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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 여수58구간

답사일자: 2023.10.28

코스: 서촌.버스정류장(시점)-서촌2교-옥적.배수문-마상승마장.갈림길-옥적리.마상마을

-마상제.저수지-감도마을입구.정자-감도해변/팬션밀집지역-감도교회-소옥1저수지-소옥마을경로당

-태양열시설물.밀집지역-화양면이천.버스정류장-오천.버스정류장-관기.해상데크-관기.배수갑문

-관기방조제-가사리생태공원(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6.06km (두루누비기준 15.8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28분

▶ 갈때 : 여수57구간 마치고, 여수58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58구간 들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 올때 : 여수58구간 마치고, 소라면가사.버스정류장에서 창무삼거리로 도보이동,

(17:43) 창무삼거리.버스정류장에서 26번/미평行 여수시내버스를 타고

(18:28) 여수종합터미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하차,

여수종합터미널근처 터미널휘트니스사우나에서 땀냄새 칼긋게 제거후,

내가조선의국밥이다 식당에서 돼지국밥과 소주1병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20:00) 부산行(무정차)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에서 택시타고 양산.내송집으로 귀가

'서촌리사무소&서촌경로당'과 남파랑길 58코스 안내판

남파랑길 여수 57코스를 마치고, 선체로 물 한잔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11:34) 두루누비&트랭글 다시켜고 남파랑길 여수 58코스를 연달아서 이어간다.

'서촌.버스정류장'을 끼고 좌회전하여 '서촌방앗간'을 바라보며,

'863번 지방도 화서로'를 따라 진행하고~

(11:35) 남파랑길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863번 지방도 화서로'를 벗어나

우회전하고 우측 농로를 따라 진행이다.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여수58코스 종점까지 12.9km로 표시되어 있지만,

변경 이전 코스로 변경 이후 거리는 약 15.7km 정도다.

(11:38) 농로 중간 정도의 사거리에서 좌회전하고~

(11:39) '화양천'을 가로지르는 시멘트다리를 건너고,

화양천 옆 둑길을 따라 나가다 보면, 좌측 건너편에 큰 비석과 당산목이 보인다.

(11:43) 농로 'ㅓ자'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11:46) 또 다른 농로 'ㅓ자'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서촌2교'을 바라보며 진행이다.

(11:48) '863번 지방도 화서로'를 다시 만나고,

58코스 출발지인 '서촌.버스정류장'에서 직진해 오는 도로가 바로 이 도로다.

'기수갈고둥' 보호안내판을 바라보고~

지난 2015년 화양면 안포 2지구 연안(안정 저수지 지류 소하천) 정비 공사 중 발견된,

멸종 위기 야생동식물 2급으로 지정된 기수갈고둥을 이곳 화양천으로 이식하였기 때문에,

불법 포획하지 말고 잘 보호하자는 안내판이다.

이후 '서촌2교' 앞에서 우회전하여 '섬숲길 이정표'를 바라보며,

'863번 지방도 화서로'를 따라 진행하고~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나간 '화양천' 기수역 바라보고~

화양천(華陽川)

전라남도 여수시의 화양면 고봉산(高峰山, 363.7㎞) 일대에서 발원하여,

화양면 화동리 화동제(화동저수지)에서 하천이 시작되어 화동리와 서촌리를 거치며

대체로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서촌리 1404번지 부근에서 순천만(여자만)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1.98㎞, 유로연장 4.64㎞, 유역면적 7.54㎢로, 섬진강 권역의

섬진강 남해권 수계(水系)에 속해 있는 지방 2급 하천이다.

하류 범람원에는 화양면에서 가장 넓은 들녘인 서촌평야가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서촌천(西村川)'으로 기록되어 있고, "서하리(西下里)에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데, 서촌천 이름은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의 이름은 화양면(華陽面) 지명에서 유래되었는데, 고시지명을 정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11:50) '863번 지방도 화서로'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갈림길 우측에 '화양 곡화목장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화양 곡화목장길 코스는 총 5개 코스와 시루봉 탐방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은 제3코스 시·종점으로 안양산을 거쳐 화양 중고개까지 3.5km 구간으로

약 2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화양천' 기수역 뻘밭을 바라보며,

'863번 지방도 화서로'를 따라 길게 진행하고~

'화양천'과 '여자만'이 만나는 이곳을 '서촌 간석지'라 부르는데,

'서촌마을'에서 '꼬막'과 '바지락'을 양식한다고 한다.

(12:03)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석교마을 방조제' 입구에서

'863번 지방도 화서로'를 벗어나 좌회전하여 '옥적수문' 방향으로 진행이다.

'석교마을 방조제' 입구 그늘진 곡각지점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샌드위치와 테라 캔맥주 큰거 1캔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12분 쉬었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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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휴식하는도중 남파랑길을 진행하는 부부1팀이 지나가는데,

'여수구간'에 들어와서 남파랑길을 진행하는 분은 처음 본다. ㅎ~

(12:15) 다시 출발하여,

제방 둑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고~

방조제에서 '서촌 간석지'를 바라보니,

물이 빠진 상태에서는 마치 작은 저수지처럼 보인다.

(12:17) '이 해역은 서촌어촌계의 바지락·고막 양식장으로 불법 채취를 금한다'라는

경고판을 바라보면서 진행하고~

(12:18) '석교마을'에서 흘러내리는 소하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좌측으로 건너 숲속 임도로 진행이다.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여자만'을 바라보고~

(12:26) '옛날집' 간판이 달린 음식점을 지나고~

그렇게 '옛날집' 음식점을 지나면 이제까지 이어오던 '화양면 서촌리'에서

'화양면 옥적리'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화양면 옥적리(玉笛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 북쪽으로

전어로 유명한 감도마을과 접하고, 남쪽은 화동리, 동쪽은 비봉산과

벌곡재를 경계로 면 소재지인 나진리와 접하고 있다.

산전·논골 등의 마을이 있다.

밀양박씨·인동장씨·전주이씨 등이 처음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옥적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옥, 소옥, 신기, 논골, 마상 기밀개를

병합하여 법정리인 옥적리가 되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지만 소득 작물이 적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없다.

화양면의 경우에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은 어촌계가 형성되어 주민 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만 옥적리는 포구가 있는 마상마을을 제외하고는 바다와 인접하지 않아

농업과 축산업을 하는 농가가 많은 편이다.

옥적리(玉笛里)는 마상·신기·대옥·소옥·산전마을을 병합한 법정리 이름이자

신기와 소옥마을만을 칭하는 행정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산이라 불렀다.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쳐 큰 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 전해 온다.

비슷한 형상의 지형이었던 율촌면의 취적(吹笛)마을도 뒷산의 이름이 ‘대통산’으로

대나무통 모양으로 생긴 산의 모양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옥적마을의 유래와 함께 옥피리형 지세에 대한 풍수의 설명도 전해오는데,

옥피리형 지세는 자손들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산의 동쪽 큰 골짜기 마을은 대옥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한다.

신기마을은 우리말 땅이름으로 ‘새터’로 불리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인동장씨가 이주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이 마을 출신인 학자 장태지(張泰址)는 1858년에 태어나 돈녕부 동지사

(敦寧府 同知事)에까지 올랐다가 낙향하여 향리의 후학들을 가르쳤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옛 초등학교는 1948년 개교하여 50여 년 동안

주변 마을 기초 교육을 담당하다 1999년 폐교되었다.

마상(馬上)마을은 본래 ‘몰산개’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고쳐 부르게 된 이름으로,

‘몰’은 말[馬]의 고어(古語)이다.

곡화목장 시절 방목한 말을 몰이하여 잡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까운 돌산읍 마상포마을의 본래 이름도 ‘몰산개’였다고 전해 온다.

마상마을 남쪽 해안에는 ‘기밀개’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기밀개’는

해안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구미포(九尾浦)’라고 표기하였다.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산전(山田)마을은 곡화목장에 있었던 네 군데의 송전(松田) 중 한 곳이다.

송전은 널(관)이나 집을 짓기 위한 목재, 배를 만들기 위한 선재 등 좋은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정하여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가꾸었던 곳으로, 송전의 나무를 함부로 벤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던 기록이

『난중일기(亂中日記)』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타난다.

 

 

 

좌측으로 '옥적 방파제'를 바라보고~

(12:27) 직진 방향으로 '옥적수문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

(12:28) '섬숲길' 이정표와 남파랑길 방향 표지기가 좌측을

가리키고 있는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잠시후 우측 3시 방향으로 휘어지며,

앞쪽의 '옥적2호 배수문 관리동'을 향해 진행이다.

좌측으로 습지 바라보고~

(12:30) '옥적2호 배수문 관리동'을 지나,

처음으로 만나는 'ㅏ자' 갈림길에서 직진하고~

(12:33) 두번째로 만나는 'ㅓ자'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옥적 배수문'을 지나 길게 진행이다.

(12:37) '해수침투조사용 관측망' 시설물이 있는 사거리갈림길에서,

우측 농로로 방향을 바꾸고~

(12:40) '마상승마장' 방향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사거리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비닐하우스'건물 1동을 지난다.

이후 숲속 임도로 들어서서, 우측으로 '태양열 시설물'을 끼고 올라,

'마상승마장' 안내판이 있는 'T자' 갈림길에서 우회전하고~

(12:49) 또 다른 '태양열 시설물'을 보면서 오르고,

대형 원형 집수정이 있는 고개를 넘어간다.

쑥부쟁이...

(12:51) '옥적리 마상마을'로 들어서고~

마상(馬上)마을은 본래 ‘몰산개’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고쳐

부르게 된 지명으로, ‘몰’은 말[馬]의 고어(古語)이다.

곡화목장 시절 방목한 말을 몰이하여 잡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상마을 남쪽 해안에는 ‘기밀개’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기밀개’는 기미(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곳) 개란 뜻으로,

한자로는 ‘구미포(九尾浦)’로 표기하였다.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마상마을' 벽화를 바라보며,

마을길을 따라 진행하고~

(12:56) '마상마을'끝에서 좌회전하여,

앞쪽의 '마상저수지'를 바라보며 진행이다.

마상제 저수지는 9,000평 규모의 준 계곡형 저수지로, 외래 어종이 없는

가물치, 장어, 참게, 참붕어, 새우 등이 자생하고 있어서 지역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이고 상류권에 갈대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평균 수심은 1~3m, 동절기에도 잘 얼지 않아 연중 낚시가 가능한 곳이라고 한다.

이후 '마상제' 저수지를 좌측에 끼고

'마상길' 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13:03) '마상제 저수지' 제방끝에서

좌회전하여 둑 아래로 포장 농로를 따라 진행이다.

(13:06) 농로삼거리 갈림길에서 우회전하고,

이후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진행이다.

(13:17) '863번 지방도 옥천로'를 만나고~

이곳에서 이제까지 이어오던 '화양면 옥적리'를 벗어나,

'화양면 이천리'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화양면 이천리(利川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 마을 뒤편으로 낮은 산자락이

길게 뻗쳐 있으며 앞쪽은 여자만과 접해 있고 창무리, 옥적리와 인접한 마을이다.

이대·오천·양달·음달·감도 등의 마을이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군 화양면 이천리가 되었고,

1949년 여천군 화양면 이천리가 되었다.

1998년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여수시로 삼여통합됨에 따라 여수시 화양면 이천리가 되었다.

이천리의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이대와 오천을 병합하여

이천이라 부르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이천을 지나서 만나는 감도마을은 몇 해 전부터 맛있는 가을 전어회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해변 마을이다.

전해 오는 옛 이름은 ‘감디’라 하였는데 ‘감’은 ‘물이나 길이 감아 도는 곳’을 뜻하며

‘디’는 ‘~하는 곳’의 뜻으로 쓰이는 이 지역 지방의 사투리로 마을 앞 해안으로

바닷물이 감아 도는 곳이라 해서 지어진 땅이름이다.

오천마을은 오동나무로 만든 통나무 샘이 있어 지어진 이름인데,

‘오동나무 오(梧)’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오천’이라 하였다.

토박이말 이름은 오동나무의 다른 이름인 머구나무에서 유래한 ‘머구내’이다.

오천마을은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오동천(梧桐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오동나무 통으로 만들어진 샘이 있었으며

주변 마을에까지 좋은 물로 소문이 나 이 물로 병을 고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오천마을 남쪽 바닷가에 있는 이천(利川)마을은 이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대는 마을 앞에 있던 배나무가 꽃을 피우면 멀리서 바라볼 때 하얀 뭉게구름처럼 보여서

‘구름 운(雲)’자와 ‘배나무 이(梨)’자를 써서 ‘운이대(雲梨大)’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삼이대여(三利大閭)라고 나와 있을 뿐

운이대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앞바다의 수심이 낮아 간조 때에는 너른 갯벌이 펼쳐지고, 바지락이나 꼬막이 많이 난다.

앞바다에서 전어와 참조기, 멸치, 낙지, 새우, 붕장어 등이 많이 잡힌다.

오천에서 감도에 이르는 해안 도로는 해안 경관이 뛰어나고 낙조가 아름다워 주말이면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언덕위로는 쉼터 정자가 보이고,

아래에는 '화양면 이천리 감도마을' 안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감도마을의 불암산(佛岩山 178m)은 부처의 형상으로 감도(坎道)는

부처의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모은 감중련(坎中連) 형국의 지형으로,

오금(五金)의 땅에 사람의 길[人道]과 하늘의 길[天道]이 있어

중촌(中村)과 감도(坎道)라 이름하였고, 비봉(飛鳳)이 비취(翡翠)의 해(海)를

크게 아우르고 구름 위를 용승(龍昇)하는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 하였다.

이후 '863번 지방도 옥천로'를 따라 진행하다,

좌측으로 '여러 펜션가'와 '감도항' 바라보고~

(13:20) 남파랑길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갈림길에서 '863번 지방도 옥천로'

도로를 벗어나, 좌회전하여 '감도해변'으로 내려간다.

(13:22) '감도해변'으로 내려서서 우회전하여,

펜션가 입구 앞을 지나 '인금이길'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감도해변' 끝자락 '웅담가 선착장' 바라보고~

그렇게 '감도해변' 벽화를 바라보며 진행하다,

담장이며 집안 치장이 조금은 혼란스러운 '유화민박'집을 지난다.

(13:29)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우측 방향의 마을 골목길로 진행하고~

우측위로 사각정자가 보이는 농로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지나온 방향의 '웅담가' 포구를 내려다보고~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건너편 '감도포구'가 내려다보이고,

'감도해변'으로 내려서서 우회전하여 전방으로 '감도교회를 바라보며 진행이다.

감도마을 앞바다 멀리로 '간도' 바라보고~

'감도 선착장' 우측으로 '소운두도'와 그 뒤쪽 '운두도' 바라보고~

(13:38) '감도교회'를 바라보며 '863번 지방도 옥천로'로 올라서서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13:40) 도로 좌측 편에 '중촌마을.버스정류장'이, 우측 편에 '이천마을.버스정류장'이

있는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이천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고~

이후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의 마을 골목길로 진행하다,

'이천마을'을 벗어나고 마을 뒷산 숲속 임도로 진행이다.

(13:46) 급경사 S라인 임도를 올라서서,

임도 고갯마루에 도착하고~

(13:54) 임도 고갯마루를 내려서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이천리'를 지나

다시 '옥적리 소옥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옥적리의 북동쪽에 있는 비봉산 일대는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산[馬踞山(마거산)]'이라 불렀는데,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큰 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옥피리형 지세는 풍수지리설에 자손들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고 하는데,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산의 동쪽 큰 골짜기 마을은 '대옥'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하였다.

 

 

 

이후 전방으로 '소옥1제 저수지'를 바라보며,

제방길인 '작은골길'을 진행하고~

'소옥1제 저수지' 윗쪽 '소옥마을' 바라보고~

(14:06) '소옥1제 저수지' 제방 끝에서 좌회전하여,

'작은골길'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이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을 따라,

(14:13) '소옥마을'로 들어서고~

우측으로 '소옥마을 경로당'을 보면서 마을 안으로 들어서고,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의 마을 골목길로 진행이다.

'소옥마을' 동구 밖 정자에 선 채로 물 한잔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14:18) 다시 출발하는데, 우측 밭지대에는 '태양열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14:24) 농로 삼거리갈림길에서 '섬숲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이천마을'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이후 농로 좌우로 설치된 '태양열 시설물'

밀집지역을 빠져나오고~

(14:30) '이천마을'로 이어지는 임도 오르막길을 진행이다.

포장된 그늘 숲길이라 다행이기는 하지만 오르막길은 늘 부담으로 다가오고,

양 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아놓은듯한... 천근만근~ ㅎ

(14:35) '남평문씨 강진파 납골묘'를 지나고~

(14:37) 기울어진 섬숲길 이정표가 있는 고갯마루를 지나 조금 내려서서,

남파랑길 이정표가 서 있는 'T자' 갈림길에 도착이다.

근처 그늘진 곡각지점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찹쌀떡과 식혜1캔으로 간식하며 8분 휴식이다.

(14:50) '그로브 농부의정원' 팬션&카페를 지나고~

'여자만' 바닷가를 가득채운

'소운두도', '자래섬', '운두도' 바라보고~

(14:54) 농로 사거리 갈림길을 만나고~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진행해야하는데,

예전에 부착된 남파랑길 시그널을 따라 진행하느라 9분 알바 ㅠㅠㅠ~

(15:03)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두루누비 앱이 가르키는 코스대로 우회전하여 진행이다.

(15:08) '863번 지방도 옥천로'로 올라서서 우회전하여,

전방으로 '이천교회'를 바라보며 진행하다 '화양면이천.버스정류장'을 지나고~

그렇게 '863번 지방도 옥천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도로 갈림길 좌측 아래의 '이천선착장'과 '이천해변'을 바라보고,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좌측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간도' 바라보고~

(15:18) '이천리 버스정류장' 앞을 지나면서 우측으로 보면,

'오마이 황토펜션'이 자리하고~

(15:22)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이곳에서 '863번 지방도 옥천로' 도로를 벗어나,

좌회전하여 '오천.버스정류장'과 '오천 경로당' 사잇길로 진행이다.

오천(梧川)마을은 「오동나무로 만든 통나무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오동나무 오(梧)’ 자와 ‘내 천(川)’ 자를 써서 ‘오천’이라 하였다.

토박이말 이름은 오동나무의 다른 이름인 '머구나무'에서 유래한 ‘머구내’이다.

오천마을은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오동천(梧桐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오동나무 통으로 만들어진 샘이 있었으며

주변 마을에까지 좋은 물로 소문이 나 이 물로 병을 고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5:24) '오천 방조제' 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정면 앞쪽에는 펜션촌이 조성되어 있고~

좌측으로 '오도' 바라보고~

이후 '섬숲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가사리방조제' 방향으로,

펜션단지 아래 해안을 빙 둘러 이어지는 해안산책로를 길게 진행이다.

'성끝 방파제' 바라보고~

(15:35) 길이 808m의 '해상데크길'로 진행하고~

이 화양면 이천지구 해상데크는 '여자만 갯노을길' 중 일부 구간으로 추진된 탐방로다.

해상데크 중간중간에는 '쉼터 벤치'와

'인명구조함'이 설치되어 있고~

'여자만' 바닷가 바라보고~

(15:47) '해상데크길' 출구로 나서서,

'관기 배수갑문'을 향해 진행이다.

(15:50) 우측 위 '863번 지방도 옥천로' 도로에서 내려오는

자전거길을 만나 '관기 배수갑문' 방향으로 진행하고~

(15:53) '관기 배수갑문' 앞에서 좌회전하여,

방조제 탐방로를 따라 진행이다.

그렇게 '관기 배수갑문' 방조제로 들어서면 이제까지 이어오던

'화양면 이천리'를 벗어나, '화양면 창무리'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화양면 창무리(昌武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화양면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고,

북으로는 소라면 관기리에 접하고 남으로는 용주리에 접한다.

마을 서쪽은 비봉산이 있어 서고동저형의 지형으로,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이 바다를 끼고 있는 화양면 지역에서 바다와 접하지 않은 마을에 속한다.

조선시대 『호구총수』에 ‘창무정’으로 기록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백초·화교를 포함하여 법정리인 창무리가 되었다.

백초리·화교리·창무리 등의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화양면의 입구에 있는 창무마을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문꾸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문꾸지’는 ‘문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화양면 지역에 곡화목장이 설치되어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송소마을에서

오천마을에 걸쳐 성을 쌓고, 성문을 이 마을에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창무’란 이름도 ‘문꾸지’와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의 옛 땅 이름 중 하나인 ‘창마징이’의 유래에서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오는데,

‘칭마징이’는 ‘창으로 막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서 생겼다는 이야기와 돌산만호진 입구를 지키는 창을 든

초병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창마징이’의 음을 표기하여 ‘창무정(昌武亭)’이라고 기록한 내용은 1789년의 『호구총수』이며,

기록으로 처음 나타나는 이 마을의 이름이다.

창무리의 서쪽에 자리 잡은 백초마을은 본래의 ‘신추’라는 마을 이름을 ‘하얀 풀’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흰 백(白)’ 자와 ‘풀 초(草)’ 자로 표기하여 ‘백초(白草)’라 하였다.

신추라는 땅 이름은 여수 지방 여러 곳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거문도·소거문도·개도·낭도·

돌산 등의 주로 해안 지역에 전해오는 땅이름이다.

‘센추’라고도 한다.

하얀 풀이 많은 지역으로 알려진 ‘신추’나 ‘센추’라고 하는 이들 지역을 답사해보면 공통적인

지형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해안가의 바위가 절벽이나 급경사의 비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창무마을과 백초마을 사이에는 배나무가 많았다는 ‘배낭골’과 ‘잿등’을 비롯해 양달·잔닥개·

두골골창·홈테골·속돌 등의 이 마을만의 독특한 땅이름들이 전해온다.

‘칠성바위’라고 알려진 7개의 고인돌 등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전해준다.

관기마을과의 사이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관기들이 넓게 펼쳐지고, 마을 남쪽으로는

밭이 많아 갓과 옥수수·수박·토마토 등을 많이 재배한다.

마을 동쪽으로 국도 77호선이 지난다.

창무리에서는 근대에 훌륭한 선각자들을 배출하였다.

먼저 여수 지역 3·1운동의 기수로 알려진 이 마을 출신의 윤자환 열사는 천도교도로서,

1919년 3월 2일 전라북도 남원의 유태홍의 집에서 기미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을

촉구하는 대자보를 가져와 율촌 등 여수 지역에 전파하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같은 집안의 윤형숙 열사는 20세의 어린 나이로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1919년 3월 10일 광주 장날을 맞아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 경찰의 칼날에 한쪽 팔을 잃으면서도 만세를 부르다 잡혀가 대한여성의 기개를 한껏

드높인 인물이다.

감옥을 나와서도 결혼하지 않고 개화기의 사회계몽 운동에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열사의 행적은 주변에는 알려졌지만, 관심을 두는 이가 적어 묻혀 있다가

향토사가와 문중의 노력으로 시에 전해져, 최근에야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져 서훈하였다.

창무리 입구는 지금도 촌로들이 ‘문(門)’이라 부르는데, 윤형숙 열사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해 있어

오가는 이의 귀감이 되고 있다.

목장의 경계를 하였던 만리성은 지금도 여러 곳에 성터의 흔적이 남아서 화양 지역의 역사를 전해 준다.

백초마을은 동물 가면을 이용한 좌수영 수군들의 진중농악인 ‘신추농악’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진중농악의 기능 보유자들이 연로하고, 이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후세에 전수하지 못해

마을의 나이든 주민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여자만(汝自灣)을 바라보고~

'관기방조제'길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함께 가는 길이다.

그렇게 진행하면 '관기방조제' 중간 지점부터

'화양면 창무리'를 벗어나, '소라면 현천리'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소라면 현천리(玄川里)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여수군 설립시 덕안면 지역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현천·마륜·오룡·가사리를 병합, 소라면에 편입하면서

법정리인 현천리가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여수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여천군 소라면이 되었으나,

1998년 4월 1일 삼여통합에 따라 여수시 소라면이 되었다.

행정리인 마륜·단계·오룡을 포함하고 있다.

쌍둥이마을과 소동패 놀이로 잘 알려진 현천리1구에는 선천·중촌·오룡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현천이라는 마을 이름은 본래 이름이었던 ‘가무내’를 한자로 바꿔 적은 이름이다.

‘가물(검을)현(玄)’과 ‘내천(川)’이라는 훈을 빌려 쓴 이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무내’라는 마을 이름의 뜻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천에 물이 적어서 가물어 있다는 뜻이라고

전해오는데, 말라 있는 개천이란 뜻의 ‘건천(乾川)’이라 하지 않고 현천으로 표기하였다.

다른 지역의 ‘가무내’란 땅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가무내’는 ‘감’과 ‘내’란 말이 합성된 말로

옛말 ‘감’은 큰 산을 이르는 말이었으니, 가무내는 큰 산 아래의 냇가로 설명하고 있다.

가무내란 개천은 우리나라 곳곳에 전해지는 땅이름 중 하나로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선천·중촌·오룡을 1789년의 『호구총수』 기록과 비교해보면 현천·중촌(中村)·

오룡정(五龍亭)으로 기록되어 있어, 처음 현천마을은 오늘날의 선천(先川)마을을

이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천마을은 냇가가 마을 앞에 있다는 뜻으로, 1897년 여수군이 설립되면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단계(丹桂)’라는 마을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천으로도 부르는 중촌마을은 『호구총수』에서는 중촌으로 등장하지만, 1897년의 여수군 설립시

기록이나 1914년 일제의 기록에 모두 현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풍수가 연화부수지여서 부자가 많이 난다고 전해왔다.

특히 이 마을의 정씨 가문은 조선 후기에 만석꾼 부자로 이어져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이 가문의

후손이었던 정충조가 일제에 항거하며 여수 지방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룡마을은 마을을 둘러싼 산의 모양이 다섯 마리의 용의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현천2구 마을인 마륜(馬輪)마을은 외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곳으로, 『호구총수』에서는

기와를 굽던 곳의 뜻을 가진 ‘와지(瓦旨)마을’이란 기록으로 전해온다.

마륜이란 마을 이름은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는데, 외지라는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을 뒷산의 이름인 천마산에서 인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천마산은 철마산이라고도 하며, 일본이 정기를 끊기 위해 설치했다는 쇠말뚝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이 전설은 1910년을 전후로 측량 기점을 표시하기 위해 산 정상에 설치했던 표시석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다.

현천3구 마을인 가사(佳沙)마을은 아름다운 모래 해변이란 뜻의 한자 풀이로, 마을 유래가 전해온다.

한자의 뜻보다는 어느 지역의 갓 지역이라는 뜻의 ‘가새’란 뜻의 마을 이름으로 보인다.

가사마을에는 농곡(農谷)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논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논골’을 한자로 고쳐 농곡마을이 되었다.

농곡마을 뒷산 골짜기는 길이가 길어서 ‘진골’이라고 하고, 현천마을과의 사이에 국사봉이 자리하고

있어서 신선바구·메뚜기바구·선바구·굴바구 등의 재미있는 바위 이름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

현천리와 사이의 산에는 밥을 할 때마다 쌀이 나오던 쌀바구가 있었으나 한꺼번에 많은 쌀을 원하던

욕심 많은 행자 때문에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가사리 마을 서쪽 해변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와 잠긴 바위 웅덩이에 불에 달군 돌을 넣어

온천욕을 하던 해수탕이 전해온다.

쌍둥이마을로 더 잘 알려진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현천1구 중촌마을은 1970년대 말 방송을 통하여

쌍둥이가 많이 태어나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1989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후 풍수지리를 비롯해서 수많은 종류의 쌍둥이 탄생과 관련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특별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또 2011년 9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탄소중립' 개념을 적용한 건물인 여수YMCA 생태교육관이

개관하기도 하였으며,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앞두고 가사마을 부근에 ‘가사리 생태학습공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 많은 사람들이 가사리 갈대밭을 찾고 있다.

소동패는 어른들의 대동패와 구분되는 모임으로,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마을의 소년단이나

청년단에 해당하는 단체이다.

하지만 현재 소동패 놀이의 재현에는 60~70대 고령들만 참여하여 안타깝다.

(16:00) 연장 580m의 '관기방조제' 북쪽 끝으로 나가,

'관기길' 도로를 만나고~

(16:02) 좌회전하면, '여수시 자전거도로 종합 안내판',

'여자만 갯노을길 종합안내판' 및 '가사리 생태공원 안내판'이 차례로 세워져 있는

남파랑길 58코스 종점이자 59코스 시점이다.

'관기방조제' 끝 귀퉁이 전봇대 옆 '대곡마을'을 알리는 이정표 밑에

59코스 시작점 패널이 붙어 있고~

오늘 남파랑길 진행은 여기까지...

목표했던 남파랑길 여수 58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두루누비&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여수 58코스를 종료한다.

이후 '소라면가사.버스정류장' 뒷편 사각정자로 이동하여 의관 재정비하고,

(땀에 젖은 상의 갈아입고 윈드쟈켓 꺼내 입고, 남은 음식 떨이하고...)

여수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교통편을 알아보니,

여수84번 시내버스가 이곳 '소라면가사.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데,

종점인 '가사리.기쁜요양원'에서 (19:00) 출발이다.

카카오택시. 여수개인택시를 호출해봐도 택시가 잡히지 않고,

그러고보니 오늘이 '여수불꽃축제'하는 날이라 더욱 택시잡기가 어렵다.

그러는도중 오늘 점심무렵 '석교마을 방조제' 입구에서 점심을 해결할때

앞질러간 부부1팀이 도착하고,

부산진구. 서면에 거주하시는 중년부부인데 58코스 들머리인 서촌마을에 차량을 주차해 놓았단다.

서로 교통정보를 공유하고, 할 수 없이 그나마 버스가 많이(?)다니는

'창무삼거리'까지 같이 도보로 이동하기로 한다.

(16:30) 출발하여 지나온 '관기방조제'를 역으로 다시 진행하여 '옥천로' 도로를 따라

무려 1시간10분 더 걸어 (17:40) '창무삼거리.버스정류장'에 도착후 부산.중년부부와 헤어지고~

(17:43) 창무삼거리.버스정류장에서 26번/미평行 여수시내버스를 타고

(18:28) 여수종합터미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하차,

여수종합터미널근처 터미널휘트니스사우나에서 땀냄새 칼긋게 제거후,

내가조선의국밥이다 식당에서 돼지국밥과 소주1병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20:00) 부산行(무정차)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에서 택시타고 양산.내송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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