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2.7.21
코스: 기성버스정류장(시점)-사동3리마을/사동항-사동2리마을-기성망양해수욕장-망양정옛터
-망양1리마을-망양2리마을-황금대게공원-기성면에서 매화면으로-망양휴게소-영신해변
-덕신휴게소-덕신1리마을-덕신해변-오산1리마을/오산항-오산2리마을-오산3리마을
-매화면에서 근남면으로-진복2리마을/진복방파제-진복1리마을-촛대바위-산포3리마을
-산포2리마을-망양정해맞이공원-망양정-왕피천케이블카정류장-전통체험장-수산교/노음교차로(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24.26km (두루누비기준 23.2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6시간45분
▶ 갈때 : 개금집에서 노포동.동부시외버스터미널으로~
포항行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기성行 완행시외버스를 타고 기성버스정류장에 하차, 트레킹 시작
▶ 올때 : 같은날 울진26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25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해파랑길 24코스,25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
해파랑길 24코스,25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는 '기성버스정류장' 우측
'기성면 보건지소입구' 담벼락앞에 세워져있다.
(10:25) 해파랑길 25코스 스탬프 찍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해파랑길 25코스는 시작된다.
(10:27) 해파랑길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도로를 버리고 좌측의 농로로 진행하여야 한다.
논을 좌우에 끼고 논길 사이로, 해파랑길에서 만나기 어려운 논길 횡단이다.
좌측 건너편으로 울진비행훈련원 기숙사가 보이고~
한국 항공 전문학교 소속으로 보통 1년간의 교육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대부분 기숙사에 입소하는 모양이다.
매달 모집을 하고 두 달에 한번 입과를 한다.
평균 나이가 30세라고 하고 상당한 외국어 능력과 면접도 거쳐야 입과 할 수 있다.
국가 지원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돈도 많이 들어간다.
농로끝 하천 둑 앞 'T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하고, 개울을 건너 우측으로 진행이다.
'척산리'에서 '기성리'로 바뀐 셈이다.
기성리(箕城里)
동쪽으로 동해와 바로 접해 있는 전형적인 어촌 지역이다.
마을 남쪽으로 기산항이 있어 수산업이 활발한 지역이다.
서쪽에는 기성(箕城)들, 음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남쪽은 정명천의 하류이다.
기성 마을은 평해의 옛 고을인 기성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설은 기성(箕城)이란 마을 이름이 남~북 방향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모양이
배같이 생겼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자연 마을인 사미정 마을은 아름다운 경치, 곧 곡대, 용추, 부운, 송림, 환포, 어적을 따서 이름 붙여졌다.
(10:36) 도로갈림길에서 좌측 '보고수산'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올라간다.
완만한 도로 오르막길을 올라,
(10:44) '대풍원 나릿골 꿀벌농원'을 지나고~
이후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더니, 또 다시 도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참나리...
나래가막살이...
석잠풀...
메꽃...
(11:00) '동물이동통로' 아래를 지난다.
그렇게 '동물이동통로' 아래를 통과하면, 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사동리'로 들어서게 된다.
기성면 사동리(沙洞里)
사동(沙銅)이란 마을 이름은 이 지역에 모래가 많고, 광물질 (鑛物質)이 매장되어 있다고
구전되면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동쪽은 동해와 접하였고, 서쪽은 모악산(馬岳山)을 경계로 삼산리(三山里)가 있으며,
남쪽은 전설이 담긴 도지 고개를 지나 척산 3리와 기성리가,
북쪽은 흙리고개와 진불백사장을 경계로 망양 1리가 있다.
사동리는 상사동(上沙銅), 하사도(下沙銅), 주담(周潭)의 3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상사동(上沙銅)에는 본 마을 외에 장밭골, 돌담 마을이 있고,
하사동(下沙銅)은 세천(細川)을 경계로 남쪽 마을이 염전마, 북쪽 마을이 장장골이다.
(11:04) '사동' 방파제와 등대가 보이고~
바다가 층을 이루고 있다.
내리막길에 바라본 바다는 산이 솟아 오른듯이 아래의 바다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
위치가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사동방파제
좌측 산마루는 거의 공동묘지다.
이 지역의 특성인지 여기저기 집단 봉분이 산재해 있는데,
봉분 중간중간에 꽃을 놓고 간 흔적을 보면 꾸준히 사람들이 다녀가는 모양이다.
(11:08) '사동3리 쉼터'를 지나고~
(11:13) '사동3리' 동회관 앞을 지나서 간다.
'사동'항
사동항은 1996년 보수 사업을 실시하여, 북방파제, 남방파제, 방사제, 파제제, 진입 도로,
물량장, 호안, 선양장, 석산 복구 등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완료하였다.
사동항은 기성면을 중심으로 한 어업 전진기지이자 자연재해에 대비한 대피 항만이다.
사동항에서는 울진대게, 울진 오징어, 고등어 등 주요 어획물의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사동항은 어항의 기본적 역할뿐만 아니라 바다낚시꾼들과 스킨스쿠버 동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사동항 인근에 있는 사동항 등대는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촬영지로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11:17) '사동항 진입교'를 건너서, '사동 2리'로 들어서고~
'사동2리' 표지석을 지나는데, 도로 우측 편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동리(2)쉼터'를 지나고~
'사동'항이 끝나는 방파제 해안으로 철조망이 보이고, 더이상 해안으로는 통행로가 없는 듯하다.
(11:20) '사동'항이 끝나는 방파제 끝, 좌측 도로를 따라 해파랑길이 이어진다.
은근히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도로 오르막길을 따라 이번 해파랑길 25코스의
마지막 고개라고 할 수 있는 일명 '흙리고개'로 올라간다.
설악초...
능소화...
(11:29) '동물이동통로' 아래를 지난다.
그렇게 '동물이동통로' 아래를 통과하면,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기성망양해수욕장 관내인 '망양리'로 들어서게 된다.
기성면 망양리(望洋里)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있으므로 망양동이라 하였는데,
대곡천(大谷川)을 경계로 망양(望洋)이라 하였다.
망양리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북서쪽은 현종산(懸鍾山, 416.7m)이 높이 솟아
덕신리와 접하고, 남쪽은 국도를 따라 사동리와 인접해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여 주요 수산물은 오징어·고등어·전어 등의
어획과 미역의 채취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11:34) '기성망양 해변'이 시작되고~
해파랑길은 다시 해안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11:36) '경상측량 연수원' 앞을 지나는데, 우측 바다 쪽에는 길게
물양장(物揚場)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후 해변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지던 해파랑길은, (11:45) '기성망양해수욕장'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주차장을 따라 나가 (11:47) '해빛뜰 마을 / 기성망양 교류센터' 건물 옆으로 이어진다.
오호 통제라~
기성망양해변
기성망양해수욕장(箕城望洋海水浴場)
원래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망양정해수욕장'과 구분하여
'기성망양해수욕장'이 되었다.
완만하게 펼쳐진 백사장은 길이 600m, 폭 80m이고, 수심은 1,5∼2m 정도로 비교적 얕은 편이며,
백사장 뒤 도로 주변으로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해수욕 후 햇살을 피해 휴식하기 좋으며,
야영장과 오토 캠핑장도 마련되어 있다.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이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이 해수욕장은 새로운 2000년을 맞아 해맞이 장소로 새롭게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해수욕장의 백사장과 수평선이 거의 일직선상으로 보여, 이곳에서 해맞이를 하면 마치 바로 눈앞에서
해가 바로 떠오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아쉽게도 2022년부터 야영장으로 전환됨에 따라 기성망양해수욕장은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11:50) 해안 방풍림 사잇길을 따라 진행하고~
'망양로' 도로로 올라서고~
(12:00) 도로 좌측은 '망양정 옛터'로 오르는 테크 계단길이다.
망양정 옛터
망양정 옛 터(望洋亭舊地) -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413-4
이곳은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 옛 터(舊地)로,
망양정이 두 번째로 옮겨온 장소이다.
망양정은 고려 시대 기성면 망양리 해변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1471년(성종 2) 평해 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인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1517년(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 해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 군수 김세우와 함께 중수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평해 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그 후 세월이 오래되어 다시 허물어졌다.
1860년(철종 11) 울진 현령 이희호(李熙虎)가 망양정이 오랫동안 무너진 것을 한탄하여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 망양정이 있는 근남면 산포리 둔산(屯山 )으로 옮겨 세웠다.
1888년(고종 25) 울진 현령을 지낸 류태형의 「선사록(仙槎錄)」에 의하면,
망양정이 둔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후세 사람들의 안목이 고루하여 읍치(邑治) 조금 멀다는 이유로
강과 바다 사이로 옮겨지었다"라고 한다.
그동안 이곳은 옛터 동쪽으로 도로가 나면서 상당 부분의 터가 사라지고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2015년 정자를 건립하여 지역주민 및 탐방객의 쉼터와 선인(先人)들의 정취(情趣)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되었다.
'박선장'의 '망양정' 시판과 '망양정 유허비' 및 '망양정 옛 터' 설명판
望洋亭 - 水西 朴善長 詩
開懷森森三山遠(개회삼삼삼산원) 가슴을 여니 아득히 삼신산은 먼데
極目茫茫萬頃平(극목망망만경평) 눈길 닿는 저 끝까지 만경창파 펼쳐져 있네
欲遂平生觀海志(욕수평생관해지) 평생에 바다 보려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請君須上望洋亭(청군수상망양정)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 보시게나
조선 중기 慶尙都事(경상도사)를 지낸 박선장(朴善長, 1555(명종)~1616(광해군)이
이곳 망양정에 올라 읊은 시다.
당시에는 높으신 양반도 바다 구경이 쉽지 않았던 시기라 이 양반도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한 바다 구경을, 이 이름있는 망양정에 올라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의 절경을 마주하였으니
시 한 수 읊지 않을 수가 없었겠다.
'망양정 유허비' 한쪽 측면에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御製詩)와 원재(圓齋) 정추(鄭樞)의 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시 및 이산해의 시가,
다른 측면에는 '정철'의 '관동별곡' 중 '망양정 편'이 새겨져 있으며,
비석 뒷면에는 1993년 12월 세운 '망향정유허비문'이 새겨져 있다.
예전에는 이들 시 현판이 이곳 '망양정' 누대에 걸려 있었지만 지금은 '산포리'의 '망양정'으로
옮겨가고 이곳에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 望洋亭 - "梧亭(오정) 朴蘭(박란)이 강릉 교수(敎授)로 있을 때 차운하여 지은 시"
飛亭勝絶冠吾邦(비정승절관오방) 나는 듯한 정자의 뛰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에 으뜸이라
嶺外樓臺盡乞降(영외루대진걸항) 고개 밖 누대들 모두 와 머리를 조아리네
暘谷浪飜掀出日(양곡랑번흔출일) 양곡에 치미는 물결은 솟는 해를 떠받쳐 올리고
漁帆風急露危杠(어범풍급로위강) 고깃배 돛에 심한 바람이 불어오니 휘청거리는 돛대만 앙상하구나
誰將學釣鼇連六(수장학조오연육) 누가 장차 낚시질을 배워서 자라 여섯 씩을 한 줄에 꿸꼬
我欲追仙寫擧雙(아욕추선사거쌍) 나는 신선을 따르고자 신을 한꺼번에 둘씩 들어보네
千古雄才慙水郭(천고웅재참수곽) 천년토록 뛰어난 시인들이 수곽에 부끄럽게 여긴 까닭은
壯觀難賦海兼江(장관난부해겸강) 바다와 강을 아우른 장관을 읊기 어렵기 때문이라네
※ 暘谷(양곡) : 해 돋는 곳, 水廓(수곽) : 눈동자 부위
예로부터 평해 지역에 기성팔경(箕城八景)이 있으니,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고시(古詩)를 지어 승경(勝景)을 노래한 후 많은 명공문사(名公文士)들이 이를 차운(次韻)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다에 연해 있으나,
평해(平海)의 망양정만은 몇 리 바다로 들어간 지점에 있다.
뛰어난 시로서는 梧亭(오정) 朴蘭(박란 : 1495~ ? )의 시를 절창(絶唱)으로 삼는다"라고 했다.
'망양정' 옛터 정자에서 내려서고~
(12:10) '망양1리(망양정 옛 터)'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망양방파제'
(12:12) '망양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서 간다.
고기 건조대가 오징어로 바뀌었다.
해변에 갯바위와 어우러진 절경이 이어지고~
(12:27) '황금 울진 대게 공원'
대게의 원조! 울진
「동국여지승람」과 「임원경제지」, 「대동지지」 등에 자해(紫蟹, 자줏빛 게)로 기록된
대게는 울진의 주요 토산물로 명시되어 있다.
「해포(蟹浦)」, 「해진(蟹津)」, 「기알게(지형이 게 알을 닮은 바닷가라는 뜻)」로 불리는
평해읍 거일리(원조마을)는 울진대게의 주요 서식지이면서 해양생태계의 보고로 확인된
왕돌초(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게라는 이름은 몸체가 크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 아니라 몸통에서 뻗어있는 다리의 모양이
대나무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대게는 보통 황금색, 홍색 등 색깔에 따라 4종류로 구분하는데,
진짜 대게는 황금색이 짙은 「참대게」 또는 「박달게」를 말하며, 다리의 마디가 여섯이라 해서
육촌(六寸)이라고도 하고, 대나무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죽촌(竹寸)」,
「죽육촌(竹六寸)」이라고도 불려 왔다.
1930년대 교통수단이 원활치 못할 당시 서울, 대구, 포항, 안동 등 대도시에
해산물을 공급할 때 교통이 편리한 지역으로 반출하였으므로 집하지인
지명(영덕)으로 불려 왔을 뿐 실제 대게의 원조는 울진대게이다.
울진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대게 생산량과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대게 자원의 서식지와 생태환경보호로 원조 울진대게의 우수성을 지키고 있다.
대게 공원의 트릭 아트
'황금 울진 대게 공원' 조형물
(12:30) '오징어 판매장' 앞을 지나고~
(12:32) '어린 고기 방류 장소' 안내판을 지난다.
'7번 동해대로'의 높은 방벽 우측 도로를 진행하고~
(12:35) '7번 국도 동해대로 진입로'로 올라 우측의 '망양로' 도로를 따라서 간다.
'망양휴게소'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서서히 흩날리던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12:45) '기성면'에서 '매화면 덕신리'로 면계가 바뀌는 지점이다.
울진군 매화면(梅花面)
매년 봄이면 매화꽃 향기가 가득한 고장인 매화면은 남쪽으로 온정면(溫井面),
동남쪽으로 기성면(箕城面), 북쪽으로 근남면(近南面), 서쪽으로 금강송면과
영양군 수비면(首比面)에 접하고, 북동 일부가 동해에 면한다.
길곡리 내길마에서 발원하여 면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는 왕피천(王避川)의 지류인
매화천(梅花川)은 천혜의 자연이 그대로 간직되어 다슬기가 살아 숨 쉬는 맑고
깨끗한 하천이며,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동해안의 청정 항구 오산항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하다고 한다.
매화면 덕신리(德新里)
조선시대 때 덕신역이 있었으므로 덕신 또는 역말이라 하였다.
덕신리의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신흥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남쪽은 현종산(懸鍾山, 416.7m)이 높이 솟아 있고 500m 거리에 망양휴게소가 있으며,
기성면 망양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은 오산 1리와 인접해 있는 산간(山間)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큰골, 환리(環里), 후리(厚里), 한밭, 항실(項實, 項谷), 밤월 등이 있다.
환리(環里)는 산(山) 모양이 가락(고리)과 같이 생겼다 하여 환리(環里)라 불렀다 한다.
후리(厚里)는 그물로 고기를 몰아서 잡는다 하여 후리라 하였고
또 마을 뒷산이 그물처럼 둘러싸였다 하여 후리라 하였다고도 한다.
(12:48) '망양휴게소'
'망양휴게소'는 사람이 많아서 시끄럽고 너무 번잡해~
그냥 매점에만 들려 간식과 식수 보충하고, 서둘러 휴게소를 빠져 나온다.
참나리가 군락으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이건 보고 가야지~ ㅎ
(13:03) '영신해수욕장' 해변
(13:06) 도로 건너편에 있는 '덕신휴게소'를 지난다.
(13:07) 길이와 폭이 20m로 거의 비슷한 '덕신1교'를 건너고~
해파랑길은 300m 전방에서 우측으로 갈리는 '917번 도로'를 따라 '오산리' 방향으로 이어진다.
(13:09) '덕신리 버스정류장' 뒤편 길을 따라 직진해 나간다.
도로 좌측으로 '덕신 감리교회'가 보이는 '덕신교차로'에서
우측 '덕신1리' 방향으로 진행하고~
(13:12) 해송 고목이 비스듬히 자라고 있는 '후리정' 정자 쉼터에 배낭을 내리고
점심을 해결하며 35분 푹 휴식이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ㅎ)
다시 행장 갈무리하고 다시 출발!!!
(13:49) '덕신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우측으로 '덕신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계속 진행이다.
(13:51) '덕신1리'와 '오산1리'가 갈리는 '오덕교'를 건너고~
기수역 앞쪽으로 '오산항' 방파제 공사가 한창이다.
오산리(烏山里)
울진군 매화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오산 1리, 2리, 3리 세 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있다.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오천동(烏川洞)과 초산동(草山洞)에서 ‘오(烏)’ 자와 ‘산(山)’자를 따
‘오산(烏山)’이 되었다.
'오산 보건 진료소' 앞을 지나는데,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된 낮은 방파제에는 홍게 건조대가 줄지어 있다.
(13:55) '오산1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13:56) '오산1리(오천) 버스정류장' 앞을 지나서 간다.
'오산1리' 동해안 순복음 교회를 지나고~
(14:02) '오산항 어판장'과 '죽변 수협 오산지점' 앞을 지나서 간다.
오산항
1960년 이후에 축항 공사를 실시하여 100m 방파제가 축조되었고,
1990년에는 1종항으로 승격되었다.
죽변항과 후포항의 중간 지점에 있어 풍랑으로 위급할 때에는 어선 대피소의 역할을 하며,
각종 해산물의 물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1989년부터 국립 수산 진흥원 종묘배양장에서 넙치·전복·연어 등 종묘를 배양하여
앞바다에 방류로 어민 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오산'항에서 잡히는 꽁치는 담백한 맛이 일품이라 한다.
(14:03) '오산2리' 교통 표지판을 지나고~
오산2리는 1670년경 안동 김씨가 마을을 개척한 이래 마을 이름을 '지심'이라 하였는데,
그 뒤 울진 임씨가 입향하면서 뒷산에 나무가 무성해지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면서
'초산(草山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14:06) '오산2리(초산)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지나온 '오산방파제'를 뒤돌아보고~
(14:07) '오산2리 쉼터'를 지나서 간다.
갯바위로 나가는 잔교가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에 올라보고~
잔교 초입에 호랑이 양각판이 전시되어 있다.
'오산2리'와 호랑이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쉼터에도 방호벽 벽화에도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마을 설명 자료에는 호랑이와 연관된 자료는 없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산중 혹은 마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동물이었다.
용맹함과 위엄을 두루 갖춰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존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호랑이는 수렵의 대상이 아닌 벽사, 수호신적 성격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민화 호랑이 그림으로서
사(邪) 된 존재를 멀리하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벽사적·길상적 의미가 강하다.
'오산2리' 해안가 갯바위
(14:12) '오산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오산 해수욕장' 백사장이 길게 이어진다.
(14:17) '오산3리' 교통 표지판을 지나고~
불영사계곡16km 성류굴12km를 알리는 교통 표지판을 지난다.
'한국 수산자원공사 동해 생명자원 센터' 앞을 지나는데,
백사장으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배출수를 바라보고~
해파랑길을 걷다 보면 자주 목격하는것이 바닷가로 내 보내는 배출수인데???
바다 옆에 위치하여 맑은 바닷물을 계속하여 끌어올리고 양식장을 한 바퀴 돈 물은 다시 바다로
내보내야 하는데, 과연 배출수를 깨끗하게 정화하여 다시 바다로 내보내는지 그것이 의문이다.
(14:24) 또 다른 '오산3리' 교통 표지판을 지나고~
(14:27) 좌측으로 '울진군 노인 요양원' 입간판을 보며, '무릉교'를 건너고~
'무릉교'를 건너지만, 다리 건너편은 아직도 '오산3리' 관내다.
이 바닷가에 웬 양떼들이...
지나온 오산해변을 되돌아보고~
(14:35) 그렇게 '917번 지방도'인 '망양정로'를 따르면, '근남면' 교통 표지판을 지난다.
'매화면 오산3리 무릉마을'에서 '근남면 진복2리 동정마을'로 면계가 바뀌는 지점이다.
근남면(近南面)
근남면의 북·서·남쪽은 각각 울진읍(蔚珍邑)·금강송면(金剛松面)·매화면(梅花面)에 접하고,
동쪽은 동해에 면하는데, 울진읍에서 남쪽에 가까운 면이라 해서 근남면이라 하였으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7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울진군에서 비교적 면적은 좁지만 인구밀도는 높은 면이다.
면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왕피천(王避川)과 지류인 광천(光川)은 서부 산지에서는
심한 천입곡류(穿入曲流)를 하나 노음리(老音里) 일대와 하구에서는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어, 면의 주된 경지 분포 지역이 된다.
왕피천 하구 후리(厚里) 부근에서 매화천(梅花川)을 따라 매화리에 이르는 구간에는
조선계에 속한 석회암이 분포해 있고, 구산리(九山里)의 선유산(仙遊山:199m) 기슭에는
‘지하 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성류굴(천연기념물 155)이 있다.
그 외에도 산포리(山浦里)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望淨亭),
행곡리(杏谷里)의 불영계곡(佛影溪谷)·천량암(天糧岩)과
수산리에 굴참나무(천연기념물 96) 등의 명승지가 있다.
근남면 진복리(進福里)
울진군 근남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새로 복을 받는다는 뜻으로 진복리라 하였고,
또한 마을의 뒷산이 진복봉(進福峯)이므로 진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백연산(白蓮山) 지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마을 뒤를 둘러싸고 있고 마을 앞은 동해이다.
서쪽은 원남면 금매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남쪽은 오산리 무릉(武陵)과 접하고
북쪽은 산포리(山浦里)와 인접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오원, 동정, 홍촌, 최촌, 맛불, 샛불 등이 있다.
'진복리' 해안가 갯바위
'진복방파제' 바라보고~
(14:48) '진복'항
(14:50) '진복2리(맛불) 버스정류장'
돌고래 트릭 아트가 최근에 그려진 듯 선명하다.
(14:52) '진복2리(맛불, 샛불, 최촌, 홍촌마을)' 표지석
'진복2리' 해변이 시작되고~
머리에 소나무를 이고 있는 대형 입석 바위를 지난다.
(15:04) '진복2교'를 건너고~
모래유실방지용인가??? 백사장뒤로 테트라포트를 길게 포진시켜 놓았다.
(15:08) '진복1리(선진마을)'로 들어선다.
'진복1리 선진마을'은 16세기 중엽에 광주노씨가 처음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 하여 '오원(梧原)'이라 하였는데,
최근에 '선진 마을'로 지명이 바뀌었다.
도로 좌측 구석에 작은 '해신당'이 고목 당목 아래 위치하고 있다.
진복리 오원마을에는 할배당이라 불리는 성황당과
할매당이라 불리는 해신당(海神堂)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황당은 오원의 남서쪽 산등성이 노송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신당은 이곳 마을 북쪽을 감싸는 구릉의 아래 해안에 인접해 있다.
'해신당 당집 내부는 제단을 조성하고 제단 위에는 각기 '성황신위'라 쓴 두 개의 위패가 놓여 있다.
제단 위쪽의 양 모서리에는 당집의 성주로 추정되는 접은 한지를 걸어 두었고,
해신당의 추녀 밑에는 갈퀴에 매단 해산물을 걸어 두어 해신당임을 나타내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밤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동제를
성황당과 해신당 순으로 지내고 있다.
'오원마을' 해안에도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기묘한 형상의 갯바위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다.
(15:20) 그렇게 진행하면, 돌출된 해안 갯바위에 소나무가 여러 그루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곳부터 '산포3리'에 들어선다.
근남면 산포리(山浦里)
옛날 왕피천 하구(河口)에 모래가 쌓이기 전에는 1000m 이상이 포구(浦口)로 되어 있어
배가 왕래(往來)하였다 하여 산포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1650년 경에 달성 서씨(達城徐氏)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1916년 세포동·흑포동(黑浦洞)·
도촌동(島村洞)·둔산동이 통합되어 산포리로 개편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가는개, 호암(狐岩: 여우가 살던 바위), 화수독, 월증리, 망지등, 목동바우 등이 있다.
화수독은 1750년 경에 가는개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전소되고부터 마을 앞산에
독을 두 개 묻어 놓고 매년 음력 2월에 물을 독에 채워 두었는데, 독의 물이 많이 줄면
화재의 위험이 있다 하여 주의하고, 적게 줄면 재해(災害)가 없다고 전해오고 있다.
검은개는 망지등이 있는데 이것은 바닷속의 고기떼를 찾기 위하여 망(望) 보던 산봉우리를
망지대(望知臺)라 하여 일컫는 말이며, 촛대바위는 동해안에 빼어난 경관을 이루는 바위이다.
(15:21) '물개바위'
꼭 물개가 바위 위에 올라서 잠을 자고 있는 형상인데, 자연이 빗어놓은 조각이 신비롭기만 하다.
(15:24) '산포리' 이 구간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촛대바위 사이를 지난다.
1986년 울진 해안 도로 구간 중 미개설구간인 산포-진복간 해안 도로를 개설하면서
현재의 촛대바위를 제거하도록 계획된 것을 빼어난 절경을 보존하려는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공사 관계자의 공사 위험을 무릅쓰고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하게 된 것이며,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마치 촛대와 같은 모양의 바위라고 하여
이후 자연스레 '촛대바위'라 불려지게 되었는데, 오늘날에 관광명소가 되었다.
(15:32) 갯바위 건너편 '금호정' 정자에 올라 배낭을 내리고 물 한잔하며 잠시 휴식이다.
'산포3리' 해변
(15:40) '산포3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산포3리' 마을 표지석 옆 '마을 유래' 설명판에는 또 다른 마을 유래가 설명되고 있다.
이 마을은 1600년 경 홍천 용(龍)씨가 터전을 잡은 후 제주 고(高)씨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다.
당시에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동네의 모습이 검게 보여 흑포동(黑浦洞)이라 하였으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마을 뒷산 네 곳에 화강(火瓨) 항아리를 묻어 놓고 매년 2월 초하루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제(祭)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화수독은 1750년 경에 가는개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전소되고부터 마을 앞산에
독을 두 개 묻어 놓고 매년 음력 2월에 물을 독에 채워 두었는데, 독의 물이 많이 줄면
화재의 위험이 있다 하여 주의하고, 적게 줄면 재해(災害)가 없다고 전해오고 있다'라는
말과 결이 약간 다르게 전해오고 있다.
'산포3리' 해변 바닷가 끝에 테트라포트를 길게 쌓아 놓았다.
해변 백사장 끝에 물양장이 보이고~
(15:50) 성류굴 6km 교통 표지판을 지난다.
지금 걷고 있는 '917번 지방도' 망양정로를 이어가면, 망양정로 끝에서
해파랑길 25코스의 종점인 수산교 하단을 만나고, 왕피천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알려졌다는 '성류굴'을 만날 수 있다.
'성류굴'은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동굴이다.
지나온 '산포3리' 해변을 바라보고~
(15:55) 이 구역에서 유명한 '지니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려 했는데 오늘은 휴업이다.
아쉬운 마음 달래고, 다시 길을 이어 가려는데, 방호벽 그림이 발길을 붙잡는다.
우와~ 이 섬세함... 감동 백배다.
파도 소리와 바람만이 유일한 관람자일 수도 있는 이 한적한 곳에,
벽화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섬세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제까지 해파랑길을 이어오는 동안 수 많은 벽화를 보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려놓은 벽화가 단연 일등이지 싶다.
잠시후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산포리' 카페를 지나고~
이어지는 '망양정로'를 따라가다 (16:04) '산포교'를 건넌다.
'산포2리' 해안으로 독특한 모양의 구조물들이 바다를 향해서 뻗어 있다.
방파제라면 바다에서 파도를 막아주도록 횡으로 설치되었을 것이고,
방파제 옆으로 접안 시설이 있는 항구도 있었겠지만 이곳은 해안선과 수직으로
구조물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해 놓았다.
돌제라는 해안 침식 방지 공법의 하나로 해류가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것을 방지하여
해안으로 흙이 쌓이도록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뉴스를 보면 이곳의 해안 침식이 심해서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도로도 피해를 볼 정도였는데
돌제가 설치된 해안을 보니 해안 침식은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될 모양이다.
(16:07) '산포2리 마을회관'과 버스 정류장, 마을 표지석을 차례로 지나간다.
산포(山浦) 2리
1500년경에 달성 서(徐)씨가 개척하여 살면서 해안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리개(佳里介라 하였고, 1650년부터 '가는개(細浦)'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해안선에 가는 모래밭이 길게 펼쳐져 있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그리고 또 이 마을에는 호암(狐岩) 화수독(火水盆)이라는 것이 있고,
자연부락인 월증동(月增洞)이 있다.
'산포2리' 해수욕장을 지나고~
(16:15) '산포4리 버스정류장'을 지나서 간다.
(16:16) '해맞이 광장'과 '망양정 해수욕장'이 갈리는 갈림길이다.
소나무 펜션을 지나자마자 바로 좌측의 '해맞이 광장'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완만한 도로 오르막길을 진행하고~
(16:20) 'ㅏ자' 갈림길에서 우측의 '망양정→', '울진대종→' 방향으로 진행이다.
'망양정 공원'에 들어서고~
망양정 공원 -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일원
망양정(望洋亭)은 울진 성류굴 앞으로 흐르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 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肅宗)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숙종과 정조(正祖)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鄭樞)의 망양정시, 정철의 관동별곡,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등의 글이 전해져 오고 있는 곳이다.
망양정 공원은 정부의 경북 북부지역 경제개발 촉진을 위한 「경북 북부 유교문화권 관광개발 사업」에
선정되어 2001년부터 2010년까지 국·도비 지원을 받아 망양정 개축 및 울진대종 건립, 전통체험장,
파고라, 조경시설, 순환도로, 화장실, 주차장 조성 등 망양정을 중심으로 주변 정비를 완료하고
군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역사문화 향기와 동해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공원의 중앙부에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해맞이 행사의
타종식을 위한 울진대종과 종각이 세워져 있다.
(16:23) '망양정' 언덕 위로 올라서면 좌측에 '울진 대종' 종각이
우측에 '소망 전망탑'이 세워져 있다.
'울진 대종'
울진 대종은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박한종이 높이 2.86m, 바깥둘레 1.638m,
무게 7,518㎏(2,005貫)의 대종을 2006년 12월 제작 완료하였다.
문양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아름다운 비천상을 응용하였고,
명문은 향토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시인인 김명인이 맡아 울진군의 무궁한 발전과
화합을 염원하는 내용을 새겼다.
'소망 전망탑'
'소망 전망탑'이 세워진 이 언덕은 이곳은 원래부터 일출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해발 45m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섬이나 다른 장애물이 없어 떠오르는 해를
한눈에 쏙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은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이곳에서
해맞이 행사를 열어왔다고 한다.
'망양정 공원' 포토존
'망양정'이 조망된다.
수국...
망양정으로 가는 길은 '바다 소리길'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아름다운 실로폰 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은 실로 환상적이고,
실로폰 소리에 대나무 소리까지 어우러지는 정말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16:35) '망양정'
'망양정' 안내문에는 '원래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에 있었던 망양정을 조선 철종(186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2005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지었다'라고 하고, 망양정 안에
걸려 있는 시 편액을 나열하고 있다.
망양정(望洋亭)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번지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의 정자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이다.
고려 시대에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허물어졌으므로 조선시대인 1471년(성종 2) 평해 군수 채신보(蔡申保)가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517년(중종 12)에는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자, 다음 해 안렴사(按廉使) 윤희인(尹希人)이
울진 군수 김세우(金世瑀)와 협의하여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 평해 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또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690년(숙종 16) 숙종이
안원군(眼原君)에 편액(偏額)을 보내어 게판(揭板)하였다.
1858년(철종 9) 울진 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의 근남면 산포리 둔산으로 옮겨 세웠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였다.
1888년(고종 25) 울진 현령을 지낸 류태형의 「선사록(仙槎錄)」에 의하면, 망양정이
현종산 남쪽 기슭에서 이곳 둔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후세 사람들의 안목이 고루하여
읍치(邑治)와 조금 멀다는 이유로 강과 바다 사이로 옮겨지었다" 라고 했다.
때문에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조선 숙종이 내린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이나,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망양정 편,
숙종과 정조는 어제시(御製詩), 정선(鄭敾)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정추(鄭樞)의 시,
심수경(沈守慶)의 시, 임회(林薈)의 시, 박란(朴蘭)의 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시 등은 모두
이전 현종산 남쪽 기슭의 망양리에 있었던 '망양정'을 노래하고 화폭에 담은 것이다.
'망양정' 누대에 올라 동해의 만경팡파를 즐기고~
원재(圓齋) 정추(鄭樞: 1333 ~ 1382) 선생의 시
望洋亭上立多時(망양정상입다시) 망양정 위에 오랫동안 서 있으니
春晚如秋意轉悲(춘만여추의전비)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아득해지네
知是海中風霧惡(지시해중풍무악) 바람과 안개로 바다 날씨 나쁜 듯
杉松不長向東枝(삼송부장향동지) 전나무와 소나무 동쪽 향한 가지는 자라지 못했네
萬壑千巖邐迤開(만학천암이이개)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가 잇따라 놓였는데
傍山歸去傍山來(방산귀거방산래)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왔다네
雲生巨浸包天盡(운생거침포천진) 구름이 큰 물결에서 나니 하늘을 다 감쌌고
風送驚濤打岸回(풍송경도타안회)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중 '망양정'
관동별곡 중 '망양정'은
天根(텬근)을 못내 보와 望洋亭(망양뎡)의 올은 말이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 관대 [가득 성난 고래 누가 놀라게 하였길래]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물을 부는 듯 뿜는 듯 어지럽게 구는구나]
銀山(은산)을것거내여 六合(뉵합)의 나리난닷 [은빛 파도를 꺾어 내어 온 세상에 뿌리는 듯]
五月長(오월댱텬)의 白雪(백설)은 므사일고 [오월 긴 하늘에 흰 눈은 무슨 일일까]
이하 생략.
나재(懶齋)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망양정기 기문에는 "이 정자는 여덟 기둥으로 둘렀는데 기와는 옛 것을 쓰고,
재목도 새로운 것을 쓰지 않았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풍경 물색의 기이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中略>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하며 구름 걷고 비 갤 때에,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면
동쪽이 동쪽이 아니요, 남쪽이 남쪽이 아닌데 신기루(蜃氣樓)가 보일락 말락 하고,
바위섬들은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가다가 큰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고,
고래가 물을 내뿜으면 은은하고도 시끄러운 소리에 하늘이 부딪치고 땅이 터지는 것 같으며,
흰 수레가 바람 속을 달리고 은산(銀山)이 언덕에 부서지는 것 같다.”
또한 기문에 “우리나라에서 봉래(蓬萊)와 영주(瀛洲)를 산수의 고장이라 하지만
그중에도 관동(關東) 지방이 제일이 되며, 관동 지방의 누대(樓臺)가 수없이 많지만
이 정자가 제일 으뜸이 된다”라고 기록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망양정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읊은 시를 단산 김재일이 썼다.
十里沙平望大洋(십리사평망대양) 십 리에 모래 평평한데 큰 바다를 바라보니
海天遙闊月蒼蒼(해천요활월창창) 바다와 강은 멀고 넓은데 달빛이 창창하다
蓬山正與塵衰隔(봉산정여녹쇠격) 봉래산이 속세와 떨어져 있으니
人在浮菱一葉傍(인재부릉일엽방) 사람은 명아주 한 앞 가에 떠있구나
望洋亭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枕海危亭望眼通(침해위정망안통) 바다를 낀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
登臨猶足盪心胸(등림유족탕심흉) 올라가 보면 가슴속이 후련히 씻기네
長風吹上黃昏月(장풍취상황혼월) 긴 바람이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金闕玲瓏玉鏡中(금궐영농옥경중) 달 속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 북인의 영수 이산해 (李山海)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서인의 중심 정철이 서울을 떠난 죄를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에게 물어, 울진 평해에 유배를 왔다가
망양정 시를 남겼다.
이곳에 정철의 관동별곡도 나란히 걸려 있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해파랑길 26구간에 진행할 '은어다리'를 바라보고~
(16:40) '망양정'에 내려서서 진행하면 탐방로 우측에 '관동팔경'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대형 대리석 패널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제 '월송정'과 '망양정'을 지났으니 이북에 있는 총석정과 삼일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해파랑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망양정 해맞이 공원'에서 '왕피천 케이블카'를 타면 왕피천을 가로질러
해파랑길도 중간 생략하면서 훅 건너뛸 수 있지만 그럴수 있나! 여기까지 걸어 왔는데...
'망양정 해맞이공원' 조형물
(16:50) 시대에 맞추어 목장승이 아닌 콘크리트 구조물로 장승을 세워 놓았다.
앞쪽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중간에 울진금강송 생태 지킴이 및 울진 왕피천 생태 지킴이,
맨 뒤에 해맞이 지킴이와 망양정 지킴이가 양쪽으로 나란히 서서 각가 다른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탐방객을 반기고 있다.
(16:52) '전통 체험 공원'
전통 체험 공원에는 윷놀이, 풍물놀이, 말뚝박기등 각종 놀이판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16:57) 그렇게 내려서서 입구로 나오면, '왕피천'을 끼고있는 도로를 만나고~
좌회전 하여 '917번 도로' 방향으로 진행이다.
(16:58) '망양정 해맞이공원 '입구를 좌측으로 보면서, 삼거리에서 직진의 917번 도로가 아닌
담벼락을 좌측에 끼고 자전거 도로를 따라서 간다.
'왕피천' 테크 탐방로가 이어지고, 벚꽃이 피는 시기라면 이 길도 장관이겠다.
왕피천 양쪽으로 수변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태백 산맥 자락의 금장산(金藏山, 849m)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인 왕피천은
왕피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한 곳이라고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해파랑길이 지나지는 않지만 왕피천 유역으로는 불영 계곡, 성류굴, 국내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가 있다. 이곳 왕피천 하류에도 하늘로 쭉쭉 뻗은 건강한 소나무 숲 사이로 시민들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17:07) '7번 국도 동해대로' 밑을 통과하면,
해파랑길 25코스 종점인 '수산교'가 지척이다.
(17:10) 해파랑길 25코스 종점인 노음교차로의 '수산교' 앞에 도착이다.
해파랑길 25코스,26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는 노음교차로의 '수산교'입구에 세워져있다.
오늘 목표했던 해파랑길 25구간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25코스 완료 스탬프 찍고~
오늘 하룻밤 묵어갈 숙소가 해파랑길 26구간 초입에 있어,
해파랑길 26코스 출발 스탬프 찍고~
해파랑길 26구간을 연속으로 이어간다.
해파랑길 25코스,26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가 세워져있는 노음교차로에서
우측 '수산교'를 건너면서 26코스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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