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13.12.14
답사코스: 금정산성/동문-제4망루-금정산성/북문-범어사-노포동종합터미널-스포원파크-회동저수지/상현마을
gps거리: 13.45km 널~널 3시간50분
개금역에서 지하철2호선을 타고 화명역에서 하차, 금정1번 마을버스로 환승한후 금성마을에 도착
도보로 7코스1구간 종료지점인 금정산성/동문에 도착, “갈맷길(263.8km)” 제7코스 제2구간을 걸어본다.
금정산성 동문
갈맷길 7코스 2구간 인증대
금정산성 [金井山城] 사적 제215호. 둘레 1만 7,336m, 높이 1.5~3.2m.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으로서, 지금은 4㎞의 성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 처음으로 축성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의 규모나 축조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에 낙동강 하류에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여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의 금정산성은 조선시대에 중축한 것이다.
1703년(숙종 29)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남쪽 끝에 있는 동래부의 방비를 위해 금정산에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둘레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 4문이 있는 산성을 쌓았다.
그 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둘레 5,643의 중성(中城)을 쌓고, 시설을 보강했다.
1806년(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을 신축하고 서·남·북 문루를 다시 쌓으니, 그 길이가 32리였다.
산성의 성벽은 이곳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해 쌓았고, 수구문· 보루· 암문 등이 설치되었다.
1972년에 동문과 남문,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망루가 복원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성동일대/산성마을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화전민과 승려들이 거주하다가 금정산성이 축조된 뒤에
현재의 마을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 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 지방지도에 의하여 지금의 부산교육원 자리에 아문리(亞門里)라는 마을이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산성리(山城里)는, 영조 16년(1740)에 편찬된 <동래부지> 각면각리원근정도조에,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18리(里)라 하였고, 순조 32년(1832년)에 나온 <동래부읍지> 방리조에는,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20리 거리라 하였다.
1914년의 부군(府郡) 폐합 때 산성리를 금성리(金城里)로 개칭한 듯하다.
이는 1899년에 발간된 <동래부읍지> 방리조에 ‘北面 山城里 距官門十八里’라 기록된 것이,
1937년에 발간된 <동래군지(東萊郡誌)> 읍면동리조에는 구포면 금성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동문을 지나 부채바위, 제 4망루, 원효봉, 북문에 이르는 능선길은 부산 전체를 조망하는 시원한 길이다.
제 4망루에서 이어지는 중성
부채바위 상단
부채바위
암벽의 높이가 약 45m 되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이다.
3망루와 4망루의 중간에 있으며 마치 부채를 펼친 모양과 같다 하여 부채바위라고 한다.
약 45m 되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이며 부산 록클라이머들의 암벽등반 연습지이다.
바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
이 소나무의 뿌리는 어디에 박혀 있을까? 소나무의 생명력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언제봐도 멋진…암벽전시장
지나온 길
금정산 제4망루
금정산성 중성
의상봉(사자바위)
금정산 고당봉, 원효봉
갈맷길 스토리텔링
원효봉 정상부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 원효봉(687m)이라 불린다.
원효봉에서 바라본 회동저수지
금정산 고당봉(801m)
《동국여지승람》권 23 동래현 산천조에 보면 “금정산은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다.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샘이 있다.
둘레가 10여척이고 깊이가 7촌가량으로 물이 늘 차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 마리 금빛 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산 이름을 금빛 샘이 있는 산 「金井山」이라 하고, 그 산 아래에 절을 지어 절 이름을
범천의 깨끗한 물고기라고 "범어사(梵魚寺 678년 창건)"라 불렀다.
금정산은 부산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산세지만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이 이루어져 있고 14개나 되는 약수터에서는
항시 맑은 물이 샘솟아 올라 부산시민들의 모태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했던 탓인지 곳곳에 기암절벽이 절묘하고, 크고 작은 금정의 봉우리들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곳에는 넓은 분지를 형성해 자리한 금정산성 마을이 있다.
산성마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금정산성안 촌락으로 해발 8백10m의 산 정상에 서서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왜 국내 최대규모의 산성을 쌓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 하류 대저 땅과 북의 양산지계까지 내려다 보이고 동으로 수영강과 회동저수지, 온천천,
동래읍성지역 등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탓에 왜구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 있었으니
금정산성과 마을의 역사와 전설은 곧 호국의 이념으로 점철돼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금정산성 안에 세 개의 신라고찰이 있는데 국청사, 미륵사, 정수암이 그것이며
모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또 북문을 벗어나 3km 아래에는 범어사와 원효암을 비롯한 여러 부속암자가 자리하고 있으니
호국명산에 호국도량의 존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금정산성 북문
갈맷길 스토리텔링
금강암 입구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고 불리는 1300년 호국고찰 범어사(梵魚寺)
삼국통일의 화룡점정을 찍었던 문무대왕과 의상대사가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하는 일념으로
금정산에서 7일간의 기도를 한 결과 왜구를 무찌르고 절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신라 문무왕때인 서기 678년 의상대사가 해동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창건한 이후 고단했던 우리 역사의 중심에서
늘 흔들림없는 한국불교의 요람으로서,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해 온 사찰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이 절을 사령부로 삼아 승병활동을 했고 1919년 3·1운동 때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지시에 따라 학생과 스님들이 범어사 학림의거로 불리는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특히 전국의 만세운동에서 사용될 태극기를 범어사에서 만들었다는 일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범어사는 정세가 혼탁하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선사상의 맥을 지켜내고 불교계의 정화운동 중심 사찰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절이기도 하다.
또한 이 절을 거쳐갔던 수많은 고승들 또한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신라때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구한말 이후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들이 이절의 맥을 지켜왔다.
구한말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이 “선찰대본산”이라 명명하고,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스님을 조실로 모신 바 있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범어사에서 수도했고~
만해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용성 큰스님의 제자이자, 성철 스님의 스승으로서 한국 현대 불교의
정화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했던 동산 큰스님은 범어사를 상징하는 스님이기도 하다.
범어사 대웅전
바람에 부딪히는 대나무잎의 소리가 정겹고~
범어사 천왕문
범어사 조계문
갈맷길 7코스 2구간 인증대
범어사매표소 입구에서 몇걸음 내려와 지장암 가는길로 들어서면
금정산둘레길인데, 산 허리를 둘러가는 아주 멋진 길이다.
金魚洞天(금어동천)
신선이 산다는 “금어동천”은 신선과 금정산의 금어가 함께 노니는 신성한 장소였다,,
가로3m x 세로2m 의 큰 바위 중앙에 <금어동천>이라 새겨있고, 그 (좌측)에 김철균<金撤均>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앞 쪽 큰 바위에는 <정현덕>, 그 아래에는 <윤필은>, 건너편에는 <김교헌>, 등 역대 동래부사들의 이름과,
희미한 싯귀들이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금어동천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금정산의 이름 유래부터 거슬러 올라야 한다.
범어가 노는 계곡은 범어사의 유래에서 차용한 것 같다.
이중 김철균이 제일 먼저 이름을 남겼으니 그가 금어동천이라 새긴 것 같고,
뒤이어 이곳을 방문한 동래부사들이 그 풍류에 편승? 한 것 같다.
정현덕(1810), 김철균(1771), 윤필은(1640)은 동래부사 및 부윤 출신이다.
특히 정현덕은 범어사 곳곳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그는 대원군의 심복으로서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 원악도 (遠惡島)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윤필은은 동래부윤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관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아무튼 그들이 즐겨 찾았던 이곳이 그 시절과 오늘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금정산 자락도 옛 모습을 상당히 잃었다.
범어사 지장암
다시 갈맷길로 복귀하여 도로우측으로 진행하니 나무테크길이 한동안 계속 이어진다.
경동아파트 후문에서 도로를 버리고 갈맷길은 산으로 이어진다.
사거리갈림길을 만나고, 이곳에서 갈맷길은 용천사 방향으로 이어진다.
까치의 발바닥을 닮은 작장마을을 지나고~
갈맷길 스토리텔링/ 작장마을의 유래
노포동종합터미널 상가에서 점심 해결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후
7번국도를 따라서 진행하고~
스포원파크 입구에서 갈맷길은 상현마을로 이어진다.
수영강 상류
수영강 상류 주변은 인적이 드물어 조용히 생각하면서 걷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경부고속도로 부산톨게이트 근처
이제 오늘의 목적지 상현마을도 지척이다.
갈맷길 7코스 안내판
현재 회동저수지는 갈수기라 그런지 저수지가 많이 말라있다.
갈맷길 8코스 안내판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 맡고, 귀로 듣고, 발로 느끼는, 오감 만족의 여행 “갈맷길”
이곳 상현마을에서 오늘구간 마무리를 하고,
3번마을버스을 타고 가다 구서역에서 지하철1호선으로 환승하고, 서면역에서 지하철2호선으로 바꿔 개금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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