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2014.4.12
답사코스: 밀양.산외면 남기리/정문마을.정려각(旌閭閣)~기회송림~오연정(鼇淵亭)~용평터널(백송터널)~월연정(月淵亭)~
용호정(龍湖亭),심경루(心鏡樓)~살내마을/정자나무~금시당.백곡재(今是堂 .栢谷齋)~용두취입보~천경사~3중보~소나무거리숲~
밀양교~밀양관아~아랑각~영남루~무봉사~밀양읍성~추화산/봉수대.산성~충혼탑~밀양시립박물관~교동손씨/고택~밀양향교
거리: 21.75㎞, 8시간30분 휴식포함/ 널널~
부산 구포역에서 열차를 타고 밀양역 도착하고,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표충사行 새마을버스를 타고 남기리/정문마을에 도착후 답사준비를 마치고 출발이다.
정려각(旌閭閣)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정려라고 한다.
이 정려라는 용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조선시대 고문헌에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문”을 세웠다는 것은 정려를 나라에서 인정받아 문을 세웠다는 뜻이다..
건물이 아닌 문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다.
“정문(旌門)”이라는 동네 이름도 바로 이 정려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정문마을에서 긴늪유원지/기회송림 방향으로 영남알프스12구간이 이어진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일찍이 걷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고…
아무리 좋은 약이나 음식보다 걷는 것이 최고의 보약이라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걷는 것을 “청복(淸福)” 즉 '맑은 즐거움'이라고 보았다.
이렇듯 걷기는 이미 선조들로부터 검증된 건강법이다.
긴늪솔밭(기회송림)뒤로 보이는 산은 산성이 있는 추화산이다.
긴늪솔밭(기회송림)
100년전부터 기회마을 주민들이 방풍림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 수천 그루의 우람한 솔밭으로
변모해 지역민들의 큰 사랑을 받는 유원지가 됐다.
1970~1980년대에는 기업체 야유회나 계모임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입구에 전도연 주연의 영화 '밀양'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밀산교를 건너고~
발밑으로는 밀양강이 흐르고, 그 뒤편의 산은 산성이 있는 추화산이다.
뒤돌아본 긴늪솔밭(기회송림)
운문지맥/ 비학산
밀산교를 건너 좌측 추화산 방향으로 내려서서 블루베리농장 앞 사거리에서 직진하고
잠시후 우측으로 영천암갈림길을 지난다.
오연정(鼇淵亭)
조선 명종 때 문신인 추천(鄒川) 손영제(1521~1588)가 낙향해서 지은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세기에 다시 지었다.
본당 건물은 “r자” 형태로 좌측에 누마루를 내고 본체의 앞과 뒤에 같은 폭만큼 마루를 설치했다.
앞뜰에는 배롱나무, 뒤뜰에는 단풍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모례서원 유허비
모례마을을 지나고~
용평터널(백송터널)
1905년 경부선 철길이 개통될 당시에 일본인들의 설계 하에 건설된 철로용 터널이다.
35년 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열차의 길로 역할을 다했지만 1940년 선로 복선화가 이뤄지면서
인근에 새 터널이 뚫리자 도보용 터널로 바뀌었다.
길이는 약 300m이고 높이 4~5m, 너비 3.5~4m 규모인 용평터널 벽면 중 일부는
106년 전 건설 당시 때부터 유지돼 온 것으로 보이는 화강암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천장에도 벽돌로 마감을 처리한 흔적이 남아 있어 고풍스러움을 풍긴다.
터널의 구조도 특이한데, 전체가 하나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중간에는 자연절벽과 뻥 뚫린 하늘이 있어
굳이 따지자면 두 개로 나뉘어 있는 셈이다.
이곳을 지날 때면 짙은 녹음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하는데,
일부 사진작가들에게 출사지로 인기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차량이 교행이 안되기 때문에 멀리서 보고 반대편에서 한 대가 진입하면 이쪽에서 대기했다가
지나가야 하며 걸을 때도 차량을 피하기 위해 한쪽 벽으로 바짝 붙어야 한다.
곽경택 감독.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 촬영지 안내판
월연정(月淵亭)
조선(朝鮮) 중종(中宗)때 이태(李) 선생이 본래 월영사(月影寺)의 옛터인 월영연(月盈淵)에 지은 별장이다.
월연 이태 선생은 중종(中宗) 5년(1510)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중종(中宗) 14년(1519)
함경도 도사(道事)로 재직중,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필 파가
죽음을 당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에 은퇴하였다.
월연정의 대청인 쌍경당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영조 33년(1757)에 월암 이지복이 복원하였다.
고종 3년(1866)에는 이종상과 이종증이 정자 근처에 있는 월연대를 보수하고 재헌을 지었다.
월연정은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쌍경당에는 문을 달아 열면 주위 경관을 볼 수 있게 했으며 방, 아궁이를 설치해 4계절 두루 살 수 있도록 했다.
재헌 또한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로, 대청·방·대청의 형태로 지었다.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월연대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중앙 1칸만 4면에 미닫이문을 단 방을 만들었다.
경관이 뛰어난 곳에 모여 있는 이 모든 건물들은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정자의 기능을 가지며
각기 다른 형태로 지어져 있어 흥미롭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쌍벽을 이룰 만큼 아름다운 조선시대 정원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쌍천교(雙川橋)를 중심으로~
좌측은 쌍경당
우측은 월연대다.
월연대 앞에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희귀종인 백송이 밀양강을 내려보며 자라고 있는데~
흰색 비늘 같은 껍질을 가진 이 나무는 원래 중국이 본산지다.
조선 초기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 씨를 가져와서 국내에 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월연정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배기는 북천과 동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그래서 월연정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남다를 수 밖에 없지만 예전보다 그 정취가 줄어 많은 아쉬움을 준다.
강 건너편의 활성유원지
용호정(龍湖亭)과 심경루(心鏡樓)
활성교를 건너고~
강 건너으로 야트막한 산성산 줄기인데, 밀양 시가지에서 보면 한일(一)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자봉이라고 불리는 산이다.
살내마을 입구
어른 다섯 아름이나 되는 거대한 둥치의 느티나무
영남알프스 둘레길에서 만난 수많은 노거수 중 둥치의 굵기로만 따질 때 이 나무가 단연 으뜸이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고가교인 금시교 아래를 지나고~
고속도로를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길이다.
밀양강
금시당(今是堂) 백곡재(栢谷齋)
금시당과 백곡재 2채로 된 건물로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으며
여주이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금시당은 조선시대 명종 때 문신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광진(1517∼?)은 명종 1년(1546)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후에 벼슬이 좌부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금시당이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말로 산수와 전원에서 여생을 즐긴다는 뜻이다.
명종 21년(1566)에 처음 지은 금시당은 임진왜란(1592)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43년(영조19)에 백곡 이지운(李之運) 선생이 복원한 것이다.
백곡재는 백곡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철종 11년(1860)에 세운 건물이다.
정당(正堂)인 금시당을 중심으로 백곡재, 문서방(文書房),고자사(庫子舍), 대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450년 된 은행나무가 금시당에서 내려다보는 밀양강과 잘 어우려져 있다.
금시당(今是堂)
백곡재(栢谷齋)
이광진이 1566년 직접 심었다는 수령 450년이 넘는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암새들”을 굽어도는 밀양강 물줄기
후문에서 바라본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
강줄기를 따라 가는 1.8㎞ 길이의 산책로는 소나무와 아카시아, 참나무, 화살촉을 만드는데 사용됐다는
대나무 등이 울창한 호젓한 길인데, 밀양 시내 주민들이 첫손에 꼽는 산책로다.
밀양강을 끼고 돌아가는 길목마다 김남주의 '고목', 서정주의 '꽃', 천상병의 '강물' 등
서정성 뛰어난 명시(名詩)들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밑을 통과하고~
추화산
보기좋은 넘들(1)
구단방우 기도터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서 굿을 하며 치성을 드리던 곳이다.
용두취입보
이 관개시설은 1909년 일본인 마쓰시타 데이지로가 구상해서 만들어낸 자연유화식 인공 터널 수로다.
밀양강에 보를 만들고 용두산 아래로 터널을 뚫어 물길을 낸 다음 산줄기 건너편 멀리 있는 상남면 일대 예림리 등
4개 마을 592㏊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설된 것이다.
전체 수로의 길이는 6438m이고 산 아래를 관통하는 터널의 길이만 433m에 달한다.
또 다른 일제강점기의 흔적인 이곳은 비록 일본인의 구상과 설계로 건설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원래의 목적대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 깊은 곳이다.
용두보
팔각정 매점삼거리
용두산 천경사 입구
천경사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용두연
기우소로서 매우 정갈하고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겼던 곳이다.
산성산에서 뻗어내린 산의 모양이 용머리 같다하여 용두라고 이름이 붙었다.
용궁과 인간세상을 연결하는곳이 용두연 이었는데 춘화라는 스님이 용왕의 두아들 스승이 되어
용궁에 들어갔다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경부선 철로밑을 통과하고~
영남알프스둘레길은 아래에 있는 용두교를 건넌뒤 밀양사회복지관 앞에서 우측으로 틀어
강둑길을 따라야 하지만~ 패스하고~
강을 가로지르는 3중 보를 잇따라 지나 강 건너에서 봤던 송림으로 곧바로 진행한다.
2002년 제3회 전국 아름다운 숲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차지한 “소나무 거리 숲”이다.
이재금(1941~1977) 시인의 시비 “도래재”
암새를 우측으로 우회한 강물과 3중 보에서 우회한 강물이 만나 영남루로 흐르고 있다.
소나무길을 통과하여 둔치를 따르면 강 건너편에 밀양읍성과 무봉사, 영남루가 보인다.
거북이가 유유자적 헤엄치는 길
밀양교에서 바라본 영남루
밀양전통시장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포졸 2명의 밀랍인형이 보초를 서는 밀양관아(密陽官衙) 응향문
지난 2002년 내일동 376-1번지(구 내일동사무소 자리)에 7,110m²의 면적에 6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복원을 추진해온 밀양관아가 8년만인 2010년 4월 28일에 완공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몇 차례의 복원작업을 거쳐 조선말까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삼문동에 밀양군청을 지어 행정업무를 처리하면서 밀양관아는 폐쇄 및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밀양읍사무소가 신축되어, 구 밀양시청, 구 내일동 사무소로 이용하던 중 2002년부터
목조팔각지붕에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의 관아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오늘 날 동헌, 매죽당, 북별실, 관리실, 화장실을 갖춘 밀양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재탄생 됐다.
형틀
밀양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동헌인 “근민헌(近民軒)”
동헌에 사용한 당호가 근민헌인데 “백성을 친근히 하되 하대하지 않는다는 목민의 정신"에서 취한 뜻이다.
북별실 납청당
매죽당
매죽당은 책실로 부사의 비서사무를 맡은 책방(冊房)이 거처하던 집이며,
고을 원의 자제들이 공부와 독서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밀양부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밀양관아 공덕비
역사의 현장
다시 영남루 입구 광장으로 되돌아가 우측 강변길로 내려선다.
석화(石花)
동심원을 그리는 듯한 돌의 모양이 국화꽃을 닮았다고 해서 석화라 불리는데,
이 돌들은 영남루 경내 안팎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자연 현상이다.
아랑각
조선 명종 때 밀양 부사 윤 씨의 딸인 아랑이 영남루에 달구경 나왔다가 유모와 밀통한 괴한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자결했고, 그 이후 주민들은 그녀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아랑 영정
현재의 아랑 영정은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아랑각에 영정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화백의 솜씨를 빌려 제작한 것을 1963년 10월 9일 직접 밀양을 방문하여 혜사(惠賜) 한 것이다.
“사건의 현장”을 알려주는 비석
지금도 밀양 최대의 축제인 “아랑제”가 열리고 있고 아랑아가씨까지 선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랑이 밀양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
누(樓)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일종의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 밀양군수 김주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각으로
절 이름을 빌려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의 누각은 조선 헌종 10년(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밀양 남천강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제일의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각지붕이다.
좌우의 건물과 복도 또는 계단으로 연결돼 더욱 웅장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천정에 조각된 문양과 용의 몸통을 형상화 한 대들보, 용 그림, 네 귀퉁이의 남주작,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 그림 등이
모두 빼어난 예술 작품을 이룬다.
이 건물에 특히 용 조각과 그림이 많은 것은 옛날 사람들이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을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해
물과 가까운 용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좌측 능파각 계단을 이용해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바라본 밀양강과 밀양시가지
교남명루 현판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높은 누각 (경상남북도를 통틀어 교남지방이라 함) –귤산 이유원-
강좌웅부 현판
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 큰 고을이라는 뜻
영남제일루 현판
(밀양 부사 이인재의 큰아들, 이중석이 11살 때 쓴 작품이다.)
강성여화 현판
(강과 성”밀양읍성”이 서로 어우러져 마치 그림 같다는 뜻이다.)
용금루 현판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아름다운 누각이란 뜻이다.)
영남루 현판
(밀양 부사 이인재의 작은아들, 이현석이 7살 때 쓴 작품이다.)
영남루 시문
영남루에 곳곳에 걸려 있는 시문과 현판은 그 솜씨가 예사가 아니다.
그 당시 높은 학문과 문화적 수준을 영남루 한 곳에서도 이 정도 엿 볼 수 있으니
밀양이 얼마나 대단한 고을인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만덕문
천진궁(天眞宮)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영남루 북쪽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이다.
효종 3년(1652)에 창건되었는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이래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있다.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의 영정, 동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
서쪽 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조선 시조 들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층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목조로 된 기와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에 3월 15일에는 어천대제(御天大祭), 음력10월 3일에는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봉행한다.
밀양아리랑 노래비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이다.
밀양이 낳은 한국 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시춘 선생(1996년 작고) 생가 복원지
1914년에 태어나 1996년 작고할 때까지 애수의 소야곡, 전우야 잘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한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감정을 달래 준 숱한 명곡을 남긴 박 씨지만 “친일 작곡가”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 혈서지원 등 단 4곡의 노래로 인해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 때 그의 이름이 포함됐다.
한국 가요계의 거목으로서 대중가요 작곡가 최초로 198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기도 한 그였지만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 18번인데~
무봉사(舞鳳寺)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 대사가 현재 영남루 자리에 있던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건립한 무봉사는
보물 제493호인 석조여래좌상도 유명하지만 “태극나비”로 더욱 유명한데~
날개에 태극무늬가 그려진 이 나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봉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인데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고 전해온다.
표충비, 얼음골, 만어사 경석 등과 함께 '밀양 4대 신비'로 통한다.
연리지
사명대사 동상을 지나고~
밀양읍성
조선 성종 10년(1479)에 축조된 퇴뫼식성곽(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곽)으로 이루어진 석축성이다.
대부분의 읍성들이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대대적으로 건립된 것과 비교하여100년 이상 앞선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읍성은 둘레가 4,670척(1,425m), 높이 9척(2.8m)이며 성 안에
우물이 4개, 연못이 1곳 있다고 한다.
1902년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 때 성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 철도부설공사에 이용하여, 지금은 성문의 위치와
아동산과 아북산을 잇는 산등성이에는 일부 성곽만 남아 있다.
밀양읍성 망루 겸 정자인 무봉대
밀양시가지와 그뒤로 보이는 비슬지맥 마루금
건너편의 아복산과 밀양여고
동문고개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30m 진행후 좌측 마을 앞 공터로 올라 텃밭 우측 길을 따르고~
왕복4차로인 큰 도로를 건너 “대공원”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간다.
밀성 박씨 묘를 지나 능선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임도사거리를 만나고~
밀양화장장
부산의 영락공원에 비하여 상당히 작은 규모인데 소음이 굉장하다.
전기로가 아닌 가스로라서 소음이 심한건지 알수가 없다.???
우측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수십 개의 둥치가 세월이 가면서 서로 엉겨붙은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모과나무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을강 전홍표 선생의 묘소 안내판을 지나
솔 향기 짙은 길을 따라 오른다.
보기좋은 넘들
추화산 정상 봉수대(해발 240m)
추화산성
경상남도 밀양시 해발 243m의 추화산 정상 부분을 돌로 빙 둘러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밀양읍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지점에 있다.
밀양의 옛 이름 추화군은 이 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추화산성은 가야시대에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터로 추정된다.
성의 둘레는 11430m이고, 성의 구조는 동, 서, 남쪽 세 군데에 성문을 설치하였고 북쪽 계곡의 평지에
우물, 연못 부속건물을 두고 정상에 봉수대를 배치하엿다.
추화산 서·북부 정상의 봉수대는 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군사적 고지이면서, 주변의 주민과 군사들에게
적의 침입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다.
성안에서 기와 조각, 토기 조각, 분청자기, 백자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추화산성은 처음에는 읍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읍성이 현재의 아동산에 쌓아지면서 산성으로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추화산 정상 봉수대의 산그리메
추화산성 성내우물
우측으로 이어지는 산성을 한 바퀴 도는 임도길을 따른다.
보기좋은 넘들
영천암 입구 삼거리
영천암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포장길을 따라 200m쯤 내려서서 포장길을 버리고 흙길을 따르다
묘 몇 기가 있는 제사고개에서 내리막길을 계속 진행한다.
충혼탑
이곳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산화한 이 지역 출신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M48A2C전차
F-4D(PHANTOM) 전투기
밀양시립박물관
밀양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유적과 근현대의 유적들, 밀양 백중놀이를 비롯한 민속놀이,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항일독립투사들의 기록 등이 소중하게 전시돼 있는 곳이다.
돌고~도는~물레방아
밀성손씨 교동파 세거지 기념비
운치 그윽한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면 크고 작은 고택들이 길손을 맞아준다.
밀양 교동 밀성손씨 고가
“열두대문”이라는 한정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고가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한 때 99칸에 달하는 대 저택인데,
조선 숙종 때인 17세기 중반 손성증이 최초로 지었다고 전해온다.
밀양 향교
1602년 건립된 밀양 향교는 대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와 대성전 등이 있는데, 크기가 유독 커서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함께 영남 지역에서는 가장 큰 향교로 손꼽힌다.
이 향교로 인해 동네 이름도 교동이 됐다.
홍살문
골목길을 빠져나와 교동농협 앞 버스정류소에서 답사 마무리를 하고,
잠시 기다리다 밀양시내버스를 타고 밀양터미널로 이동후,
곧바로 연계되는 부산行 버스를 타고 부산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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