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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 거제19구간

답사일자: 2023.2.1

코스: 김영삼대통령 생가.기록전시관(시점)-대계마을.몽돌해변-강망산.봉수대-덕포해변

-팔랑고개-팔랑포.마을회관-옥포항-임진왜란 첫승전지 비-대우조선.서문--대우조선.남문

-대우조선.정문-대우조선.동문-두모고개-거제문화원-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7.32km (두루누비기준 15.5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5시간22분

▶ 갈때 : 경남 양산.사송집에서 부산.노포동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1호선 타고 하단역에서 하차, 4번출구로 나와 횡단보도건너

하단역 버스정류장에서 (부산~거제)行 2000번 버스를 타고 소계마을에 하차,

대계마을(김영삼대통령 생가)까지 도보이동후 트레킹시작

▶ 올때 :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行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 버스정류장에서 16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

남파랑길 19구간 궤적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대계마을' 표지석 옆 남파랑길 거제19구간 안내판

'대계마을' 표지석 옆 정자에서 답사준비를 마치고

(10:20) 두루누비&트랭글 앱켜고 남파랑길 거제19코스 시작이다.

'옥포해전' 설명판을 읽어보고~

옥포해전(玉浦海戰)

1592년(선조 25) 5월 7일(陰) 옥포(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를 완벽하게 무찌른 해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된 뒤 당시 상황을 보면, 일본군이 침입했을 때에 남해안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2개의 수영이 설치되어 연안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경상도에서는 좌수사인 박홍과 우수사인 원균이 각각 동래 해안의 좌수영과 거제 가배량(加背梁)의

우수영에서 낙동강 하구를 경계로 해안과 도서지역을 관할했다.

한편 전라도에서는 좌수사인 이순신이 여수의 좌수영에서 여수-해남까지 남해안을,

우수사인 이억기가 해남의 우수영에서 해남-부안까지의 서해안을 관할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도의 수군이 일거에 무너지며 일본군의 거점 확보가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원균과 합세해 경상도 수군을 지원하는 데 동원된다.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보유 중이던 전선(戰船)인 판옥선(板屋船) 24척과 중형 전함인

협선(挾船) 15척, 소형 전함인 포작선(鮑作船) 46척 등 총 85척으로 전대(戰隊)를 편성하여

5월 4일 본영(本營: 지금의 여수)을 출항하여, 소비포(所非浦: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5월 6일 아침에 당포 앞바다에 도착하자, 경상우수 본영의 70여 척의 전선 중

거의 대부분을 잃고, 판옥선 4척· 협선 2척 등 겨우 6척만 가지고 온 경상 우수사 원균과

옥포 만호 이운룡 등 관할 지역의 수군장들과 함께 합세해 송미포(松未浦: 거제시 동부면)에서

작전을 짜면서 하루를 더 보냈다.

이때 이순신은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을 통합해 함선 91척의 총지휘를 맡았다.

5월 7일 새벽에 전 함대가 발선하여 옥포 근해에 이르자, 척후장(斥候將)인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내와 곧바로 옥포로 진격했다.

이순신의 함대가 옥포 포구에 도착했을 때는 일본군의 대소 함선 50여 척이 선창에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 수군들은 전열을 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이 틈을 타 공격해 격파했다.

이때 승리했던 상황을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왜적들은 우리 수군을 보고 노를 빨리 저어 진지를 나와 우리 군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 옥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1명의 부상자만 발생한 반면, 왜군은 첫 번째 패전으로

전선 26척 격침에 4,08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여 아군의 완벽한 첫 승리를 거둔 전투였고,

이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불리했던 정황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시초가 되었다.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종 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를 받았다.

이번 남파랑길 19코스는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을 따라 진행하게 되어있다.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 수군의 첫 승전인 옥포해전이 펼쳐졌던 옥포만을

끼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 만들어 놓은 둘레길로, 김영삼 대통령 생가에서

옥포항까지의 8.2km의 거리를 세 구간으로 나누어 조성하였다.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 앞에서 남파랑길은 '옥포대첩로'를 버리고

좌측 '대계2길'을 따라 '대계항'이 있는 해변으로 내려간다.

'대계항' 바라보고~

(10:23)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좌측으로 '몽돌해변'을 보면서 진행이다.

'몽돌해안' 끝에서 해안을 벗어나

우측으로 '거산리조트'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대계항' 바라보고~

'대계마을' 바라보고~

(10:26)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진행이다.

'대계전원주택' 단지를 지나고~

(10:30) 우측 '대계마을'에서 이어져 오는 '옥포대첩로'에 올라서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58번 거가대로'가 지나는 '대계2교'를 바라보며 진행이다.

'58번 거가대로'가 지나는 상행선 '대계2교'와 하행선 '대계2교' 밑을 지나고~

(10:33) '대계2교' 밑에서 인도가 없는 '옥포대첩로' 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봉수대' 방향으로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이후 완만한 오르막 수레길을 따라 정면의 독립가옥을 바라보며 진행하고~

독립가옥 마당을 지나는데~

이 녀석들이 나타나 얼마나 반기는지,

잠시 녀석들과 눈맞춤하며 쉬었다 간다.

'58번 거가대로'와 남해 바다를 바라보고~

펜스 옆 숲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녀석이 가이드를 자청하며 앞서 나간다.

(10:40) '3-1 구간/ 봉수대 1.4km' 이정표를 지나고~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 3구간이 '덕포해수욕장 ~ 김영삼대통령 생가'를 잇는

약 2.9km 코스인데, 봉수대를 거쳐 가는 길이 '3-1 구간인 모양이다.

(10:42)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문을 통과하는데,

이곳에서 가이드를 자청하던 녀석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원목 계단길과 돌계단길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올리고~

(10:57) 사각 정자가 세워진 능선 갈림길에서 남파랑길은 좌회전하고,

이곳에서 좌측의 봉수대까지 0.5km 거리다.

이 정자가 있는 능선에서 거제시 '덕포동(德浦洞)'을 만나게 되는데,

능선 좌측 '북쪽'으로는 계속 '장목면(長木面) 외포리'이고,

능선 우측 '남쪽'은 '거제시 덕포동(德浦洞)'과 경계하면서 봉수대까지 진행하게 된다.

 

 

 

좌측으로 '관중'이 울창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고~

언제부터인가 붉은 비닐 끈이 길 안내를 하고 있다.

(11:02)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217m 봉'을 지나고~

잠시후 파묘한 흔적만 남은 묘지 공터를 지나 완만하게 내려서다가

다시 올라 별 특징없는 '228.9m봉' 정상부를 지나고~

(11:08) 정면으로 조망이 확 트이면서,

말끔하게 정비된 '강망산 봉수대'에 도착이다.

강망산(江望山) 봉수대(烽燧臺)

강망산(江望山: 374m) 정상에서 남쪽 덕포동과 북쪽 장목면(長木面) 외포리를 경계하면서

동남 방향으로 내려선 능선 끝, 덕포동 고인돌이 있는 덕포동 뒷산 정상(228.9m)에 위치하여

덕포 해수욕장과 동남쪽 해안이 조망된다.

둘레 약 35m에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높은 곳은 4.5m나 된다.

연대로 오르는 계단은 나선형으로 북동쪽에 설치됐다.

연대(烟臺) 상부 연소실은 사각 웅덩이 형태로 남아 있으며, 연대 아래 북서쪽 능선에는

불을 피우던 연소시설이 5m 거리를 두고 6개소나 설치돼 있다.

연대 앞 좁은 평탄지에는 민묘와 등산로가 개설돼 있다.

이 봉수의 축조에 관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15세기에 설치되어

18세기에 개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봉수의 원래 명칭은 《대동여지도》에 보면, 옥포항(玉浦港) 북단에 조라포가 있고,

그 위에 율포·장목포의 순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위치로 볼 때 율포의 가을곶 봉수대가

바로 강망산 봉수대로 비정되고 있으며, 따라서 봉수대의 구조도 거제 옥녀봉 봉수대

(경남기념물 129)와 비슷하고 건립 연대도 거의 비슷한 거제 북부지역의 간봉(間烽)으로 추측된다.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거가대교' 방향 바라보고~

'능포' 방향 바라보고~

그렇게 봉수대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조망을 즐긴후,

봉수대 능선 우측 방향으로 진행하면, 온전히 '거제시 덕포동'으로 들어서게 된다.

거제시 덕포동(德浦洞)

거제시의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옥포 2동 관할하에 있다.

상덕·하덕·개끝·대밭·장자골 등의 옛마을, 감자골·거시이골·다짓골·대밭골·범등골·

연새짓골·서당골·중산·허리골 등의 골짜기, 구렁보·소루개보 등의 보(洑), 넓덕바위·

미주바위·벼락바위 등의 바위, 덕포재·새미실재·연밭구미고개·옥포재 등의 고개가 있다.

미주바위는 메주처럼 생겼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덕포해수욕장이 있다.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4기가 있고, 문화재로는 강망산 봉수대(경남기념물 202),

장승포 덕포리 이팝나무(경남기념물 95)가 있다.

(11:23) 이후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이정표를 지나고~

그렇게 급경사 내리막길을 길게 내려서면

정면으로 확 트이면서 '덕포 해수욕장'이 잘 조망된다.

(11:31) '강망산 봉수대 입구'로 이어지는 철제 계단길을 따라 길게 내려서고~

(11:34) '옥포대첩로'가 지나는 도로로 내려선후,

우측 아래에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넌다.

이후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데로 '옥포대첩로'를 따라 진행하여

'기산 하브뷰' 아파트 앞을 지나고~

(11:38) '하덕 버스정류장'이 있는 'ㅓ자'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덕포6길'을 따라 '덕포 해수욕장' 방향으로 진행이다.

그렇게 '덕포해변'에 도착하면, 남파랑길은 우회전하여 진행하게 되고~

이곳이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 3구간과 2구간이 갈리는 지점인데,

앞으로 '팔랑포 마을'까지 약 3.5km의 2구간과 함께 가게 된다.

인적이 끊긴 철 지난 바닷가 '덕포 해수욕장' 바라보고~

'덕포 해수욕장' 사랑 마크 포토존

'국제 펭귄 수영 축제' 조형물

매년 겨울이면 이한치한(以寒治寒)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이색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리는데,

대표적인 행사로 거제 펭귄수영 대회를 비롯하여 서귀포 겨울바다 국제펭귄수영 대회,

해운대 북극곰 수영 대회, 포항 겨울바다 돌고래 수영 대회 등이 개최된다.

거제 펭귄수영 대회의 경우 매년 천여 명의 내외국인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2018년 1월 20일에 개최된 제13회 때 65세 참가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거제도의 펭귄 축제 행사는 이후 보도가 없어서 계속 열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세계 거리 이정표를 지나고~

지나온 '덕포 해수욕장' 다시 한번 더 바라본다.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여도권관 김인영' 안내판을 지나고~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덕부(德夫). 전라남도 보성 출신.

아버지는 김견(金堅)이며, 형은 김인수(金仁秀)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여도권관(呂島權管)으로서 이순신(李舜臣)의 지휘 아래

좌척후장(左斥候將)이 되어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참전하여 왜선 1척을 쳐부수고,

이어 당포해전(唐浦海戰) 때는 우별도장(右別都將)으로 크게 활약하고,

제3차 한산해전(閑山海戰)과 1594년 3월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때는

우척후장(右斥候將)으로 참전하는 등 항시 앞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문벌이 낮고 중앙에 밀어주는 세력이 없어서 벼슬이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올랐을 뿐이었다.

이에 이순신이 조정에 계문(啓文)을 올려 포상을 청하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자,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뒤에 현감에 제수되었다.

옥포해전' 설명판을 지난다.

(11:46) '덕포랜드 짚라인 도약대'를 보면서 진행하고~

작은 개울가를 따라 진행하다 좌측으로 다리를 건넌다.

(11:48) 적색 난간의 철교를 통해 '덕포천'을 건너고~

'덕포천' 상류 바라보고~

덕포천(德浦川)

경남 거제시 덕포동에서 발원하여 남동방향으로 흘러 웃골과 중리,

대밭, 하덕마을 등을 지나 옥포만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하천 수계는 본류와 1개의 소하천인 장자골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천연장은 2.67km, 유로연장은 3.05km, 유역면적 3.54㎢이다.

유역 인근의 토지 대부분은 산지로 되어 있고, 하천을 따라

주거지와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하천의 경사도는 상류부가 1/31, 중류부가 1/63~1/31,

하류부가 1/625~1/71로 상류지역으로 갈수록 급한 경사이다.

하천 중류부에는 58번 지방도로가 하천을 가로지르며 지난다.

급경사의 테크계단 오르막길을 올라선후, 산허리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옥포대첩 기념관' 방향으로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11:51) 첫번째 쉼터를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경상우수군의 장수였던 '남해현령 기효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남해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숙흠(叔欽).

아버지는 사과(司果) 기대유(奇大有)이다.

어려서 예문(藝文)을 배우고 서법에 능했으나 성격이 호방하여 무과를 택하였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자 무비가 소홀하였으므로 왕의 명을 받들어

주와 군의 군비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부임하여 전선[戰艦]과 병기를 수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추록되고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해 현령 기효근'에 대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3년 계사년 음 6월 28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종일 비 오다. 오후 네 시쯤에 잠깐 개다가 도로 비가 왔다. 〈중략〉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색시를 태우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 원균 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옥포대첩 기념관' 1.4km 이정표를 지나고~

(11:54) 두번째 쉼터를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경상우수군 영등포만호 우치적 장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

본관은 단양(丹陽).

아버지는 이천부사 우필성(禹弼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무관직을 거쳐 1592년(선조 25)에 경상우수영 소속인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가 되었다.

그 해 4월에 왜선이 경상도해안의 각 수군진포(水軍鎭浦)를 급습하자, 수사인 원균(元均)의

지휘하에 적선 10여 척을 쳐부수는 데 공을 세웠다.

5월 초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대를 이끌고 합동작전을 하자,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과 함께 선봉에서 연합함대를 인도하였다.

옥포·적진포·합포 해전 때에는, 맨 먼저 왜장이 탄 적선에 뛰어올라가 적을 죽이고 그 배를 빼앗았다.

그 뒤 많은 해전에서 원균의 돌격전법의 선봉장으로서 언제나 적선에 올라 많은 적을 죽이고,

적에게 잡혀 있던 우리 백성들을 구해내었다.

1596년에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8년에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데

매우 공이 컸다.

이 때 적장 한명이 큰 활을 휘어잡고 누선(樓船) 위에 높이 앉아서 독전하는 것을 보고 쏘아죽였다.

1601년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간원(諫院)으로부터 불의를 많이 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05년 북도우후(北道虞候)에 이어 경흥부사·회령부사 등을 거쳤다.

1611년(광해군 3)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1613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면서

함경·강원도의 순변사(巡邊使)가 되었다.

그 뒤 경성부사를 거쳐 1619년 평안도병마절도사, 1625년(인조 3)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28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그곳에서 죽었다.

 

 

 

이후 '옥포대첩 기념관' 1.1km 이정표를 보면서 원목 계단길을 내려서고,

작은 데크 다리를 건너 원목 계단길을 올라서서 고도를 높힌다.

(12:00) '남파랑길 사각 패널'이 붙은 세번째 벤치 쉼터를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소비포권관 이영남'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소비포권관(所比浦卷官) 이영남(李英男)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충청도 진천(鎭川) 출신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옥포만호(玉浦萬戶)로서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을 도와 활약하였는데,

개전(開戰) 초기에는 원균과 이순신(李舜臣) 사이의 전령(傳令) 임무를 맡았다.

본래 경상우수영에서 율포만호(栗浦萬戶)를 지내고, 소비포권관(所比浦卷官)

등을 거치면서 점차 이순신의 성품에 매료되어 그의 충복(忠僕)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簽節制使)로서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공을 세웠다.

이어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더욱 분전(奮戰)하여 많은 적을 무찌르고 전사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으로 봉해졌고 광해군 때 병조참판,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북도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된 묘는 진천군 덕산면(德山面)에 있다.

다시 내려서서 작은 계곡을 하나 지나고,

다시 올라서니 편백이 빽빽한 숲 가운데 원목 계단길이 한참 이어진다.

(12:06) 네번째 벤치 쉼터를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사도첨사 김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본관은 경주

1546년 영천에서 태어났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올랐다.

1591년 전라좌수영 소속 사도 첨절제사(蛇渡僉事)로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 우척후장(右斥候將),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는 척후장으로 활약하였다.

후일 대병장(代兵將)으로도 활약하며 이순신이 참전한

주요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자 권준과 같은 장수들이

사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보좌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방장이 되어 전투 중 일본 수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일본으로 압송됐지만 탈출해 귀국하였다.

선조로부터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받고,

함안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 고향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이정표(옥포대첩 기념관 350m)를 지나면 등로는 좌측으로 휘어지며,

또 다시 원목 계단길을 길게 올라서서 진행하고~

(12:11) 운동 시설과 쉼터 벤치가 있는 '팔랑고개'에 도착이다.

운동시설 좌측 편에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 입간판과 함께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옥포 대전의 명장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명종 즉위년) ~ 1598년(선조 31)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李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

(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순신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 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 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에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訊問)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중략……

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여수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이곳 '팔랑고개'에서 남파랑길은 이정표가 가르키는 우측 '팔랑포 0.73km'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좌측 아래에 있는 '거제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들렀다 가기로 한다.

(12:14)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 2구간 이정표를 지나면,

'거제 옥포대첩 기념공원'이다.

제일 먼저 '옥포대첩 기념공원' 내 '참배단'에 들려

묵념을 올리고~

'옥포대첩 기념탑' 둘러보고~

옥포대첩기념공원(玉浦大捷記念公園)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있는 공원으로 넓이는 10만 9398㎡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옥포만에서 왜선 50여 척 중

26척을 격침시킨 옥포대첩을 기념하여 조성하였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첫 승첩으로 이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 6월 12일에 기념탑을 세웠으며, 1963년에는 옥포정을 완공하였다.

1973년에 옥포조선소가 들어서며 기념탑과 옥포정을 아주동 탑곡마을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주변이 협소하여 1991년 12월부터 현 위치에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높이 30m의 기념탑과 참배단·옥포루·팔각정·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1996년 6월에 개원하였다.

이중 '충(忠)' 자를 형상화한 참배단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다.

전시관은 옥포해전 당시의 해전도 등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며,

옥포루는 전망대를 겸하고 있는 팔각 정자이다.

공원에서는 매년 이순신 장군의 제례행사가 열리며, 6월 16일을 전후하여 약 3일간

거제 옥포대첩축제가 열린다.

개원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5시)까지다.

'옥포루'에 올라 주위 조망을 즐기며 잠시 휴식이다.

남해 앞바다 바라보고~

'옥포만' 바라보고~

이후 운동 시설과 쉼터 벤치가 있는 '팔랑고개'로 되돌아온후

(12:34) 이정표가 가르키는 '팔랑포' 방향으로 남파랑길을 이어간다.

그렇게 진행하는데, 나무가지 사이로 '옥포대첩 기념공원'에서 보았던

옥포만의 대우조선 선박들이 보이고~

(12:37) '옥포대첩 기념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인 '팔랑포 2길'로 내려선다.

이후 남파랑길은 좌측으로 '옥포대첩 기념공원'으로 연결되는 '팔랑포 2길' 따라

몇 발자국 진행하다, 곧바로 도로를 벗어나 우측 '옥포항' 방향으로 내려서야 한다.

'팔랑포 마을 300m' 이정표를 지나는데,

좌측으로 계속 눈길을 끄는 '옥포만'과 '대우조선'을 바라보고~

(12:40) 벤치 쉼터를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옥포만호 이운룡'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무신이자 공신으로, 청도 출신으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이고, 부는 남해 현령 이몽상(李夢祥)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 별시에 급제한 후 1587년 선전관에 임명되고,

1589년 정월에 옥포만호로 임명되었다.

옥포만호로 3년째 근무하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에 접근하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적군의 거대한 형세에 진영을 버리고 곧 도망하였다.

이어 적군이 서남해안을 돌아 거제로 향해오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전선과 무기를 바닷속에 침몰시키고, 수많은 군사도 흩어버리고서는

남해현의 앞 바다에 떠돌아다니다가 육지를 찾아 도망하려 하였다.

이때 옥포만호로서 원균 휘하에 있던 이운룡은,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더욱이 이 지역이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임을 상기시키면서, 전라 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항언했다 한다.

이에 원균은 이운룡의 강변에 따라 율포만호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영으로 보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1592년 5월 7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과 합세해 옥포해전에 참전하여

선봉장으로 임전하여 적선 5척을 분멸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뒤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 참가,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왜군의 내양(內洋) 진출을 막아

우리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웅천 현감과 동래 부사직을 거친 후,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1604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 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비변사 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 복무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청도의 금호 서원(琴湖書院)과 의령의 기강서원(歧江書院)에 제향 되었다.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옥포만'과 '대우조선'

남파랑길 갈림길에선 좌측으로 진행이다.

팔랑포 방파제 & 느태 방파제 바라보고~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서 우회전하여,

'1구간 옥포항 2.1km' 방향으로 진행이다.

(12:44) '팔랑포 포구'로 들어서고~

'옥포항 2.0km' 이정표를 지나고,

좌측으로 해변길을 따라 진행하다 '팔랑포 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팔랑포는 임진왜란 때 첫 승첩을 거둔 옥포만 동북쪽에 자리한 전형적인 작은 어촌 마을로,

'잔잔한 물결이 팔랑팔랑 포말거린다'하여 파랑포 혹은 팔랑포라고 하였다는 지명 유래와

옥포대첩 때 패잔한 왜병 여덟 명이 도망가 편안히 보낸 마을이라 하여 팔랑포(八郞浦)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구술 설화로 전해 오고 있다.

 

 

 

'팔랑포' 해변과 붙어있는 민가를 지나서, 나무테크 계단길을 올라

(12:48) 사각정자를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경상우수군 장군인

'지세포만호 한백록'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 한백록(韓百祿)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지(綬之)이다.

한경인(韓敬仁)의 손자이며, 한굉(韓硡)의 아들이다.

진잠현감, 지세포만호, 부산진첨사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때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 해전, 합포 해전에 참전했으며,

미조항 싸움에서 전사했다.

이후 다시 좁은 해안 산길을 따라 '옥포항' 방향으로 진행하고~

(12:57) '옥포산림공원 전망대' 입구 팔각 정자 옆을 지나는데,

옥포 대전의 장군들 중 '녹도만호 정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1543년(중종 38) 해남에서 증 공조판서 정응정(鄭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웅천 현감(熊川縣監)·제주 판관 등을 지내면서

민의의 뜻은 따랐으나 부당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1591년(선조 24) 제주목사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부임하여 여수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갔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

옥포 해전에서는 후부장(後部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 중선 2척을 분멸시켰다.

이후 임진년의 수많은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이 쏜 대철환에 머리를 맞고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통곡하며, "국가가 오른팔을 잃었다"하며,

글을 지어 제사 지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특별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증직하고, 녹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부산 기사(釜山記事)」에는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하였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이공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옥포산림공원 전망대'에 올라 주위조망 살펴본다.

지나온 '팔랑포' 바라보고~

'팔랑포 방파제' & '느태 방파제' 바라보고~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옥포만'과 '대우조선'

(13:03) '옥포산림공원 치유정원' 안내판을 지나고~

예전 바다낚시에 한참 빠져있을 무렵 '옥포항'에서 낚시배를 타고

이곳 갯바위에서 밤볼락낚시를 즐길때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ㅎ

첫번째 삼거리갈림길에서, 직진의 야자매트길이 아닌

좌측길로 진행하고~

두번째 삼거리갈림길에서, 직진의 '옥포항 지름길' 방향이 아닌,

'빨간 남파랑길 화살 표찰'이 가르키는 좌측 방향으로 진행이다.

'세계 거리 이정표'가 있는 사각정자 데크 쉼터에서 우회전하여 내려서고~

'옥포항 0.84km' 남파랑길 이정표를 지난다.

이후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서 사각정자 쉼터를 지나고,

(13:14) 우측으로 이어지는 해상 데크 탐방로를 따라 진행이다.

그렇게 길게 이어지는 해상 데크 탐방로를 따라

(옥포 - 13)원형 위치표시판을 지나고~

(13:17) '중앙공원' 갈림길 이정표에서

'빨간 남파랑길 화살 표찰'이 가르키는 좌측 방향으로 진행이다.

대우조선해양 안내판을 지나고~

'옥포만'과 '대우조선' 바라보고~

'세계 거리 이정표'가 있는 갯바위 끝 데크 쉼터에서 우회전하여 진행이다.

그렇게 진행하는데 '옥포항'이 가까워지고 있고,

(옥포 - 2) 원형 위치표시판을 지나면서, 대형 입간판 뒤면을 지나다

앞으로 가서 내용을 확인해 보고~

(13:30) '옥포항'으로 나서기 위해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면,

옥포해전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13:32) 소형 어선들이 정박 중인 '옥포항'을 지나고~

좌측으로 '옥포항'과 우측으로 노래 주점과 횟집, 삼계탕 음식점이 있는

'옥포로2길'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13:35) 정면의 '팔팔 횟집' 앞에서 남파랑길은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7.5km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 방향이다.

'해양경찰 옥포출장소' 앞을 지나고~

'옥포항' 바라보고~

(13:40) '옥포1동 주민센터' 앞을 지난다.

거제시 옥포동(玉浦洞)

경남 거제시에 있는 동으로 면적 10.86㎢ 이다.

동쪽은 옥포만에 접하고, 남서쪽에 국사봉(國士峰: 387m)이 솟아 있으며,

해변 부근에 발달한 평지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제군 이운면(二運面)이었는데,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면서 통영군에 속하였다.

1935년에 이운면이 장승포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53년에 다시 거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에 장승포읍이 시(市)로 승격함에 따라 옥포리가 옥포동이 되었다.

1995년 1월에는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태(都農複合形態)의 거제시가 됨으로써

거제시에 속하였다.

행정동인 옥포동은 법정동인 옥포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옥포마을, 조라마을, 국산마을, 팔랑포마을이 있었다.

문화재로는 옥포성(玉浦城: 경남기념물 104)이 있는데, 거제시 소유이다.

'임진왜란 해전 첫 승전지' 비석을 바라보고~

'옥포1동 방범지원대' 앞 광장의 '옥포대첩' 시비를 지난다.

이후 'GS 25 편의점' 앞에서 좌측 횡단보도를 건너

'대우조선해양 복합업무단지' 앞을 지나는데~

이곳 '대우조선해양 복합업무단지'에서부터 '옥포로' 도로를 따라

'대우조선'을 벗어나기까지 계속해서 '대우조선해양' 옆 길을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그 거리가 5km 이상이나 된다.

(13:55) 우측 도로 건너편에 실물 크기인 듯한 '임진란 거북선 2호'가 보이고~

'대우오션플라자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13:58) '대우조선해양' 사외 주차장을 지나고~

'옥포 물류센터' 건물 옆을 지나간다.

(14:02) '대우조선 열정교'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열정교' 출입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 진행하고,

좌측으로 거대한 선박 두척이 건조되고 있는데 무슨 배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옥포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좌측 '아주천' 너머로 대형 부품 공장 건물과 크레인들이 보이고~

(14:10) '19번 교차로'를 지난다.

이곳에서 이제까지 진행해온 '옥포로'와 빠이빠이하고,

'14번 거제대로'를 따라 진행이다.

이즈음에서 '거제시 옥포동'에서 '거제시 아주동'으로 행정계가 바뀐다.

거제시 아주동(鵝洲洞)

경남 거제시에 있는 동으로 면적 12.47㎢ 이다.

동쪽은 장승포동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옥녀봉(玉女峰: 555m)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는 옥포만에 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제군 이운면(二運面)이었는데,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면서 통영군에 속하였다.

1935년에 이운면이 장승포읍으로 승격하였고, 1953년에 다시 거제군에 속하였다.

1989년 1월 장승포읍이 시(市)로 승격함에 따라 아주리가 아주동이 되었다.

1995년 1월에 장승포시와 거제군이 통합되어 도농복합(都農複合) 형태의 거제시가 됨으로써

거제시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동인 아주동은 법정동인 아주동·아양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장기마을·내곡마을·배나무골·성안마을·용소마을·탑곡마을이 있었으나

대우조선해양의 옥포조선소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이주하였다.

장기마을은 아주리 동쪽 당등산 자락에 있었는데 예전 5일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탑곡마을은 옥포조선소 남문과 정문 사이의 국도변에 있던 마을로,

신라시대의 사찰인 법률사가 있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곳에서 아양리삼층석탑이 발견되어 길가에 세워져 있다가 1983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옥포조선소 안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주요 도로는 14번 국도가 거제대교를 거쳐 아주동까지 해변을 따라서 이어지고,

1018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부산항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으며, 문화재로는 경상남도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거제아주동고분군(巨濟鴉州洞古墳)이 있다.

 

 

 

좌측으로 '아주천' 산책로 갈림길을 지나고~

이곳에서 잠시 고민 하다가 직진 도로변 길을 따라가는데,

지나면서 산책로를 바라보니 '아주천'변으로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우레탄도 깔려 있으므로 무릎에 무리도 덜 가고,

직접적인 자동차 소음과 매연을 피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천변 산책로로 진행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곳 인도는 오토바이 주차장이다.

(14:17) '20번 교차로'를 지나고,

좌측 다리 건너편에는 '대우조선 서문'이 있는 곳이다.

'대우조선 서문 버스정류장' 앞에는 '아주천'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아주천(鵝洲川)

경남 거제시 아주동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다 북동방향으로

유향을 바꾸어 흘러 아주동 해안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하천연장은 2.64km, 유로연장은 3.97km, 유역면적 7.43㎢이다.

하천변에는 주거단지와 운동장, 주민센터, 학교 등의 여러 시설이 형성되어 있으며,

하천 중하류부 남동쪽으로 옥포국가산업단지가 위치한다.

하천 중하류지역을 따라 14번 국도가 있다.

행복 홀씨 패널과 '자연보호 헌장비' 옆을 지나고~

(14:25) '21번 교차로'를 바라보며 좌측으로 휘어지는 '14번 거제대로' 도로를 따라가다,

'아주교'를 통해 좌측 아래로 나란히 이어져 온 '아주천'을 건너서 간다.

그렇게 '14번 거제대로'를 진행하다,

(14:31) '14번 거제대로'의 자동차 전용도로가 끝나는 지점을 지나고~

'대우조선해양 남문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14:34) '22번 교차로'를 지나고~

'3.1 기념탑 교차로' 앞을 지난다.

'대우 정문 교차로'를 지나고~

(14:42) '대우조선해양' 정문을 지나고~

남부.일운, 장승포, 교통표지판을 보면서 진행하고~

(14:53) 우측으로 '아양 지하차도' 입구를 보면서 진행하는데,

'거제대로'는 '아양 지하차도' 입구 끝 지점에서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나간다.

(14:57) '아양.아주 이주민 망향공원' 입구를 지나고~

망향비

내용을 살펴보니 대우조선 설립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

아주동·아양동 이주민 망향비다.

이후 우측 도로 건너편으로

'거제시 환경사업소 장승포 공공 하수 처리시설'을 보면서 진행하고~

(15:03) '25번 교차로'를 지나는데, 좌측은 '대우조선해양 동문'이다.

'대우조선해양 동문'을 지나면 '거제대로'와의 사이에 격리 공원을 두고

대우조선 담장에 붙어 있는 보행로를 따라 진행하고~

이후 좌측 아래로 '대우조선'을 보내고, 우측 위로 비스듬히 오르는 보행로를 지나

'거제대로' 변으로 올라서서, '거제대로' 좌측으로 별도로 구획한 보행로를 따라 진행이다.

(15:10) 우측 도로 건너편으로 '거제소방서 장승포 119 안전센터' 안내판을 지나고~

이즈음에서 '거제시 아주동'에서 '거제시 장승포동'으로 행정계가 바뀐다.

장승포동(長承浦洞)

경남 거제시에 있는 동으로 면적 2.15㎢ 이다.

장승포만에 면해 있고, 북쪽은 옥포만에 접해 있다.

해안 여러 곳에는 천연의 암벽이 발달하여 절경을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거제군 이운면(二運面)이었는데,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면서 통영군에 속하였다.

1935년에 이운면이 장승포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53년에 다시 거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장승포읍이 시(市)로 승격함에 따라 장승포리가 장승포동이 되었다.

1995년 1월에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태(都農複合形態)의

거제시가 됨으로써 거제시에 속하였다.

행정동인 장승포동은 법정동인 장승포동 일부와 두모동 일부를 관할한다.

구촌(舊村)마을은 장승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신부동(新富洞)마을은 일본 입좌촌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새로운 부자들이 모여살았다고 신부동이라 불렀다.

그리고 중앙마을, 두모고개 아래 장승포항구에 있는 장승마을이 있다.

거제대학교, 시립도서관, 충혼탑, 농산물공판장, 옥포대우병원, 장승포등대 등이 있고,

1966년 4월에 개항한 장승포항이 있다.

주요 도로는 14번 국도가 거제대교를 거쳐 장승포동까지 해변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1018번 지방도가 지난다.

(15:17) '장승포'로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하는 아치형 조형물 밑을 지나고~

도로 갈림길에서 바로 가도 되지만, 안전을 위해

좌측 구.도로로 되어있는 길 안내를 따라 들어서고~

'GS 대동주유소' 앞을 지나 앞쪽 도로변으로 나가는데

'두모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5:22) 배 형상 조형물이 있는 '두모고개'로 오르고~

(15:23) '두모 교차로' 도착이다.

이곳에서 이제까지 진행해온 '거제대로'와 빠이빠이하고,

좌측 '능포로'를 따라 좌측으로 '거제 문화원'을 보면서 진행이다.

 

 

 

정면으로 온누리빌 건물을 보면서 진행하는데,

우측 도로 건너편으로 '장승포항'이 조망되고~

(15:28) 보행로 좌측 편에 장승포 산사태로 사망한 70명 주민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장승포 산사태는 1963년 6월 24일부터 25일 오전까지 500㎜의 폭우가 내리면서

25일 오전 8시 5분께 거제시 장승포동 굴세미골 인근에서 토사가 무너져

주민 61명과 경찰관 9명이 깔려 숨진 사고다.

추모비에는 당시 산사태의 아픔을 노래한 가수 이미자의 ‘한 많은 장승포’ 가사와

원순련 시인의 추모 글, 사고 경위, 사망자 명단이 새겨졌다.

(1963년 6월달이면 내가 태어나기 두달전의 일이다.)

(15:30) '자이언트장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우측 도로 건너편으로 '장승포항' 방향을 바라보고~

(15:34) 좌측으로 '장승포 119 안전센터'를 지난다.

'장승포 KT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이즈음에서 '거제시 장승포동'에서 '거제시 능포동'으로 행정계가 바뀐다.

거제시 능포동(菱浦洞)

경남 거제시에 있는 동으로 면적 3.21㎢ 이다.

동쪽은 동해에 면해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남쪽에 나지막한 방산(220m)이 있어 바다와 더 좋은 조화를 이루고,

북쪽은 능포항에 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제군 이운면(二運面)이었는데, 1914년에 용남군과 통합되면서 통영군에 속하였다.

1935년에 이운면이 장승포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53년에 다시 거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에 장승포읍이 시(市)로 승격함에 따라 능포리가 능포동이 되었다.

1995년 1월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하여 도농복합형태(都農複合形態)의 거제시가 됨으로써

거제시에 속하는 동(洞)이 되었다.

행정동인 능포동은 법정동인 능포동과 두모동 일부를 관할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양지암이 있고, 한국통신전화국, 시외버스터미널, 미화백화점, 안성의원,

옥성사 등이 있으며,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다.

주요 도로는 14번 국도가 거제대로를 거쳐 마전동까지 해변을 따라서 이어져 있으며,

1018번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부산항과의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능포동의 자연마을로는 능포마을, 양달마을, 음달마을, 옥명마을, 옥수동마을이 있다.

능개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 3대 어장인 능포정치망이 이곳에 있다.

옥명마을은 옥명포(玉鳴浦)라고 불렀다가 울 명(鳴)자를 밝을 명(明)으로 변경하였다.

옥수동은 대우 옥포조선소가 설립되면서 옥명마을에서 분리하여 옥수라고 불렀다.

(15:39) '문화상가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5:40) '장승포 시외버스터미널' 전 사거리교차로인데,

좌측으로 '옥수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도로 건너기전 CU 편의점' 앞 곡각지에 남파랑길 이정표

(←능포 봉수대 1.32km, ↓거제 문화원 1.15km)와 함께 '거제 20코스 개략도'가 붙어있고~

맞은편 '휴대폰 할인마트' 앞 전신주 기둥에

'남파랑길 20코스 시작점' 사각 패널이 붙어있다.

(15:42) 남파랑길 20코스 안내도

남파랑길 20코스 안내도는 '남파랑길 20코스 시작점' 사각 패널 앞

'장승포 시외버스터미널'과의 사이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오늘도 목표했던 남파랑길 19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두루누비&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거제 19코스를 종료하고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답사 마무리를 한다.

이후 부산行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 버스정류장에서 16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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