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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래길

남해바래길 14코스

답사일자: 2023.9.9

코스: 새남해농협.중현지소(시점)-중현마을.표지석-우물마을.버스정류장-백년곡고개

-백련암지-선원마을회관-고현면사무소-관세음길입구-이순신순국공원-월곡항-감암마을회관

-노량대교.아래-남해대교.아래-유람선매표소/남해바래길 14코스(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7.95km (남해바래길기준 16.6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5시간

▶ 갈때 : 경남 양산.내송집에서 양산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사상역에서 하차후, 사상 서부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사상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해行 시외버스를 타고 (08:18) 남해공용터미널에 하차,

남해공용터미널에서 (08:30) 출발하는 대곡行 군내버스를 타고

(09:15) 중현리 회룡 버스정류장에 하차, 시점까지 도보 이동

▶ 올때 : 남파랑길 남해46코스 진행중에 남해바래길 14코스(이순신호국길)를 마치고,

남해바래길 지선2코스 (노량바래길)을 이어간다.

개통 10주년을 맞아 2020년 새롭게 리모델링 된 '남해바래길2.0'은

총 231km로 본선 16개 코스와 지선 4개 코스, 섬 지선 2개 코스,

테마 지선 2개 코스로 구성되었다.

본선 코스는 섬 전체를 연결하는 순환형 종주길로 11개 코스가

남해안 전체를 잇는 '남파랑길' 90개 코스 중 36~46코스와 노선이 일치된다.

지선 코스는 코스별로 원점회귀가 가능한 단거리 순환형 걷기여행길로

자가용 이용이 편하게 구성되었다.

남해 바래길 14코스 이순신호국길 [남해 바래길 홈페이지]

▶ 총거리 : 16.6km

▶ 걷는시간 : 약 6시간 내외(쉬는 시간 포함)

▶ 난이도 : ★★★☆☆(무난해요)

▶ 걷는경로(단위 km) : 중현농협(하나로마트)←2.3→우물←2.1→백년고개←2.5→고현면행정복지센터 ←3.6→이순신순국공원←3.4→월곡←2.7→노량선착장

​▶ 코스개요 : 이순신호국길은 중현농협(하나로마트)에서 시작한다.

바다와 떨어져 목가적인 느낌이 물씬한 마을길과 숲길을 따라 걷는 구간을 꽤 지난다.

소나무가 울창한 백년고개를 넘어가면 정자나무가 아름다운 포상마을을 지나 고현면소재지에 닿는다.

이후 길은 다시 바다와 만나 이순신장군 전몰지인 관음포를 향한다.

이순신순국공원부터는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육지로 올라와 노량 충렬사까지

운구되었던 이야기가 깃든 길을 따라 노량 선착장까지 걷는다.

이 길의 종착점인 노량 유람선 선착장은 충렬사를 경유하여 3km 정도를 원점 회귀하는

지선 2코스 노량바래길의 시종점이기도 하다.

(09:15) '중현리 회룡 버스정류장'

서면 중현리(中峴里)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에 있는 리(里)이다.

용두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나온 줄기 밑에 자리하고 있는 농촌 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 우물천이 흐르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샘들이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로 도산리, 양지, 음지 마을이 있다.

도산리 마을은 중현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 마을은 양지에 자리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 마을은 음지에 위치한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현촌 마을은 중현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남해농협 중현 하나로마트'

'중현리 보건진료소' 입구 우측에 있는

남파랑길 남해 46코스 안내판 앞이 남해바래길 13코스 종점이자 14코스 시점이다.

두루누비&남해바래길&트랭글 앱 켜고

(09:20) 남해바래길 14코스 시작이다.

우측으로 '중현떡집'을 지나고~

(09:21) '회룡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회룡이란 마을 이름은 망운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이 마치 용이 꿈틀대며 승천하듯

마을 쪽으로 휘감아 돌아 들어왔다 하여 '골용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말로 '회룡'이라 하였다.

마을회관 앞에는 말채나무, 모과나무, 느티나무가 울창한 잎들이 덕석만 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음력 10월 열흘날 동제를 올리는 정자나무이자 당산나무다.

곡예사가 묘기를 부리듯 몸체를 둘둘 감아올라간 말채나무는 가지가 말채찍으로 쓰이는

보기 드문 귀한 나무라 특히 주민들이 애지중지한다.

둥글이 한 아름 넘는 300여 년 된 모과나무는 아직도 모과를 주렁주렁 매단다.

이 정자나무들이 양지땀, 음지땀, 시장통, 윗마을, 아랫마을 등 다섯땀 주민들의 마음속 수호신이다.

유자의 고장 남해, 그중에서도 회룡마을 유자는 향이 좋기로 소문나 있는데,

대개가 실생목이기 때문이다.

'회룡마을회관' 앞 좌측의 정자나무를 바라보고~

이후 좌측으로 '화방로' 도로를 바라보면서,

'남서대로2618번길' 마을 골목길을 따라 길게 올라서서 진행이다.

(09:25) 좌측으로 오래된 마을 공동우물을 지나고~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며 마을길을 가로지르는데,

우측 전답의 모습은 잡초와 덩굴이 우거져 오랜기간 묵혀지고 있는 모양새다.

지나온 '회룡마을' 뒤돌아보고~

(09:34) '화방로' 도로를 만나고,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중현마을'로 들어간다.

갈림길 입구에는 남파랑길 이정표(←남해농협 중현지소 1.0km, 우물 1.2km→)와

'雲谷祀 입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화방로'는 '회룡삼거리'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남해도'를 가르며 '대곡리'를 거쳐서

'고현면 이어리'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망운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한 화방사 덕택에 이름을 얻은 모양이다.

'화방사'는 '호구산의 용문사', '금산의 보리암'과 함께 '남해군'의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사찰 인근에 천연기념물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다.

(09:36) '중현마을' 표지석 좌측 아래로 내려서고~

중현(中峴)마을은 지금부터 약 600년 전에 정씨(鄭氏) 일가가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씨족이 번창하여 큰등, 작은등에 걸쳐 살게 되었고,

국가 벼슬 가선대부(嘉善大夫) 및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선조들에 의해

'중계'라고 불리다가, 1945년 행정개편으로 중현(中峴)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좌수(座首)가 거주하면서 서당(書堂) 겸 제각(祭閣)으로 건립한 운곡사는

인근 마을 유일했던 한학교육장으로 현재 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09:37) 우측으로 '남해 운곡사'를 바라보면서 진행하고~

남해 운곡사(雲谷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 ~ 1547)를 배향한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군 이동면 초곡리에서 출생하여, 17세에 경상남도 남해에서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자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정희보는 조선 성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교육에 전념한 삼남[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방의 대학자로,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영남·호남 선비의 절반이

정희보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되고 있다.

운곡사는 철종 4년(1853)에 세운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허물었다가 1874년(고종 11)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네모꼴의 처마에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팔작지붕 형식이다.

(09:40) '중현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이후 남파랑길 빨간 화살표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중현마을' 안길을 지나고~

(09:44) 남파랑길 이정표(←우물 0.6km)를 지난다.

이후 '화방로492번길'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정포천'을 끼고 내려서다,

'정포천'을 건너 '정포리'로 들어서서 '우물마을'을 향해 진행하고~

서면 정포리(井浦里)

남해군 서면의 서쪽으로 바로 남해와 접해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 정포, 우물, 웃골마을이 있다.

정포마을은 큰 우물 4개가 있고, 앞에 바다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물 마을은 마을 안에 우물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고,

웃골 마을은 정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09:49) 특이한 형태의 '태양광 발전소'를 지나고~

이른바 '영농형 태양광 발전소'인데, 태양광 모듈을 작게 만들어서 상부에서는

발전을 하고 하부에서는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계화된 농업에 맞게 농기계 작업이 원활하게 만들었다.

식물들은 매일 광합성에 필요한 햇빛이 채워지면 더 이상 광합성을 하지 않음에 착안한 것이라 한다.

아무튼 실제로 이런 논에서 벼를 재배해 보니 기존 대비 80% 정도의 수확량을 보였다고 한다.

설치비와 관리를 최적화하는 노력이 있다면 대단위 평야 지대가 대단위 태양광 발전소로

변모할 날이 곧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09:51) '우물 버스정류장' 앞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우물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 세워져 있는 '공덕비'는 마을 발전에 기여한 공을 한

'반 순애' 여사의 공덕을 기려 마을주민들이 세운 '공덕비'이다.

우측의 '우물마을' 안길로 진행이다.

우물마을에는 여름이면 차갑고 겨울이면 김이 나는 마을 이름값하는 참샘이 하나 있다.

이 샘에서 물을 마시고 동쪽으로 고개를 들면 삼봉산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이 마을에는 현촌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삼봉산 기슭에 커다란 돌무덤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 굶주림 때문에 부모를 버렸다는 고려장 터이다.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자란 이 마을 사람들은 효도하기에

소홀함이 없으며, 삼봉산 고려장 터는 효를 가르치는 산 교육장이다.

그러나 고려장(高麗葬)은 사실이 아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어디에도 늙은 부모를 산속에 버리는 장례 풍습은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않아 징역 2년에 처한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효자·효녀와 80세 이상 노인에게 잔치를 베풀고 선물까지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고려장은 고대 일본의 풍습으로, 에도 시대에 '우바스테야마(姥捨山)'라고 해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풍속이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다만 고려장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일제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 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이후 빨간색 남파랑길 화살표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우물마을'을 벗어나고~

지나온 '중현마을' 바라보고~

(10:02) 남파랑길 이정표(백년곡고개 1.2km→)를 지나

계속 급경사 임도 오르막길을 따라 진행이다.

지나온 '우물마을' 바라보고~

(10:04) 잘 정리된 황토밭을 지나는데, 바다 너머로

'여수 GS칼텍스 원유부두'가 조망되고~

그렇게 급경사의 임도 오르막길은 계속되는데,

두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10:08) 잘 정비된 평장묘지를 지나는데,

좌측으로 여수 GS칼텍스 원유 부두와 우측 광양항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조망되고~

(10:09) 완만한 오르막길이 한풀 꺾이는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도마'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진행이다.

(10:10) 이동통신 중계탑 옆을 지나

계속 '삼봉산' 산자락 임도를 따라 오르는데~

가야 할 북쪽 방면 '사학산' 너머로 '노량대교'의 양쪽 주탑 꼭대기가 살짝 보이는데,

와우!!! 드디어 남해도의 북쪽 끝자락이 조망되는 장면이다.

(10:12) 남파랑길 시종점 표지판(종점 13.99km)을 지나면서,

다시 또 임도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10:22) 네 갈래로 길이 갈리는 '백년곡고개'에 올라서고,

우측 그늘진곳에 배낭을 내리고 물 한잔하며 6분 쉬었다가 간다.

휴식후 올라온 방향에서 직진방향의 임도로 내려서는데,

좌측위로는 공동묘지다.

그렇게 '백년곡고개'를 넘어서면 지금까지 이어온 '서면 정포리'에서

'고현면 포상리'로 행정구역이 바뀌게 된다.

남해군 고현면(古縣面)

남해군의 북쪽 중앙 내륙에 있는 면이다.

북쪽으로 설천면(雪川面), 남쪽으로 서면(西面)·남해읍, 동쪽으로 설천면에 접하면서

바다 건너 창선면 (昌善面)을 마주보며, 서쪽으로 광양만(光陽灣)에 면한다.

9 법정리 (갈화리, 남치리, 대곡리, 대사리, 도마리, 오곡리, 이어리, 차면리, 포상리)

24행정리로 이루어져 있고, 면 소재지는 대사리에 위치한다.

687년(신라 신문왕 7)에 남해도를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 부르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남해군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고현면 관당, 설천면 비란 등지에 남아 있는 성산성 등의 유허를 통해

전야산군 설치 당시부터 고현면이 도읍지였던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료에는 『여지도서』에 고현면이 "관문에서 십 리에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신구대조』에도 고현면과 아홉 개 리가 수록되었다.

고지도에는 『해동지도』에서 녹두산과 함께 고현면이 기재되어 있는데,

『동여도』에는 고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부와 남부는 해발고도 300∼500m의 산지이고, 중앙부는 대사천(大寺川)·

대곡천(大谷川) 등 소하천 유역의 평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외에 콩이 많이 난다.

남해읍으로 통하는 국도가 남북으로 달리며, 남해대교를 거쳐 육지와 연결된다.

천연기념물 제152호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대곡리에 있고,

팔꽃나무와 낙엽관목수가 많이 분포한다.

문화재로는 관음포(觀音浦) 이충무공 전몰유허(戰歿遺墟:사적 232),

정지석탑(鄭地石塔:경남문화재자료 42), 고현성(古縣城:경남기념물 46), 남해 도요지(陶窯址),

화방사 보광전(花芳寺普光殿), 정지장군 승첩석탑(鄭地將軍勝捷石塔), 이낙사(李落祠),

이충무공 유허비(遺墟碑) ·묘비(廟碑), 도마리 조개무지[都馬里貝塚] 등이 있다.

고현면 포상리(浦上里)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 있는 리(里)이다.

망운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지대가 평탄하지 않아 농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

남쪽으로 접해 있는 남해를 통해 약간의 어업이 행해지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포상, 선원, 언뚝 마을이 있다.

포상 마을은 바다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선원 마을은 옛날에 선원사가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언뚝 마을은 간척 사업으로 천동까지 둑을 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33) 좌측으로 습지지역을 지나면서,

'물봉선' 군락지를 지나고~

그렇게 좌측의 '사학산' 산허리를 감아 내려서는 '백년골' 임도를 따라

길게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창선도'가 가늠되고~

바로 아래쪽에 있는 것은 '백년골 선원저수지'이고,

그 뒤로 보이는 바다는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바다이다.

'남해군 남파랑길'의 시작점이었던 '창선도'와는 이렇게 이별이다.

(10:41) 좌측으로 '남해 고려대장경' 판각 추정지인

'백련암지' 설명 패널을 지나면서~

남해 전 백련암지(南海 傳 白蓮庵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286호로)

사학산 동쪽 기슭에 있는 고려 시대 절터다.

윗단과 아랫단으로 구분되며 법당으로 추정되는 윗단의 건물 터에는 온돌 시설,

아랫단 입구에는 계단이 발굴되었다.

이 절터에서 '장명원시납은병일구이태서(長命願施納銀甁壹口李台瑞,

이태서가 장수를 기원하면서 은병 하나를 시주합니다)'라고 쓰여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은병이 고려 시대 상류사회에서 제한적으로 유통되었던 화폐라는 점에서

절을 지은 시기와 성격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절터는 선원마을에 있는 남해 전 선원사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두 유적에서 같은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고, 남아 있는 터의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찰의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편 전 선원사지는 고려대장경 판각기에 해당하는 출토품과 더불어 자재 이동을

쉽게 하기 위한 용도로 고쳐 지은 정황이 확인되어, 유력한 고려대장경 판각지로 주목하고 있다.

좌측으로 잠시 올라보니 '다랭이밭'만 보인다.

(10:47) 우측으로 출입방지 펜스가 쳐진 임도를 따라 내려서는데,

우측으로는 '백년골 선원저수지'가 위치하고~

(10:50) 그렇게 내려서면 '선원마을'과

'포상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10:54) 정면으로 '선원소류지'를 보면서 '선원마을'로 내려서서,

대형 저수조 옆을 지나고~

(10:55) 남파랑길 시종점 표지판(종점 11.57km)을 지나고,

그렇게 내려서다 좌측 위로 '선죽재'를 바라보고~

'삼봉로209번길'을 따라 '선원마을' 안으로 진행하고~

(10:59) 좌측으로 '선원회관'을 바라보면서 진행이다.

선원(仙源)마을은 조선 철종 때(1850년대) 포상부락과 분동되면서,

마을에 선원사라는 고찰이 있었다 하여 그 고찰 이름을 따서 선원이라 부르고 있다.

특히 백련(百蓮)골과 선원사지에서 팔만대장경 판각(板刻) 흔적이 있어

KBS에서 현지 조사를 할 만큼 유서 깊은 마을이다.

(11:00)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고현공설시장' 방향으로 진행하고~

(11:02) '포상마을'로 들어서서, '포상 정자나무'와

'천년정(千年亭)' 쉼터 정자를 지난다.

포상(浦上)마을은 신라 신문왕 때 '개뫼'라 하다가 고려 때 개상(介上)으로 불리었다.

조선 태종 때 고현면 개칭과 함께 포구의 위쪽에 있다 하여 '포상(浦上)'이라 부르게 되었다.

포상 정자는 조선 태종 때 '포상천년정'이라 부르다가 1914년 '포상 정자'로 개칭하였고,

1946년 정자나무를 식수하면서 '포상 정자나무'라 불렀고, 1957년 두 주를 더 식수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1:03) '천도교 포상교구'와 '포상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포상마을' 입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삼봉로'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11:06) 'ㅓ자' 농로 갈림길에서 좌회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코스모스'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11:09) '대사천' 위를 가로지르는 '포상교'를 건너고~

그렇게 '포상교'를 건너서면 '대사리'로 들어서는데,

우측에는 '선원마을' 표지석이 서 있고 좌측에는 '배수처리장'이 위치한다.

고현면 대사리(大寺里)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 있는 리(里)이다.

녹두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반농반어촌이다.

마을 북쪽으로는 녹두산을, 서쪽으로는 남해를 접하고 있다.

자연마을로 대사, 탑동, 언머리 마을이 있다.

대사마을은 큰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탑동마을은 탑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언머리 마을은 방울터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바닷가의

언(제방) 머리가 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 때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망덕사(望德寺)라는

절을 창건(創建) 했는데,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려 고종 3년(1216)에

원묘국사(圓妙國師, 1163~1245)가 제자 원영(元瑩)과 법안(法安)을 시켜

80여 간을 중건(重建) 하였고, 나라에서 선사(禪師)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을 뒤편 해발 60~70m 능선 상의 절이 있었던 유적지에서는

와편, 토기, 자기편 등이 매몰되어 있고 서쪽으로 뻗은 능선은 종지(오미)등이며

종각(鐘閣)이 있었다.

한때는 대해동(大海洞)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917년 면제(面制) 실시와

더불어 대사리로 부르게 되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본 마을에 규모가 상당히 큰 절이 팔만대장경 판각

20여 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의 판각지(板刻地)로 추정되고 있다.

(11:11) '19번국도 남해대로' 밑의 굴다리를 통과하고~

(11:12) '탑동로' 도로를 만나고,

좌회전하여 우측으로 '고현면사무소'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우측의 남해 정보산업고의 '구룡문(龜龍門)'과

좌측의 '대장경 판각문화센터'를 바라보면서 진행이다.

고려대장경 판각과 관련된 시설물로 추정되는 전 선원사지와 백련암지의 발굴 성과에 따라,

고려대장경 간기(刊記) 조사에서 대장도감판과 분사대장도감판이 동일한 장소에서

판각됐음이 드러났고 각수(刻手) 조사에서도 확인이 되었으며, 그 장소는 남해라고 밝혀졌다.

그동안 고려대장경 ‘종경록’ 27권의 ‘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이라는

기록에 따라 고려대장경이 강화와 남해에서 공동 제작되었다는 설이 제기됐으며,

최근에는 남해군 고현면 일대에서 고려대장경 판각시기 고려 중앙 지배층의 직접적인 관리와

통제, 지원을 받는 공공기구가 있었음을 입증할 만한 물질자료들이 확보되면서 이 같은 주장이

더욱 힘을 얻어 남해 단일 판각설까지 제기되고 있다.

-출처 : 경남일보 - “고려대장경, 모두 남해서 판각” 주장 제기- 2013. 8. 28-

(11:14) 참새가 방아간을 어찌 그냥 지나가랴~ ㅎ

CU편의점에 들려 식수와 간식 보충하고, 션한 부라보콘 하나 입에 물고 나온다.

(11:20)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목공체험스튜디오'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는데~

우측 '탑동공원'에 '남해 정지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남해 정지석탑(鄭地石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2호)

고려 우왕 9년(1383) 정지(鄭地) 장군이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무찔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지 장군은 고려 후기의 무장으로 1381년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이듬해

남원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2등 공신(功臣)이 되었다.

그러나 윤이(尹彝)·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을 나온 후에는 광주에 머물다 숨을 거두었다.

정지석탑은 남해 향토인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어 세웠다고 한다.

높이는 2.25m, 너비 45cm이며 커다란 자연 바위를 받침 삼아 그 위에 탑 몸을 올렸다.

몸돌은 총 5개로 네모난 몸돌 4개, 동그란 몸돌 1개를 얹었으며

지붕돌 5개가 번갈아 층층이 쌓여 있다.

별다른 장식이 없어 소박하지만 왜구로부터 남해 지역과 백성들을 구한 애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석탑이다.

(11:22) '19번 남해대로'가 지나는 '중앙육교'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11:23) '19번 남해대로'가 지나는 '중앙육교' 아래를 통과하고~

'탑동사거리'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 둑방위로 올라서니,

좌측 편에 '관세음길' 안내 패널이 세워져 있다.

'관세음길'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라는 뜻으로,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정지석탑(鄭地石塔)이 있는 탑동 공원에서

이순신 장군의 순국을 기리는 '이순신 순국공원'을 잇는 산책길이다.

'대사천' 바라보고~

대사천(大寺川)

경상남도 남해군의 고현면을 흐르는 하천이다.

고현면 남치리 녹두산 동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포상리에서 남해 바다로 유입한다.

지명이 비롯된 대사리는 녹두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반농·반어촌이다.

마을 북쪽으로 녹두산, 서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 대사·탑동·언머리 마을이 있다.

대사 마을은 큰 절이 있었다 하여,

탑동 마을은 탑이 있다 하여,

언머리 마을은 방울터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바닷가의

언(제방) 머리가 된다 하여 각각 붙여진 지명이다.

그렇게 '대사천' 우측 둑길로 진행하는데,

'정지 장군'의 '남해 관음포대첩'과 '화전별곡 제1장'을 기록한 패널을 지나고~

(11:30) '화전별곡 제2장'과 '반야심경' 끝 구절을

적어놓은 패널을 지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모두 함께 피안의 세계로 가서,

피안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어 축복을 받자는 게송이다.

(11:32) '화전별곡 제3장'을 적어놓은 패널을 지나는데,

우측아래로 경지정리가 반듯하게 된 '간사지들'에는 쉼터정자와 포토박스가 보이고~

(11:33) '이순신 장군'의 명 훈시 패널을 지난다.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병법운 필사즉생 필생즉사 우왈 일부당천 족구천부 금아지위의)

『병법에서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했고,

또 말하기를, '한명이 좁은 길목을 틀어 막으면, 족히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

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 再三嚴約

(이개제장 물이생위심 소유위령 즉당군률 재삼엄약)

『너희 제장은 살 생각을 하지 말라.

군령을 조금이라도 어긴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참할 것이다.

두번, 세번 엄히 약조하는 바이다.』

(11:34) '화전별곡 제4장'을 적어놓은 패널과

'차수약제 사즉무감'이란 '노량해전'을 앞둔 이충무공의 맹세 패널을 지나고~

此讎若除 死即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무찌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이충무공행록》에 기록한 말로,

노량해전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천지신명께 빌면서 한 맹세다.-

(11:36) '화전별곡 제5장'을 적어놓은 패널과

'대사천' 표지판을 지난다.

(11:37)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에 수록된

'이순신 장군'의 맹세 패널을 지나고~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11:38) '화전별곡 제6장'을 적어놓은 패널을 지난다.

(11:40) '관음포'가 보이는 둑길 끝 지점에 있는 '쉼터'에서

우회전하여 '대사리' 방조제 아래 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썰물로 물이 많이 빠진 '관음포' 바닷가 바라보고~

그늘 한점없는 '대사리' 방조제 아래 도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나마 다행이다.

(11:44) 배수문을 지나고, 좌회전하여 지저분한(?) 쉼터를 지나는데

쉼터 벽면에 붙어있는 '이순신 장군'의 시가 눈길을 끈다.

(11:46) '관세음길(이순신 순국공원)'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진행하다,

좌측으로 물이 많이 빠진 '관음포' 바닷가 바라보고~

(11:47) 방조제 'ㅏ자'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대사리 언머리마을'을 향해 진행하고~

남파랑길 시종점 표지판(→시점 8.53km, ←종점 13.99km)을 지나는데,

오늘 46코스 중간지점을 지나고 있다.

그렇게 '언머리마을'을 지난후, '19번 남해대로' 방향으로 나가

굴다리 바로 앞에서 좌회전하여 '남해대로 구 19번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11:57) 그렇게 '남해대로 구 19번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남해대로'가 지나가는 '방월교' 아래를 통과한다.

'방월교' 아래를 통과하면서 '관음포' 바닷가 바라보고~

(12:00) 좌측으로 폐업된 '관음포펜션'을 지난다.

그렇게 진행하면 좌측 아래로 '이순신 순국공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대사리'에서 '고현면 차면리'로 행정계가 바뀐다.

고현면 차면리(車面里)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 있는 리(里)이다.

서, 남, 북쪽의 삼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마을의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밭등들이 펼쳐져 있다.

자연마을로 차면, 금차산 마을이 있다.

차면 마을은 마을 앞에 금차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래 마을은 중간몰 서쪽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문화재로 사적 제 232호인 이충무공전몰유허가 있다.

마을의 구성은 골안, 웃차면, 아래차면, 작은차면으로 나누며,

마을 이름은 벽(壁)에 비녀가 걸린 형상이라 하여 '채면(釵面)'이라 하다가

'차면'으로 바뀌었다는 설(說)과

마을의 생김새가 좌로는 이내기끝이, 우로는 너널끝이 관음포로 향하고 있어,

'채'(가마, 들것, 목도 따위의 앞뒤로 양옆에 대서 메거나 들게 되어 있는 긴 나무 막대기)

모양이라 '채면'이라 부르다가 변형되어 차면(車面)으로 불린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차면 앞바다는 관음포(觀音浦)로 고려 시대 정지(鄭地)장군이 화약을 사용하여

왜구를 무찌른 곳(관음포대첩 1383년)이자,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처음으로 뭍에 오른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순조32)에 수군통제사 이항권이 세운 충무공유허비가 있다.

또한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이락사(李洛司) 및 대성운해(大星隕海)가 현판되어 있으며,

충무공 유적지 정화사업에 의해 1973년 사적 제232호로 지정 관리되어 오고 있다.

1991년 2월에 세운 첨망대(瞻望臺)와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8년 12월에 세운 유언비(戰方急愼勿言我死)도 유허 내에 있다.

(12:04) '소차면(이순신 순국공원) 버스정류장' 앞을 지나고~

좌회전하여 '이순신 순국공원' 안내 광장 안으로 들어서면,

'이순신 영상관' 방향으로 길 안내가 되고 있다.

(12:06) '관광안내소' 방향으로 진행하고~

이순신순국공원

역사공원이자 문화공원인 이순신순국공원은 남해군 관음포 일대

약 9만㎡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에 2017년 첫선을 보였다.

관음포광장과 호국광장, 두 개 구역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2019년부터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도록 무료입장으로 전환했다.

관음포 광장에는 고려말 왜구를 무찌른 관음포 대첩을 기념한 정지공원과

이 지역 일대에서 이뤄진 고려대장경 판각을 기념한 대장경공원이 있다.

또한 판옥선 공원, 거북선 공원, 학익진 공원 등 이순신 인물 체험공원이 있어

아이들이 놀이하며 역사를 알아갈 수 있도록 꾸며졌다.

호국광장은 노량해전 당시의 모습을 4천여 장의 분청 도자기에 그려낸

초대형 벽화인 ‘순국의 벽’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조망 데크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그 자체로 진경산수화이며 분수로 만들어진

워터스크린에 첨단 미디어 효과를 연출한 야간 멀티쇼도 인기가 좋다.

(12:07) '관음포광장'으로 들어서면,

바로 좌측 편에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지'가 나온다.

'관음포 광장'에는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른 4대첩 중 하나인

'정지 장군'의 '관음포 대첩'을 기념한 '정지공원과'

이 지역 일대에서 이뤄진 '고려대장경 판각'을 기념한 '대장경공원'이 있다.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지' 안내판

'이락사' 입구 계단길 위에

'戰方急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 표지석 바라보고~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유적(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 사적 제232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관음포 앞 바다를 배경으로 조성되었다.

관음포는 이락파(李落波)와 노량(露梁)을 연결하는 해역(海域)으로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최후의 해전을 치른 곳이며, 달아나는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를 추격하다가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곳을 ‘이순신이 순국한 유서 깊은 곳’이라 하여 ‘이락파(李落波)’라고 불렀고,

돌출한 작은 곶도(串島)를 이락산(李落山)이라 하여 이순신의 충성을 추모하였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에는 앞 바다를 바라보는 연안에 이순신을 제향한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이 사당은 순국한 지 230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그의 8대 손 이항권(李恒權)이

통제사로 부임하면서 왕명에 따라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있었는데,

이곳에다 높이 1.9m, 너비 0.73m 되는 충무공유허비(忠武公遺墟碑)를 세웠다.

또한 이락사 외문에는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이락사(李洛司)'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안쪽으로 역시 박 대통령 사액인 ‘큰 별이 바다에 지다'라는 뜻의 '大星殞海(대성운해)’

현액(懸額)이 붙은 충무공묘비각(忠武公墓碑閣)이 있다.

그 외에 순조 때 홍문관대제학 홍석주(洪奭周)가 세운 이충무공 유허비를 비롯해

근래에 세운 이충무공 사적비도 함께 있다.

이처럼 이곳은 순국한 이순신의 공적과 충성을 기리고 있는 역사적 유허이다.

대성운해(大星隕海)

조국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소나무에도 투영된 것일까?

'이락사'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다.

'大星隕海'라... '큰별이 바다에 잠겼다'는 뜻이다.

남파랑길에서 잠시 벗어나있는 '첨망대'를 보러가는데,

'이락사' 비각에서 첨망대까지 연결된 솔밭길은 500m에 이른다.

길의 좌우에는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정취를 더한다.

첨망대(瞻望臺)

한려수도를 따라 유유히 남해노량 앞바다에 이르면 관음포가 바라보이니

이곳이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 7년 전쟁중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신 곳으로 이락산 마지막 지점(500m)에 첨망대를 세워 이충무공이

순국한 지점을 바라볼 수 있게 남해군에서 1990년 2층 건물로 건립하였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면 노량해전의 전장이 한눈에 보인다.

(12:26) 다시 '관음포광장' 남파랑길로 복귀하고~

(12:27) 거북선 형상의 '이순신 영상관' 앞을 지나,

데크 다리를 건너 '호국광장'으로 들어선다.

호국광장은 이락장곶과 이내기끝이 감싸고 있는 관음포만 북쪽에 설치되어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던 관음포만 외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관음포만으로 일본군 전선을 가두어 몰살시키려 했던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해역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큰 칼을 빼어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힘차게 조선 수군을 호령하고 있다.

노량해전 전몰 조·명 연합수군 위령탑과 노량해전도가 그려진 순국의 벽, 다양한 형태의 각서공원,

호국정신의 메시지를 닮은 워터스크린 야간 멀티쇼가 벌어지는 바다광장이 이순신 순국공원의

주된 무대이다.

'호국광장'에는 노량해전 당시의 모습을 4천여 장의 분청 도자기에

그려낸 초대형 벽화인 ‘순국의 벽’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노량해전 전몰 조명 연합수군 위령탑' 바라보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지고~

'노량해전' 당시의 모습을 4천여 장의 분청 도자기에

그려낸 초대형 벽화인 ‘순국의 벽’ 바라보고~

'순국의 벽' 도자기 벽화는 끝자락에서 현대로 이어지며 노량대교와 남해대교,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등장하며 끝이 난다.

'이순신 순국공원 상징 조형물' 바라보고~

이순신 순국공원 상징 조형물은 이순신 장군의 순국일(1598년 11월 19일)에 맞춰

전체 높이 11.19m로 제작되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2주년인 2017년 4월 28일에 건립되었다.

바닥은 판옥선이 파도를 가르며 전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고, 동상은 청동주물로

노량해전 당시 판옥선 장대 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도 가슴을 움켜쥐고 끝까지 전장을

힘차게 지휘하고 있는 장군의 역동적인 모습과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구조물은 판옥선의 돛대를 형상화하여 꼭대기에는 대장선을 의미하는 '帥(수)' 자 깃발을 달았다.

 

 

 

'관음포' 앞바다 바라보고~

(12:37) 이후 '이순신 호국광장'을 나와 '관음포' 해안 길로 들어서고,

바래길 이정표(이순신호국길(충렬사)→)를 지나면,

이충무공의 정신을 설명하는 패널이 줄지어 서 있다.

'救國犧牲精神(구국희생정신)'

'公道淸廉精神(공도청렴정신)'

'孝悌忠義精神(효제충의정신)'

'公明正大精神(공명정대정신)'

'必死則生精神(필사즉생정신)'

'信賞必罰精神(신상필벌정신)'

'有備無患精神(유비무환정신)'

'禦敵保民精神(어적보민정신)'

(12:41) 그렇게 물이 빠진 '차면 포구'를 지나면서,

'차면 방파제' 앞 '목섬'을 바라보고~

(12:43) '차면 방파제' 갈림길에서 우측 '이락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이락산' 임도로 들어서니,

이 충무공의 명언 패널이 비스듬히 쓰려져 있고~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충무공의 <진중음(陣中吟)>에 나오는 시로,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애국의 마음을 담은 한시다.

'이 충무공'의 명언 중에 가장 강렬한!!! 패널을 지난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이후 말이 산이지!!!

낮으막한 언덕길을 진행하고~

'하동 금오산' 바라보고~

지나온 '차면항'과 '관음포' 앞바다 바라보고~

그렇게 '이락산' 임도를 진행하는데, 이 충무공의 명언 패널이

계속 세워져 있어 패널을 읽으며 천천히 진행이다.

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

-충무공의 <진중음(陣中吟)> 한시 구절-

원수들을 모조리 멸할 수 있다면 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

勿令妄動 靜重如山(물령망동 정중여산)

-1592, 옥포해전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좌측으로 '하동 화력발전소' 바라보고~

(12:52) 남파랑길 패널이 부착된 남해바래길 이정표를 지난다.

此讎若除 死卽無憾(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무찌를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함께 했던 정랑을 지낸 조카 이분(李芬)이 쓴

이순신 장군 행록(行錄)에 나온 글로,

『노량해전 하루 전인 11월 18일 자정 갑판에 오른 장군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此讎若除 死卽無憾.

그러자 문득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데 보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忽有大星隕於海中見者異之 홀유대성운어해중견자이지).』

(12:54) 능선 임도 'Y자' 갈림길에 도착하고~

근처 그늘진 곳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땅콩쨈 샌드위치와

얼음이 서걱거리는 아메리카노 1병으로 행복한 시간 8분을 보내고 다시 출발이다.

'이락산' 언덕 위에서 '하동' 방향 바라보고~

'하동 화력발전소'가 이목을 끌지만 앞 바다의 여러 섬들도 제 존재감을 뽐낸다.

'대도', '밴월도', '장도', '주지섬', '둥글섬', '넓은섬' 등 여러 섬이 있는데 모두 하동에 속한 섬들이다.

(13:02) 휴식후 능선 임도 'Y자' 갈림길에서

좌측 '월곡· 충렬사' 길로 진행하고~

(13:03) 두번째 능선 임도 'Y자' 갈림길에서

우측 '월곡· 충렬사' 길로 진행이다.

(13:05)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해안형 자생식물증식장 안내도'가 있는

삼거리 도로를 만나 좌회전하는데, 삼거리 우측에 '이순신 호국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그렇게 좌회전하여 쉼터를 지나는데,

이곳 쉼터에는 앉을 벤치가 없다.

(13:10) 우측 아래로 지나는 '19번 남해대로'로 내려서는 램프 구간에서

좌측 위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고~

그렇게 진행하면 '고현면 차면리'에서 '설천면 덕신리'로

행정구역이 바뀌는데, 정확한 경계지점은 잘 모르겠다.

남해군 설천면(雪川面)

경상남도 남해군 북쪽 끝에 있는 면이다.

동쪽은 사천만(泗川灣)을 건너 사천시와 창선면(昌善面), 북쪽은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남쪽과 서쪽은 고현면(古縣面)과 접하고, 바다 건너 하동군에 면한다.

8법정리 (금음리, 남양리, 노량리, 덕신리, 문의리, 문항리, 비란리, 진목리),

19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설천면의 비란리 정태마을은 신라 신문왕때부터 약 80여 년간에 걸쳐 전야산군의 도읍이었다.

그 후 고려 시대에 들어와 공민왕 때 왜구의 침탈로 말미암아 진주 선천 부곡으로 도읍을 옮겼고,

조선 태종 이후 약 2년간 하남현과 해양현에 예속됐다.

세종 이후에는 남해현에 예속되면서 설천면(雪天面)이라 이름 하고 비어천리(非於川里) 등

면내 11개 마을을 다스려오다 1895년(고종 32) 남해군으로 개칭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설천면(雪川面)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여지도서』에 설천면(雪天面)이 "관문에서 30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는 설천(雪川)으로 다시 바뀌어 나타난다.

고지도에는 『해동지도』에 대국산과 함께 설천면(雪川面)으로,

『영남지도』에는 설천면(雪天面)으로 기재되어 있다.

곳곳에 산성산(山城山)·국사봉(國師峰)·금음산(金音山:482m) 등이 솟아 있다.

농업 외에 수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연근해 어업이 이루어진다.

그 밖에 굴·피조개·바지락·김 등의 양식장이 있다.

노량리(露梁里)와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남해대교는 관광명소로 되어 있으며,

본면을 중심으로 한 일대(478.62㎢)는 1968년 12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로는 남해 충렬사(忠烈祠:사적 233), 대국산성(大局山城:경남기념물 19),

남해척화비(南海斥和碑:경남문화재자료 266), 남해 비란리 성지(非鸞里城址),

김구 적려유허비(金絿謫廬遺墟碑), 이태상 비(李泰祥碑), 이충무공 묘비(李忠武公廟碑),

남해 노량리 성지 등이 있다.

설천면 덕신리(德申里)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에 있는 리(里)이다.

금음산 북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비교적 고도가 낮으며 평탄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북쪽으로는 덕진천이 흐르고 있다.

자연마을로 강꺼리, 구들뫼, 월곡 마을이 있다.

강꺼리 마을은 덕신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구들뫼 마을은 덕신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월곡 마을은 덕신의 서쪽바다에 접한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덕개등 마을은 덕신 위에 있는 마을이다.

이후 우측 아래로 지나는 '19번 남해대로'와 나란히 임도를 따라 진행하는데,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고, '하동' 앞바다 유인도인 '대도리'가 조망된다.

'하동 대도 파라다이스'로 알려진 '대도리'는 '노량항'에서 20분 정도 소요되는 유인도로,

약 5.5km의 '대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13:13) 정면으로 '노량대교'가 보이는 'Y자'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월곡· 충렬사' 방향의 임도로 진행하고~

'하동'과 '남해'를 잇는 거대한 '노량대교'가 선명하게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제 남해도의 남파랑길도 끝을 보이고 있다.

(13:14) 임도 'Y자'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임도를 따라 진행하고~

앞쪽에 있는 '구포미산'을 향해 진행하는데,

'구포미산'은 고도 62미터의 야트막한 산이다.

좌측으로 '광양항 포스코 광양제철소' 바라보고~

우측으로 '덕신리 월곡마을' 바라보고~

남파랑길 시그널을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는데,

'구포미산'은 고도 62미터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햇살이 겨우 들어올 정도로 깊은 숲을 가졌다.

 

(13:23) 오래된 야자매트가 깔린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다,

좌측 나무에 붙은 '←차면마을', '월곡마을→' 팻말을 지나고~

(13:25) 능선 끝에서 급 우회전하여,

'편백숲길'을 따라 내려선다.

이후 오래된 야자매트 계단길을 따라, 바로 이어지는 돌계단길을 내려서고,

(13:29) '덕신리 월곡마을' 포구로 내려서서, 우회전하여 방파제 길을 따라 진행하고~

'하동 화력발전소' 바라보고~

이후 '월곡항'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 돌아 진행이다.

지금은 물이 빠져 갯벌이 넓게 드러나 있는 '월곡마을'은

지형이 한반도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13:34) '월곡항' 소공원 그늘진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션한 얼음물과 에너지바 1개로 원기 보충하며 6분 쉬었다가 간다.

다시 출발하고, '남해대로4033번길' 해안도로를 진행하다

좌측 바다 안의 '소항도(작은목섬)'를 바라보고~

그렇게 '남해대로4033번길' 해안도로를 따라,

얕은 도로 마루를 넘고~

우측으로 '노량대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13:46) '남해대로4033번길'이 이어지는 '월곡 해안도로'로 내려서서,

급 우회전하여 '송이나루 민박' 앞을 지나고~

이후 '월곡마을' 앞 방파제 도로를 '역C자' 형태로

빙 돌아서 진행이다.

(13:55) '월곡교'를 건너고~

현재 썰물때라 물이 많이 빠진 '월곡마을' 앞 바다 바라보고~

이후 우측으로 '현대수산' 앞을 지나서,

(13:57) 남해바래길 이정표 안내 따라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그렇게 진행하면 '설천면 덕신리'에서 '노량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설천면 노량리(露梁里)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에 있는 리(里)이다.

비교적 평준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농초 마을이다.

마을 남동쪽으로 금음산이 위치하며, 북서쪽으로 남해와 인접하여 있다.

자연마을로 노량, 감암 마을이 있다.

노량 마을은 바다가 목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감암 마을은 개구리 섬에 붙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문화재로 사적 제 233호인 남해충렬사가 있다.

노량(露梁)이란 지명의 뜻은 말 그대로 「이슬다리」다.

옛날 유배지로 유배당해 남해로 오는 사람들의 눈에 노량해협에 파도가 심하게 치면

그 물결이 마치 이슬방울을 뭉쳐 다리를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야 시대부터 어선의 주요 기항지였고,

육지인 하동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이후 '노량로' 해안도로를 따라 '감암마을'을 향해 진행하고~

(14:03) '판옥선' 형태의 '남해군 수협 감암위판장' 앞을 지나고~

감암마을은 남해의 최북단 마을로, 산성지가 있는 산성산 산자락

노량해협에 위치한 아담한 어촌이다.

옛날에는 '감방우'라 불렀는데, 이는 '감암'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400년 전에 지씨와 정씨가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귀해 어려움을 겪어 오다가 바위 밑에서 솟아 나는 샘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맑고 그윽한 맛이 있어 그때부터 '감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본래는 노량마을에 속해 있었으나 인구가 늘어남에 분동된 마을이다.

전방으로 '노량대교'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14:05) 도로 우측으로 '감암회관'을 지난다.

'감암항' 바라보고~

'노량대교' 바라보고~

노량대교(露梁大橋)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잇는 교량으로, 국내 기술로 만든

세계 최초의 경사 주탑 현수교이다.

2018년 9월 13일 개통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이 일어났던 장소로, 다리의 디자인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 '학익진'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주탑에 8도의 경사각을 주는 '경사(기울어진) 주탑' 방식으로 시공되어

V자 모양의 주탑으로 완성되었다.

교량의 길이는 3.1km, 주탑 높이는 148.6m (건물 50층 높이)이며, 상부구조는 현수교 형식이다.

노량대교의 주탑 간 거리를 나타내는 주경간은 890m이며 이순신대교(주경간 1,545m)와

울산대교(주경간 1,150m)에 이어 세 번째로 길다.

2009년 10월 공사를 시작하여 9년의 공사기간 끝에 2018년 9월 완공되었고,

교량 위의 도로는 국도 19호선에 속하며 왕복 4차선 도로로 완성되었다.

노량대교 바로 옆 바다에는 1973년 6월 22일 개통한 남해대교(南海大橋)가 위치하고 있으며,

교량 주변 설천면 노량리 방면에는 남해충렬사, 흥선대원군 척화비, 남해대교 유람선 선착장이 있고,

금남면 노량리 방면에는 노량항, 금남면사무소가 있다.

(14:10) '노량대교' 밑을 통과한다.

우측으로 '노량 소규모 하수처리시설'을 지나는데,

저 앞으로 '남해대교'가 보이고~

(14:13) 도로 좌측으로 '감암마을' 작은 표지석을 지난다.

그렇게 '남해대교' 가까이로 다가가면,

도로 우측으로 '산성산'으로 오르는 데크계단길이 나오는데~

현재 탐방로 공사로 인해 폐쇄 알림 현수막이 매달려 있다.

'남해대교' 바라보고~

남해대교(南海大橋)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으로

총 연장 660m, 중앙경간 404m, 측경간 128m의 연륙교(連陸橋)이다.

1973년에 준공된 국내에서 가장 긴 3경간(徑間) 2힌지(hinge:경첩) 보강형 현수교(懸垂橋)이다.

남해섬은 불과 600m의 노량수도(露梁水道)를 두고 육지와 떨어져 산업·경제·교통·운송면에서

고립상태에 놓여 있었고, 또한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빨라서 다리를 놓기에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게 생각되던 곳이었다.

이 다리는 강상형(鋼箱桁)으로 보강된 2힌지 현수교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대(橋臺)는 중력식 콘크리트 블록이며, 육지에서 제작하여 설치한 뒤 콘크리트로 빈 공간을 채운

스틸오픈케이슨(steel open caisson) 기초에 높이 60.7m의 장방형 단면 탑기둥을 가진 용접 라멘(rahmen)형식으로 가설하였다.

주케이블은 전 지름이 258㎜로 일곱 개의 스트랜드로 구성되고 소선(素線)의 지름은 5㎜이다.

주탑은 케이블 및 보강형(補强桁)에서의 반력을 지지하고 기초에 전달해 주는 중요한 구조물로

현수교 전체의 미적 감각을 좌우하는데, 이 다리에서는 라멘형식을 택하였다.

보강형은 유선형의 상형(箱桁)으로 하여 풍하중(風荷重)에 대한 양압력(揚壓力) 및 측압력의 영향을

적게 받도록 고려했으며, 교상(橋床)은 강상판(鋼床版)으로 처리하였다.

이 다리가 위치한 남해군의 경제는 주로 농산물을 주원료로 하는 소규모 공업에 불과했지만

그 좌우의 여수·광양지구, 삼천포지구 등에 대단위 임해공업단지가 설치·가동되었고, 남해안 및

호남고속도로가 완공됨에 따라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다리의 건설은 그러한 발전의 흐름을 더욱 활성화시켰고, 부근 지역인 부산·여수·마산·남해·하동

등과의 지역간 연결체제가 한층 원활하게 되었다.

남해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자연지세가 아름다운 명승고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 대교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육지와의 연락이 쉬워져 국내 관광객 및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커다란 이점을 지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 및 개발을 촉진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고 있다.

(14:17) 좌측으로 '연대봉'을 바라보면서 '남해대교' 밑을 통과하고~

그렇게 '남해대교' 밑을 통과하면 좌측으로 쉼터가 있는데,

독특한 포토존에 눈길이 간다.

(14:20) 도로 좌측으로 '노량유람선 매표소'가 있고~

이곳 '노량마을' 항구에는 '유람선 선착장'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거북선 전시관'도 있고, 그 뒤로는 '남해 충렬사'가 자리한다.

헷갈릴 수도 있지만 이곳도 '노량마을'이고 바다 건너도 '노량마을'인데

이곳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이고 바다 건너는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이다.

도로 우측은 남해바래길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이 남해바래길 14코스 '이순신호국길' 종점이고,

남파랑길 46코스는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우측 위로 올라 '남해대교'를 건너야 한다.

남해바래길 안내도에는 14코스 '이순신호국길'과 15코스 '구두산목장길',

그리고 지선 2코스 '노량바래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15코스는 이곳 출발점에서 남파랑길 46코스 따라 우측 위로 올라 '남해대교' 앞에서

남파랑길과 헤어져 좌측 '노량공원'으로 이어지고,

지선 2코스는 직진하여 '노량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 '충렬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현재 남해바래길은 노선 내 공사로 인해 지선2 노량바래길은 임시 폐쇄 되었고,

본선 15코스 '구두산목장길'도 우회로를 따라 진행하도록 안내되고 있다.)

일단 이곳에서 남해바래길 14코스 '이순신호국길'은 종료한 후,

남파랑길 남해46코스는 잠시 스톱하고,

임시 폐쇄된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을 이어간다.

(오늘 아니면 일부로 시간내어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을 진행하러

이곳에 올 엄두가 안나 처음 계획한데로 진행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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