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2014.4.26
답사코스: 밀양.산외면 남기리/남가마을~양덕마을~다원고개~다죽리/다원마을~혜산서원(惠山書院)
~모당샘~죽원재사(竹院齋舍)~영원사지~칠탄서원(七灘書院)~칠산정(七山亭)~단장면 미촌리/구미마을
거리: 12.85㎞, 4시간30분 휴식포함/ 널널~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밀양行버스를 타고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09:00 엄광리行 새마을버스를 타고 남기리/남가마을에 도착, 답사준비를 마치고 출발이다.
좌측 멀리 보담산(562m)과 낙화산(626m)을 바라보고~
남계마을 뒤에 있는 꾀꼬리봉이 우뚝하다.
남계마을 우회로를 따라 양덕마을로 곧바로 진행한다.
남계지
평화로운 양덕마을
양덕(陽德)은 꾀꼬리봉에서 내려온 산기슭 양지 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양덕마을 회관앞에서 진영기와산업(주) 굴뚝을 보며 직진한 후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다원고개가 보이는 우측으로 진행하다 첫번째 임도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한다.
잠시후 넓은공터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오르는 묵은 임도를 따라 산으로 오른다.
세월속에 묻혀있는 다원고개
좌측능선으로 가면 꾀꼬리봉, 우측능선은 화지산 방향이다.
룰루랄라~솔갈비 깔린 푹신한 이런 길이면 얼마든지 걸을수도 있을것 같다.
다죽리 다원마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다원마을 도로를 건너 혜산서원 방향으로 간다.
혜산서원의 연혁과 5현의 경역에 대한 안내판
혜산서원은 일직손씨(一直孫氏) 5현(賢)을 받드는 서원으로, 영조 29년에 창건한 격재 손조서(孫肇瑞)를 모시던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자리를 중건했다는 내용이 보이고~
격재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계우정난(癸酉靖難)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충의와 탁절로 두문출하여 오직 도학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후대에 추앙을 받아 이곳에 서원을 세웠는데 고종 5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그 집을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로 편액했다.
1971년 서원의 경역을 확장정비하고 각지에 분산된 봉안되었던 일직 손씨 명헌 다섯분의 서원인 정평공 손홍량의 안동 타양서원,
격재 손조서의 밀양 서산서원(현재의 혜산서원의 자리로 보임), 모당 손처눌의 대구 청호서원, 문탄 손린 대구 봉산서원,
륜암 손우암의 영천 입암서원 후손들의 세거지인 이곳으로 함께 옮겨 복설하고 혜산서원으로 중건한 것이다.
격재선생 신도비를 일별하고~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격재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흙돌담길 깊숙이 자리잡은 상례문(尙禮門)을 통과하고~
혜산서원(惠山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이곳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인 격재(格齋) 손조서(1412~1473)의 학덕과 인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조선 영조 29년(1753년) 건립한 서산서원이 있던 터에 1971년 확장 중건한 곳이다.
이 서원에는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일반 서원과는 달리 강당과 사당 살림채 등이 모두 담으로 구분돼 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조선 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건물의 강제 철거 만이라도 피하기 위해 일직 손씨 문중에서 가정집 처럼 꾸몄기 때문인데,
건물들 사이에 담벼락을 만들고 건물의 이름도 일반 가정집에 흔한 이름들로 바꿔 비로소 큰 화를 면했다고 한다.
600년 묵은 차나무
다원차(茶院茶)의 유래는 일직손씨(一直孫氏) 밀양 입향조(入鄕組)인 손관(孫寬)공(公)이 진성현감(珍城縣監) 시절에
진성(珍城: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차나무를 가져와 식수하였는데 육백여년이 되었다.
이 차나무는 소엽종으로 노엽(묵은잎)은 길이가 8cm, 폭이 약 4cm로 일반적인 관목 차나무에 비해서는 큰편이라고 한다.
혜산서원을 나와 흙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니 참 운치가 있는 마을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다죽리 손씨 고가
조선시대 영조 년간에 병마절도사 손진민(孫鎭民)이 창건하고 그 아들 상룡(相龍)이 택지를 확장하고
건물을 증축하여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담장과 중문을 경계로 안채와 사랑채의 내외 생활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영남지방의 상류층 고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안마당의 건물은 남향의 정침(正寢)을 중심으로 좌우에 곳간과 행랑방을 둔 별채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맞은 편에 있었던 별동(別棟)은 없어졌다.
정침은 7칸 2열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각기 2칸의 대청과 2칸 큰방이 있고 좌측에 부엌이, 우측에 건넌방이 붙어 있다.
부엌은 기명대(器皿臺), 찬간 등의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 마당의 정원은 수석(樹石)으로 잘 꾸며져 있다.
사랑채에는 죽계서당(竹溪書堂)과 모연재(慕蓮齋)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손진민 부자 외에도 손수원(孫綏遠)· 손량석(孫亮錫)· 손규헌(孫珪憲) 등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장수를 배출한 명가 집안이다.
구, 24번국도 아스팔트 도로 사거리로 나와 좌측으로 진행하여 산외면사무소를 지난다.
다원2리마을 담벼랑에 위치한 고목나무
모당천(毛唐泉)
중국 원나라 말기에 모씨와 당씨가 전쟁을 피해 이곳에 와서 식수용으로 팠다는 오래 된 샘물이다.
죽원재사(竹院齋舍)
조선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고 지방관과 언관을 지낸 오한 손기양 선생을 기리는 제사를 모신 별묘가 있던 자리다.
손기양 선생은 밀양 석동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의를 떨치기도 하였다.
죽원재사는 오한(鰲漢)선생의 5세손(五世孫)인 죽포(竹圃) 손사익(孫思翼)에 의해(영조 29년) 1573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56년에 현재와 같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이며, 치엄문은 정면 1칸, 측면이 1칸이고 ,
삼문은 정면 3칸, 측면은 1칸이며, 정열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정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크기가 각기 다르지만 모두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죽원재사(竹院齋舍) 치엄문(致嚴門)
죽원재사 본당에는 죽원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본당 건물 앞 정원
다시 구, 24번국도 아스팔트 도로 사거리로 되돌아 나와 신, 24번 국도 굴다리를 지나
율전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니 정면에 칠탄산이 우뚝 솟아있다.
뒤돌아본 다죽리 일대
영남알프스 외곽 능선
율전마을회관을 지나고~
동천(단장천)둑길에 도착하니 “리더스CC”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활성2교 다리를 건너 영원사지(瑩源寺址)터를 보러 간다.
활성2동 경로당
활성2동마을 담벼랑에 위치한 고목나무
활성2동 밭 가운데에 큰 바위가 박혀 있는데, 바위에는 글이 음각이 되어 있다.
여러 명의 대학교수들이 이 바위글을 알아볼려고 했지만 워낙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력을 모른다고 한다.
대추나무밭에 숨어있는 영원사지터
영원사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충숙왕때인 1313년 왕사가 된 보감국사(寶鑑國師)가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감국사( 1250~1322)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의 제자로서 왕사에 까지 오른 고승이다.
영원사 절은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 절터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인 보감국사 부도와 제13호인 보감국사 묘응탑비가 있고
몇기의 고려시대 석불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묘응탑비의 탑신도 오간데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묘응탑비의 비문은 익재 이제현이 썼다고 알려졌지만 내용을 알 길이 없고
비 상.하단부의 조각 솜씨만은 예사롭지가 않다.
옛 영원사지의 흔적들…
다시 활성2교 앞으로 되돌아 나와 다리 우측 강변을 따라 가는 한적한 숲길을 진행하니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길은 너무 묵어있고 수많은 잔가지들을 헤치면서 진행한다.
이게 뭔지???
칠탄서원(七灘書院)
임진왜란 당시 밀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오한 손기양(1559~1617)이 만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725년에 후손들이 건물을 다시 지어 진암서당이라고 명명했고, 1844년에는 청절사(淸節詞)라는 사당도 함께 지어
손기양의 위패를 모시고 “칠탄서원”이라고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손됐다가 1914년에 다시 복원했다.
현재의 건물은 비록 20세기 초반에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조선 후기 양식을 대부분 표현하고 있는데
이같은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된 곳이다.
강당으로 사용하던 읍청단
서재 누각인 벽립제/ 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동재 누각인 운강루(雲江樓)/ 동재는 중강재라 하여 숙소로 쓰였다.
운강루에서 바라본 칠리탄(단장천)의 전경
“칠탄”이라는 명칭은 산내천과 단장천이 합수된 단장면 단장리에서 이곳까지 흐른 동천의 거리가
칠리이기 때문에 “칠리탄”이라고 전해진다.
칠탄정(七灘亭)
북쪽을 바라보며 지어진 이 칠탄서원은 강당과 정자 서재와 동재가 운치를 더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인지 잡초와 먼지만 무성해 을씨년스런 느낌이다.
이후 칠탄정의 동제 누각인 운강루(雲江樓) 문을 나가니 산사태로 인하여 옛길은 사라지고~
우측으로 칠탄산 옆자락을 타고 가는 희미한 길을 이어가는데 길 상태가 엄청 험한 편이다.
간간히 나타나는 국제신문 시그널과 GPS가 가르키는 트랙을 따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홀아비꽃대 맞나?
그렇게 진행하다 30분후 폐묘를 만나고~
계곡을 하나 건너 묵은임도에 도착한후 우측으로 오르니 칠산정으로 오르는 시멘트길이 이어진다.
칠탄서원에서 구미마을로 이어지던 옛길은 관리가 전혀 되지않아 잡목과 잡초가 가득하고 대부분의 구간은
산사태로 인하여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칠탄서원을 문화재로 복원하려면 옛길을 먼저 복구해야 하는데 밀양시 문화재 관리담당이
조금만 관심을 가져준다면 현재와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칠산정(七山亭)
경남 문화재자료 제478호로 일직 손씨 가문의 별업 겸 재실이다.
칠산정의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이나 기품이 유교를 잘 표현한다고 하는데 유교와 관련한 향교, 서원, 정자에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 칠산정도 운치를 더하지만 각 건물들이 문화재다운 관리를 받지 못하다 보니 그 빼어남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구미마을회관
구미교
구미교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계령산이다.
구미마을 버스정류소
이곳에서 답사 마무리를 하고, 잠시 쉬고 있던중 지나가는 차량 히치하여 단장면 금곡교까지 편하게 이동하고~
이후 표충사에서 나오는 밀양시내버스를 타고 밀양터미널로 이동후,
곧바로 연계되는 부산行 버스를 타고 부산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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