년에 비석과 비각을 중건하였고, 1995년 시군통합으로 삼척읍이 4개 동으로 분리되어

1998년부터 남양동, 성내동, 교동, 정라동이 돌아가며 제례를 올리고 있으며,

제단이 낡고 노후되어 2013년 비각을 보수하고 석축을 쌓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그렇게 척주초혼단비와 경행서원 기적비를 살펴본 뒤,

다시 해파랑길 갈림길로 내려서서 해파랑길을 진행한다.

(08:12) '삼척문화회관 야외공연장' 우측 방향으로 내려서고~

다시 한번 더 '오십천변' 바라보고~

이후 삼척문화예술 회관 야외 공연장을 지나 삼척문화예술 회관 앞 '엑스포 광장'으로 진행이다.

(08:15) '죽서정' 정자를 지나는데 '일중 김충현'의 명필 현판이 눈길을 끈다.

엑스포 광장 좌측 끝에 '동굴 신비관'이 보이지만, 오늘은 생략이다.

동​굴 신비관은 2002년 삼척 세계 동굴엑스포의 주행사장에 있는 대표적인 시설물로써,

동굴 신비관 1, 2층은 세계 유명 동굴과 영화 속의 동굴, 동굴의 문화 연출, 동굴의 과거, 현재,

미래 디오라마, 동굴의 파괴, 보존 디오라마와 환생교 및 학술 관련 자료,

동굴 내 서식 동물인 박쥐의 생태, 기념사진촬영 코너 및 전망대, 박쥐의 일생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3,4층 주제영상관에서는 대형 아이맥스 영상으로 환상의 동굴을 체험할 수 있다.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 '죽서교' 다리를 건너간다.

죽서교 다리위에서 바라본 '죽서루'

죽서교를 건너, 해파랑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죽서루'를 탐방하기 위해,

'엑스포로'를 따라 약간 더 내려서서 '진주집' 앞에서 좌회전이다.

(08:20) '죽서루 주차장'

'죽서루' 삼문 좌측의 죽서루 안내판을 먼저 살펴보고~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 -보물 제213호-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주관의 부속건물이었다.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리들이 묵던 숙소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향연이 펼쳐지던 곳이다.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명종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의 시 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는 것으로 봐서 12세기 후반에 창건됐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또한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원종 7년(1266)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겼다는 내용으로 보아 죽서루는 적어도 1266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안성· 김구용· 정추 등이 죽서루 관련 시를 남긴 것으로 봐서 죽서루는 14말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죽서루는 버려졌다가, 태종 3년(1403) 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되거나 단청되었으며, 증축되었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둘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 제1루(關東第一樓)」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정면이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기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죽서루란 명칭은 누의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었고 죽림 속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었다는 데서

명명되었다고 전하며, 죽서루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유희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전한다.

누각의 전면에 게시한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 제1루)」 현판은 177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누각 내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은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이 쓴 글씨이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현재 누정 내에는 부사 허목이 지은 「죽서루기(竹西樓記)」, 당성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 등

기문과 일중 김충현이 쓴 율곡 이이의 「죽서루차운(竹西樓次韻)」, 정조의 어제 시 시판 등

모두 26개의 현판이 게판 되어 있다.

 

 

 

죽서루 출입문인 '삼문' 전면에 일중 글씨의 '죽서루'현판이 걸려있다.

그런데 허걱!!! '죽서루' 탐방시간이 오전9시부터다.

현재시간은 8시25분, 금쪽같은 시간 35분을 더 기다려야 되는데~ 할 수없다.

관리인에게 통사정(ㅎ)을 하여 사진 몇 장만 찍고 나온다는 조건으로

출입허락을 받고 신속하게 입장이다.

삼문을 들어서서 돌계단을 올라 겹처마 팔작지붕의 멋진 '죽서루' 전경을 바라보고~

177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쓴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 제1루)」 현판이 기품을 더하고 있다.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한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 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 남쪽 경계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 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이 폐허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 원년(1425, 세종 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 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 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덧대어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 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 현종 3)

임인년(壬寅年) 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죽서루의 역사를 기록한 글 중에서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죽서루기>가 단연 압권이다.

조선 중후기의 명재상이었던 미수 허목(1595-1682)은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며 또 서예가로서

헌종 3년(1662) 이곳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그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관동지방에 8경이 있으며 그 중 죽서루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둘째 죽서루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큰 시내와 깎아지른 절벽, 울창한 숲과

사람 사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죽서루의 역사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조선 태조 3년(1403) 부사 김효종이

폐허 위에 누를 세웠고 세종 7년(1425) 부사 조관이 단청을 해 올렸다.

그런데 삼척시에서 나온 자료에는 허목이 김효손(金孝孫)을 김효종(金孝宗)으로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김효손이 태종 2년(1402) 정월에 삼척부사로 부임해서 태종 4년(1404) 2월에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서루는 누각 아래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제일계정(第一溪亭: 시냇가에 있는 첫째 가는 정자)'

第​一溪亭(시냇가에 있는 첫째 가는 정자) 글씨는 현종 3년(1662)에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68세 때 쓴 글씨로, 미수는 ‘미전(眉篆)’으로 통하는 독특한 전서체 글씨로 유명하다.

미수는 곳곳에 많은 편액 글씨를 남겼는데, 거의 모두가 전서체 글씨다.

‘제일계정’처럼 행초(行草: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글씨) 글씨로 남긴 편액은 이것 말고는 찾기 어렵다.

호쾌하게 쓴 것으로 누구나 좋아할, 시원하고 유려한 글씨다.

그렇게 주마간산 식으로 '죽서루' 관람을 마치고~

되돌아 나가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다시 오십천변으로 되돌아 나오고~

(08:47) 도로를 건너 '오십천'을 우측에 두고 '삼척항' 방향으로 진행이다.

지나온 절벽 허리로 조성된 테크 탐방로 '전망대'를 바라보고~

도로 좌측 상단 바위 틈에 군데군데 토종벌꿀 통이 보이고~

'삼척의료원'을 지난 자리에서 '오십천' 양쪽을 둘러보면 새로운 물길을 위해서

어떻게 남산이 잘렸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봉황산 아래에 봉황담이란 소를 만들며 동해로 나가던 오십천은 잦은 홍수를 유발했고

8년에 걸쳐 남산을 잘라 물길을 돌린 것이었다.

이 대공사 덕분에 삼척 시내의 시가지가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지역민들에게는

새로운 물길이 고마운 일이었겠다 싶다.

'오십천'은 동해안에서 가장 긴 강인 동시에 한강과 낙동강과 오십천이 발원 지점이 동일하다.

'삼척 버스터미널'과 '삼척여고' 사이를 잇는 '오십천교' 북단 횡단보도를 건너고~

(08:58) 삼척 '시가지 빗물펌프장' 앞을 지나면, 우측 아래에 강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삼척선' 철교 아래를 통과하고~

'삼척선' 철교 아래를 지나면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해파랑길 리본이 걸려있는 둔치 윗길을 걷는 방법인데

따가운 햇빛을 피하고 싶다면 이 길이 좋다.

다른 하나는 둔치 아래에 있는 '삼척 장미 공원'을 걷는 방법이다.

장미꽃이 만발할 때면 화려한 장미 속에 빠져 걷는 것도 좋을 듯 한데 선택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중간 중간에 언제든지 위,아래로 오갈 수 있고 둔치 끝에서 두 길은 하나로 만나기 때문이다.

선택 사항이라~ 나는 다소 떨어진 곳에서 전체적인 경관을 보면서 둔치 윗길로 진행한다.

오십천 아래 고수부지에 길게 '장미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삼​척장미공원

삼척 정상동의 오십천 둔치 일원 85,000㎡ 부지에 사업비 182억 7500만 원을 들여

약 5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개장한, 총 218종 13만 그루의 장미나무를 심은,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 장미 수량인 공원이다.

삼척장미공원에는 서울대공원의 장미 23,000그루보다 6배 많고,

해외에 있는 장미 정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독일장거하우젠 유로파 장미 정원보다

약 3배 많은 장미나무가 심어져 있다.

장미공원에는 산책로와 포토존, 장미꽃을 형상화한 장미원과 장미터널, 이벤트 가든,

바닥 분수, 반원형의 잔디광장 등이 있다.

인라인스케이트장, 맨발공원, 자전거 도로 등도 있어 인라인스케이트와 자전거를 빌려서 탈 수 있다.

특히 신재생에너지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공원 내부에 전기 장치 없이 주간에 흡수한

태양빛을 전기로 생산해서 휴대폰 충전과 야간 LED 경관 조명등이 가능한 스마트벤치를 설치하여

도시 경관 조성과 범죄 예방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장미공원에는 장미 외에도 교목 18종, 관목 21종, 화초류 15종 등

총 20만 8000여 그루가 식재되어 있어 다양한 수목도 관람할 수 있다.

우측 아래로 장미공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프랑스식 정원이 연상되는 삼척 장미 공원의 모습인데,

단일 지역에 심긴 장미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09:20) '삼척교 사거리'

삼척교 옆의 '장미공원' 입구 조형물

'삼척교 사거리'에서 도로를 건너 도로를 좌측에 두고 '정라 삼거리' 방향으로 진행이다.

도로 우측으로는 '동양 시멘트'의 한국 전통 담장이 길게 이어진다.

(09:28) '정라 삼거리'

'정라 삼거리'에서 계속 직진의 '삼척항' 방향으로 진행이다.

(08:30) '정라동 행정복센터' 앞을 지나고~

'정라동' 주민센터를 지난 우측에 '삼척포진성과 미수 허목 유적지'를

안내하는 '육향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삼척포진성과(三陟浦鎭城) 미수(眉叟) 허목(許穆) 유적지

이곳 육향산(六香山) 일대는 조선시대 동해안의 9개군(흡곡~평해)과

울령도(독도)까지 해상방위를 총괄했던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이 위치했으며,

조선시대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동해안의 조수와 홍수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세워진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요 삼척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척주동해비 건립터에는 삼척포진영 영장과 관찰사들의 선정비 7개가 모아져 세워져 있다.

1661년 만리도에 건립되었던 척주동해비는 풍랑으로 부서져

1709년 다시 비석을 만들어 세웠는데, 그때 건립 터가 육향산 하단인 바로 이곳이다.

260년간 이곳에 있던 척주동해비는 1969년 햇볕이 잘 드는 산의 정상으로 이건했다.

척주동해비가 있던 이곳에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삼척포진영 영장(營將)과

관찰사의 선정비를 모아 놓았다.

육향산 정상에 올라서면 우전각(禹篆閣) 현판이 걸린 비각 안에는 '대한평수토찬비'가 세워져 있다.

'우전각' 글씨는 독립투사 지청천 장군의 글씨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1660년 조선 현종 원년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許穆)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郎善君)으로부터,

중국형산(衡山)에 있는 하(夏)나라 시조 우제(禹帝)가 썼다는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의 탁본을

전달받아 비문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중 48자를 모아 목판에 새겨 삼척부에 보관하게 하였다.

그 후 1904년(고종 41) 칙사(勅使) 강홍대(康洪大)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 등이 고종의 명을 받아

돌에 새겨서 죽관도(竹串島, 현 위치인 육향산)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산신우비는 하 시조 우제가 산과 강을 다스려 사람들이 안심하고 잘 수 있게 했다는 비석이다.

우전각 우측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삼척포진성지' 비석.

'우전각'에서 돌계단을 올라서면 좌측에 '육향정'이 세워져 있다.

육향정(六香亭)

육향정은 여석 기둥에 육각으로 지은 작고 날렵한 정자로 정라항과 그 일대 해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하기 좋은 정자이다.

광복 뒤인 1947년 12월 당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김진구(金振九)가 중심이 되고

김진원(金振元)의 발의로 김몽순, 김형국 등 지방 유지들이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공, 이듬해 5월에 준공하였다.

특히 자랑스러운 것은 육향정(六香亭)이란 현판 글씨는 애국지사 오세창(吳世昌)에게서

전자체 휘호를 받아 '육향정(六香亭)'이란 현판을 새겨 걸었다는 점이다.

육향정 맞은 편에는 '동해비각'이 위치한다.

삼척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척주동해비는 조선 현종 2년(1661)에 처음 세워졌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마을까지 몰아치고 강이 넘치는 등 수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철학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동해송(東海訟)」을 짓고

독창적인 옛 전서체(篆書體)로 비문을 써서 정라진(汀羅鎭) 앞 만리도(萬里島,

지금의 정라동 큰방파제 끝)에 「동해비(東海碑)」를 세우니 이후 자연도 척주동해비의

신비로운 문장 위력과 덕화(德化)에 감동되었는지 조수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 비석은 조수를 물리치는 위력이 있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 또는 ‘진동비(鎭東碑)’라고도 불린다.

그 후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서 바닷속에 빠지자 허목(許穆)이 이 소식을 듣고 고쳐 썼다.

1709년(숙종 35)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허목의 문하생 한숙(韓塾) 처소에서

비석의 원문을 구해 모사하여 죽관도(竹串島, 이곳 육향산)에 다시 세웠으며,

1710년(숙종 36)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 동쪽 기슭으로 비각(碑閣)까지 짓고 옮겨 세웠다.

1969년 12월 6일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六香山) 정상으로 이전하였다.

'삼척포진성지' 비석 맞은편 나무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얼려서 준비해온 캔맥주와 햄버거 1개를 먹으며 20분 휴식시간을 가지고,

'육향산' 계단길을 내려서서, 다시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09:57) 정라동 지구대 앞을 지나고~

전방 언덕에 오밀조밀 들어선 집들이 이색적이다.

이름하여 "벽 너머엔 나릿골 감성마을"인데 60, 7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곳이다.

마당인지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공간이 이어진다.

계곡에 나루가 있던 곳이라 나릿골이라 했다는데 이름이 이쁘다.

지금이야 삼척 시내가 번화가이고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지만

예전에는 삼척 경제의 중심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풍성한 어족 자원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정어리 공장에서는

정어리기름으로 비누와 양초가 생산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어업이

더욱 번성하여 항구에는 노가리와 오징어가 산 전처럼 쌓이고

나릿골 집집마다 오징어를 널어 말리는 풍경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10:00) 옛날에는 '정라항'이라 불린 '삼척항'을 지난다.

삼척항(三陟港)

오십천 하구에 발달한 항구로 동해항과 더불어 시멘트 반출의 전진기지이다.

1466년 정라항(汀羅港)에 삼척진을 설치하고 수군 첨절제사를 임명하며 군항으로

시작된 삼척항은 군항 기능을 상실하자 어항으로서 수산물의 집산지, 거래지가 되었다.

삼척 수산물 공동할복장이 이를 말해 준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길이 91m인 방파제가 축조됨으로써 항구 기능이 이루어졌고,

삼척 지역 무연탄과 시멘트가 개발되면서 무역항으로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수문으로 보이는 저것은 대체 뭐지?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혹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어항과 화물선이 접안하는 항구가 붙어 있으므로

큰 배들이 들어오면 파도를 칠 테니 수문을 내려서 어민들을 보호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실은 일본에서 넘어오는 쓰나미를 막기 위한 지진 해일 방지 수문이었다.

일본 서북부에서 지진 해일이 발생하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이 삼척항이어서

2021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3.5미터의 파도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아파트 15층 높이로 국내는 최초, 아시아 최대 크기라 하며,

평상시에는 수문이 올라가 있다가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면 수문을 내린다고 한다.

일본에서 지진 해일이 발생하면 삼척항까지 2시간이 걸리고

수문을 내리는 시간은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10:02) 'Y자' 갈림길을 만나고, 해파랑길은 우측 수산시장으로 가지 않는다.

'삼척수협 정라지점'이 위치한 갈림길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

(10:04) '등대 건어물' 앞에서 좌측 골목길로 해파랑길이 이어진다.

'정라동' 골목위로 진행하고~

마치 선박 내를 걷는 느낌을 주는 하얀 담벼락 길.

마치 선박에서 사용하는 조명과 담에 매어 놓은 견인줄은 선박 내부를 걷는 상상을 하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했을 콘크리트 골목길.

좌측에 설치되어 있는 쇠손잡이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는 노인의 때를 상상하게 한다.

'삼척항'을 바라보고~

'이사부광장'을 바라보고~

(10:06) '솔향기전망대'를 지난다.

해파랑길은 마을위로 계속 오르고~

(10:10) 마을위 정상 주차장에 올라선다.

정상 주차장 우측 '바다전망대' 들려보고~

바다전망대에서 바라본 '삼척항'

'바다전망대' 달의 마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저 밝은 둥근달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과 혼자 말처럼 나직히 토해놓은 고백은 '마음'이었다.

나(작가)의 작업의 달들은 수많은 이들의 상처난 이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모든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소통하며 따스한 위로를 건내는 달이기를 바란다.

2020년 김우범

 

 

 

(10:14) 정자 쉼터를 지난다.

(10:16) 사거리 갈림길에서 해파랑길은 직진이다.

해파랑길은 좌측 멀리에 있는 SK 봉황산 기지국으로 이어진다.

'삼척 새천년 해안 샛바람길' 안내판을 지나고~

(10:21) 좌측으로 '소망길'이 갈리는 갈림길에서는 직진이다.

좌측으로 지나온 오십천 건너편의 '봉황산(146.7m)' 정상부 통신탑이 조망되고~

(10:25) 성결교회 0.7km / 광진봉수대 1.2km 방향안내판을 지난다.

(10:28) 먼지털이기가 있는 Y자갈림길에서 좌측 도로를 버리고 우측 임도를 따라 진행이다.

사거리 갈림길에서 직진이다.

SK 봉황산 기지국을 지나고~

(10:32) 사각정자와 전망대가 있는 139미터 삼각점봉을 지난다.

송림숲을 따라 룰루랄라~

(10:38) '광진산 봉수대'

광진산봉수대(廣津山烽燧臺)

돌무더기가 있는 국난 극복 유적지다.

삼척시 교동 광진산에 위치한 봉수대로 성종 12년(1481)에 설치하여

인조 4년(1626)까지 있었던 통신기지로 영동지방 해안선 산봉에 30리 마다

봉수대를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으로

북쪽은 어달산과 남쪽은 양야산 봉수대와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10:41) 구름다리 갈림길

구름다리갈림길에서 좌측의 구름다리를 건너지않고 직진하여

포장도로인 '광진길'에 내려서고~

(10:44)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갈림길에서 해파랑길은 '광진길'을 따라 직진이다.

(10:45) 도로 갈림길에서 포장도로인 '광진길'을 버리고 연수암 방향으로 직진하고~

이후 해파랑길은 마을 지름길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간다.

(10:50) 새천년도로인 '이사부길'로 들어서서 좌측으로 진행하고~

이사부(異斯夫) 길[새 천년 해안 도로]

삼척시는 해맞이 관광 명소 개발과 도심의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하여 1995년부터

삼척 해변 ~ 삼척항을 연결하는 해안 도로 공사를 시작, 1999년에 완공한 뒤,

뉴 밀레니엄을 여는 지난 2000년을 맞아 「새 천년 해안 도로」로 명명하였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바다에 바로 접해 있고,

군부대 경계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서 민간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도로가 개설된 이후 푸른 해송과 기암괴석, 동해의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로 말미암아 많은 방문객이 찾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새 천년 해안 도로는 삼척 해수욕장과 삼척항을 잇는 약 4.7km의 해안 드라이브 코스이다.

삼척시는 2014년에 이 해안 도로를 따라 보행 덱을 설치하였으며, 2017년 12월에

미 개통으로 남았던 약 800m 구간의 군 경계 철책을 철거하고 보행 덱을 완전히 개통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2018년 초 이 길 이름을 삼척을 대표하는 신라장군 이사부의

해양개척 정신을 기려 「이사부길」이라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사부길 인근에는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 정벌을 위해 출항한 '오분항'이 있으며,

영화 <외출>에 나왔던 펠리스 호텔, 소망의 탑, 비치조각 공원 등이 해안 도로의 명성을 높여 주고 있다.

(10:51) '광진'항

삼척항에서 해변과 헤어졌던 해파랑길은 광진항에서 다시 해변을 만난다.

'이사부길'을 따라 진행하고~

가슴이 확 트이는~ 이 맛이 해파랑길이다.

(10:59) 삼척시 교동의 '비치 조각 공원'에 도착하고~

삼척시 교동(校洞)

교동은 삼척시의 북쪽 끝에 위치한 동이다.

1986년 삼척읍이 6개 동을 합해 삼척시로 승격할 때 교리 · 갈천리 · 증산리 ·

우지리 · 마달리의 5개 법정리를 합해 교동이라 하였다.

이들 동리 이름은 모두 『여지도서』의 부내면(府內面)에 기록되어 있는데,

교동(校洞)이라는 이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법정리 중 갈천리는 해안에 갈대와 물억새가 무성하여 갈천(蘆川)이나

가을천(加乙川)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갈천(葛川)으로 변하였다.

증산리는 마을 주위의 산세가 시루(甑) 같아서 '시루뫼'라 하였는데, 한자로 증산(甑山)이 되었다.

우지리는 처음에 울계(鳴鷄)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우지(禹之)가 되었다는 설과,

읍내로 통하는 큰길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웃길' · '웃질'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우지(禹池)가 되었다.

마달리는 마을 서쪽에 움푹 꺼져 들어가 있는 땅에 큰 못이 있어 '못알'이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마달(麻達)이 되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와 함께 '새 천년 해안 도로' 중 A코스인 '이사부 길'을 따라간다.

(11:05) '두꺼비 바위' 전망대와 포토존

앞쪽 갯바위 중간 바위가 기어오르는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두꺼비 바위

아름드리 나무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새 천년도로 해변은 2000년도 도로 개통 이후

수많은 이들로부터 산책과 드라이빙 코스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바위는 인근 주민과 이곳을 지나다니는 고기 잡는 어부들로부터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된 후

지금의 '두꺼비 바위'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촬영하면 집안이 번성하고

행운이 들어온다는 얘기가 있다.

이곳 두꺼비 바위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하는데, 이 근처에서 잡기 힘든

53cm 짜리 감성돔 대어를 낚시로 잡은 후 낚시하는 사람들로부터 '오삼 바위'로 불리기도 하며,

현재도 낚시하기 좋은 포인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무나루가족호텔 2km 안내판을 지나고~

(11:17) '후진'항은 현재 방파제 보강공사가 한창이다.

이름만큼이나 작은 '작은 후진해수욕장'을 지나고~

작은 후진 해변

작은 후진 해변은 새 천년해안 도로 주변의 아름답고 깨끗한 청정 해변으로,

북쪽으로는 삼척해변과 인접해 있으며 낮은 구릉을 뒤로 한 아담한 어촌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백사장 길이는 150m에 불과하지만 수심이 1~1.5m 정도로 가족 단위의 피서지로 적합하다.

갯바위가 있어 주변에서 낚시를 함께 즐길 수 있으며, 해변의 남쪽 끝 지점에 후진항 방파제가 있다.

(11:21) '후진 마을' 해신당을 지난다.

-후진(後津) 마을 해신당 유래-

후진의 옛 이름은 '뒷나루'였다.

뒷나루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후진'이 되었다.

동헌이 있던 시내에서 볼 때 뒤쪽에 자리한 포구였기 때문이다.

후진은 큰 후진과 작은 후진으로 나뉘며, 행정동은 삼척시 교동에 속한다.

본 해신당은 원래 작은 후진 마을 동쪽 바닷가 언덕에 ‘ㄷ’자 모양으로

돌을 쌓은 제단, 즉 신석(神石)이 있었는데, 마을이 생기면서 바람 신을 모시고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던 장소였다.

그러다 1999년 ‘새 천년해안 도로’가 개통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사라져

근처에 임시로 해신당을 만들어 제를 지내오다가,

2011년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해신당을 복원하였다.

(11:23) '삼척 해변'으로 들어서고~

해수욕장 뒤편으로 '쏠비치 삼척'이 보인다.

'새 천년 해안도로[이사부길]' 출발선을 지나고~

이사부(異斯夫) 길 A코스 출발선

「새 천년 해안 도로」는 삼척 해수욕장과 삼척항을 잇는 약 4.7km의 해안 드라이버 코스이다.

삼척시는 2014년에 이 해안 도로를 따라 보행 덱을 설치하였으며, 2017년 12월에 미 개통으로 남았던

약 800m 구간의 군 경계 철책을 철거하고 보행 덱을 완전히 개통한 뒤, 이를 기념하여 이곳을

삼척시 해안 길의 시작점으로 정하고, 원덕읍까지 약 104.5km에 이르는 해안선을 연결하는

명품 해안 길 조성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2018년 초 이 길의 이름을 동해왕 이사부 장군의

해양개척 정신을 기려 「이사부길」이라 명명하였다.

이사부는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년) 지금의 삼척인 실직국의 군주로서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최초로 정벌하여 우리 영토에 편입시킨 역사적인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과거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항했던 지역이 바로 이 곳

삼척의 해안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여 년 전 이사부가 싸워 이겨 지켜낸 울릉도와 독도의 위대한 역사가

이 해안 길을 통해 오랫동안 기억되고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희망한다.(2018년 2월)

(11:28) '삼척 해수욕장'

삼척해수욕장(三陟海水浴場)

삼척시 갈천동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백사장 너비 400m, 길이 1.5km이다.

1984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삼척 시내에서 북쪽으로 1.4km 지점에 있다.

삼척 제일의 해수욕장으로 해안선에서 약 150m까지는 수심이 1~1.5m로 얕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다.

해수욕장 뒤편으로는 송림이 울창하며 가까이에 횟집을 비롯해 민박집과 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그 밖에 미디어 글라스와 백사장 데크로드, 포토존, 퍼걸러, 다목적광장 등 다양한 편의 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남쪽 해변에는 아담한 규모의 후진해수욕장이 있어 해수욕과 낚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갈천동(葛川洞)

갈천동은 삼척시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행정구역 상 교동 7통에 해당되며 4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척시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동해, 북쪽은 증산동, 서쪽은 우지동과 마달동,

남쪽은 교동에 접하고 있다.

서쪽에 청고치, 북쪽에 와우산이 동쪽으로 뻗어내리고, 우지천이 마을 중심부를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갈천동 지명 유래는 해안에 갈대[蘆노]와 물억새[荻적]가 무성하여 갈내[蘆川노천]

혹은 가을천(加乙川)이라 불러오다가 이것이 와전되어 갈천(葛川)이 되었다.

'삼척 해변 관광안내소'와 '관광안내도' 옆을 차례로 지나고~

그네와 여러 개의 쉼터를 지나는데, 제법 많은 연인들이 여가를 즐기고 있다.

궁전 형태의 어린이 놀이터

'내 삶의 쉼표 SAMCHEOK'

이후 '삼척 종합안내센터' 앞을 지나고~

김경숙 작가의 '말가족 모래상' 작품을 지난다.

모래로 만들었지만 무너지지 않는 특별 기법으로 만든 작품이라 한다.

'아이 러브 유' 포토존

이후 최근에 조성된 듯한 '해송[곰솔] 사잇길'로 들어서고~

삼척 해수욕장 북쪽 끝에서 해파랑길은 해변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11:35) 쏠비치 직전의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는 갈림길에서 해파랑길은 좌측 도로行이다.

우측으로 '쏠비치(Sol Beach) 호텔 & 리조트 삼척' 건물을 두고 해변 도로를 진행하고~

태양의 해변이라는 의미의 '쏠비치(Sol Beach) 호텔 & 리조트 삼척'은

그리스 산토리니 마을의 건축 미학을 담아 하얀 외벽과 파란색 지붕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리스 키클라틱 건축양식을 모티브로 환상적인 바다 전망과 어우러지는

709실 규모의 호텔 & 리조트로 탄생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11:42) '쏠비치(Sol Beach) 호텔 & 리조트 삼척' 정문을 지나고~

(11:45) '증산 마을' 입구로 나서면, 좌측에 '증산마을/ 甑山 시루뫼'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증산리는 마을 주위의 산세가 시루(甑)와 같아서 '시루뫼'라 하였는데,

한자로 증산(甑山)이 되었다.

 

 

 

(11:47) '해가사의 터'로 나서면, 임해정(臨海亭) 정자 쉼터가 있고,

그 아래 넓은 광장에 '드래곤볼'과 '해가사의 터' 탑이 세워져 있다.

해가사 터인 임해정은 『삼국유사 수로 부인전』에서 전하는 "해가"라는 설화를 토대로 복원되었으며,

문헌상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삼척해수욕장의 와우산 끝인 이곳으로 추정된다.

성덕왕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로 가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 병풍 같은 바위벽이 있어 바다에 맞닿았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옆 사람들에게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자 그 누구뇨?" 하니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사람이 발붙일 곳이 못 됩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 곁에 늙은 노인이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노래를 지어 바쳤으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바닷가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용이 홀연히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이 기절하여 땅을 쳐 보았지만 아무 방법이 없었다.

한 노인이 있다가 "옛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하였는데

지금 바다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당장 이 경내의 백성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며 몽둥이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바다에서 부인을 데리고 나와 바쳤다.

공은 부인에게 바닷속의 사정을 물었다.

부인은 "칠보 궁전에 음식이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가 있고 깨끗하여

세상의 익히거나 삶은 음식이 아니더라."하였다.

옷에도 향기가 배어 세상에서 맡는 향기가 아니었다.

수로의 자색과 용모가 절대가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에게 잡히었다.

여럿이 부른 해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현)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드래곤 볼을 보면, 용을 타고 있는 수로부인 이미지와 헌화가가 새겨져 있다.

사랑의 여의주 "드래곤 볼(Dragon Ball)"은 독특한 조각 기법으로 구형 표면에 새겨

그 예술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볼을 돌리면서 연인들의 사랑과 소망을 기원하는

의미 있는 기념비로 거듭나고 있다.

여의주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높이 1.6m, 지름 1.3m의 오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가 4톤이나 나가지만 회전이 가능하도록 제작됐다.

드래곤 볼에는 암소를 끌고 가는 노인이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불렀다는

4구체의 향가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용을 타고 있는 수로부인의 설화 속 이미지도 새겨져 있는데,

드래곤 볼을 돌려서 용을 타고 있는 수로부인이 앞에서 멈추면 소망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하며,

헌화가 배경 이미지가 멈추면 연인들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고, 해가사의 배경 이미지가 멈추면

깊이 묻어 둔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해가사의 터 탑 앞에는 '해가'와 '설화 내용' 표석이 있다.

해가사의 터는 해안절경과 더불어 동해시 소재의 추암 촛대바위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장소로 사진촬영지로 유명하다.

야간에는 하트, 별 조명에 불이 들어와 아름다운 수로부인공원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11:48) '증산 해수욕장'

'증산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11-1 버스가 운행되고 있지만, 하루에 몇 편 없다.

'이사부 사자공원'으로 오르는 탐방로를 따라 오르고~

(11:52) '이사부 사자공원' 갈림길을 만나고~

해파랑길은 직진으로 이어지지만 좌측 테크 계단길을 따라

'이사부 사자공원'으로 올라간다.

(11:55) '이사부 사자공원'

이사부 사자공원

신라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이어받아 조성한 이사부 사자공원은 증산마을의

아늑한 절경과 동해 추암 해변의 촛대바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가족형 테마공원이다.

이사부 사자공원 내 조성된 '삼척 그림책 나라'는 그림책을 테마로 조성한 공간으로

빅북, 팝업북, 조형물, VR·AR 기기 등을 한곳에서 체험할 수 있다.

5월~ 8월에는 물썰매장도 운영되어 아이들과 함께하기 좋은 공원이다.

이사부(異斯夫) - 생몰년 : 미상(480년대~562년 이후)

- 이름 : 이사부(異斯夫), 이질부례(伊叱夫禮), 태종(苔宗), 이종(伊宗)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 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 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은 우릉羽陵)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 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伊飡) 박이종(朴伊宗, 이사부의 별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내용은 큰 차이가 없지만, 하슬라 군주가 된 것이

우산국 정복 전이냐 후냐라는 순서 차이만 난다.

삼국사기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된 다음에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우산국을 정벌한 상으로 이사부를 아슬라(하슬라)에 부임시켰다고 써 있다.

이 때문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항한 곳이 어디냐를 놓고

강릉시와 삼척시가 다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삼척시 출항설을 지지하는 편인데, 삼국사기 기록대로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먼저 됐다고 해도 강릉에 가자마자 대규모 선단을 꾸리기는 어려웠을 거고,

실직 군주 시절부터 원정을 준비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삼척에서 울릉도는 동쪽으로 쭉 가면 되기 때문에 항해 방향을 잡기도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손승철 교수는 나중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 기록을 참고해 봐도 동해 바다와 울릉도 관리는

삼척이 제일 수월하고 최적의 출항지라고 주장했다.

우산국 정복에 사자 목상을 사용했다는 점 때문에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

신라 사람이던 이사부가 먼 서역에서나 볼 수 있는 사자를 알았던 것은 신라에 뒤늦게 들어온

불교의 경전에 사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사자를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설 속의 동물로만 알았을 가능성이 크나,

한반도의 사자의 존재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져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테크 계단길 입구, 출구에 갓을 쓴 한복 차림의 사자상 작품(이원갑 2014)이 세워져 있다.

약속의 땅 / 아주 먼 옛날 사자(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때도 대한민국 우리 땅이었다. 독 도 는.

테크계단길 입구 좌측에 조성되어 있는 포토존

(좌) 김문기 작 '가족 사랑' 포토존

우) 좌측 김문기 작 '허허실실',

우측 박종윤 작 2013 장려상 '독도의 평화 파수꾼'

노인 행복 일자리 카페 좌측에는 '평창 2018'을 기념한

'반다비'와 '순호랑' 캐릭터가 전시되어 있다.

카페 위 쉼터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목각 사자상

신라 장군 이사부가 삼척을 출발하여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한 것은 알겠는데

사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발동했다.

알고 보니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키는 과정에 사자가 이동된 것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사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산인은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력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려우니 계략을 써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만들고 전선에 나눠 실었다.

" 먼바다를 한참 건너가느라 지친 상태에서 거친 바다에 익숙한 우산국 병사들을 병력으로

굴복시키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낸 꾀가 한반도에서는 살지도 않는 거의 신화 속의 동물과도 같은 사자를 등장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나무로 만든 사자로 말이다.

우산국 사람들은 생전 보지도 못한, 험악하게 생긴 동물을 풀어놓겠다고 하니 백기 투항하고 말았다.

속임수를 깨달은 다음에 우산국 사람들이 원통해했다고 하지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 했으니 이사부 장군은 최고의 전법을 구사한 것이었다.

'삼척 그림책 나라' 건물

그렇게 주마간산식으로 '이사부 사자공원' 관람을 마치고

해파랑 갈림길로 되돌아가서 해파랑길을 이어 간다.

(12:01) 테크 다리를 건너고~

전방으로 '추암 해수욕장'이 펼쳐지며, 촛대바위가 더욱 가까이 보인다.

'동해시' 표지판을 지나고~

이곳부터 삼척시 증산동(甑山洞)에서 동해시 추암동(楸岩洞)으로 시계(市界)가 바뀐다.

동해시 추암동(楸岩洞)

강원도 동해시 중동부의 동해안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북평동 관할이다.

동해시 주위에 구호동(九湖洞), 구미동(九美洞), 대구동(大口洞) 및 삼척시 증산동(甑山洞)과 접한다.

원래 삼척군(三陟郡) 견박면(見朴面) 지역이다가 1914년 과동(科洞) 및 탄막을 병합하여

삼척군 북삼면(北三面) 추암리가 되었고, 1945년 북삼면이 북평읍(北坪邑)으로 개칭,

승격됨에 따라 삼척군 북평읍 관할이 되었다.

1980년 북평읍과 명주군(溟州郡) 묵호읍이 통합되어 동해 시가를 설치됨에 따라

동해시 북평동 관할의 추암동이 되었다.

동해-삼척 간의 삼척선이 마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감돌아 통과하며,

삼척시 증산동과의 경계에 추암역이 있다.

추암해수욕장과 해돋이 명소로 알려진 촛대바위가 있다.

구미동, 구호동과 함께 북평산업단지를 이룬다.

 

 

 

해파랑길 33-34코스 안내도와 '자전거 인증 부스'를 지난다.

(12:05) 추암 해변에 내려서기 전 우측에 비석이 보이는데~

해변에 내려서서 확인해 보니 '壬戌生回甲紀念碑'라는 처음 보는 비석인데,

과거 이 지역에서 회갑을 맞은 임술생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는갑다.

'추암 해변'

추암 해변

동해시 북평동 남부에 있는 추암리 마을 앞에 길이 150m의 백사장을 가진 해변이다.

해안절벽과 동굴, 칼바위, 촛대바위 등의 크고 작은 바위섬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조용하고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뛰어난 경승지로 해금강이라 불려 왔으며 조선 세조 때 한명회가 강원도 체찰사로 있으면서

그 경승에 취한 나머지 능파대(凌波臺)라 부르기도 했었다.

이후 '추암 해변'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려 햄버거와 캔맥주 큰거 구입하여

점심을 해결하며 12분 휴식시간을 가지고~

우측에 있는 죽도의 '촛대바위'를 보러간다.

(12:18) 육계도와 연결되는 테크 다리를 건너고~

섬 꼭대기 전망대 방향으로 오르면, 자연석에 희미한 '凌波臺(능파대)' 글씨가 가늠된다.

(12:23) 이곳의 주인공 '촛대 바위'다.

'추암'은 송곳 바위라는 의미인데 바로 '촛대 바위'의 또 다른 의미이다.

동해시의 명소 추암 촛대바위는 수중의 기암괴석이 바다를 배경으로 촛대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비경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장소다.

촛대처럼 생긴 기이하고 절묘한 바위가 무리를 이루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촛대바위와 주변 기암괴석 군을 둘러싼 바다는 수시로 그 모습을 바꾼다.

파도 거친 날에는 흰 거품에 가려지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닮기도 하고

파도 잔잔한 날에는 깊은 호수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곳 해돋이는 워낙 유명해 많은 여행객들과 사진작가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우암 송시열도 이곳을 둘러보고는 발길을 떼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촛대바위, 형제바위의 일출은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도 자주 나온 곳이다.

촛대바위의 전설

옛날 이곳 추암 해안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소실을 얻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본처와 소실 간에 투기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두 여자의 시샘에

급기야 하늘도 노하여 벼락으로 징벌을 가해 남자만 남겨 놓았는데

오늘날 홀로 남은 촛대바위가 그 남자의 형상이라 한다.

1900년대까지 이 남자와 본처 그리고 소실을 상징하는 3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중 두 개의 바위가 벼락으로 부러져 없어졌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남성들에게는 일부일처제를 여성들에게는 현모양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참고로 촛대바위 붕괴에 관하여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681년(숙종 7년) 6월 12일과 6월 26일 두 차례에 걸쳐서 양양, 강릉, 삼척 근해에서

규모 M6~7급으로 추정되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특히 6월 26일 발생한 2차 지진은 한반도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으로 진도 7.5로 추정되는 지진이었다.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담벼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의 신흥사 및

계조굴의 거암이 모두 붕퇴(崩頹)되었다.

삼척부 서쪽 두타산 층암은 예부터 돌이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모두 붕괴되었다.

그리고 (삼척)부의 동쪽 능파대 수중의 10여 장 되는 돌이 가운데가 부러지고

바닷물이 조수가 밀려가는 모양과 같았는데, 평일에 물이 찼던 곳이 1백여 보 혹은 5, 60보 노출되었다."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강희 20년) 5월 11일 계해 1번째 기사》

멋진 형상이다.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져 절경을 연출하며,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부부바위,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등으로 불린다.

이곳의 바위군(群)은 동해시 남서부에 분포된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이 노출된 것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 일대의 석회암이 토양 밑에 있을 때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독특한 모양을 이루었고, 이것이 바닷물에 의해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의 석림 '능파대'

능파대는 인근 하천과 파랑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죽도) 및

촛대바위와 같은 암석 기둥(라피에)들을 포함한 지역을 총칭한다.

라피에는 석회암이 지하수의 용식 작용을 받아 형성된 암석 기둥이다.

이곳의 라피에는 국내 다른 지역의 라피에와 달리 파도에 의해 자연적으로 들어난

국내 유일의 해안 라피에다.

라피에로 유명한 세계 자연유산 '중국의 석림'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국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국의 석림'이라 부른다.

촛대바위를 비롯하여 잠자는 거인 바위, 코기리 바위, 양머리 바위 등

다양한 모양의 라피에를 볼 수 있다.

촛대바위는 파랑의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씨 스택(sea stack)에 해당되는 지형으로

고등학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능파대' 전각

능파대는 촛대 바위 일대를 부르는 말로 조선시대 한명회가 붙인 이름이다.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우아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고해를 건너 해탈의 세계로 간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강원도에는 능파대가 두 곳이 있는데, 고성 능파대와 이곳 동해시 능파대(凌波臺)다.

이곳 동해시 북평동 남부 추암리 마을에 있는 능파대는 조선 세조 때 이곳을 찾은 체찰사

(조선시대 지방에 군란이 있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그곳에 가서 일반 군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

보통 재상이 겸임하였다) 한명회(韓明澮)가 '능파대기(凌波臺記)'에서 추암의 절경에 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삼척군 동쪽으로 십 리쯤 가면 한 곳에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혹은 불끈 솟아오르고

혹은 구멍이 나고 절벽을 이룬 것이 바다 가운데 있다.

- 중략 -

강릉 경포대와 통천 총석정과는 그 경치가 난형난제이며 기이한 점은 이곳이 더 좋다 하겠다.

속되게 ‘추암’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이제나마 작명에 대하여 부끄럼이 없게 ‘능파대’라고 그 이름을 고치노라."

정상의 동해시 표지석 '남한산성의 「正東方」은 이곳 추암해수욕장입니다.'

서울 광화문의 정동방이 강릉의 정동진이라면

남한산성의 정동방은 이곳 추암 해변이라는 안내이다.

(12:28) '해암정'

정면 해암정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 글씨고, 좌측 해암정은 시택 심지황,

우측 석총람은 송강 정철 글씨라 한다.

북평 해암정(海岩亭)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1361년(공민왕 10) 삼척 심씨(三陟 沈氏)의 시조인 심동로(沈東老)가 고려 말의 혼란한 국정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세가의 비위를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때 왕이 이를 만류하다가 동로( 東老:노인이 동쪽으로 간다는 뜻)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낙향한 후에는 후학의 양성과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왕은 다시 그를 진주군(眞珠君)으로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지금의 해암정(海岩亭)은 본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에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 다시 중수한 것이다.

건물은 낮은 1단의 석축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 형식이다.

4면 모두 기둥만 있고 벽면은 없다.

뒤로 지붕보다 조금 높은 바위산이 있어 운치를 더해 주며,

이곳에서 보는 동해의 일출 광경은 장관이라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이 함경도 덕원(德原)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이곳에 들러 '草合雲深逕轉斜 (초합운심경전사 :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

라는 글을 남겼다 한다.

해암정 내부 편액들

해암정을 지나 우측으로 돌아서, 출렁다리 입구 이정표 따라 넓은 길을 오른다.

(12:32) 출렁다리를 건너고~

길이 72m의 국내 유일의 바다 위에 지어진 '해상 출렁다리'인데

중간에 벌집 구조의 바다 밑이 뻥 뚫린 곳도 지난다.

촛대바위 방향의 석림을 되돌아보고~

출렁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동해항 방파제가 시선을 끈다.

이후 테크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 편의 군부대 때문에

우측 아래로 돌아가도록 등로가 조성되어 있다.

그렇게 군부대를 빙 둘러 '조각 공원 입구'로 들어선다.

 

 

 

(12:39) '조각 공원'

일출 명소답게 다양한 조형물로 공원을 장식해 놓았다.

우측 위가 '추암역'이다.

드디어 해파랑길 32구간 종점이 지척이다.

(12:45) '추암역'

해파랑길 삼척~동해 33코스 진행은 해파랑길 33코스,34코스 종합안내판앞에서

추암철도 가도교 아래를 통과하여 우측으로 진행된다.

해파랑길 33코스,34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

오늘 1차로 목표했던 해파랑길 32구간 후반부 진행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32코스 완료 스탬프 찍고~ 물 한잔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해파랑길 삼척~동해 33코스를 연속으로 이어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