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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둘레길

영남알프스둘레길8 (청도.금천 임당리~신지리.만화정)

답사일자: 2012.5.26

인원: 홀로

답사코스: 청도.금천면 임당리~박실고개~영취사~소작갑사터~박곡리.당산나무~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박곡지~대비사

~박곡리.당산나무(BACK)~길부리.길부저수지~신지리.운강고택~선암서원~세심대~신지리.만화정(萬和亭)

거리: 23.2, 6시간 휴식포함/ 약간 널널~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07:40 출발하는 언양행 버스를 타고 언양버스터미널 도착.

09:00 남대구행 버스를 타고 10:10 대천에서 하차. 도보로 20번국도를 따라 지난번 답사마친 청도.금천면 임당리로 향하고~

 

10:15 20번국도가 지나가는 임당마을 입구에서 임당마을로 향하여 GO-GO-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오봉산(437m)이며 오봉산 아래에 영알둘레길이 지나가는 박실고개가 위치한다.

 

그렇게 진행하다보니 좌,우측 논에는 모자리가 한창이다.

 

 

10:24 임당교를 건너고~

 

~~꽃 향기~는 너~무~슬퍼요~

 

10:35 임당마을 입구에는 당등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이 여러 개 놓여 있는 아득한 공간이다.

 

 

 

10:40 지난번 둘레길을 마친 임당마을입구 삼거리의 전경

 

이곳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고풍스러운 건물을 만나는데, 좌측이 임호서원(林湖書院)이고~

 

 

 

임호서원은 무과 장원급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두 아들 지남, 철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고 선조 임금의 호송까지 책임졌던 삼우당 박경신(1539~1594) 선생 및 두 아들을 향배한 곳.

 

우측은 보물 제1237호로 지정된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소장 문적을 보관했던 보물전시각인 경의관(景義館)인데~

 

 

종전 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된 삼우당과, 호성원종공신 2등에 봉해진 두 아들에게 조정에서 내린

각종 문서 등의 보물을 전시했던 전각이다.

 

10:45 다시 임당리 마을회관앞으로 되돌아나오고~

임당마을 안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진행하면 처음 만나는, 좌측으로 다리 건너 골목안에는 일명 내시집으로 불리는

임당리 통정대부김씨 고택이 있다.

 

지난번 둘러본 곳이라 그대로 직진한후 두번째 작은 다리를 건너 개울을 우측에 끼고 진행한다.

 

우측으로 오봉산이 보이고~

 

10:55 갈림길을 만나고~

우측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20m쯤 가다가 다시 만난 갈림길에서 우측 임도를 따라 오른다.

 

 

정면으로 해들게봉 뒤편 독종골만당에서 도롱굴산(일명 시루봉, 까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이는데

능선 중간 오목한 곳이 지난번 지난온 정거고개다.

 

그렇게 완만하게 이어지는 임도 오르막길을 따라 진행하고~

 

약선

 

임도를 따라 오르다 바라본 해들게봉 뒤편 독종골만당에서 도롱굴산(일명 시루봉, 까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모두 성불 하입시더

 

11:20 임당리와 박곡리를 이어주는 박실고개의 전경

 

마침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그늘진곳에 배낭을 내리고 휴식하는차에 아예 점심까지 해결하고 12:05 출발이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인데 커다란 오동나무가 주위로 많이 보이고~

 

어느순간 정면으로 오봉산 정상부의 베틀바위가 눈에 들어오고~

 

 

임진왜란 때 인근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베틀로 베를 짜며 피난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바위다.

 

진행하다 좌측으로 바라본 해들게봉(475m)의 전경

 

12:17 영취사(옛 약왕사) 입구에 도착하고~

 

영취사(옛 약왕사) 전경

 

영취사 큰법당 앞뜰에서 바라본 운문지맥상의 억산 깨진바위의 전경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서서 소작갑사터에 도착하고~

 

 

신라 진흥왕 21(560)에 한 신승이 나타나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짓고, 인근에 소작갑사(또는 대비갑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 등 4개 절을 더 지었다는 운문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로 그 소작갑사 인데~

지금은 불상과 전각은 온데간데없고 과수원 안에 석등 받침 등 일부 흔적만 남아 있고,

현재 억산 아래 박곡지 상류에 있는 대비사의 전신이 바로 이 절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찔레꽃 만발한 임도길을 따라 진행하고~

 

12:40 골안못을 지나고~

 

골안못에서 바라본 지난온 둘레길

 

과수원에는 또 다른 결실을 기다리고 있다.

 

혼자놀기

 

이후 박곡리 곡란마을 골목을 통과하다보니 담쟁이넝쿨, 황토벽이 멋스러운 반시 저장고,

흙돌담과 탱자나무 울타리 등 시골마을 골목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최근에 지은듯한 박곡리 보건진료소를 지난다.

 

12:50 박곡리 정자나무 쉼터에서 다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대비사로 향한다.

 

13:10 보물 제203호인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을 친견하고~

 

 

 

석굴암 불상과 비슷한 시대의 석불로, 풍만함과 강건함이 수려한 조각 솜씨에 녹아 있는데,

다만 얼굴 부위가 훼손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두툼한 듯 부드러운 입술과 크지는 않지만 엷은 웃음을

띤 눈매가 잘 살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도 훼손 시기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도로를 따르다 바라본 박곡리 주변의 전경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 12:25 박곡지에 도착하고~

 

인근 지역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이 저수지 갓길을 따라 진행하니 저멀리 억산이 어서오라 손짓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박곡지 주변의 전경

 

 

 

독종골만당 아래로 광산이 보이고, 예전보다는 더 많이 훼손되었는 것 같다.

 

그렇게 진행하다 지나가는 차량에 편승하여 잠깐이나마 편하게 대비사입구에 도착하고~

13:40 정심교를 건너고~

 

 

대비사, 이 절의 전신은 박곡리 소작갑사터에 있던 소작갑사다.

고려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는데, 절 이름은 대자대비(大慈大悲)에서 따 왔다는 설과

신라시대 대비가 이 절에서 수양을 했기 때문에 붙었다는 설이 있다.

 

보물 제834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 숙종 11(1685) 때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비사 화단에 핀 야생화

 

 

 

대비사에서 바라본 억산 깨진바위의 전경

 

*승천 못한 이무기가 쪼갰다는 억산 깨진바위의 전설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대비사에는 억산 깨진바위와 밀양 호박소 등과

연관 있는 이무기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 대비사에는 고승 한 분과 동자승이 함께 살고 있었다.

스님과 동자승은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곤 했는데, 어느날 밤 잠에서 깬 스님은 옆에 누워 있는 동자승의 몸이

마치 냉수목욕을 한 것처럼 차갑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은 다음날 자는 척하면서 동자승의 동태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방을 빠져나간 동자승이 다음날 새벽이 돼서야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날 밤 살며시 동자승의 뒤를 밟은 스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절 가까운 곳에 있던 연못으로 간 동자승이 옷을 벗고 들어가서는 이무기로 변신, 유유히 헤엄을 치며 노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는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모른 채 연못에서 나와 산 너머 이무기못안골로 가서는 빗자루를 들고 주변을 쓸어댔다.
결국 스님은 "네 이놈. 상좌야. 네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라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놀란 이무기는 슬픈 울음을 터뜨리며 날아올랐다.

이무기는 ", 하루만 더 있으면 용이 되어 승천하는 1000년 동안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는데…"라며

절 뒷산의 정상 바위를 꼬리로 내려친 뒤 그 너머의 호박소로 들어가버렸다.

억산의 명물인 깨진바위는 바로 이 이무기의 꼬리가 만들어낸 자국이며,

운문사 위 이무기못안골에 마치 빗자루로 쓸어 댄 것 같은 자국이 바위에 많은 것도 모두 그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대비사 주변의 연못

 

 

다시 박곡리 정자나무로 되돌아가다 바라본 기천봉(578m)의 전경

예전에는 계물방산으로 불리는 봉우리다.

 

아름다운 박곡지 주변의 전경

 

 

14:40 다시 박곡리 정자나무로 되돌아 나오고~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좌측으로 바라본 억산 깨진바위의 전경

 

오봉리 258m봉 아래에 자리하는 전원주택단지를 바라보고~

 

그렇게 도로를 따라 박곡리에서 길부리로 진행하니 도로 우측으로 둑방지가 자리하고 있다.

 

14:50 길부마을 입구에서 둘레길은 직진으로 이어지지만 길부저수지를 둘러보기 위해서 좌측으로 들어서고~

 

길부저수지의 전경

 

길부저수지 둑길을 따르다 뒤돌아보니 오봉리 뒷편으로 기천봉이 우뚝 솟아있다.

 

다시 도로로 되돌아나와 도로를 따르니 길부마을 표지석이 우뚝하고~

 

15:15 좌측으로 옥련암이 자리하는 작은 고개를 넘고~

 

내려서니 금천면 신지리와 동창천 건너에 있는 현 면소재지 동곡리가 눈에 들어온다.

 

완만한 내리막길 우측 솔밭에는 쭉 뻗은 소나무 수천 그루가 밀림을 이루고 있고~

 

15:20 신지리 섶마리마을을 지나 신지1리 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고~

 

좌측으로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명중고택/운강고택이 자리한다.

 

 

*운강고택의 특이한 구조
소요당 박하담의 12대손인 운강 박시묵이 19세기 후반에 크게 확장해서 지었다는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제106)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별도로 ''자 형태로 지어진 대저택이다.

생활의 필요에 따라 공간구성이 짜임새 있게 이뤄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안채 대청마루와 축대 사이의 나무 발받침과 사랑채 옆의 화장실 구조가 눈에 띈다.

안채 마루 발받침은 대청마루와 축대 사이에 계단 높이의 받침을 한 층 더 둠으로써

여성들이 오르내리기 수월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사랑채 옆 화장실은 소변기와 '푸세식' 대변기가 분리된 구조에다 목재를 사용한 깔끔한 마감처리가 눈에 띈다.

집주인을 비롯한 양반들은 이 화장실을 사용했고, 하인들이 사용하던 뒷간은 따로 있다.

 

도로 우측편에는 도일고택/성암고택이 있다.

 

 

운강고택 지역이 끝나는 곳에서 50m정도 진행하다 우측 동창천방면으로 진행하고~

 

15:35 선암서원(仙巖書院)의 전경

 

 

 

선암서원(仙巖書院)은 1975 8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밀양박씨 선암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관리하는데,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원래 매전면 동상동 운수정의 향현사(鄕賢祠)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10(1577)에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선암으로 위패를 옮기고 선암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76(숙종 2)에는 서문중이 중건하였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78(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들에 의해 다시 중건되고 선암서당으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원 안에는 득월정(得月亭), 선암서원, 소요정, 장판각(판목보관각), 살림채, 문간채 등이 있다.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 득월정, 행랑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뒤편으로 선암서원이 남향하고 있다.

판목보관각에는 김대유, 박하담 등 14의사의 문집 목판과 예부운(禮部韻)의 원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선암서원은 정면 5, 측면 2칸 규모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깔고 양쪽으로는 방을 들였다.

 

강당은 주심포 후기 양식에 속하는 익공계에 가까운 건물로서 외출목도리를 받치는 행공첨자 밑에 소로가 없는 것과

다포작으로 짜올린 천장 구조 등은 특이한 수법이며 살림채는 전형적인 남부지방형 평면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강당 앞뜰의 수백년 된 배롱나무 두 그루는 여름이면 붉고 화사한 꽃을 피워 서원 전체를 뒤덮는다.

서당 건물 자체의 기품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은 안동 도산서원에 비견될 만큼 높은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강당 앞문을 나서면 동창천 변의 용두암과 용두소 등이 노송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현재는 박향숙氏가 서원을 관리하면서 전통고택 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여름 휴가철에는 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홈페이지(http://sunam.co.kr) 또는 전화(070-4150-8445)로 예약 문의를 할 수 있다.

 

선암서원 장판각의 전경

 

신지리 삼거리로 되돌아나오다 바라본 운문지맥 마루금

 

15:45 신지리 삼거리로 되돌아나와 임당리 방향으로 200m정도 가다가 좌측 밭지역 잡풀을 해치고

동창천 하천쪽으로 내려가다 만나는 "세심대는 옛 선비들이 마음을 씻은 곳이라고 하는데~

 

 

 

옛날 운강 박시묵이 만화정 중건과 함께 지었던 작은 정자인 세심대란 정자가 이곳 언덕위에 있었다는데

부랑인들이 숙소 구실을 하며 낡아 허물어져가던 정자를 40여년 전에 철거했다고 한다.

하천 바위벽에 새겨진 세심대(??·연비어약(鳶飛魚躍) 등 무수한 글씨에서 예전 이곳 주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음을

짐작할수 있지만 현재는 인근 주민들 조차 그 존재를 거의 모를 정도로 버려진 채로 방치되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한다.

세심대에 있던 세심대기편액은 만화정 누마루 위에 걸려 있다.

 

16:00 만화정(萬和亭)에 도착하고~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동창천변 정자인 만화정(萬和亭)은 청도 한옥마을로 불리는 신지리의 여러 고택 가운데

주변 풍광과 가장 잘 조화된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기에 남쪽으로 피난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이곳에서 숙식했을 만큼 빼어난 풍치를 자랑하며

설계 또한 섬세함이 빛나는 건물이다.

 

만화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소요당(逍謠堂) 박하담(1479~1560)이 건립한 서당 터였는데

그의 11세 손인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서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소요당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저술과 학문연구에 매진한 성리학자였다.
특히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속적인 출세와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 소요당은

본격적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는 삼족당 김대유 등과 함께 운문사 아래에 최초의 사창(社倉)을 지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매진했다.

또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소요당을 찾아와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풍과 인품이 12대손인 운강 박시묵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후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崗) 박시묵이 더욱 확장, 현재의 모습처럼 정자 형태로 변형했고

이곳에 강학소를 열어 지역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인 진계 박재형은 해동속소학

38권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주변의 선암서원 등과 함께 청도 지역 학문의 요람 역할을 하고있는 곳이다.

 

16:10 이번구간 영알둘레길 답사를 마무리하고~

만화정 앞에서 금천교/ 다리를 지나면 좌측으로 다음구간 영알둘레길 들머리인 어성마을 가는 길이다.

 

이후 도로를 따라 널널하게 동곡리 버스터미널로 이동하고~

 

잠시 시간이 남아 동곡시장옆 가게에서 동곡막걸리와 파전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17:00 출발하는 언양行 버스를 타고 아침에 진행한 순서를 역으로 하여 부산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