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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래길

남해바래길 지선2코스

답사일자: 2023.9.9

코스: 노량선착장(시점)-거북선.전시관-남해.충렬사-노량공원-노량삼거리/산성산.탐방로입구

-데크전망대-산성산.정상갈림길-레인보우전망대-노량선착장(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3.26km (남해바래길 공식기준 3.2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1시간5분

▶ 갈때 : 남파랑길 남해46코스 진행중에 남해바래길 14코스(이순신호국길)를 마치고,

남해바래길 지선2코스 (노량바래길)을 이어간다.

▶ 올때 : 남해바래길 지선2코스 (노량바래길)을 마치고, 잠시 스톱했던

남파랑길 남해46코스를 이어간다.

남해바래길 2.0 - 지선2코스 「노량바래길」 [남해바래길 2.0 홈페이지]

▶총거리 : 3.2km

▶걷는시간 : 약 1시간 30분 내외(쉬는 시간 포함 )

▶걷기난이도 : ★★★☆☆(무난해요)

▶걷는경로 (단위 km) : 노량 선착장←0.3→거북선 전시관←0.2→남해 충렬사←0.9→

노량공원←0.2→산성산 탐방로←1.5→레인보우전망대←0.1→노량 선착장

​▶코스개요: 노량바래길은 노량 유람선선착장 앞을 출발해

이순신장군의 가묘가 있었던 충렬사 사당 앞을 지난다.

이후 노량마을길을 지나 노량대교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노량공원에 닿는다.

노량공원에서 다리쉼을 잠시 한 후 길을 건너 산성산탐방로를 걸으면서

아름다운 편백숲길을 만난다.

레인보우 전망대에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다.

레인보우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길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14:20) '노량 유람선 선착장'

이곳 '노량마을' 항구에는 '유람선 선착장'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거북선 전시관'도 있고, 그 뒤로는 '남해 충렬사'가 자리한다.

헷갈릴 수도 있지만 이곳도 '노량마을'이고 바다 건너도 '노량마을'인데

이곳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이고 바다 건너는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이다.

'노량 유람선 선착장' 우측 도로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남해바래길 안내판

남해바래길 안내도에는 14코스 '이순신호국길'과 15코스 '구두산목장길',

그리고 지선 2코스 '노량바래길'을 안내하고 있는데,

15코스는 이곳 출발점에서 남파랑길 46코스 따라 우측 위로 올라 '남해대교' 앞에서

남파랑길과 헤어져 좌측 '노량공원'으로 이어지고,

지선 2코스는 직진하여 '노량 유람선 선착장'을 지나 '충렬사'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현재 남해바래길은 노선 내 공사로 인해 지선2 노량바래길은 임시 폐쇄 되었고,

본선 15코스 '구두산목장길'도 우회로를 따라 진행하도록 안내되고 있다.)

일단 이곳에서 남해바래길 14코스 '이순신호국길'은 종료한 후,

남파랑길 남해46코스는 잠시 스톱하고,

임시 폐쇄된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을 이어간다.

(오늘 아니면 일부로 시간내어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을 진행하러

이곳에 올 엄두가 안나 처음 계획한데로 진행이다. ㅎ~)

(14:25) 남해바래길&트랭글 앱 켜고, '노량로' 도로를 따라

'이순신 호국길(충렬사)→' 방향으로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 시작이다.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패널 바라보고~

(14:27) 'Y자' 도로갈림길을 만나고,

이곳에서 '노량로' 도로를 버리고 좌측 '노량로183번길'로 진행이다.

(14:28) '노량 회타운' 앞을 지나고~

그렇게 '노량 회타운'을 지나면 우측 '충렬사' 입구에는 소공원이 있고,

좌측에는 '거북선 전시관'이 있다.

(14:29) 먼저 '거북선' 외관을 살펴보고, 내부 입장은 생략이다.

이 '거북선'은 1591년에 건조한 돌격용 전선으로 이충무공전서와 옛 선박의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노산 이은상' 등 학계 전문가들의 고증을 받아

1980년 해군 공창에서 복원하여 해군사관학교에서 전시 관리하던 것을

'류삼남 전 해군참모총장'이 주선하여 1999년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제원은 전체 길이 34.2m, 선체 길이 25.5m, 선체 폭 10.3m, 선체 높이 6.4m,

노(櫓) 16개, 승조원 130여 명, 함포 14문, 속력 최대 6노트이다.

'남해대교'와 '노량해협' 바라보고~

'거북선 전시관' 도로 건너편에는 '충렬사 버스정류장'과 화장실 건물이 위치하고,

그 우측에 '남해 충렬사' 약도와 안내각이 세워져 있다.

남해 충렬사(사적 제233호)

남해 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의 유구(遺軀)를 처음으로 안치한 것을 기려서 순국한지 30년째 되던 인조 6년(1628)에

지역의 선비들이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효종 9년(1658)에 다시 지었으며,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 준 현액을 받았다.

사당 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가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 내삼문, 외삼문, 청해루 등이 있다.

사당 후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초빈(草殯: 장사를 지내기 전에 시체를 방 안에 둘 수 없는 경우에

관을 바깥에 놓고 이엉 같은 것으로 덮어서 눈비를 가리는 것) 했던 곳에 가묘(假墓: 정식으로

묘를 만들기 전에 임시로 쓰는 묘)가 있다.

사당을 세운 이후에는 충렬사 옆의 호충암(護忠庵)에서 화방사(花芳寺)의 승장(僧將: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인 승병의 장수)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사당을 지켰다.

'충렬사' 입구 소공원에 세워져 있는 金汝贇(김여빈), 高承厚(고승후) 영세불망비와

윤기섭(尹驥涉) 공적비 바라보고~

이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때 이곳 충렬사에 3개월간

모셔졌다가 전라 땅 고금도를 거쳐 외가 동네인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되어

안장되었는데, 공이 돌아가신지 30년이 지난 1628년(인조 6)에 남해의 선비

金汝贇(김여빈), 高承厚(고승후) 등 유림들이 옛 터에 초옥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충렬사의 최초 사당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렬사도 훼철되었고, 이때 위패는 본당 뒤편에 묻고

제기는 향교로 이관했으며, 토지는 매각되어 충렬사에는 비각만 남게 되었다.

그 후 51년이 지난 1922년 향사(鄕士) 윤기섭(尹驥涉)이 금 일백 원을 의연한

고준홍(高晙洪)이 사우(祠宇) 3칸을 중창하였다.

(14:31) '충렬사' 공연마당을 지나서 우회전하여,

'노량로183번길'을 따라 진행하고~

(14:33) '충렬사' 입구 'T자' 갈림길 앞에 '남해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남해 척화비(斥和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군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이 외국과의

화신을 경고하기 위해 1871년(고종 8)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내용인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란 12자가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란 뜻의

"戒吾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계오 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노량 선착장에 처음 세워졌다가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향인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세웠다가 1998년 8월에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옛 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다시 현 위치에 이설하였다.

낮은 사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남해 척화비' 좌측에 '자암 김구선생 추모비'가

축대 위 우측에 세워져 있고~

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

남해에서 12년간 유배생활 중 「화전별곡」을 지은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자암 김구'를 추모하는 비다.

자암 김구(金絿, 1488~1534)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조선 초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기묘사화로 인하여 1519년(중종 14)에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이배되어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노량 적소에서 적거 생활을 하였다.

이때 남해찬가라 할 수 있는 「화전별곡」을 경기체가로 지었다.

김구는 중종 28년(1533)에 사면되어 복관(復官) 되었으나 이듬해에 47세의 일기로 타계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자암 유허비는 숙종 30년(1704)에 김구의 6대 후손 김만화가 남해 현령으로 부임하여

조상의 흔적을 찾아 옛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죽림서원을 세워 조상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였으나, 죽림서원은 고종 원년(1864)에 대원군의 서당, 향사 철폐령에 의거 훼철되었다.

비의 총 높이 276cm, 비신 높이 190cm, 너비 90cm, 두께 34cm이다.

축대 위 좌측에 '삼도통제사 이태상 비'가 세워져 있다.

비명은 '嘉善大夫三道統制使李公泰祥之碑(가선대부삼도통제사이공태상지비)'로,

이태상은 본관은 덕수, 자는 내숙으로 숙종 27년(1701)에 출생하였으며 충무공의 5대 손이다.

이태상이 진주병마사로 재직 중이던 영조 36년(1760)에 남해 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

이 비는 1882년 전 판관 문경일의 감독하에 건립된 것으로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4:35) '충렬사 외삼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오르니,

'충렬사 외삼문' 우측에 한글 비석이 서 있다.

한글 비석은 1949년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쓴 충렬사 비석으로,

비명은 『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이다.

한글 비석 우측의 '통제사 이태상'이 세운

'청해루' 바라보고~

한글로 번역한 충렬사 비문이 새겨진 동판 바라보고~

'충렬사 내삼문'에 걸려있는 현판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쓴 친필글씨다.

'충렬사 내삼문' 안 '비각'에 있는 '이 충무공 묘비'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썼는데,

비문의 내용은 이순신 장군의 전공과 나라와 백성에게

끼친 덕을 칭송한 글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사우인 본당 바라보고~

'충렬사' 현판 글씨는 조선 18대 임금 현종이 1663년 쓴 어필 글씨이며,

'충렬사'에 모셔져 있는 '이 충무공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석 화백'이 그린 것으로

정부에서 1973년 표준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충무공비' 바라보고~

그렇게 '주마간산'식으로 '충렬사' 관람을 마치고,

되돌아나와서 '이태상 비'와 '김구 비', '남해 척화비'를 차례로 지나고~

(14:40) '노량로183번길'

'노량마을' 이면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그렇게 진행하다 우측으로 평상이 있는 쉼터를 지나고,

(14:41) 쉼터 끝에서 우측 아래로 이어지는 데크계단길을 내려서고~

(14:43) 그렇게 데크계단길을 내려서서 '노량로' 도로와 다시 만나고,

급 좌회전하여 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올라간다.

(14:48) 도로 좌측에 있는 '노량마을' 표지석을

지나면서 뒤돌아보고~

설천면 노량리(露梁里)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에 있는 리(里)이다.

비교적 평준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마을 남동쪽으로 금음산이 위치하며, 북서쪽으로 남해와 인접하여 있다.

자연마을로 노량, 감암 마을이 있다.

노량 마을은 바다가 목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감암 마을은 개구리 섬에 붙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문화재로 사적 제 233호인 남해충렬사가 있다.

(14:51) 그렇게 '노량로' 도로를 올라서서 '나루터 휴게 커피숍'을 지나는데,

남해바래길 지선 2코스와 본선 15코스 상세도가 세워져 있다.

(14:52) '통일동산' 표지석과

로터리 중앙의 상징 바위 바라보고~

'노량공원' 표지석과 안쪽에 있는 '신동관 선생 기념비'를 바라보고,

'청남 신동관 기념비' 옆에는 '祖國近代化'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가 새겨져 있다.

청남(靑南) 신동관(申東寬, 1929~2018)

남해군 서면 중현리 도산마을에서 출생하여, 중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서울 조선 전기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사회 혼란기에 군인의 길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육군종합행정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장교로 임관되어 군무와 병행하여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계속해서 미국 육군보병학교와 일본 경도대학에서 2년 동안 연수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사회 혼란이 가중되어, 5·16 군사혁명으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함에 따라 박정희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피선됨에 따라

경호과장직을 수행하면서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에 따라 경호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하여

대통령 수행 해외 10개국을 순방하였다.

1964년 7월에 박 대통령이 진해 저도에서 하기 휴가를 보낼 때, 남해의 발전을 위해

남해대교 건설의 중요성을 대통령에게 피력한 결과, 1966년 9월에 국무회의에서

남해대교 건설이 확정되었고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3년 6월 22일에 남해대교가 개통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시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이후 9대, 10대

국회의원에 계속 당선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4:53) 도로 좌측 편으로 '덕신마을' 표지석과 '덕신마을'로 내려서는

도로가 이어지고, 정면으로 '노량삼거리'를 보면서 진행하고~

설천면 덕신리(德申里) 덕신마을

인근에 노량원과 덕신역원이 있어, 남해현 내로 들어오는 행로 따라 원님들의 통행이 잦아

'덕을 말린다'라는 뜻에서 '덕신'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중종 때(1531년) 자암 김구 선생이 노량에 적거하면서 향사들에게 예속 진작에 전념하였는데,

향내 교화를 가장 많이 받은 곳이 덕신이었으니 리명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옛날에는 바다가 본 마을 앞에까지 들어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옥토 들판으로 되어 있다.

'옥녀영랑'이란 전설적인 명당지가 덕신의 어딘가에 있다는 설에 따라 남도의 이름있는 풍수들이

수없이 찾아 들었으나 찾지 못했다는 수수께끼가 있는 곳이다.

'푸른 남해 환경 선언' 표지석 바라보고~

잘 가꾸어진 공원 안쪽에 위치한,

약간 생뚱맞은 '바다 선녀상' 바라보고~

(14:54) '노량삼거리'를 지나는데, 우측으로 '갱번마루' 입간판을

자세히 보니 '갱번마루'는 이곳에서 8km 떨어져 있다.

'갱번'은 남해 사투리로 '바다'를 뜻하고

'마루'는 '산마루'를 의미해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것을 말한다.

그렇게 '노량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남해대로'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우측으로 '산성산 탐방로 입구'가 보이고~

(14:57) '산성산 탐방로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남해대로' 도로를 벗어나 우측으로 오르는데 '전망대'까지 1.7km 거리다.

(14:58) 데크계단길이 시작되는데, 헐~

그렇지만 데크계단길 옆으로 뺀질뺀질한 등로가 나 있어 그대로 올라간다.

잠시후 데크계단길을 내려서고,

그렇게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공사안내 현수막이 걸려있다.

(15:00) 다시 데크계단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좌측에 '유자나무' 설명 패널이 있어 읽어보고~

옛날 남해에서는 유자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자가 아주 귀해 유자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유자가 남해에 전래된 전설로, 서기 840년(신라 문무왕 2)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 무역을 하던 당시, 당나라를 방문한 장보고는

당나라의 한 상인으로부터 유자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장보고는 귀한 유자를 도포 속에 넣고 돌아오는 길에 거센 풍랑을 만나

남해에 기착하게 되는데, 이때 도포자락에 보관하고 있던 유자가 깨져

그 씨앗이 떨어져 남해로 흘러들었고, 그 이후 남해에서

유자가 자라기 시작하였다는 전설이다.

이후 '산성산' 산허리를 시계 방향으로 진행하고,

(15:04) '감암마을' 갈림길에서 우측 데크계단길로 올라간다.

'감암마을'은 남해바래길 14코스 진행시 지나왔던 마을이다.

이후 은근한 오르막길이 계속되고, 두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15:07) '편백 숲'이 시작되는 초입에 쉼터 벤치와

'피톤치드' 설명 패널이 있고~

피톤치드(phytoncide)

식물이 자신의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박테리아, 곰팡이, 해충을 퇴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산하는 살생 효능을 가진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식물의'를 뜻하는 'phyton'과 '죽이다'를 뜻하는 'cide'의 합성어로, 1937년 러시아

레닌그라드 대학교의 생화학자 보리스 토킨(Boris P. Tokin)이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향신료, 양파, 마늘, 녹차나무, 오크, 향나무, 소나무 등이 모두 피톤치드를 방출한다.

마늘에 포함된 알리신(allicin)이나 다이알릴 다이설파이드(diallyl disulfide), 소나무에서

방출되는 테르펜 류의 휘발성 유기 화합물이 대표적인 피톤치드인데, 지금까지

5천 종이 넘는 피톤치드가 알려져 있다.

산림욕을 하면 많은 양의 피톤치드를 흡입하게 되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의학이나 아로마테라피에 피톤치드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식물이 많은 숲에서의 산림욕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 피톤치드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숲속의 환경이 먼지와 소음이 없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밀폐된 실내에서는 많은 양의 피톤치드를 방출하도록 만든 생활화학 제품의 사용을

경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록 피톤치드의 살생 효능이 충분히 약하다고 하더라도 밀폐된 실내에서 장시간에 걸쳐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흡입하면 호흡기에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15:10) 좌측으로 또 다른 '감암마을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그렇게 탐방로 정비중인 등로를 따라 진행하면,

공사안내 현수막이 걸려있다.

(15:12) 데크전망대로 내려서는데, '근로자휴게실'로 바뀌어 있고 ㅎ~

'노량해전' 패널 바라보고~

'노량대교'가 잘 보이는 장면이다.

그렇게 전망데크를 내려서니,

우측으로 습지 정비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고~

(15:14) 공사안내 현수막이 걸려있는, 급경사 데크계단길이 다시 시작된다.

(15:16) 데크 다리를 건너고~

다시 또 급경사 데크계단길이 시작되는데,

양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ㅎ~

(15:19) '산성산 정상' 갈림길을 만나고~

'산성산'은 예전 '남해지맥' 진행할때 올라가봤으니

오늘은 당연히 생략이다. ㅎ~

이후 좌회전하여 내려서고,

약 400개가 넘는 데크계단길을 줄기차게 내려선다.

그렇게 내려서면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노량대교'가 보이고~

(15:27) '팔작지붕 누각'의 '레인보우 전망대'에 도착이다.

누각 안으로 들어서면 천정이 화려한 단청으로 단장되었고,

'노량해협' 방향에는 '노량해전' 설명 패널이 세워져 있다.

노량해전

1598년(선조 31) 11월 19일에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다.

이 해전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은 왜 수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의 정전회담 결렬에 따라 1597년(丁酉) 8월에 재차 조선을 침공한 왜군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였으나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뒤부터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病死) 하면서 철수를 유언으로 남기자,

순조롭게 철수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순천 왜교성(예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의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조·명 연합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진린은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사천(泗川)에 있던 시마쓰[島津義弘]와

남해의 소시라노부[宗調信]는 대대적인 구원 함대를 500여 척으로 편성하여

왜교성으로 진격하였다.

왜교성 앞바다를 차단하고 있던 200여 척의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 구원 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급히 노량 수로로 이동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 해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노량해전은 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야 끝이 났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의 결과는 조·명 연합함대의 대승리였다.

연합함대의 선봉장으로서 조선 수군의 적극적인 공격작전,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통솔과 함께 조·명 연합군의 화공 전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도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여러 명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鄧子龍)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아침 동틀 무렵 맞이한 죽음의 순간에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안위보다 전황을 걱정하는 위대한 장수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량해전은 조·명 연합 작전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서,

임진왜란 동안 가장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었다.

노량해전의 승리야말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레인보우 전망대'에서 '노량대교' 바라보고~

'레인보우 전망대'에서 '남해대교' 바라보고~

휴식후 '레인보우 전망대' 누각을 나서면서 뒤돌아보고~

그렇게 데크계단길을 내려서고,

갈림길에서 정면 데크계단길이 아닌, 우측 탐방로로 진행하고~

(15:28) 아치형 통과 문 3개를 지나는데,

위로는 '남해대교'가 지나간다.

(15:30) 남해바래길 지선2코스 노량바래길 시종점이자,

14코스 종점, 15코스 시점 안내판 앞으로 내려서고~

오늘 2차로 목표했던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도 무사히 도착했다.

남해바래길 남은 숙제 모두 완료~ ㅎ

남해바래길&트랭글 앱 끄고,

'남해바래길 지선2 노량바래길'을 종료하고,

곧바로 잠시 스톱했던 남파랑길 남해46코스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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