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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경주11구간

답사일자: 2022.2.4

코스: 나아해변(시점)-나아교차로-상라버스정류장-봉길터널(버스이동)-봉길버스정류장-봉길리교차로

-봉길해변(문무대왕릉)-대본삼거리-감은사지-대본삼거리-이견대-대본항-가곡항-나정항-나정고운모래해변

-전촌솔밭해변-전촌항-사룡굴-단룡굴-거마장마을-감포항(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9.23km "봉길터널600m 버스이동포함" (두루누비기준 17.2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4시간45분

 

▶ 갈때 : 개금집에서 부전역으로~ 광역전철 동해선 타고 태화강역에서 하차,

태화강역/버스정류장에서 701번 버스 환승하여 나아리/버스정류장에 하차,

시점까지 도보 이동.

▶ 올때 : 감포공설시장/버스정류장에서 100-1번 버스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버스정류장에 하차,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사상/서부터미널行 버스이용,

부산.사상/서부터미널 하차, 지하철2호선타고 개금집으로 귀가.

 

 

 

나아해변&월성원자력발전소

 

나아해변 소공원 정자옆 해파랑길 10코스,11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

 

​나아해변 소공원 정자옆에 세워져있는 해파랑길 10. 11코스 종합안내판 우측에 있는 11코스 스탬프를 찍고, 

(08:40)  좌측 (주)건설신화 골목으로 진행하면서 해파랑길 11코스는 시작된다.

 

 

 

 

(08:47)  나아교차로

 

좌측에 있는 나아버스정류장에서 150번, 150-1번, 160번버스가 봉길터널을 지나간다.

버스로 봉길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곳 나아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탈 수도 있다.

(버스정류장은 봉길터널전에 두 정류장이 있고, 봉길터널지나 다음정류장인 봉길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나는 버스이동을 자제하고 최대한 걷기위해 봉길터널앞 정류장까지 이동하기로 한다.

양남종점에서 09:20에 버스가 출발하는데 나아버스정류장까지 7,8분, 상라버스정류장까지 5분정도 소요되니

상라버스정류장에 늦어도 09:30분 전에 도착해야 버스를 탈수 있을 것이다.

 

 

 

(08:48)  나아리표지석앞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간다.

 

월성원자력홍보관

 

나아리표지석 우측으로 월성원자력홍보관이 위치해 있고, 홍보관 좌측으로 나산들공원이 조성되어있다.

 

 

 

(09:02)  나산교차로

 

해파랑길 대부분은 해안길을 걷던가, 산길을 걷고 또, 도로변을 걷더라도 자전거, 보행자 겸용 도로나

보행자 전용길을 걷기 때문에 큰 위험성은 없지만 이곳은 인도가 없어 많이 위험하다.

자가용과 대형차량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변 가장자리를 따라 위축된 자세로 조심해서 걸어간다.

 

 

 

(09:05)  나산버스정류장

 

봉길터널 500m앞 봉길터널 2,430m를 알려주는 교통표지판을 지난다.

 

(09:15)  상라버스정류장

 

상라버스정류장 봉길터널관리사무소에서 부착해놓은 안내문에

"봉길터널은 장대터널로써 도보는 매우 위험하오니 이곳에서 버스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봉길터널이 상당히 길고 과속차량의 굉음과 매연이 심하여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차량이용이 맞다.

버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더라도 꼭 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봉길터널을 통과한후, 봉길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다.

 

 

 

봉길터널

 

(09:40)  봉길리교차로

 

봉길리교차로 우측에는 청정누리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면 월성원자력발전소로 가는 길이고, 해파랑길은 도로를 건너 좌회전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한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방폐장이 완공되어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청정누리공원의 "새천년의 도약 (빛조형물)"

 

(09:45)  봉길해변&대본리해수욕장

 

모래사장이기는 하지만 중간중간에 몽돌이 있는 봉길해변 대본리해수욕장(大本里海水浴場)은

1968년에 지정된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내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시에서 동쪽으로 32㎞지점에 있으며, 백사장 길이 2㎞, 폭 40m이다.

남쪽의 일부 해안은 봉길해수욕장이라고 불린다.

모래질이 좋고 경사가 완만할 뿐 아니라 물이 맑고 깨끗하며 평균 22℃의 수온을 유지하고 있다.

해수욕장 바로 옆에는 토함산에서 내려와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大鍾川)이 있으며,

이곳에서 야영을 할 수 있어 가족휴양지로 적합하다.

주변에 경주 보문단지와 많은 사적지들이 산재해 있으며, 해안경관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해수욕객들에게 문화유적 관광을 겸한 매력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다.

해수욕장 200m 앞바다에는 문무대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고, 또 가까이에 감은사지(感恩寺址)와

일출맞이 명소인 이견대(利見臺)· 기림사· 용연· 골굴사 등이 있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 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대왕암으로 불리우며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이에 따라 시신을 육지에서 화장한 후 바닷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는데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의 수중 왕릉,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문헌적 뒷받침이나 기타 증거로 보았을 때

무덤 아래에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수중 왕릉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곳은 영험한 곳으로 여겨져서 제를 올리는 무속인들이나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많다고 한다.

 

 

 

(09:53)  문무대왕릉 안내문

 

이후 봉길해변끝 화장실앞에서 좌측으로 해변을 빠져나가 대종천옆으로 진행하고~

대종천을 건너기 위해 우회하는 마을길을 따라 올라 31번 국도에 올라선다.

 

 

 

(10:04)  대종교를 이용하여 역사와 전설이 얽혀있는 대종천을 건너서 간다.

 

대종천(大鍾川)

 

대종천(大鍾川)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의 재궁마을에서 발원하여 계속 북동류하다가,

장행1교 부근에서 동류하고, 양북휴게소 부근에서 남류하고, 구길교 부근에서 동류하다가,

경주시 양남면과 문무대왕면의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문무대왕면은 원래 양북면이었는데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2021년 4월부터 문무대왕면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종천의 대종은 큰 종이란 의미로 대종천에 얽힌 전설이 있다.

고려 시대의 일이다.

고종 25년(1238) 몽골의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의 구층탑을 비롯한 문화재가 많이 불타버릴 때였다.

황룡사에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의 네 배가 넘는, 무게 100톤에 가까운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골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그들 나라로 가져가기로 했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운반수단이어서 토함산 너머에 있는 하천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용은 몽골병들이 큰 종을 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배가 대종천에 뜨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종을 실은 배는 침몰되면서 더불어 종도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이후 큰 종이 지나간 개천이라고 해서 “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 뒤부터는 풍랑이 심하게 일면 대종 우는 소리가 동해 일대에 들렸고 몇 년 전만 해도

주위 마을의 해녀들이 대종을 보았다 하여 탐사하였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은은히 울리던 종소리의 주인공은 황룡사에 있던 종이 아니라

감은사의 종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빠뜨린 것이라는 일설도 있다.

그러나 대종천의 조선시대까지의 명칭은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를 통해 확인 해보면

동해천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언제 오늘날의 대종천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0:07)  대본삼거리

 

대본삼거리에서 해파랑길은 우측으로 진행해야하는데, 좌측으로 1km 떨어져있는 감은사지에 갔다가

다시 대본삼거리로 되돌아나와 우측의 해파랑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예전의 해파랑길은 대본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하여 감은사지에 갔다가 감은사지 뒤편 산으로 올라서, 

뜸북재에서 이견대 주변으로 내려와 해파랑길을 이어졌는데 해파랑길이 변경되었다.

아마도 두번이나 국도를 횡단하는 위험성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니까.)

 

 

 

(10:15)  감은사지(感恩寺址)

 

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었다.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感恩寺址 東西 3層石塔)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신문왕 2년(682)에 세워진 쌍탑이다.

전체 높이 13.4m로 화강암으로 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두 탑이 같은 규모와 형식을 띄고 있다.

2층 기단(기단부)중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만들었는데 모두 12매의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상층 기단은 면석 12매에 갑석 8매로 이루어져있다.

이렇게 탑의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석재로 구성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단을 2층으로 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형식으로 이후 한국석탑의 전형을 이루었다.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 제366-1호)와

금동 사리외함(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광대나물

 

그러고보니 오늘이 입춘이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는 법이다.

 

 

 

그렇게 대본삼거리로 되돌아와 직진하여 해파랑길을 이어가는데,

바다에 있어야 할 배가 도로위에 올라와 있다.

 

(10:26)  자연산회단지 입구

 

신라 동해구(東海口) 표석

 

동해구(東海口)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는 신라의 지명으로,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동해로 들어가는 하구일대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에서 전하고있는 중요한 세가지 유적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의 유골이 있는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을 바라볼수있도록 쌓은 축대인 '이견대',

문무대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완성한 '감은사'이다.

 

 

 

 

경주 해파랑길 11. 12. 13구간 안내문

 

자연산회단지 입구에서 좌측으로 20m가량 떨어져있는 이견대(利見臺)를 보러간다.

 

 

 

(10:28)  이견대(利見臺)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대본리(臺本里) 감은사(感恩寺) 터 앞에 있는 신라 때의 유적인데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문무왕의 해중 능묘(海中陵墓)를 망배(望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이 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에는 왕이 이 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이견대가(利見臺歌)」라는 가요가 있었다고 하는데

작자는 어느 왕이라 하나 잘 알 수 없고 가사는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어느 왕의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대(臺)를 지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이견대라 하고, 그 부자의 즐거움이 비할 데 없어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이 내린 보물, 만파식적(萬波息笛)”<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날 신문왕(문무왕의 아들)은 동해에 작은 산이 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점을 치도록 하였는데,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주고자 한다는 풀이가 나왔다.

왕이 사람을 보내 바다를 자세히 살피게 하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쳐져서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정오에 행차에 나섰다.

순간,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며 천지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7일 동안 이어졌다.

날씨가 가라앉은 후 왕이 배를 타고 그 작은 산으로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동해의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께서 내리는 보물입니다”

왕이 대나무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까닭을 묻자 용이 대답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도 합쳐질 때 소리가 나는 법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에 좋게 쓰일 것입니다”

왕이 대나무를 베어 뭍으로 나오자 작은 산과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 피리를 불면 가뭄에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고,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그치며, 병이 낫고, 적병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세상의 근심거리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해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과 봉길해변&대본리해수욕장

 

이견대에서 다시 자연산회단지 입구로 되돌아가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10:37)  문무대왕 유언비와 참배단

 

대본리방파제

 

(10:44)  대본항

 

여기서부터 경주시 문무대왕면을 지나 경주시 감포읍이다.

이후 대본항 끝까지 가면 해파랑길을 찾을 수 없다.

해파랑길은 대본항 끝에 있는 갈매기횟집으로 가기 전 골목에서 좌회전하여 마을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개인 전용 어항인가???

 

대본리 해변 갯바위

 

그렇게 대본3리 마을길을 지나고~

(10:52)  31번국도에 올라서서 국도옆에 마련된 보행자겸용 자전거길을 통해서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잠시 31번국도변의 자전거, 보행자겸용 도로를 걷던 길은

대본2리에서 다시 해안으로 들어간다.

 

 

 

(11:03)  가곡해변길이 시작된다.

 

(11:11)  대본1리(가곡) 표지석

 

(11:13)  가곡항

 

(11:14)  할배.할매 소나무와 가곡제당

 

가곡항에 있는 약 400년 된 소나무로서 마을 수호신의 당목이다.

감포 가곡제당 할배·할매 소나무는 금슬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었고 자식이 없어, 

평생 둘이서 의지하면서 살다가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나중에 할머니를 따라 할아버지도 가셨다.

그 후 폐허가 된 집에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자란 것이 할배·할매 소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그루의 할배 할매 소나무도 나란히 감포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깃배들이

무사히 귀항할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듯하다.

 

 

 

(11:16)  대본리 해변 자갈길이 시작된다.

 

(11:20)  해룡일출대관음사

 

대형 법당과 명상실이 있어 수백여 명의 템플스테이 시설을 갖춘 지상 5층,

연면적 4600㎡에 이르는 건물 내부에는 작은방 25개와 단체 이용이 가능한 큰방 3개가 있다.

그리고 해변 곳곳에 힐링 명상 공간을 마련,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31번 국도와 접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아 새해맞이 일출 관광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다.

사찰 안에 '갤러리'와 '좋은 식당‘ '커피숍' 등이 갖춰져 있어 가족단위로 나들이하기도 좋은 곳이다.

 

 

 

이후 걷기힘든 해변 자갈길과 모래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러다가 모래가 푹푹 빠지는 해변 숲속으로 들어서니 철조망도 보이고

예전 군부대의 경고문과 경계근무지 등이 가끔씩 나타난다.

 

 

 

그렇게 모래가 푹푹 빠지는 해변을 진행하다 (11:32)  31번 국도로 올라가려고 하니

이곳은 도로로 나가지 못하도록 전부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길이다. 

 

 

 

이후로도 걷기 좋은 해변길이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푹 푹 빠지는 모래길과 

굵고 불규칙한 자갈길의 연속이라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진행하다 철조망이 없는곳에서 (11:36)  좌측의 도로로 올라 31번국도를 따라간다.

 

 

 

(11:38)  지중해 레스토랑.카페.펜션 건물앞에서 좌측 해안가로 내려가니,

여기는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이기도 하다.

 

 

 

저 멀리 나정방파제가 보이고~

 

(11:48)  나정항

 

테트라포트가 길게 쌓여있는 나정방파제가 길다.

 

나정마을 해안도로 갈림길에서 우측 해안가로 해파랑길은 이어진다.

 

나정마을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후세가 만파정(萬波亭)이라는 지었는데 신라의 나, 만파정의 정을 합쳐서 나정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만파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11:55)  나정마을 해안가의 '평화의 울림'

 

신문왕이 받았던 만파식적을 불면 몰려왔던 왜구가 물러가고, 앓던 병이 나으며

국가 재난이 해결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고명진 조각가의 2019년 8월 작품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대지와 바다의 평온 기온을 모티브로

행복에 대한 염원, 소망과 미래에 대한 염원을 대나무 피리(萬波息笛) 이미지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현대적 재해석하여 조영화한 작품이다.

 

 

 

(12:00)  나정고운모래해변이 시작된다.

 

(12:02)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

 

배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는 가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가 나정고운모래해변에 위치해 있다.

2008년 KBS 가요무대가 선정한 대한민국 “한국 60년 명가요 60선'에 뽑히기까지

만만찮은 그 세월 40여년 동안 끊임없이 불리고 사랑받아온 명가요. 바다가 육지라면!이다.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2년전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두번째 애창곡인데,

어머니 생각을 하면 웬지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12:07)  나정인도교

 

나정고운모래해변과 전촌솔밭해변으로 이어주는 인도교인데, 「만파식적」형상으로 건립했다.

나정 인도교의 만파식적 설화를 살펴보면~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그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월성 천존고에 본존 하였다.

피리를 불면 나라의 걱정과 근심이 해결됐으며, 병이 든 사람들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다리가 놓인 개천을 경계선으로 감포읍 나정리에서 감포읍 전촌리로 넘어간다.

 

 

 

(12:09)  전촌솔밭해변

 

깔끔하게 잘 정비된 전촌리 해변길을 따라 해파랑길을 이어간다.

전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법동"이란 옛 이름에서 온 것인데, 법을 잘 지켜서 문을 열어 놓고 살 정도였다고 한다.

 

 

 

가로등에 "해파랑"이 새겨진 길은 여기서 처음으로 본다.

 

이후 햇살이 따뜻한 전촌솔밭해변 벤취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토스트와 캔맥주로 점심을 해결하며 휴식이다.

(10분 휴식)

 

 

 

전촌항방파제 땡겨보고~

 

이후 전촌솔밭해변끝에서 좌측으로 나와 해안도로에 도착전

(12:24)  해파랑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전촌항방향으로 진행한다.

 

 

 

(12:26)  거마상(巨馬像)

 

전촌항입구에 세워진 거마상.

신라시대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병마들을 주둔시키면서 이 지역을 ‘거마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감포로 가려면 지나가야 할 전촌항 뒷산도 말이 누워있는 모양이라고 거마산이라 한다.

 

 

 

(12:27)  전촌항

 

경주 해파랑길 11. 12. 13구간 안내문

 

전촌용굴(사룡굴.단용굴) 안내문

 

이후 감포항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은 전촌항 앞에 있는 해안가끝의 야트마한 산을 넘어야 하는데, 

(12:34)  급경사 나무데크계단을 통해 해안가끝 산길로 올라선다.

 

 

 

뒤돌아본 전촌항방파제

 

가슴이 탁 트이는 망망대해

 

(12:40)  사룡굴갈림길

 

이곳은 사룡굴(四龍窟)과 단용굴(單龍窟)이라는 해식동굴이 있는데, 이 두 개의 동굴을 전촌 용굴이라 부른다.

사룡굴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마리 용이 살았고, 단룡굴에는 감포를 지키는 용이 한 마리만 살았다.

이곳 용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마을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굴을 비워 주었고,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으로 끌려갈 뻔한

오누이를 숨겨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굴 바로 앞에서는 2개 동굴만 보이는데 구멍 속에 수평선이 있고, 구멍 속으로 동해바다가 보인다.

 

먼저 우측 바닷가에 있는 사룡굴에 갔다오기로하고 우측 나무데크계단을 내려선다.

 

 

 

(12:45)  사룡굴(四龍窟)

 

이 굴은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는 사룡과 맑은물에 사는 담룡이 함께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1970년대에 간첩 6명이 사룡굴속에 숨어 주변 정찰을 한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었는데

2015년에 개방되었다.

 

다시 사룡굴갈림길로 되돌아 나오고, 감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가 산길 나무테크계단을 이어간다.

 

 

 

(12:52)  감포항.단룡굴(單龍窟)갈림길

 

내려선 바닷가에서 우측에 있는 단룡굴에 갔다오기로 한다.

 

 

 

(12:55)  단룡굴(單龍窟)

 

다시 단룡굴갈림길로 되돌아온후 감포항으로 직진한다.

 

해안가 갯바위

 

(13:03)  저멀리 오늘구간의 종점인 감포항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마장마을 도착전 몽돌과 모래가 뒤섞인 해변

 

(13:10)  거마장마을

 

거마장마을회관,경로당에서는 우측이다.

 

거마장마을에서 감포항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명태가 감포항 해풍에 잘 말라져간다.

 

(13:20)  테트라포드 가득한 해안가를 지나고~

 

(13:25)  해파랑길 11구간 종점(감포항방파제 회센타 맞은편)이다.

 

해파랑길 11코스,12코스 종합안내판

 

해파랑길 11코스 스탬프는 종합안내판 뒤편에 세워져있다.

 

 

 

감포항

 

감포리는 본래 장기군 내남면의 지역으로 감포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안포리와 전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감포리로 하였다.

사대이끝을 감포1리, 사무골∙떡돌밭을 감포2리, 감포∙판장을 감포3리,

대안∙고대안∙부산맛지를 감포4리, 후리자리를 감포5리로 하였다.

감포3리인 <판장(板牆)>은 1937년 우리나라에서 인천 다음의 두번째 읍으로 승격된 감포읍의 중심부로,

동해안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하역하여 위판하는 어판장이 있다.

옛날 이곳을 개발할 때 모랫벌에 소나무 기둥을 박고 널빤지를 걸쳤으므로 '판장'이라고 한다.

 

 

 

해파랑길 경주 12코스는 방파제회센타앞 11코스,12코스 종합안내판앞에서 감포항옆으로 진행하면서 시작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목표했던 오늘 구간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12코스 스탬프 찍고~ 그렇게 답사마무리하고,

감포공설시장/버스정류장으로 이동, 100-1번 버스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버스정류장에 하차,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사상/서부터미널行 버스이용,

부산.사상/서부터미널 하차, 지하철2호선타고 개금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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