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3.4.22
코스: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일대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해파랑길 양양~속초 44구간 진행중 해파랑길에서 벗어나있는 '낙산사'를
주마간산 식으로 둘러 본 내용을 정리한다.
(06:20) '낙산사' 공영주차장에서 '낙산사로' 도로를 따라
후문 매표소 방향으로 진행하고~
(06:21) '낙산 전진마을 성황당' 앞을 지난다.
낙산 전진마을 성황당이 있는 이 마을은 1896년(고종 33)에 양양군 사현면에 속해 있었으며,
앞 나리(앞 나루의 변한 발음)라 불리다가 앞 나루를 한문으로 표기해 전진(前津)리가 되었다.
낙산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다.
풍어·풍농과 무시고, 마을의 안녕과 지역 발전을 기원하며 마을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1953년 지었다.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마을과 지역 발전을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
(06:23) 낙산비치호텔 갈림길을 지나고~
(06:25) 매표소에서 무인발급기로 입장권을 끊고(입장료 4,000원),
'낙산사' 경내로 들어간다.
기념품과 차를 판매하는 '낙산다래헌' 건물을 지나고~
(아직 영업전이다.)
'의상 기념관' 역시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의상(義湘) 기념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는 한국 불교를 크게 빛낸 신라의 대표적 고승이며
이 땅에 화엄 사상의 토대를 굳건히 세운 화엄종의 개조(開祖)이다.
2001년 건립한 의상 기념관에는 의상 대사의 얼굴을 그린 진영(眞影), 일대기를
재현한 8폭 불화, 저술의 핵심인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 발원문을 담은 10폭 병풍,
각종 서적과 논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2005년 양양 산불로 전소된 낙산사 전각을 복원하기 위해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벌인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를 망라한 토기, 청자, 백자,
기와, 철편, 상평통보 등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낙산사와 의상대사'
강원도 양양의 해변가 오봉산 낙산사에서는 아늑한 토담 담장 속에 법당이 있고,
동해를 굽어보는 해수관음의 자비로운 미소가 있다.
그리고 의상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도 있고, 홍련암에 앉아 관음굴에서
울리는 파도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 도량에는 언제나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손길이 있다.
그러므로 관음의 진신이 상주하는 도량 낙산사다.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 문하에서 화엄교학을 공부한 의상대사가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귀국 후 의상대사는 낙산의 관음굴을 찾았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낙산사의 창건 연기 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한다.
이 책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조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상대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 한 것이다.
의상은 굴 입구에서 재계(齋戒)한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우자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 삼가 예를 올림에
공중에서 수정 염주 한 벌을 주어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또한 동해 용이 여의보주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것도 받고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여기에 금당(金堂)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의상대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여인으로 변한 관음이 월수백(생리대)을 빨던 물을 마시라고 건네자
이를 더럽다고 엎질러 버렸는데 그러자 파랑새 한 마리가 “제호(일종의 감로수)를
거절한 승려여!” 하고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원효가 관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승려가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하였는데,
해로하기 50여 년 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하였다.
(06:28) '낙산사 관음지'와 '의상대'로 갈라지는 갈림길 계단에
어느 길로 갈지를 묻는 듯,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글귀가 시선을 끈다.
(06:29) 의상대(義湘臺)
의상대(義湘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671년( 문무왕 11) 낙산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서
좌선(坐禪)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1925년 당시 주지 만옹스님이 건립하였고 만해스님 한용운이 의상대기를 지었다.
이후 수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2009년 9월 해체 복원하였다.
육각형의 정자로 이(二) 익공(翼工, 공포의 구조 형식인 주심포, 다포, 익공계의
세 가지 형식 중 가장 간결하게 꾸며진 형식) 양식의 공포(栱包/貢包,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에 겹처마 모임지붕으로 상부에
화강암 절병통(節甁桶, 지붕마루 가운데에 세우는 기와로 된 항아리 모양의 장식)을 올렸다.
주변의 해송과 암벽 그리고 동해바다가 어우러진 동해안의 대표적인 해안 정자로
의상대에서 맞는 일출경(日出景)은 낙산사의 백미(白眉)이다.
의상대 해돋이 -조종현-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
(네이버 이미지에서 빌려온 사진)
'의상대'에서 '홍련암' 바라보고~
(06:32) '낙산사 홍련암 감로수'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의 원효대사가 낙산사를 참배하기 위해 오다가 보니
흰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대사가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익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대사가 다시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속옷을 빨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 물을 청했는데,
여인은 빨래를 발던 더러운 물을 떠 주었다.
원효가 그 물을 버리자 이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스님은 가지 마십시오」하고는 숨어버렸다.
원효가 돌아보니 그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 짝이 남아 있었는데,
절에 와서 보니 나머지 짚신 한짝이 관음상 앞에 있었다.
비로소 원효는 앞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한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고 그 우물을 오봉산 정상 넘어에서 찾아내어
우성건설 최승진 거사의 시주를 받아 이 자리와 낙산사 원통보전 앞에 흘러넘치게 하였다.
그런데, 홍련암의 석간수는 원효(元曉)가 양양의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안내 표지석에는 다르게 적고 있다.
'홍련암'으로 가는도중 '포토존'에서 바라본 '홍련암'
(06:36) '낙산사 홍련암'
홍련암(紅蓮庵)
낙산사의 부속 암자로 의상대(義湘臺)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佛殿)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紅蓮)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의상에게 여의주(如意珠)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와 같이 지었다고 한다.
신라 및 고려 시대의 중창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수차례
중수하였는데, 현재의 홍련암은 1975년 원철(園哲)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현재 홍련암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고,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채가 있다.
사리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낙산사를 모조리 불태운 화마가 홍련암 직전까지 덮쳤는데, 1m 앞에서
갑자기 불길이 멈췄다고 하여 홍련암은 성지로서의 지위가 더욱 탄탄해졌다.
'홍련암'에서 '의상대' 바라보고~
의상대(義湘臺) -취미수초(翠微守初)선사(1590~1668)-
의벽천년수(倚壁千年樹) 절벽에 기대인 저 천 년의 나무
능허백척대(凌虛百尺臺) 허공에 우뚝 솟은 저 백 척의 대여
신승거무적(神僧去無跡) 신승은 가고 없으니
운외학배회(雲外鶴徘徊) 구름 밖에서 학이 배회하네
이후 '의상대'로 갈라지는 갈림길로 되돌아 나온후,
'낙산사 관음지'로 진행이다.
(06:42) '낙산사 관음지 관세음보살상'
낙산사 길 (길에서 길을 묻다)
(06:43) '낙산사 보타락'
(06:44) '낙산사 지장전'
(06:45) '낙산사 보타전'
낙산사 보타전
원통보전,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우리나라 대표적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불전이다.
불전 내부에는 천수, 성, 십일면, 여의륜, 마두, 준제, 불공견색의 7관음과
32응신, 1500관음상을 봉안하였다.
낙산사 경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전으로 설악산 신흥사 조실 무산 오현스님의 원력과
당시 주지를 지낸 지홍, 보산, 마근스님에 의해 1991년 7월에 불사를 시작하여
1993년 4월10일에 완공하였으며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팔각지붕으로 되어있다.
배산임수의 지형덕으로 지난 2005년 4월 발생한 양양 대형산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전각 외부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를 그린것이다.
보타전 앞에는 누각 형태의 보타락이 있으며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해수관음상'을 향한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06:49) '낙산사 관음전'
'해수관음상' 앞쪽 낮은 곳에 위치한 '관음전'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처럼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북쪽으로 난 창을 통해서 보이는 '해수관음상'이 '관음전'의 불상인 셈이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해수관음상
낙산사 성보 가운데 일반일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것이 해수관음상이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빠짐없이 들려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해수관음상은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만인 1977년 11월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넓이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
양옆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위의 활짝핀 연꽃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을 받혀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을 짓고있다.
이 해수관음상은 당시 주지 원철스님이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 700여 톤을 운반해와 300여 톤을 깎아내고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해수관음상 둘레에 조성된 108 법률석은 2005년 대형산불 이후 불법이 더욱
번창하여 중생의 번뇌를 깨달음으로 성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전 종각
'낙산항' 방파제와 '낙산해수욕장' 바라보고~
되돌아 내려와 '낙산사 원통보전'으로 참배하러 간다.
(07:01) '낙산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찰을 지키면서 사부대중을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3칸 규모의 내부에는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치국천왕, 장검을 들고있는 남방증장천왕,
용을 잡고있는 서방광목천왕, 보탑과 창을 들고있는 북방다문천왕이 있다.
1914년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의 개금이 이루어졌었고, 1988년에 보수하였으며,
2010년에 다시 문의 중수와 사천왕상을 개금하였다.
1950년 6.25전쟁과 2005년 양양산불의 재난속에서도 이 문과 사천왕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천왕문'부터가 본격적인 원통보전(圓通寶殿) 구역이다.
원통보전 구역에는 원통보전을 비롯해서 사천왕문(四天王門), 범종루(梵鐘樓), 빈일루(賓日樓),
응향각(凝香閣), 설선당(說禪堂), 정취전(正趣殿), 근행당(勤行堂), 송월요(送月寮)와 심검당(尋劍堂),
선열당(禪悅堂), 취숙헌(聚宿軒) 등이 있다.
'낙산사 범종루(梵鐘樓)'
현재 이곳에 걸려 있는 범종은 2006년 10월 문화재청이 복원한 것이다.
예전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은 1469년 예종(睿宗)이
부왕 세조(世祖)를 기리기 위해 보시한 종이다.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였을 때 퇴락한 절의 중창을 명하였다.
그런데 그 동종은 2005년 4월 5일 산불로 녹아내려 보물 지정이 해제되고 말았다.
낙산사 동종(洛山寺 銅鐘)
낙산사는 671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의상대와 홍련암에서 기도 정진하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한 후 창건한 사찰로, 동아시아 최초로 건립된
상주(常住) 도량(道場)이다.
이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중창을 한 이래 2005년 산불로 낙산사 도량의 대부분이
소실될 때까지 모두 다석 차례의 소실과 중창 복원을 반복하였다.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은 조선시대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낙산사가 중창이 시작된 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睿宗)의
명에 의해 주조되었다.
2005년 4월 5일 양양지역을 휩쓴 대형 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될 당시 소실·용해되어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
동종의 복원은 문화재청이 관계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성종사(聖鐘社)에 의뢰해 이루어졌다.
복원된 동종은 2006년 10월 16일 낙산사 보타락에 임시 봉안하였다가 사천왕문 옆의
범종루가 완성된 후 이전·봉안하였다.
'낙산사 빈일루(賓日樓)'
빈일루(賓日樓)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하면 1800년 후반과 1900년도 초에 두번에 걸쳐 중수한 기록이 나온다.
이번에 새로지은 빈일루는 조선 제22대 정조가 단원 김홍도에게 특명을 내려 제작한 그림첩인
'금강사군첩'에 나온 '낙산사도'를 기반으로 낙산사 회주 정념스님께서 지으신 전통건물이다.
현판은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지관 큰스님께서 쓰셨고, 현판서각은 문화재서각장인
고원 김각한 거사의 작품이다.
잔각의 단청은 단청장 이승만 거사의 솜씨인데, 근래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전각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단청을 자랑한다.
전각은 정면 3칸, 옆면 3칸으로 16개 기둥을 세웠는데, 그중 4개의 기둥은 이번 2005년에 불탄
낙산사의 거목을 손질해서 세웠다.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는데, 전돌은 전통적으로 궁궐과 대찰수준의 전각에만 시설할수 있는 재료이다.
누각의 정면은 팔각지붕이며, 후면은 응향각과 비례를 맞추기위해 맞배지붕을 지었다.
2층 누각에는 바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디자인이 되어있다.
2층 단청과 문양은 청학과 비천상, 용왕(바다에 사는 동해용왕으로써 관세음보살님의 우보처이시다.)
등의 문양이며, 특히 정면에는 비천상이 난초화분과 붓, 서책을 들고있는 문양을 넣었는데
전국의 사찰 가운데에서 유일한 문양이다.
'낙산사 응향각(凝香閣)'
응향각(凝香閣)
행랑채와 같은 독특한 형태이다.
‘凝香閣’은 '향기가 한 군데로 모이는 집' 이라는 뜻으로
스님들의 선방(禪房)을 표현한 이름이라고 한다.
'낙산사 설선당(說禪堂)'
'낙산사 정취전(正趣殿)'
'원통보전 꽃담과 낙산사 대성문(大聖門)'
또 하나의 대문 대성문(大聖門)을 지나야 비로소 원통보전이다.
'大聖'이라는 명칭에 유교적인 느낌이 풍기고 하거니와 구중궁궐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엄중하다.
대성문 좌우의 원장(垣墻)이 매우 정갈하여 인상적이다.
'낙산사 원통보전 칠층석탑'
2005년 4월 5일 산불이 낙산사를 덮치면서 낙산사7층석탑도 깨지고
갈라지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선 세조 때 낙산사 중창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당시 낙산사 중창은
왕실 차원에서 각종 물자를 조달하여 1468년에 완성되었다.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중창할 때 높이 6.2m의 7층석탑으로 조성했는데,
이때 탑 속에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봉안했다고 한다.
(07:06)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圓通寶殿)
낙산사의 중심법당이며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원통보전이다.
「양주기밀지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蹟)」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
즉, 원통보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창건 당시부터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이었다는 말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 팔작지붕 전각을 복원에는 양양 지역의 소나무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원통보전에 독존(獨尊)으로 봉안하고 있는 건칠관세음보살좌상(襄陽洛山寺乾漆觀音菩薩坐像)
(당시 촬영한 사진이 흔들려 네이버 이미지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2005년 화재 당시 정념(금곡)스님은 원통보전이 무사하지 못한 것임을 직감하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이 불상을 지하의 빈 공간으로 무사히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날의 대화재는 정념스님이 낙산사 주지로 부임한지 불과 보름만에 맞은 날벼락이었다.
그런데 저 관음상에는 ' 조신의 설화(調信說話)'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경주 세달사라는 절의 승려였던 조신(調信)은 강릉에 있는 절의 장원을 돌보는
직책에 임명되어 낙산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명주태수(溟州太守) 김흔(金昕)의 딸을 보고 반하여 낙산사 관음상 앞에서
사랑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였다.
수년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으나 결국 다른 사람에게로 혼처가 정해지자,
관음상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원망하다가 잠이 들었다.
뜻밖에 그 여인이 함께 살기 위해 왔다고 하여 조신은 기뻐하며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살림을 시작했다.
40여 년 깊은 정을 나누는 동안 5남매를 거느리게 되었으나 가난으로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10년간 걸식을 하게 되었다.
큰아들이 굶어죽자 명주 해현령에 묻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만난 지 50여년만에 고통스럽게 서로 헤어지려고 하다가
깨어 보니 한바탕 허무한 꿈이었다.
조신은 관음상 앞에 참회하고 해현령에 묻은 아이를 파보니 미륵석상(彌勒石像)이 나왔다.
미륵상을 근처의 절에 모신 조신은 출가하여 정토사를 짓고 불도에 정진했다고 한다.
꿈을 통해 애욕의 무상함을 깨우친 조신의 이야기는 이광수에 의해
소설 「꿈」으로 꾸며졌고,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낙산사 원장(洛山寺 垣墻)'
낙산사 원장(洛山寺 垣墻)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
원통보전 둘레를 사각으로 에워싸고 있는 흙담을 '낙산사 원장(洛山寺 垣墻)'이라 부른다.
조선 세조의 명으로 낙산사를 중창할 때 처음으로 이 담장을 지었다는데,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하였다고 한다.
높이는 3.7m, 길이는 220m이다.
법당을 향하고 있는 담장 안쪽의 담벽은 기와로 쌓고, 담장 바깥쪽의 담벽은 막돌로 쌓았다.
담장 안쪽 담벽의 밑부분은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한층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 암키와)를 차례로 쌓아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하여 벽면을 멋스럽게 장식하였다.
담장 바깥쪽의 벽면은 막돌로 벽면을 고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회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에는 기와로 지붕을 덮어 담벽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과 기와와 흙으로 높고 반듯하게 쌓은 이 담장은 매우 아름다운 조형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 담장은 원통보전 구역을 신성한 지역으로 구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2005년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당시 낙산사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 누각,
홍련암 영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2015년 현재 화재로 손실된 사찰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복원되었고,
보물 동종도 복원되었고 주변 숲은 회복 중에 있다.
(07:12) '낙산사 홍예문(虹霓門)'
홍예문(虹霓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
1466년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했을 때 세운 석문(石門)이다.
당시 세조의 뜻에 따라 강원도 26개 고을의 수령이 하나씩 보낸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의 기단부(基壇部)는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뒤 두 줄로 쌓아
무지개 모양의 문을 만들었다.
문의 좌우에는 돌로 벽을 쌓아 사찰의 경내와 밖을 구분하였다.
1962년에 홍예문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門樓)는
2005년의 산불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문루는 2006년 12월에
복원 개통하였다고 한다.
예전 언제인지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처음 낙산사를 구경할때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저 낙산사 홍예문(虹霓門)이다.
성곽(城廓)에서나 볼 수 있는 홍예문이 사찰에 있다니 하고??? ㅎ~
'낙산사 취숙헌(聚宿軒)'
충전이 필요할 때, 심신이 지쳤을 때,
낙산사 템플스테이는 좋은 쉼표가 된다.
프로그램은 휴식형과 체험형으로 나뉘며, 외국인도 신청할 수 있다.
낙산사는 입장객에게 무료로 공양 국수를 대접한다.
공양시간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낙산사 탐방 중 출출함을 해결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라.
이후 (07:18) 후문 매표소를 지나, 해파랑길 진행 도중에 스톱한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낙산항' 방파제 바라보고~
그렇게 '낙산사' 탐방후 (07:27) 낙산사 갈림길로 되돌아나오고,
'낙산사'를 탐방하느라 1시간10분이 지체되었다.
다시 해파랑길 44구간 출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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