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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 창원6구간

답사일자: 2022.11.19

코스: 부산 강서구.송정공원(시점)-용원 어시장-용원교-초록오름공원-안골왜성입구-청천마을 표지석

-안성마을 표지석-진주교-웅동 119안전 센터-황포돛대 노래비-흰돌메공원-남해고속도로 남문대교 밑

-동천 3교-성내천교-주기철 목사 기념관-웅진읍성 견룡문-제덕교-진해.제덕사거리(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5.45km (두루누비기준 14.8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5분

▶ 갈때 : 부산5구간 마치고, 창원6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6구간 들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 올때 : 제덕사거리의 제덕만택지 버스정류장에서 진해 306번 시내버스를 타고

(20분 소요) 진해구청 버스정류장에서 하차,

횡단보도를 2개 건너 맞은편 진해구청 시내버스정류장에서 진해발 부산行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에서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 지하철역에 하차,

양산역 버스정류장에서 17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

남파랑길 6구간 궤적

남파랑길 부산5구간을 마치고, 송정공원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가 두루누비&트랭글 앱 다시 켜고

(12:10) '영도대교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남파랑길 창원6코스 진행이다.

송정공원에 세워져있는 남파랑길 창원 6코스 종합안내판

부산시 강서구와 창원시 진해구 용원과 경계지역에 있는 부산시 강서구 송정공원에서

진행방향 직진하여 횡단보도를 건너면 창원시 진해구에 들어서게 된다.

부산에서 대중교통편으로 송정공원에 오기 위해서는 55, 520번은 송정공원에 바로 내려설수 있고,

길 건너편 용원사거리에는 58-1, 58-2, 353번 등을 이용할 수 있다.

부산 강서구와 창원 진해구가 갈리는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타이어 뱅크' 건물 앞에서 직진하고~

(12:12) '용원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다.

이후 '해병대 환경 감시단'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을 지나면,

좌측 편에 작은 섬이 있는데, 바로 '망산도'다.

망산도·유주암(望山島·維舟巖)

-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7호. -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 188번지 일원

고대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비(首露王妃) 허태후(許太后)의 전설과 관련된 곳으로,

용원동 앞바다의 작은 섬을 망산도(望山島), 이 섬의 동남방 70m 해상의 바위섬을

유주암(維舟巖)이라 부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허태후 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다.

서기 48년에 가락국의 구간(九干)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청하자,

왕은 자신의 왕비는 하늘이 정해 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玷)에 나가 망을 보게 하였다.

어느 날 서남쪽 해상에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배가 나타나자 유천간이 횃불을 들어

배를 인도하니 마침내 그 배는 망산도에 닿았고, 그 배에서 허태후 일행이 상륙하였다.

승점에 나가 있던 신귀간의 보고를 받은 왕은 친히 나아가 태후를 맞아들였다.

그날 밤 침전에서 태후가 말하기를 “소첩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며

이름은 황옥(黃玉)인데, 어느 날 꿈속에서 황천상제(皇天上帝)가 말씀하시기를

‘가락국 수로왕은 본디 하늘이 내려보낸 사람이나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가서 짝을 지어라.’

하기에 달려 왔노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아 혼인하고 백오십 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허태후가 처음으로 배에서 내린 곳이 망산도이며, 타고 온 돌배가

바닷속에 뒤집혀 유주암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수로왕이 몸소 마중을 나와 이 섬에서 멀리 해상을 바라보며 기다렸다고 하여

망산도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망산도'를 알리는 표지석 땡겨보고~

(12:21) '용원 수산물 센터' 앞 'Y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이다.

'용원어시장'의 '활어회센터'를 지나고~

'부경신항수협 수산물위판장' 앞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용원교' 초입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서~

(12:30) '용원교'를 건넌다.

용원교를 건너자말자 바로 우회전하여

부산신항 부영 '사랑으로' 아파트 옆 산책로를 따라 진행이다.

가을이 익어간다.

부산신항 부영 '사랑으로' 아파트가 계속 이어지고~

깨끗한 '초록오름공원'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ㅎ

부산신항 부영 '사랑으로' 아파트가 끝나고 우측 개울이 실개천으로 바뀌는 상류에 이르면,

(12:50) 남파랑길은 우측으로 방향이 바뀐다.

개울 위를 건너서 '역U자' 형태로 반대편 길을 따라 약간 내려서고,

(12:53) 제일함바식장 앞 'ㅓ자' 갈림길에서 좌측 '용원동로'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이정표가 가르키는 '웅천 안골 왜성 0.4km' 지점이다.

완만한 '용원동로' 도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12:57) '안골 왜성' 입구를 지난다.

웅천 안골 왜성(熊川安骨倭城)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있는 성으로 부산과 다도해 방면을 연결하는

가덕수도(加德水道) 첫머리에 있다.

삼면이 바다인 육망산(陸望山)에 의지하여, 앞은 절벽이고 뒤는 안골만으로 이어져,

천험과 지리를 고루 갖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제포진(薺浦鎭)에 소속된 안골포영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었고,

석성 둘레가 약 56m, 높이 약 3m이며 성안에는 시내·우물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수군의 진영(鎭營)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고쳐 쌓아 본성(本城)으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웅천·웅남·남산에

둘레 약 300m의 내성(內城)을 3중 석축으로 쌓았다.

왜군은 그 외에도 많은 지성(支城)을 쌓아 이곳과 웅천·제포를 연결하여 다도해 쪽으로

진출하려는 왜 수군의 본거지로 삼았다.

1592년(선조 25년) 성 앞 안골포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대첩의 여세를 몰아

왜군을 크게 무찌른 안골포해전이 벌어졌다.

오늘 남파랑길 한 코스만 진행하면 '안골 왜성'을 보고 가겠지만, 부산5코스를 마치고

연달아 창원6코스를 진행하느라 시간이 없어 '안골 왜성'은 창원6코스의 숙제로 남긴다.

이후 우측 '망개산'과 좌측 '안골 왜성'을 연결하는 굴다리 우측 생태통로를 따라

굴다리 위에 올라 다시 앞쪽 계단길을 따라 고갯마루를 넘어간다.

'안골로' 'T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좌측으로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고,

(13:05) 다시 우회전하여 '안골로' 보행로를 따라 진행이다.

(13:07) '안청공원(무궁화공원)' 입구에서 좌회전이다.

'청천마을 포구'를 바라보고~

예전 바다낚시에 미쳐있을때 팔뚝만한 '수조기' 잡으러 이곳에 몇번 온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때의 그 열정이 새삼 그리워~

(13:17) '안청로'와 '청안로'가 갈리는 사거리에서

'황포돛대 노래비 5.1km' 방향으로 좌회전이다.

이삭 유치원 앞을 지나고~

이정표는 좌측으로 1.4km에 '진해 바다 70리길' 중 안골포길 도착점을 표시하고,

남파랑길은 직진 방향이다.

이후 '안골포'를 좌측에 끼고 '역 C자' 형태로 돌아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

(13:26) 시드니모텔, 홍초롱모텔 2개가 있는 도로 마루를 넘어서고~

(13:28) '안성 마을' 앞 삼거리에서

'안성 마을' 표지석이 있는 우측 도로를 따라서 간다.

도로 건너편 우측으로 '하늘누리' 전통차 카페를 지나고~

저멀리로 '가덕해저터널'이 시작되는 '가덕도 천성'일대 바라보고~

도로가에 놓인 작은 나무의자가 '여보게!!! 잠시 쉬었다가게'라고 말을 건넨다.

좌측으로 '웅산'. 가운데 '불모산', 우측으로 '화산' 바라보고~

(13:49) '남의로'가 지나가는 S-OIL사거리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진행이다.

(13:51) '대장천'을 가로지르는 길이 101m의 '진주교'를 건너고~

진​주교(鎭鑄橋)는 진해의 마천 산업단지 중에서 60여 업체가 주물업체이기 때문에,

진해의 '진(鎭)'자와 주물(鑄物)의 '주(鑄)'자를 따서 진주교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대장천' 기수역 바라보고~

대장천(大壯川)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 화산(花山)[799.2m]의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성흥사에 이르러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성흥사를 지나면서 하천의 경사가 급격히 완만해지고 마천동에서 소사천을 아우른 뒤

두동에서 바다로 합류되는 유로 연장 6.00㎞, 유역 면적 29.97㎢로 하천이다.

중류에 해당하는 덤바위, 대장동, 죽항, 부암 마을에 걸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대장천의 발원지인 화산은 북쪽에 위치한 김해시 장유면 율하천 및 대청천과 분수계를 이룬다.

대장천은 팔판천이라고도 불린다.

대장천 골짜기는 팔판산계곡, 대장동계곡, 성흥사계곡으로 불리며 여름에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팔판산계곡에 자리 잡은 성흥사는 833년(흥덕왕 8)에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팔판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연중 그치지 않아 대장동에서는 농사가 잘되어

‘웅천 낙토는 대장동’이라는 말이 전래되고 있다.

진주교(鎭鑄橋)을 건너자말자 남파랑길은 좌회전이다.

'고압전선 지중화 시설'을 지나고~

'154,000 볼트' 고압전선이 이 시설에서 지중화로 변경되어,

마천 일반산업단지로 공급된다고 한다.

남파랑길 창원 6코스 안내판

좌측 건너편으로 '영길 마을'을 바라보고~

(14:00) '월남천'을 건너는 '영길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우측 '남의로 26번길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웅동 119안전 센터' 앞을 지나고~

(14:04) '남영로'가 지나가는 사거리 교차로에서 좌회전이다.

'영길 운동장' 정문을 지나고~

'영길 버스정류장'과 '영길 마을회관'을 차례로 지난다.

도로 건너 우측 편에 '중소 벤처기업 진흥 공단 부산경남 연수원' 입구를 지나고~

(14:12) '김해횟집' 뒷편 삼거리 갈림길에 '자전거길 안내도'와

'이정표(←마천공단, ↑영길마을)' 거창한 '황포돛대 노래비'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 삼거리 갈림길은 '진해바다 70리길' 중 7구간 안골포길 출발점이자,

6구간 흰돌메길 출발점이다.

삼거리갈림길 뒷편 정자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캔맥주(카스 큰거) 1캔과

햄버거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15분 푹 쉬었다 간다.

(14:27) 휴식후 출발!!!

대형 유람선 모양의 '리치랜드' 카페

(14:40) '황포돛대 노래비'가 있는 소공원

'황포돛대 노래비'

2003년에 조각가 이상헌이 '고향의 향수'란 주제로 조각한 작품으로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 324-15 맞은편 소공원인, 해안관광 도로의

중간지점인 영길만에 세워진 진해 지역의 새로운 관광명소이다.

1960년대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황포돛대」는 작사가 이용일(본명 : 이일윤)이

이 고장 출신으로, 경기도 연천의 포부대 근무 당시, 고향 바다인 영길만을 회상하며

노랫말을 만들었고, 군 제대 후인 1964년 백영호 작곡, 이미자의 노래로 발표하게 되어

국민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그 유래를 담아 이곳 영길만 도로변에 황포돛대 노래비를 건립하게 되었고,

가로 5m, 세로 6m, 높이 7m 규모로 화강석을 재료로 하여 제작된

노래비 전면에는 노래 가사가, 뒷면은 작품 설명이 새겨져 있다.

다시 '진해바다 70리길' 6구간 '흰돌메길' 방향의 해안 관광도로를 따라 남파랑길을 이어간다.

진행방향으로 부산신항 웅동 배후 단지에 '동원로엑스냉장' 물류센터 건물이 보이고~

(최대한 땡겨본다.)

(14:54) '흰돌메공원' 입구

(남문 휴게소에서 우측 위 흰돌메공원으로 오르는 구름다리[출렁다리]가 놓여있다.)

흰​돌메공원

하얀 바위나 흰 돌이 많아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백석산(白石山)· 흰돌메라는

옛 지명에서 따 온 말로 시민공모로 정한 공원 이름이다.

새해에는 해돋이 장소로, 봄이면 벚꽃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남문 휴게소 '웅포해전' 설명 표지석 (직접 확인하지 못해 네이브 이미지에서 퍼옴)

웅​포 해전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웅포[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와성 마을과

사도 마을 사이의 포구]를 점거하고 있던 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 사이에 접전을 벌인 해전을 일컫는다.

조선 수군이 부산에 진을 친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웅포를 점거한 왜군을 소탕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그러나 왜군은 임진년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자 조선 수군에게 대응하지 말고 수성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해상 전투를 피하고 포구의 산기슭에 은거하여 지형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웅포에 함선들을 정박시킨 상태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쯤 지난 1593년 2월부터 3월 초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지금의 창원(진해구) 웅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조선 수군이 공격하여 승리한 해전이다.

1593년 1월 조정으로부터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2월 6일에 8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전라 좌수영[현재 전라남도 여수시에 소재]을 출발하여

경상남도 통영시와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인 견내량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함대와 합류하여 부산 쪽으로 가던 도중 웅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발견하였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주도 아래 2월 10일(음), 12일, 18일, 20일 4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지만 적은 포구 밖으로 일체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수군은 유인작전을 포기하고 2월 22일 단독으로 상륙작전을 겸한 총 공세를 펼쳤다.

의승병들과 사부들을 태운 10여 척의 전선을 동으로는 안골포에, 서로는 제포에 상륙시켜 공격하였다.

적세가 분산될 때 전선 15척을 웅포를 향해 돌격시켜 총통을 쏘아 적선을 반이나 쳐부수고

수많은 적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후 2월 28일과 3월 6일에도 산기슭의 적 진지에 포탄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아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왜군은 여전히 포구에 은거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순신은 최후 수단으로 화공으로 왜선들을 불태워버리고자 화선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함선을 상실하여 궁지에 몰린 왜군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화풀이하면 그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하여 화공을 중단하였으며, 4월 3일에 연합 함대를 해산하고 전라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이 해전은 일본군의 서진 의지를 좌절시킨 의미가 컸으며, 7차례 해전에서 각기 다른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 특징이다.

'흰돌메공원' 입구 앞 남파랑길 빨간 화살표시가 가르키는 좌측 아래

계단길을 따라 해변산책길로 내려간다.

잔잔한 '웅동만'을 좌측에 끼고 해변 산책로가 이어지고~

'웅천' 일대 바라보고~

예전 휴게소와 선착장 역할을 하던 곳인 듯한데 태풍으로 인해 파손되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듯하다.

(15:01) 해변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서 우측 계단길을 올라

'남영로' 도로로 올라서고~

(15:08) '남해고속도로 제3지선'의 '남문 대교' 밑을 통과한다.

(15:13) 남영로 사거리 갈림길에서 도로를 건너 '창원 남문지구' 방향으로 진행하고~

'도코다카오카 코리아' 건물을 좌측에 두고 직진방향의 도로를 따라서 간다.

부산 진해 경제자유구역 외국인 투자지역에 2018년에 입주한 '도코다카오카 코리아(주)'는

일본 최대 전력회사인 '도쿄전력'의 자회사인 도코다카오카와 국내 중전기기 전문 업체

'청탑산업'이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로, 변전소용 가스 변성기를 조립생산하여 한국전력에

공급하는 회사라고 한다.

 

 

 

(15:16) 부산 진해 경제자유구역 남문 외국인 투자지역 안내판

남문지구 아파트 단지 '호반베르디움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5:24) '남영로'와 '웅천동로'가 갈리는 사거리갈림길에서 도로를 건너 직진이다.

(15:27) '동천'을 가로지르는 '동천 3교'를 건너고~

좌측으로 바라본 '동천' 일대

'남문지구 동천변 산책로 안내판'

남파랑길은 '동천 3교'를 건너자말자 횡단보도를 통해 '남영로' 도로를 건너

맞은편 '동천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다.

(15:34) '동천 2교'를 지나고~

좌측으로 또 무슨 ??? 건물이 들어설 모양이다.

'진해대로'가 지나가는 '성내천교' 아래를 통과하고~

(15:38) '동천 1교'를 지난다.

'남문지구 동천변 산책로 안내판'

(15:40)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경남 창원(昌原) 웅천 출생의 독립운동가이다.

1916년 평북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延禧專門)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그 후 웅천(熊川)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으며,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6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 목사, 마산 문창(文昌) 교회 목사를 거쳐

1936년 평양 산정현(山亭峴) 교회 목사가 된 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주기철 기념관'을 나와 바로 대각선 맞은편에 위치하는

(15:43) '웅천 읍성'으로 들어간다.

웅​천읍성(熊川邑城)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에 있는 조선 전기에 축조된 석성의 성곽터이자 읍성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 (1434)에 남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와 인접한

제포 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된 연해읍성이다.

읍성은 지방의 주요 거점에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이 복합되어 축조된 성곽으로

웅천읍성은 남해안 지역에 축조된 연해읍성이다.

이 웅천읍성은 왜구의 침입과 조선 전기에 개항한 삼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왜인 거류지가

조성되어 있는 제포와는 불과 1km 남짓 떨어져 있으며,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에게 함락되어

동문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임진왜란 시 웅천 왜성의 자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조선군의 대 일본 방어의 최일선 기지로서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웅천읍성은 2001년도부터 2008년도까지 4차례의 직간접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동벽, 남벽 체성부,

동문지, 옹성, 동북, 동남 치성, 북, 동, 남쪽의 해자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웅천읍성은 1434년 세종 16년에 둘레 3400척, 높이 15척으로 초축된 이래

문종과 단종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수개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평면 형태의 경우

정방형의 읍성에서 장방형의 읍성으로 증개축 되었다.

체성부는 세종조 축성 신도가 반감된 전후의 축조 양식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해자는 조축 해자 및 증축해자가 확인되고 있고 또한 해자 내 도개교 및 목익

(적이 해자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놓은 나무말뚝)이 확인되었다.

1407년(태종 7) 일본과의 선린책으로 내이포(乃而浦)를 개항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게 되자 일본인의

불법 거주가 많아져 이를 막고 읍면을 보호하기 위하여 1437년(세종 19) 웅천수군첨절제사영

(熊川水軍僉節制使營)으로 축조한 것이 이 석성이다.

1451년(문종 원년)에는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동·서·북의 세 곳에 수로를 만들어 성을 일부

확장하였으며, 1510년(중종 5)에는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일시 왜구에게 함락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둔하였다.

당시 성의 규모는 ≪동국여지승람≫ 성곽조(城廓條)에 “석축의 둘레가 3,514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성안에는 2개의 우물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동문지(東門址)의 길이는 4m이며 성벽의 높이는 5∼8m, 너비는 3m인데, 지금 남아 있는 총 길이는

약 500m이고 동벽 북쪽 끝의 남쪽 10m 지점에 누지(樓址)가 남아 있다.

성의 기단부는 장대석을 다듬어 한 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장방형이나 삼각형 면석을 쌓아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대형 면석의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견고함을 더하였으며 지면과 거의 수직으로 축성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존 관리를 하지 않아 일부 성이 허물어진 것을 읍민들이 다시

축성한 곳도 있으나 동·서·남쪽에 남아 있는 부분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웅천읍성의 서쪽에는 감포산성(甘浦山城)과 소산성(小山城) 등 두 개의 지성(支城)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 소(宗義智)와 마쓰우라(松浦鎭信)가 각각 수비하고 있던 성이고,

남산의 서쪽에 있는 제포(薺浦)는 삼포의 하나로 옛날의 개항장이다.

'웅천읍성 명문석'

웅천읍성 명문석

웅천읍성의 동벽과 남벽에는 모드 5개의 명문석(銘文石)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명문석의 내용은 읍성 축성 구간을 담당한 군현(郡縣) 및 감독의 성명을

각석하여 축성 후에도 그 책임을 연대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명문석에서 확인된 지명은 진주(晉州), 창녕(昌寧), 청도(淸道), 합천(陜川) 등 5개소로

웅천읍성의 축조에 동원된 인력들이 경상도 전역에 걸쳐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문석 내용 중 '晉州 鄭□夫, 昌寧 李敦仁 등의 인명이 보이는데 이 중 이돈인은

조선 세조 및 성종조의 사람으로 단종 1년 웅천읍성의 개축 시 부사직(副司直)으로

당시 창녕군의 구역을 담당한 감무임을 알 수 있다.

'웅천읍성 해자 조교'

웅​천읍성 해자조교

웅천읍성 동문지 옹성 바깥해자 내에서 해자를 건너기 위해 설치된 교각의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목재 기둥이 2열 4조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확인된 이 교각의 기둥은 옹성 개구부로부터 동남쪽으로 15m 지점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동문지 옹성 외벽과는 약 9m 이격된 지점이다.

이 목재 기둥들은 동문지 옹성과 수평하게 반원형을 이루며 축조된 폭 4.6m의 해자 내부에서

확인된 원형의 통나무재로 현재 해자의 바닥으로부터 잔존 높이 20.5~80cm로 확인되고 있다.

직경은 각각 25, 28, 34, 35cm이며, 앞뒤 간격은 74cm로부터 182cm이며 좌우 간격은

3~3.25m로 확인되고 있다.

薺山(제산) 김성탁의 《薺山全集》에 "널다리를 해자 위에 걸쳐 인마를 통하게 하고,

양변의 나무인형에 쇠줄을 걸어 놓았다가 성에 오르면 줄을 당겨 다리가 들리게 하였다"라는

기사에서 조선시대 읍성에는 해자를 출입하는 시설로 줄을 올리고 내리던 조교(釣橋)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웅천읍성 해자(垓子)

해​자는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방어시설의 하나로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방어시설이었다.

웅천읍성에서는 길이 300m의 동벽과 남벽 해자가 확인되었다.

'웅천읍성 옹성'

웅​천읍성 동문지 옹성

웅​천읍성의 동문지 옹성은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체성과 동시기에 축조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웅성은 전체 직경 18m, 내벽 직경 약 13m이며 옹성의 외벽 둘레는 52m,

내벽 둘레는 27m이다. 잔존 최고 높이는 약 3.5m 정도이다.

옹성 체성부 폭은 약 3.5m로 내벽의 경우 약 3단 정도가 나타나고 있다.

옹성의 개구부는 북쪽을 향해 약 폭 4m 정도로 확인되었다.

옹성 체성부는 성석(城石)의 면이 바깥쪽으로 보이도록 하면서 세워쌓기·눕혀쌓기 하였으며

사이사이에는 끼임돌을 사용하였다.

성석의 크기는 2mⅩ1.5mⅩ1.2m정도의 것이 대부분이며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그 크기가 작아진다.

기단부의 축조는 체성의 축조와 동일한 형태로 바닥에 인두(人頭)대의 할석을 쌓고

내·외벽 끝에서 약 1.5m 정도까지 판석으로 깐 기단석이 돌출되어 있고 그 위에 지대석을

설치하고 약 20cm 정도 퇴물림하여 체성부를 축조하고 있다.

현재 옹성 내부 바닥에서는 배수시설 등의 지하시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유물 역시 자기편 일부와

기와 편 등이 소량 확인되고 있다.

웅천읍성 동문루인 '견룡문(見龍門)'

동문루(東門樓)

문루는 성문의 출입통로 상부에 마련된 누가 있는 건물을 말한다.

성문의 문루는 성내외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하고, 전투 시에는 장수의 지휘소로

이용하는 건물이 되기도 한다.

《熊川誌》(增補)에 의하면 웅천읍성에는 4대문(四大門)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일명 見龍門(東門), 睡虎門(西門), 鎭南樓(南門), 拱宸門(北門)이라 하였다.

이중 동문인 견룡루는 절충식[초루식(譙樓式)과 누각식(樓閣式)의 문루 형식을

일부씩 절충한 형식의 문루]이다.

발굴조사 결과 문루의 하단부에 해당하는 문지의 폭은 약 2.8m 내외로 확인되었다.

초축 이후 증·개축 과정을 거쳤으며 주초석은 1.8Ⅹ 0.8m 크기의 대형 활석을

사용하였으며, 확돌이 2개소 확인되었다.

복원된 웅천읍성 동문루는 단층 문루로 지붕 형식은 팔작(八作) 지붕이며,

문루의 공포(拱包) 형식은 이익공이며 평면 형태는 정면 3칸 Ⅹ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견룡문 문루' 위에서 좌측으로 바라본 전경

'견룡문 문루' 위에서 우측으로 바라본 전경

(15:51) '동문루'를 내려와 '진해웅천동 우체국'을 지나고~

(15:52) '진성한식' 음식점 앞 갈림길에서 좌회전이다.

'웅천읍성 저잣거리'를 지나고~

4일, 9일에 장이 서는 '웅천시장' 앞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이다.

어린시절 내가 살던 동네 골목을 연상케하는~

우리마트에 들려 션한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진행이다. ㅎ~

(15:57) '남문동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5:58) '2번 국도'인 '진해대로'가 지나가는 '제덕교' 아래 굴다리를 통과한다.

'다온 플라자' 앞 'T자'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가르키는

'진해해양공원' 방향으로 우회전하고~

진행하는 길 우측에는 '한국쯔바키모토오토모티브(주)' 공장이 위치하는데,

한국쯔바키 모토오토모티브(주)는 동력 전달용의 드라이브 체인 등

각종 체인류와 감속기, 전동 실린더, 캠 클러치 등의 파워 & 컨트롤 분야의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갈림길에서 우회전하고~

(16:05) '농협 주유소' 앞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웅천서로' 도로를 건넌후

좌회전하여 '진해 해양공원 3.8km→' 방향으로 진행이다.

'웅천서로'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도로마루에 올라서서

'전망좋은모텔 유에스모텔'을 지난다.

(16:13) '제덕 사거리'

(16:15) '우대감네 금송아지' 음식점 앞 '남파랑길 창원 7코스' 안내판

오늘은 여기까지다.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6구간 답사 마무리를 한다.

제덕사거리의 남파랑길 창원 7코스 종합안내판 바로 아래에 위치해있는

버스정류장 이름은 '제덕만택지'다.

제덕사거리의 제덕만택지 버스정류장에서 진해 306번 시내버스를 타고

(20분 소요) 진해구청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고,

횡단보도를 2개 건너 맞은편 진해구청 시내버스정류장에서 진해발 부산行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후,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 지하철역에 하차,

양산역 버스정류장에서 17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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