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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어록

(무문관 제8칙) 해중조차(奚仲造車)


 

월암화상이 스님에게 물었다.

"해중이 수레 일백폭을 만들었는데,

두 바퀴와 축을 모두 빼 버리니 무엇을 밝히려 하는 것일까?"

(月庵和尙問僧 奚仲造車一百輻 拈却兩頭 去却軸 明甚邊事

 월암화상문승 해중조차일백폭 념각양두 거각축 명심마변사)

 

무문왈(無門曰): "만약 바로 밝혀 얻으면

눈은 유성처럼 빠르고, 마음은 번개와 같으리라."

 

: 바퀴가 구르는 곳 달인이 오히려 헤맨다.

사유 상하 동서남북(처처에 자유자재하다.)

 

* 월암선과[月庵善果]: 무문스님의 사조[師祖]

 

월암화상이 괜한 시비를 하였나?

아니겠지, 무문도 본바가 있어 저렇게 설명 했겠지.

수레 일백폭에 바퀴와 축을 빼 버리다니, 그럴리가 있겠는가?

해중이 만든 수레는 잘도 굴려가고 있으니 걱정 할 일은 아니고,

다만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대 스스로 가고자 한다면 수레는 절로 굴려갈 것이다.

 

해중(奚仲)은 중국의 상고시대인 하()나라 사람으로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처음 고안한 발명가이다.

수레만들기 1인자인 셈이다.

그런데, 해중은 괴각을 부리듯 바퀴살이 백개나 되는 훌륭한 수레를 만들면서

양쪽의 바퀴를 꿰고 있는 굴대를 빼버렸다.

수레의 가장 중심축인 굴대를 뽑아버렸으니 어쩌자는 것인가?

, 양쪽 바퀴를 꿰고 있는 굴대를 제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를 묻고 있다.


무문혜개스님은 굴대를 제거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곳에서는

뛰어난 사람도 어리둥절하게 된다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동서남북과 사유상하를 자유로이 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굴대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꿰고 있는 업보의 축(), 인과의 축이라고 볼 수 있다.

중생이 중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적으로는 고정관념이나 틀, 집착의 굴대이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괴로움의 원인이 될

그런 쓰잘 데 없는 것에 범부중생들은 목숨을 건다.

굴대를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지만

오히려 빼버리고 나면 온 천하는 자기 것이 된다.

살활자재(殺活自在)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은 상식과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무심(無心)의 지혜작용은 굴대 빠진 수레바퀴가 자유롭게 시방세계를 구르듯

우리들을 자유자재하게 살도록 한다.

그러한 면에서 8칙의 해중조차는 차사문의(借事問義)의 논법이 특출한 공안이다.


자아의식을 완전히 날려 보내고 그저 텅 비워 버리려면

사상(四相)을 수행의 금강방망이로 여지없이 깨부수어야 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차별과 분별이라는 번뇌, 망심(妄心)일 뿐이다.

망념(妄念)의 자기자신이 없어지고 나면 본래의 참된 모습인 진실의 자기가 드러난다.

전도된 생각을 초월하고 깨달음에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자기 스스로가 굴대 빠진 수레가 되어 시방세계를 무애자재하게 활보할 수 있다.

정반성(定盤星)을 인정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정반성이란 천칭저울의 중앙막대기 기점에 있는 별표시(星印)를 말하는데

이것은 물건의 무게경중(輕重)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저울대의 중앙을 표시하는 것 일뿐인데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여기에 신경 쓴다.

참선에서 이 비유를 쓰는 것은 언어,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생각의 담을 허물고 인식의 카테고리를 벗길 일이다.

무심(無心)의 작용(作用), ()의 실천적인 중도(中道)의 묘용(妙用)을 살려낼 때

마음의 수레는 사방천지 종횡무진할 수 있다.

대자유의 삶에는 굴대가 필요치 않다.


(인드라망 우학스님 무문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