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3.10.28
코스: 원포.버스정류장(시점)-봉화산.들머리-임도/봉화산갈림길-이목안포로-데크쉼터-산전삼거리
-산전.버스정류장-구미제저수지-전동마을.표지석-구미마을.버스정류장-이목리마을회관
-신기마을.버스정류장-서연리마을회관.갈림길-대서이연말동네.버스정류장-소서이.버스정류장
-화양면대서이.버스정류장-농들재.고갯마루-서촌마을.버스정류장(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8.06km (두루누비기준 17.9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49분
▶ 갈때 : 전날 여수종합버스터미널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두바이모텔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익일 (05:32) 여수시외버스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28번/백야도行 여수시내버스를 타고
(06:34) 원포.버스정류장에 하차, 트레킹 시작
▶ 올때 : 여수57구간 마치고, 여수58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57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원포.버스정류장'
'원포.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진 남파랑길 여수 57코스 안내판 앞이
남파랑길 여수 56코스 종점이자 57코스 시점이다.
남파랑길 안내판의 명소로는 '가막만 조망'과 '고봉산 정상',
그리고 '서이산 전경'이 소개되고 있는데,
'고봉산 정상'은 실제 진행 코스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06:41) 답사준비를 마치고 두루누비&트랭글 앱 켜고
남파랑길 여수 57코스 시작이다.
원포.버스정류장에서 좌측의 마을 안길인 '셋돔길'로 진행하고~
(06:45) '원포마을' 안을 흐르는 하천 다리를 건너,
'200m' 지나 '서촌'과 '디오션CC'가 갈린다는 교통표지판을 보면서 '이목안포로' 도로를 만나고~
이후 '서촌'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우측으로 보면,
경로당 옆에 '느티나무 당산목'이 보이는데 수령 330년 이상의 보호수다.
(06:48) '안포1교차로'에서 좌측 '디오션CC' 방향으로 좌회전하고~
'디오션CC' 진입로를 잠시 진행하다,
우회전하여 도로를 건너고~
(06:51) '봉화산가는길' 이정표를 바라보며 계단길을 올라간다.
남파랑길 이정표 거리 표지에는 종점까지 9.5km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오류이며
실제로 남은 거리는 15~6km 정도이고, 봉화산 정상까지는 1.0km 거리다.
그렇게 계단길을 올라서서 숲길로 들어서기 전 뒤돌아서
'원포마을'을 바라보는데, 일출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후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시작되고~
(07:07) 조망이 약간 트이는 암반위에 올라서고~
배낭을 내리고 물 한잔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의관 재정비하며 (윈드쟈겟 벗고) 5분 쉬었다 간다.
'가막만' 바닷가와 '디오션CC'를 바라보고~
이후 넓은 등로를 잠시 지나면,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후 급경사의 오르막길은 시작되는데, 숨이 목구멍까지 차 오르고
도심구간을 지날때 평탄한 도로에 익숙해진 몸이 상당히 무겁게 느껴진다.
두 다리는 마치 쇠붙이를 매달아 놓은듯하고...
아~ 저주받은 저질 체력 ㅠㅠㅠ
(07:23) '봉화산' 임도를 만나고~
이곳에서 직진하여 300m만 가면 '봉화산 정상'인데,
마음은 '봉화산'이라 외치는데 몸은 자연스럽게 우측 봉화산 임도로 진행이다. ㅎ~
우측 아래로 '중시루봉'과 '하시루봉' 바라보며,
임도따라 길게 진행하고~
(07:32) 좌측으로 '봉화산(372.4m)'으로 올라가는 등로가 있지만,
무시하고 계속 임도를 따라 진행이다.
벌개미취...
그렇게 진행하면 임도 능선을 경계로 우측은 '화양면 안포리'이고
좌측은 '화양면 장수리'로 나눠진다.
화양면 장수리(長水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동쪽으로 안포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이목리와 접하며
마을 뒤쪽으로 봉화산이 솟아 있어 마을을 안고 있는 형국이다.
화양지구관광개발구역의 중심지이며 봉화산 남쪽 산자락에 형성된 공정·자매·수문·장척·장등마을의
경관이 다도해와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가 확정되면서 화양지구관광개발의 필요성이 더욱 커져, 골프장·리조트·
해수욕장·낚시터개발 등의 사업들을 진행하려 하였으나 현재 까지도 사업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호구총수』에는 현재 장수리에 있는 마을로 장등·장척동·수문동·자을매여가 기록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여수군 화양면 장수리가 되었고,
1949년 여천군 화양면 장수리가 되었다.
1998년 삼여통합으로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장수리는 ‘장척’과 ‘수문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장수리’라 하였다.
장수리는 공정(公亭)·자매(自梅)·수문(水門)·장척(長尺)·장등(長燈)마을이 통합된 법정리이다.
각 마을의 이름 또한 유래가 있다.
장수리의 자매마을은 마을 뒷산에 자생하는 매화나무가 많아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자매’라는 이름의 한자를 풀이하여 나온 이름이다.
자매마을의 우리말 땅이름은 ‘잘미’라고 하였다.
‘잘미’란 뜻을 풀어보면, 산이란 뜻의 옛말인 ‘자’에서 연유된 말로 ‘자+뫼〉자뫼〉자메〉잣메 〉잘메〉
잘미’로 변화되어, 산 아랫마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자매’는 ‘잘미’를 음차(音借)하여 적은 한자로, 한자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이두식 표현이다.
잘미 남쪽의 공정마을의 옛 이름은 ‘공진이’였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음이 비슷한 ‘공정’으로 표기하였다.
예로부터 마을의 지형이 지네처럼 길게 생겼다 하여 지네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공정마을 동쪽 건너편에 있는 당(닭)머리가 풍수지리상 닭의 지세인데, 닭과 상극인 지네혈인
‘공진이’가 바다로 나가려는 형국이지만 닭이 지켜보고 있어 움츠리는 지세가 되었다고 한다.
공진이를 한자로 ‘공진(蚣進)’으로 해석하여 지네가 나아간다는 뜻으로 풀었기 때문이다.
수문마을은 옛 이름이 ‘수문동’이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물 수(水)’ 자와 ‘문 문(門)’ 자의 한자를 풀이하여, 장수만 바다의 문이
이 마을에 있어 바닷물의 근원지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역시 한자를 풀이한 이름이다.
수문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 이름은 대부분 숨어 있다는 뜻의 우리말인
‘숨은’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가까운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의 수문포(水門浦)[숨은개]와 소라면 가사리의
수문개[水門浦][숨은개]도 바다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수문동마을도 바다에서 보면 마을 앞의 산등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
이에 따라 ‘등 속에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의 ‘숨은등’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그러나 한자 표기인 ‘수문(水門)’이라는 글자 때문에 뜻이 왜곡되었던 것이다.
수문마을 앞 어귀의 ‘날개’라는 모퉁이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던
돌무덤이 남아서 여수 지역 동학의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수문마을 동쪽의 장척마을의 옛 이름은 ‘장자골’이다.
장자골은 한자로 ‘장자곡(長者谷)’이라 하여 부자가 살던(예전에는 부자를 ‘장자’라 하였음)
마을이라 전한다.
마을을 한자로 ‘장척(長尺)’이라고 한 것은 ‘장자골’ 중에서 ‘장’은 음을 빌어[音借] ‘장(長)’으로
표기하고, ‘자’는 길이를 재는 ‘자 척(尺)’의 의미로 훈을 빌려와[訓借] ‘장척’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소라면 사곡리의 장척마을도 장자터마을이 변한 이름으로, 부자 마을이란 뜻이
엉뚱하게 장척으로 변하여 ‘길이를 재는 긴 자’라는 뜻이 되었다.
장척마을 동쪽의 장등마을의 옛 이름은 마을이 봉화산 자락과 함께 긴 산등성이를
이루고 있어 ‘진등’이라고 불렀다.
‘진등’은 한자로 쓰면서 ‘장등(長嶝)’으로 바뀌었다가, 불빛이 멀리 비추라는 뜻의 ‘등(燈)’ 자로 바뀌었다.
마을 뒷산에 백야곶 봉수대가 있어 봉수대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마을에 전해오고 있다.
마을의 풍수가 좋아 인물이 난다는 믿음과 멀리 떠날수록 마을 이름의 뜻 때문에
큰 인물이 된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07:38) '장수리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 도착하고~
'여자만' 바닷가 바라보고~
반원형의 '여수반도' 서쪽 끝자락과 '고흥'으로 이어지는 섬 들이다.
반원형 반도 끝 지점에 '해넘이 전망대'가 있고,
'고흥'으로 넘어가는 '화양면'과 '조발도'를 잇는 '화양대교'가 보이고,
우측 맨 뒤편으로 고흥의 진산 '팔영산'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07:45) '고봉산 전망대'로 이어지는 임도 갈림길에서 남파랑길은
'고봉산 전망대' 방향이 아닌 우측이다.
이후 임도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라 발걸음도 가볍고~ ㅎ
이후 온전히 '화양면 안포리'로 이어지던 임도가 '화양면 화동리'로
행정계가 바뀌는데, 정확한 경계지점은 잘 모르겠다.
화양면 화동리(華東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동쪽은 안포리, 서쪽은 서촌리와 이목리,
남쪽은 장수리와 안포리, 북쪽은 나진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본래 여수(천)군 화양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선조 때 곡화목장의 감목관청이 있었으므로
곡화, 또는 감목관청의 동쪽이 되므로 동촌·화동 또는 상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따라 평촌·통후·안양·대청·산전리를 병합하여 화동리가 되었다.
1963년 대청·안양·산전이 행정리인 청량리로 분동되었으며,
1998년 4월 1일 여천군·여천시·여수시의 통합으로 새로운 여수시 화양면이 되었다.
화동리의 이름은 곡화목장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곡화의 ‘화(華)’와 동쪽의 ‘동(東)’을 합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이 마을의 옛 이름은 동편·댕핀·코캐 등으로 전해진다.
댕핀은 동편의 방언이고 코캐는 곡화(曲華)가 변한 말이다.
곡화는 조선조 초기부터 지금의 화양면 지역에 자리했던 곡화목장의 감목관이 거주했던
중심 마을이었기에 목장의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의 기록에는 화동이라는 이름은 없고 돌고개(乭古介)란 이름으로
나타나 있어 예전에는 돌고개가 마을이름으로 불렸던 모양이다.
돌고개는 화동리의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고인돌고개로, 느티나무·팽나무와 함께 큰 바위가
쉬어가기 좋게 놓여 있어서 여름철에는 마을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시원한 쉼터를 제공해 주던 곳이다.
이 바위들이 고인돌이라고 알려진 것은 불과 십수 년에 불과하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매장 풍습으로 알려졌으며, 오래 전부터 이 지방에 사람이 산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적 유산으로, 화동마을 일대는 농공단지 조성으로 파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백 기의
고인돌이 산재한 고인돌의 천국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화동마을 장년층에게는 어린 시절 고인돌 주변에서 돌화살촉이나 돌칼을 주워서
놀았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화동리 고인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조선조 곡화목장이 있던 시절에 감목관들의 치적을 기리는 글을
비석 대신 고인돌의 표면에 새겨 넣었다는 점이다.
2기의 고인돌이 고갯마루에 남아 있는데 빙옥같이 투명하게 다스렸다는 빙옥기정(氷玉其政)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고갯마루 뒤편에 세워진 화양고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뒷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다.
동구 근처 고개에 이처럼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었기에 돌고개란 이름이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름으로 시장이었던 저잣골, 건너 마을인 건너똠,
말에서 내려 걸었던 하막(마)등, 나무통샘, 뒤의 마을 통후동,
가죽을 다루던 사람이 살았다는 갓바치가 있고, 장터라는 곳은 화동리 동쪽 안골과의
사이에 있는 들로서 곡화목장 시절에 곡화목에 유일하게 장이 섰던 곳이다.
보름마다 만조가 되면 안정리 해안선을 따라 안골마을 아래까지 배가 들어와 장을 열었던 곳으로,
이 장은 조선 말기까지 열다가 조선 후기부터는 뱃길이 편한 나진마을로 옮겨가서
나지포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여천군 마을 유래지』의 안양동(安養洞)을 보면, 노승 한 분이 마을 앞을 지나다
"마을 이름을 안양이라 지어 부르면 자식들이 고이 자라며 부모에게 효를 다해 받들어 모시며
마음이 편하게 되리라"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안양동의 이름을 한자 풀이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 마을에 전해져 오는 옛 이름은 ‘안양골’이었다.
노승이 아니라도 동촌의 안쪽 양지쪽 마을이란 뜻으로 자연스럽게 지어진 이름이다.
마을 뒤의 안양산(安養山)은 옛기록에는 화산이라 하여 화양면의 이름이 생겨난 매개체로서
산자락에는 안양사 절터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안양마을 남쪽의 대청동(大淸洞)마을은 대청몰이라 하였으며, 마을을 이루기 전 대청사라는
큰 절이 있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오지만 이를 확인할 만한 옛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설을 조사한 마을 유래 소개에서 대청사의 동서남북에는 네 곳의 암자가 있었다.
동쪽 암자는 소장리의 한도재, 서쪽은 이목리, 남쪽은 이영산의 중턱, 북쪽은 안양산에 있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 안양산과 이영산의 절터는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
구체적인 조사를 한다면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마을에 전해지는 많은 이름들 중에 흔들바위의 다른 표현인 ‘깐닥바구’라는 이름이
퍽이나 정감있게 들렸다.
이밖에도 활처럼 휜 ‘활바구’, 방아가 돌아가는 모양으로 생긴 ‘방앳돌이’,
도랑골, 뛰어서 건너지는 ‘건내바구’ 등의 재미있는 이름들이 전해온다.
(08:02) 전방으로 '이목안포로' 도로가 보이는 'Y자' 임도갈림길에서
남파랑길은 우측이다.
(08:04) 정자쉼터와 간이주차장이 있는 '이목안포로' 도로를 만나서,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이목안포로' 도로는 '여수' 남쪽 끝자락의 서쪽 '이목리'와
동쪽 안포리까지 가로지르는 도로인데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다.
(08:08) 도로 좌측으로 '고봉산 전망대'로 연결되는
또 다른 임도길을 지난다.
쑥부쟁이...
우측 숲사이로 '화동리 산전마을' 바라보고~
(08:12) '화동리 산전마을' 입구를 지난다.
이후 도로 우측에 넓게 조성된 자전거길 및
보행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고~
(08:36) 도로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지점에 세워진
이정표는 '↑이영산, →고봉산2.2km를 알리고~
이곳을 지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화양면 화동리'에서
'화양면 이목리'로 행정계가 바뀐다.
화양면 이목리(利木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 여수반도 서쪽 화양반도의
남서쪽 서이산과 이영산 자락 서쪽에 형성되었으며, 여자만과 인접하고 있다.
본래 ‘배낭기미’라 불리던 마을이다.
우리말 고어(古語)에 ‘크다’라는 뜻의 ‘
’과 바닷가란 뜻의 ‘기미’가 더해져 ‘
기미 〉 뱃기미 〉
배기미 〉 배나무기미 〉 배낭기미’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한자로 ‘배나무+구미’라는 뜻으로 이목구미(梨木九味)라고 표기하였으며,
이것이 이목리의 유래가 되었다.
면소재지로부터 남서쪽 약 9㎞ 지점에 위치하며
서이·연말·신기·구미·전동·벌구·가정 등의 마을이 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군 화양면 이목리가 되었고,
1949년 여천군 화양면 이목리가 되었다.
1998년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여수시로 통합됨에 따라 여수시 화양면 이목리가 되었다.
농업을 위주로 하며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과 바지락 채취 등 마을 어촌계가 형성되어
주민 소득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2017년 화양면 이목리에서 안포리까지 동서노선 6km와
장수리에서 안포리까지 남북노선 2.3km 등 총연장 8.3km의 왕복 2차선 도로를 개통하였다.
도로 건너편 벤치쉼터에는 '구절초'가 반기고~
(08:39) 데크전망대 쉼터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햄버거와 테라 캔맥주 큰거 1캔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하며 10분 쉬었다가 간다.
(08:49) 가야할 남파랑길을 가늠해보고,
다시 출발이다.
그렇게 '고봉산'과 '동성산' 자락을 돌아온 '이목안포로' 도로가 끝자락에 이르니,
도로는 급한 경사도로 '동성산' 자락을 휘감아 내려가고~
전방으로 '팔영대교' 땡겨보고~
(09:00) '500m' 전방에 '장수'와 '서촌'으로 갈리는,
'자매로' 도로가 있다는 교통표지판을 지난다.
'자매로'라는 도로 이름은 길 끝에 있는 '장수리'의 '자매마을'에서 온 것인데,
'자매마을'이라는 이름은 여자형제를 뜻하는 자매는 아니고, 마을 뒷산에 자생하는
매실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09:05) '이목안포로' 도로가 끝이나고,
'자매로' 도로가 지나는 '산전삼거리'를 만나, 방향표지기 안내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고~
그러나 남파랑길 이정표에는 57코스 종점을 좌측 변경 전 방향을 표시하고 있고,
종점까지의 거리도 6.3km로 표시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아직 약 10km 정도 더 남아있다.
(09:07) '산전삼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09:10) '자매로 카라반 캠핑장'을 지난다.
벌개미취...
좌측으로 '이목리 산전마을' 바라보고~
(09:13) '산전 버스정류장' 앞에서 '자매로' 도로를 벗어나,
좌측 아래 '산전마을'로 내려간다.
(09:16) '이목리 산전경로당' 옆 골목을 빠져나와 좌회전하고~
이목리 산전(山田)마을
전동 마을 위쪽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로, 자치내(雌雉內)라고도 부르며,
조선시대 송전으로 지정되었던 지역이다.
자치내는 「산 안쪽 마을」이란 뜻의 우리말 땅이름으로,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암꿩이라는 뜻의 자치(雌雉)로 표현하여 암꿩과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으며,
이곳을 ‘암꿩혈’이라며 풍수지리를 곁들여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후 '산전마을'을 벗어나 '자치내길'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이다.
(09:24) 그렇게 함께 이어오던 '자치내길'이
'전동길'로 도로명이 바뀌고~
제법 규모가 큰 '구미제 저수지'를 만나,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둑길을 따라 진행이다.
(09:32) '이목리 전동마을' 고목을 보면서 진행하고~
이목리 전동(典洞)마을
구미마을 동쪽 이영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전몰이라고도 하였으며,
전(全)씨가 많이 살아서 생겨난 마을 이름이다.
마을에 자체 규범을 만들어 마을 일들을 처리하여 '전동'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는 마을에 전해지는 유래는, 마을 이름에 '典(법 전)' 자가
표기되어 생겨난 유래이다.
(09:36) '전동마을' 표지석을 지난다.
(09:40) '863번 지방도 화서로' 도로를 만나 우회전하여,
'구미마을 버스정류장' 앞을 지난다.
남파랑길 이정표에는 '여수 57코스 종점' 방향은 맞지만,
종점까지 3.5km는 변경 전 거리 표시다.
이목리 구미(九味, 龜尾)마을
이 지역의 땅이름이 '구시날'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구시날'을 한자로 옮기면서 거북꼬리라는 뜻의 구미(龜尾)로 표기하였는데,
일제 때 쉬운 한자로 고쳐 아홉 구자를 써서 구미(九味)로 바꿔 쓰고 있다.
‘구시날'의 뜻은 마을 뒷산인 이영산에서 흘러내린 골짜기가 구미마을 앞에서 깊이 파여
그 형상이 마치 소나 말의 먹이인 여물을 담는 구시처럼 생겨 ‘구시날'이라 하였고,
‘구시날'이 있던 곳이 해안이어서 ‘구시기미’ 라고 부르게 되었다.
(09:42) 이후 '863번 지방도 화서로' 도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남파랑길 방향표지기가 우회전하도록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지도를 바라보니, 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해 나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한데,
우측으로 빙 돌아 '이목리 이목마을'을 경유하도록 코스가 정해졌다.
그냥 도로를 따라가면 위험해서 일까???
할 수 있나???
남파랑길 코스대로 따라 갈 수 밖에~ ㅠㅠㅠ
이후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09:46) 땡볕에 농로 오르막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좌측 사면 농로로 방향이 바뀐다.
좌측으로 '구미마을 벌구방파제' 바라보고~
정면아래 '이목방파제'를 바라보면서 진행하다,
잠시 내려서고 다시 우측 샛길을 따라가면 앞쪽으로 '이목교회' 건물이 보이고~
'서이산' 바라보고~
남파랑길 57코스 안내판의 명소에 소개된 '서이산 전경'이다.
'서이산'이라는 이름은 '서리태'라는 콩이름이 쥐의 귀를 닮았다고 붙은 것처럼
산 위 바위의 모양이 쥐의 귀를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09:53) '이목교회' 안으로 들어서서,
교회 앞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간다.
'유자나무' 맞제???
이후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이목마을'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고~
(09:58) '이목마을회관'을 지난다.
이목리의 마을 이름은 이 지역을 본래 '배낭기미'라고 불러왔기에,
이를 '배나무+구미'라는 뜻으로 이목구미(梨木九味)라고 한자로 표기하며 만들어졌다.
이목구미는 충무공의 난중일기에서 여자만을 지나던 충무공께서
순천부사와 조우하는 내용과 함께 전해오기도 한다.
배낭기미의 뜻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배나무가 많았던 기미라고 전해지나,
배나무와는 관계가 없는 「큰 구미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 고어(古語)에 `크다'라는 뜻을 가진 '
'과 바닷가란 뜻의 '기미'가 더해져
'
기미 > 뱃기미 > 배기미 > 배나무기미 > 배낭기미 '로 변했다.
가야할 해안길과 '서연마을'을 바라보고~
(10:03) '863번 지방도 화서로' 도로를 다시 만나고,
좌회전하여, '신기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신기마을은 ‘새터’ 마을을 한자로 음차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초등학교가 있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던 큰 마을이었으나,
최근 농촌인구의 감소로 을씨년스럽게 변해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하였다.
마을 동산 뒤편에는 ‘오시박골’이라는 작은 골짜기가 있고
이곳에 ‘불 뜬 자리’라는 곳이 전해온다.
땅의 좋은 기운을 끊기 위해 일본인이 불을 놓아 뜸을 떴다는 자리이다.
(10:07) '서연마을'로 연결되는 삼거리를 만나고,
남파랑길 이정표 안내 따라 우회전하고~
종점까지 5.7km 남았고, 약 27분 전 '구미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난 지점에서
'863번 지방도 화서로' 도로따라 직진해 온다면 약 0.6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산허리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힘들게 진행하여 이목교회와 이목마을을 거쳐
빙 돌아오는 코스로 진행하여 거리는 1.5km로 더 늘어났다.
'이목방파제'와 구미마을 벌구방파제' 바라보고~
'서연마을 방파제' 바라보고~
'서연마을'은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서우' 또는 '시우'라는
물고기를 많이 잡던 곳이라고 한다.
'서연마을'의 이름이 '서우개'와 '연말마을'을 합친 것이데
'서우개'가 바로 '서우'가 많이 나던 곳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서우' 또는 '시우'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려웠다.
누군가는 '상어'의 일종, 누군가는 '돌고래'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그저 구전에 의한 정보인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 많다.
(10:09) '소나무 고목'을 바라보며 진행하고~
남파랑길 57코스는 '여수 섬 숲길'과 함께한다.
(10:11) 해안길 우측으로 '김녕김씨' 납골당인 '慶先堂'을 지나고~
이후 '서연마을'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화서로' 해안길을 따라 길게 진행이다.
(10:19) 해안길 끝지점 '연말길' 도로가 시작되는
삼거리갈림길에서 남파랑길 방향표지기 따라 우회전하고~
(10:21) 농로 중간 갈림길에서 좌회전하고~
그대로 우측으로 진행하면 '서연리 마을회관'이 위치한다.
(10:22) 또 다른 농로갈림길에서 우회전하고~
(10:24) '섬숲길' 이정표가 있는곳에서 우측 '서이산 섬숲길'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멋진 전원주택 단지를 지나고~
(10:25) '대서이연말동네 버스정류장' 앞을 지난다.
'대서이마을'과 '연말마을' 어귀쯤의 정류장인가???
'대서이마을' 이름은 '서연마을' 동쪽 뒤편의 '서이산(鼠耳山)'에서
이름을 따 온 마을 이름이다.
이후 '서우개길'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하고~
(10:32) 좌측 아래 '소서이마을'과 포구를 바라보면서,
'소서이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좌측으로 '괭이바위산' 정상부 땡겨보고~
이후 '서우개길'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하여,
(10:40) 도로 고갯길인 별 특징없는 '대서이재'를 넘어간다.
이후 '서우개길' 도로 내리막길을 길게 진행하고,
(10:44) '화양면대서이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10:45) 직진으로 '서우개길'과 우측으로 '서이산 임도'가 갈리는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우측이다.
우측 임도갈림길 입구에는 남파랑길 이정표가 종점 3.1km를 알리고~
이후 '서이산' 북쪽사면을 휘감아도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고~
보편적으로 임도 길 주위로 '편백'이나 '삼나무' 같은 단일종의 나무를 심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다양한 나무들이 어울려 있는, 생물 다양성을 마주할 수 있는 임도라 더 좋다.
(10:54) '새에덴 국제기도원' 표지판을 지나,
깊은 숲속에 인적이 끊긴 적막감이 감도는 기도원 앞을 통과하고~
(11:01) 또 다른 '새에덴 국제기도원' 표지판을 지난다.
(11:03) '서촌마을'을 알리는 '섬숲길' 이정표가 있는곳에서
급 우회전하여 진행하고~
그렇게 진행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화양면 이목리'에서
'화양면 서촌리'로 행정구역이 바뀌는데 정확한 경계지점은 잘 모르겠다.
화양면 서촌리(西村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 동쪽은 화동리, 서쪽은 순천만,
남쪽은 이목리, 북쪽은 옥적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서남쪽에 서이산[296.8m]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에 낮은 평야를 이룬다.
봉화산에서 시작된 화양천이 이영산과 간지산 사이를 거쳐 산전저수지에 모아져
서이산과 안양산을 사이에 두고 서촌들로 흐른다.
서촌리는 화동리와 들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모든 주민이
농업을 위주로 생활하는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음지몰·석교리(石橋里)·봉오동 등이 있다.
면소재지에서 6㎞ 지점에 위치한 도시 근교 마을이지만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어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령화되었다.
최근 시설원예가 많이 들어서서 토마토와 오이의 재배가 많고
갓김치의 재료가 되는 갓재배가 많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석교·봉오와 함께 여수군 화양면 서촌리가 되었다.
1949년 여천군 화양면 서촌리로 되었고,
1998년 여수시 화양면 서촌리가 되었다.
서촌리는 조선시대 곡화목장 감목관 아사가 있던 화동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촌리 북쪽에 있는 석교리는 본래 석교마을 이름인 독다릿개를 한자로 바꾼 이름으로
서촌에서 석교마을로 가려면 낮은 갯벌을 지나야 했기에 이곳에 큰 바윗돌을 놓아
돌다리를 만들게 되어서 불려졌다.
석교마을로 가는 길목 골짜기에는 피우실이란 지명이 전해오는데 동학 때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피를 많이 흘린 곳이어서 피우실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곡화목장 사례』를 보면 “避雨室假家”(피우실가가)로 표기되어 목지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든 움막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서촌의 남쪽에 있는 봉오동마을은 마을의 옛 이름을 봉골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봉화산에 있는 봉군들이 이 마을에 살면서 봉수대를 교대로 지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조선시대 곡화목장[백야곶목장]이 있던 곳으로 서촌리와 화동리는 마을 사이에 있는
개천을 중심으로 하여 줄다리기와 씨름 등의 민속놀이가 아주 성행했다고 한다.
곡화목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두 마을이 이 지역의 중심이었다.
최근 조사된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여수의 구전자료는 화양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여수 동학군의 대장이었던 심송학 도접주는 화양 지역 전투 이후에 붙잡혀 죽음을 당했지만
봉오마을의 심씨가에서는 후손에 자랑스러운 조상이 되었다.
(11:09) 임도길 숲속 '벚나무 군락지'를 지나는데,
일번 도로변 가로수로 만나던 '벚나무'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11:10) 'ㅓ자' 임도갈림길에서 직진 임도로 진행하고~
'서촌마을' 이정표 표시가 좌측으로 약간 애매하게 가리키고 있는데,
방향 무시하고 직진해서 진행해야 한다.
(11:12) 비상시 차량 차단 로프 거치시설을 지나 올라서서,
별 특징없는 고개마루인 '농들재'에서 우측으로 남파랑길 사각패널을 바라보며 완만하게 내려간다.
우측으로 '서이산정상 1.0km' 이정표를 지나고~
(11:16) 또 다른 차량 차단 로프 거치시설을 지나서,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고~
(11:20) 정면으로 조망이 확 트이면서,
'서촌마을'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임도에 도착이다.
이후 정면 멀리로 '서촌들' 평야지대를 바라보며,
빨간화살표 남파랑길 시그널이 가르키는 '서촌마을' 골목길을 따라 진행하고~
서촌리는 조선시대 군마를 기르던 곡화목장이 있던 자리로
목장의 관사가 있던 화동리의 서쪽에 있다고 서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11:30) '서촌삼거리'의 쉼터 정자 앞으로 나가,
좌측으로 보면, '서촌경로당'과 남파랑길 58코스 안내판이 보인다.
남파랑길 58코스 안내판& 59코스 시작점 패널
오늘 1차로 목표했던 남파랑길 여수 57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두루누비&트랭글 앱끄고 물 한잔하며 호흡을 가다듬고
남파랑길 여수 58코스를 연달아서 이어간다.
'남파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파랑길 여수59구간 (2) | 2023.11.20 |
---|---|
남파랑길 여수58구간 (1) | 2023.11.04 |
남파랑길 여수56구간 (1) | 2023.11.04 |
남파랑길 여수55구간 (1) | 2023.11.04 |
남파랑길 여수54구간 (1) | 2023.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