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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맷길

갈맷길4코스-2구간 (감천항~몰운대/다대포객사)

일자: 2013.9.29

답사코스: 감천항~두송반도전망대~다대항~몰운대(다대포객사)

gps거리: 14.6km  ~4시간30

 

개금시장 버스정류소에서 61번 시내버스을 타고 감천동 삼성여고정류장에서 하차하고~

도보로 갈맷길4코스1구간 종료지점 YK스탈(한보철강)에 도착,

부산의 해안을 잇는 갈맷길(263.8km)”4코스 제2구간을 걸어본다.

 

갈맷길의 마스코트/ 갈매기

 

그렇게 감천항 고철부두 펜스길을 따르니 길옆으로 고철을 가득싫은 트럭들이 줄지어 서있다.

 

도로 한복판에 위치한 수령200년 되는 보호수와 당집

 

이곳에서 큰 도로를 버리고, 우측/안구평 임도로 올라가는 작은 도로를 따른다.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 좌측으로 진행한다.

 

두도

 

위험구간 안내문

 

호젓한 비포장 임도길이 시작되고~

 

우측으로 지난구간 걸었던 갈맷길을 바라보며 진행한다.

 

구평도로 갈림길

 

다대팔경 이야기 안내문

 

 

아미완월(峨嵋翫月)

아미산(娥嵋山)은 사하구의 장림동과 다대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다대동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산 정상에는 응봉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수군진영이었던 다대포진과 서평포진을 내려다보며

낙동강하구 일대와 몰운대 앞바다를 한 눈으로 감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

이 아미산 중턱에 떠오른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만사 모든 잡념과 시름이 사라져 버려

마음속 깊은 곳에 잔잔한 물결 같은 정겨움이 느껴질 정도로 광경이 평화로웠다 한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하여 산 중턱까지 주택가로 변하여 옛 정취는 사라졌다지만 저 멀리 영도의 야경과

남항에 정박중인 외항선의 붗빛은 또 다른 모습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또한 가로등 불빛과 어울리는 달빛도 새로운 멋을 찾을 수 있다.

 

몰운관해(沒雲觀海)

몰운대(沒雲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는 부산의 전형적인 육계도로 낙동강 하구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16세기까지만 하여도 “몰운도”라고 불리는 하나의 섬이었으나, 낙동강 상류에서 운반되어 온 토사의 퇴적에 의해

다대포와 연결된 섬이다.

예로부터 우거진 숲과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와 기암괴석, 출렁거리는 창파, 수려한 모래사장은 빼어난 경승지로 이름나 있다.

몰운대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끼는 날에는 이 일대가 그 기류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데에 비롯된다.

몰운대의 지형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 경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노래한

옛 시인, 묵객들의 ()가『동래부지(1740)』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몰운대의 아름다운 자연절경은 해안의 기암괴석과 수목이 어우러져 오늘도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야망어창(夜望漁唱)

야망대(夜望臺)는 다대만의 동쪽 낫개( : 밀물이 드나드는 곳)와 다댓개 사이에 있는 언덕을 말한다.

옛날 이 고장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면 언덕에 올라 멸치떼의 동정을 살피다가 고기떼가 몰려들 징조가 보이면

낫개로 내려와서 작은 돚단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확인한 다음 징을 울려 신호를 하였다 한다.

이곳에 올라 밤에 멸치떼를 살피고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야망대라 하였다.

야망대에서 든는 고기잡이 노래소리와 아름다운 경치는 가히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 당시 야망대에서 들었던 고기잡이 노래인「다대포후리소리」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전승, 보존되고 있다.

 

화손낙조(花孫落照)

화손대(花孫臺)는 오늘날 몰운산의 중앙쯤(현 다대포객사가 있는 곳)에서 남쪽 바다를 접하는 곳에서

쥐섬을 바라볼 수 있는 ()가 몰운대이고,

동쪽 바다에 접한 곳에서 모자섬을 바라볼 수 있는 동쪽 맨 끝자리가 화손대이다.

이 부근에는 우거진 숲과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와 기암괴석, 출렁이는 파도는 별유천지가 따로 없을 정도이다.

화산낙조는 남해바다 저 멀리 석양에 지는 저녁노을이 다대포 앞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태양의 붉은 기운이 진홍빛으로 이글거리면서 망망대해 저 멀리 사라지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두송만취(頭松晩翠)

두송산(頭松山)은 승학산에서 봉화산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내린 두송반도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산은 사면(斜面)이 급하며, 짙은 송림으로 덮혀 있어 지금도 사람의 왕래가 뜸한 산으로

다대포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두송산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나무의 결이 좋아

군선(軍船)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두송반도 부근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푸르름이 다양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낼 정도였으며,

특히 늦은 가을에 해풍(海風)을 맞으며, 바라다 보는 푸르름은 다대팔경으로 그 손색이 없었다.

 

남림숙하(南林宿霞)

솔섬(松島)은 다대포 입구에 있는 갯바위로 이루어진 섬으로 다대팔경 중 삼도귀범(三島歸帆)의 하나이기도 하다.

섬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늘푸른 소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어 옛부터 다대포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아침이면 항상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안개속에 잠겨서 섬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다.

이때 머무는 맑디 맑은 안개는 송림숲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낭만이 흐르는 다대팔경의 절경 중 절경이었다.

지금은 솔섬으로 가는 입구에 목재공장과 주택지로 변하여 그 옛날 울창하게 우거졌다 소나무 숲은 볼 수 없다.

 

팔봉반조(八峰返照)

팔봉도(八峰島)은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로 이어지는 중간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낙동강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대대포와 연결되어 몰운도에 이어져 있다.

『사하지(1986)』에 수록되어 있는 다대팔경에는 팔봉산(八峰山)으로 기록한 되어 있으나,

정확한 팔봉산의 위치는 찾지 못했다.

예컨데 팔봉도(八峰島)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다대포에 휘황찬 밝은 달이 떠올라 다대포 앞바다의 잔잔한 물결위에 내비친 달빛이 팔봉에 되비치는

밝은 달빛은 어느 지역에서 보는 달빛과는 또 다른 정취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옛 정취는 반감되었다고 하나 지금도 경승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삼도귀범(三島歸帆)

삼도귀범은 다대팔경 중의 하나로 다대포 입구 갯바위로 이루어진 쥐섬고리섬솔섬을 삼도(三島)라 한다.

삼도주변에는 두송반도와 낙동강 하구의 화손대몰운대야망대의 경관이 펼쳐져 있다.

다대포구에서 아침이면 하얀 돗을 단배가 앞바다 저멀리 고기잡이를 나아가, 저녁이면 만선을 이룬 배들이

흰 돛을 펼쳐 단 돚단배가 다대포의 입구인 삼도 주변의 바람을 안고 포구로 돌아오는 광경은

저녁노을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당시 흰 돛단배 위로 하얀 갈매기떼가 따르고, 뱃머리에 부딧쳐 부서지는 흰물결의 멋은 사라졌다 하여도,

오늘에도 대형 고기잡이 배의 만선 귀환 때에 갈매기떼가 따르는 전경에서 옛 풍경을 회상할 수 있으며,

지금도 섬 주변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해풍(海風)을 맞으며 낚시를 즐기고 있다.

 

다대포 앞바다의 전경

 

야망대로 이어지는 갈맷길 갈림길을 만나고~

 

이곳에서 갈맷길은 두송반도 전망대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게 되어있다.

 

장군산. 천마산 뒤로 낙동정맥 마루금을 바라보고~

 

가을을 알려주는 넘

 

또 다른 갈림길/ 좌측으로 진행하여 우측으로 돌아오도록 되어있다.

 

두송반도 전망대/ 숲이 가려 전망대 구실은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나와 우측/야망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다대포의 전경

 

다대포 앞바다/ 모자섬. 쥐섬. 화손대를 바라보고~

 

낙석 위험지대

 

이곳 두송중학교 앞에서 갈맷길은 야망대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되어있다.

 

다대2동 주민휴식공간

 

통일아시아드공원을 지난다.

 

다대앞바다/ 예전 낚시에 빠져있을때 이곳에서 배를 타고 모자섬. 형제섬 일원으로 낚시를 갈때가 생각난다.

그 열정이 새삼 그리워~

 

다대항 일대

 

다대포 후리소리보존회에서 후리소리 한마당이 펼쳐진다.

 

 

다대포 후리소리는 1987 7 1일 지방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멸치잡이할 때 그물의 멸치를

후리며 노동의 피로를 덜고 흥을 돋구는 어로요(漁撈搖).
토속민요의 하나로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부르며, 지방에 따라서 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
.
다대포 후리소리는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다른 여러 사람이 그 노래를 받아 부르는 선후창(先後唱)형식이다.

 

이 다대포 후리소리는 그 공동작업의 과정을 따라 형성되었는데 후리소리란 후리그물이라는 큰 그물로 넓게 둘러치고

여러사람이 벼리의 두 끝을 끌어당기면서 부르는 소리(노래).

그 후리그물은 바다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 육지로 끌어올리는 지예망(地曳網)이었다.
이 후리소리는 풍어를 비는 당산제(堂山祭)부터 시작되어 풍어를 노래하는 끝소리까지 8과장으로 되어 있다.

이 후리소리가 자취를 감춘 것은 1950년 후반에 바다의 치어(稚漁)까지 잡는다하여 지예망어업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 있어서 후리소리의 채록(採錄)은 비교적 쉬웠다.

이곳 노인들이 1981년부터 노인당에 모여 그날을 되살리며 가사와 가락을 채록한 것이다.

후리소리는 당산제(堂山祭)부터 시작되는데 그 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산제(堂山祭)
어부님네- 예

우리 자아 당산제를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십니더- 예
비나이다. 비나이다. 당산님 전에 비나이다

앞터 당산 서낭님요 뒤터 당산 서낭님요

두 골목에 서낭대신 그물 걸기 좋은 시대

기도 발원 드리오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

...........
(
후략(後略
)
(
당산제가 끝나면 용왕제(龍王祭)가 된다
.)

 

용왕제
어부님네- 예

용왕님을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십니더- 예

비나이다. 비나이다. 용왕님 전에 비나이다

동해바다 용왕님이요, 서해바다 용왕님이요, 남해바다 용왕님이요
,
북해바다 용왕님이요, 물밑에는 황실용왕 물위에는 청실용왕

청실 황실 용왕제를 지극 정성 드리오니

...........
(
후략
)

 

그물을 옮겨 배에 싣는 소리
(
前略)
멸치 잡아 무엇하리 열두 독 젓을 담아 황금빛에 맛들거든

첫째 독은 헐어다가 나라에다 상납하고

둘째 독은 헐어다가 부모님 전에 봉양하고

세쩨 독은 헐어다가 형제간에 갈라 먹고

넷째 독은 헐어다가 이웃간에 노놔먹지

남은 독은 팔아다가 논밭 전지 많이 사서

부귀영화 누려보세 다 실었소 (그물을 실었느냐는 뜻)- 예

 

그물 놓는 소리
(
생략)

 

그물 당기는 소리
어기여차 당겨주소 어기여차 당겨주소 (후렴)
용왕님 은덕으로 메러치 풍년 돌아왔네

산은 첩첩 천봉이요, 물은 잔잔 백옥인데 우리 다대포 꽃이 피네

꽃 피고 봄이 오니 메러치 풍년이 아닐쏘냐 십오야 둥근 달이

삼경인들 변할쏘냐 똘똘 뭉친 우리 어부 일구월심 변할쏘냐

만경창파 푸른 물에 메러치떼가 몰려오네

...........
(
후략
)

 

그물 터는 소리
(
생략)

 

가래소리
(
생략)

 

풍어소리
캐지나 칭칭나네 캐지나 칭칭 나네(후렴)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이수강변 백로 가자

청천 하늘에 잔 별도 많고 시냇가에는 자갈도 많다

정월이라 대보름날 달밤에 나온 소년들은 답교하고 노니는데
이월이라 한식날은 나무마다 춘기들고 가지마다 순이 난다
.
...........
(
후략)
로 되어 있다.

 

이 다대포 후리소리는 어로작업에 직접 종사했던 사람들에 의해 가사와 곡조와 동작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전승되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그 소리는 대부분 4박자로 돼 있어 이 지방 민요의 특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민속적인 면으로나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면으로도 옛것을 되살피는 가치가 있는 후리소리다.

 

몰운도(沒雲島)

 

사하구 다대동에 위치해 있는 섬으로 태종대·해운대와 더불어 부산의 3대이다.

3대는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가운데 해천만리(海千萬里)의 바다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경승지이다.

1763년 일본통신사 조엄이 쓴『해사일기』에 해운대와 몰운대의 경치를 비교한 뒤 "몰운대는 신라 이전에는

조그마한 섬으로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아름다워 아리따운 여자가 꽃 속에서 치장을 한 것 같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몰운도의 이름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이면 그 안개와 구름에 잠겨서 섬이 보이지 않는다고

구름 속에 빠진 섬이란 낭만적인 이름이 되었다.

이 곳에는 신석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다고 여겨지는 패총(조개무지)을 남기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부산포 해전에서 중군장의 직책을 맡았다가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공의 사적을 적은 '정운공순의비'가 이

몰운도에 있으며, 다대포첨사영의 다대포객사도(지금의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음) 이곳으로 옮겨 복원되어 있다.

이 몰운도는 경관이 아주 뛰어나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몰운도를 몰운대라 하지만 몰운도에는 몰운대와 화손대의 두 대()가 있다.

화손대(花孫臺)는 몰운도의 남쪽끝 바다로 면한 동쪽 끝의 대를 말하고, 몰운대는 남쪽 끝 바다를 면한 한가운데의 대를 말한다.

화손대 앞에는 모자섬이 있고 몰운대 앞에는 쥐가 많아서 쥐섬이라 하는 섬이 있다.

몰운도가 있는 다대포 주위에는 부산에서도 섬이 가장 많은 곳이다.

 

다대포해수욕장이 참으로 많이 바뀌어 졌습니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1543~1592)

 

정운의 자는 창진(昌辰) 본은 하동(河東) 출생지는 영암(靈巖)이다.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 현감, 제주 판관을 거쳤다.

1592년 임진난이 일어날 때는 녹도만호였다.

임란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도망하여 곤양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과 부원론으로 대립되었는데

정운은 어영담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는 우리의 국토가 아닌가하고, 부원론을 주장 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 참가 분전하였다.

8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9 1일 이른 아침 부산포에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지나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돌아

함대를 정비하고 화준구미(花樽龜 尾)에 이르렀다.

여기서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이어 부산포내에 돌선하였다.

 

이때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당시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이었다.

이에 우장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한 결과  

적선 100여척을 격파,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많은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으며, 영암의 충절사와 이곳 동래충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예전 낙동정맥 진행당시 촬영한 사진-

 

 

 

화손대갈림길에서 갈맷길을 잠시 멈추고 화손대를 향하여~ GO GO GO

 

화손대일대의 갯바위

 

 

 

화손대에서 바라본 모자섬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나와 몰운대전망대로 향하고~

 

빗물을 받아 두는곳

 

 

자갈마당

 

낙동정맥의 시작과 끝지점/ 몰운대 전망대

 

쥐섬

 

실질적인 낙동정맥의 시작과 끝지점

이곳은 군부대가 주둔하는 곳이라 출입금지구역 입니다.

 

다대포객사

 

조선시대의 객사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벽 없이 기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이 객사를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순조 25(1825)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다대초등학교 안에 있던 것을 1970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벽이 없이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이 객사는 일반적으로 중앙의 정당과 좌우 익실로 이루어진

다른 객사들과는 달리 정당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기둥과 마루를 보수하고 단청공사와 현판을 설치하였다.

다대포 객사는 이 지역에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조선시대 객사건축물이다.

 

몰운대(沒雲臺) -조선 선조조 동래부사 이춘원-

 

호탕풍도천만리-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 만리요,

백운천반몰고대-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부상요일차륜적-   새벽바다 돋는해는 붉은 수레바퀴,

상견선인가학래-   언제나 학을타고 신선이 온다.

 

몰운대에서 갈맷길4코스2구간이 종료된다.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 맡고, 귀로 듣고, 발로 느끼는, 오감 만족의 여행 갈맷길

근처 횟집에서 회비빔밥과 션한 맥주 한병으로 오늘구간 마무리를 하고~

1000번 시내급행버스를 타고 부산역으로 이동, 67번 버스를 타고 개금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