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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講解

반야심경 강해 6-보살(菩薩)

반야심경 강해 6-보살(菩薩)

 

 

관자재보살’에서 ‘보살’의 의미를 새겨보겠습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인데,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단어로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두 가지 속성을 갖춘 자가 바로 보살인 것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보면 잘 알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보살의 한결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물론 아래다, 위다 하는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후(先後),고하(高下)

상대 개념이 아닌, 분별이 끊어진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두 가지가 모두 함께 중요한 것입니다.

굳이 두 가지를 따로 구분하려 하면 이미 그 의미가 퇴색될 우려가 있습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행이며,

보리를 구함이 바로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대비원력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을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함이 곧 타인, 이웃을 이익 되게 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인생을 정직하고 올곧게 살려고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이며, 보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 연기의 진리를 통한 희망의 메시지를

가슴속에 품고 깨달음이라는 크나큰 포부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으로 이웃을 위해 부단히 희생하지만 희생한다는 상이 없으며,

부단히 궁극의 자기 향상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잠시『대지도론』의 보살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그는 ‘나는 부처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고 서원했다.

그는 이때부터 보리살타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발심을 일으킨 자가 바로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의상조사법성게』를 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란 말이 있듯이,

처음 발심한 이의 순수하고 지극한 마음이 바로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보살의 개념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고 너무 멀게만 느끼던 우리들에게

나도 보살이라는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서 지극한 마음을 내고 원을 세우면 바로‘보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대승불교의 활짝 열린 보살 사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살이 되는 세상이 바로 ‘큰 탈것[大乘]이라는

대승불교가 꿈꾸는 이상적 세계인 것입니다.

보살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언제라도 우리 이웃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이익되게 해 주십니다.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수많은 분의 보살님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내 부모, 자식, 형제, 친척, 친구, 직장 동료에서부터, 어려운 이웃,

심지어 축생들에서부터 자연만물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보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는 ‘하나’라는 깨달음의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모두를 통틀어 이르는 단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살은 중생 구제(하화중생)와 자신의 닦음(상구보리), 포교(이타利他)

수행(자리自利) 함께 이루어 나가는 존재입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어떤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보완적이며,

결국은 하나의 길에 대한 두 가지 실천 방법인 것입니다.

보통 우리 불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포교, 교화, 전법(傳法)에 대해서 불교인들은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본인의 공부,수행은 열심히 하면서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법을 일러주고 포교하는 것에는

너무도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불교의 현실입니다.

포교도 하나의 수행이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교의 힘이 바로 수행력(修行力)이요, 정진이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닫고 난 뒤에, 부처 된 뒤에 포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 바로 지금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남을 위해

한 마디라도 일러주는 그것이 바로 포교이지, 내가 깨닫지도 못했는데

무슨 포교냐고 한다면 이것은 소승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본인 수행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나를 위해 수행한다는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행하고, 내가 부처되겠다는, ‘내가’라는 아상 때문입니다.

아상을 녹이는 것이 수행일진대, 나 잘되자고 수행한다면 어찌 그 수행에 힘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내 수행이 원만해지기 위해서는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이타적인 포교의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고, 너의 수행, 이웃의 교화 포교가 바로 나의 수행과

직결된다는 당연한 믿음이 우리 불자들에게는 많이 결여되어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이 세계를 이롭게 하고,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통해 자리(自利),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보살의 사상이고, 대승불교의 실천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반야심경에 사족을 달면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신도님들 모두에게 이익 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고 보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역시 내 수행을 위해 닦아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연기법을 설법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설법한 연기법과 한달 전 설법한 연기법은 절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늘 같은 연기법을 강의하더라도 나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연기법의 세계는

나날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번 법문을 하는 동시에 나는 나의 공부를 하고 실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마다 그 실천력이 늘어가는 것이며,

그만큼 마음 공부는 깊어 가는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내 마음을 밝혀 줍니다.

이것이 내 수행인 것입니다.

이것이 포교이지, 수행이냐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분별심일 뿐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벌써 2,500년 전 그 위대한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일러 주셨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후 열반까지의 전 생애동안 철저히 포교와 교화,

전법으로 순일하게 일관하셨습니다.

스스로 이웃을 위하고 자신을 위한 정진의 삶, 보살의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는 전법의 나날이요, 중생을 위한 이타행의 나날이었습니다.

참다운 불자라면 부처님을 닮아가야 할 뿐 다른 무엇을 닮고자 하겠습니까?

보살의 삶이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전법, 중생 교화라는 이타행의 실천으로

다시금 되돌아가자는 대승불교의 선구적 삶의 방식입니다.

이제 우리의 의식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포교도 대승 보살의 당당한 수행이라는 의식 전환이 요구됩니다.

염불, 참선, 간경, 주력, , 기도만 수행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포교, 교화,

전법하는 그 자체가 소중한 수행방법이라는 수행관(修行觀)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활 수행자들이 낱낱이 모두 보살이 되는 세상이 불국토인 것입니다.

 

불국토를 따로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보살이 됨으로 인해 보살이 사는 국토는 불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밝은 보살의 원력을 밝게 세우고 나면 때부터 보살이 됩니다.

생활수행자가 그대로 보살이 됩니다.

우리 생활수행자가 나서서 밝은 깨침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일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