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2.10.12~10.13
코스: 남항진해변/솔바람다리(시점)-강릉항-안목해변-송정해변-강문해변-강문솟대다리
-경포해변-경포호-허난설헌유적지-경포대-경포해변-사근진해변-순긋해변-순포해변
-사천해변-사천진항-사천진해변(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8.26km (두루누비기준 16.1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5시간25분
▶ 갈때 : 강릉 38구간 마치고, 현지 숙박으로 인해 39구간 들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 올때 : 같은날 강릉40구간 동시진행으로 인해 39구간 날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강릉 바우길 5구간 (바다 호수길 15km)
사천진리 해변공원에서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경포 해변과 경포 호수,
허난설헌이 태어난 초당 마을을 지나 다시 남항진까지 바다를 따라 걷는 길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가에 조개껍질을 주우며 걸을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동양 최대의 해변 솔밭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습니다.
경포 호수길의 정취와 바다 옆 솔밭길이 이 길의 아름다움과 추억을 더해줍니다.
'남항진' 해변 솔바람다리
솔바람다리
남항진과 안목을 잇는 인도교인데 총 길이 192m로, 2010년에 완공되었다.
남대천 기수역에 놓인 다리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어 피서지로서 인기가 높으며
야간에 조명으로 아름다운 야경을 보여준다.
남항진 해변[南項津海濱]
강릉시에서 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강릉공항 입구의 남항진동에 있는 해변으로,
백사장의 길이 600m, 면적 24,000㎡이다.
남항진은 남대천 하구에서 섬석천이 만나 바다로 빠지는 곳에 있는 포구로,
옛날 송정에서 한송사(寒松寺), 한송정(寒松亭), 불하산(佛下山)으로 가는
남쪽 길목에 있는 나루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해파랑길 38-39코스 안내판과 강릉 바우길 5, 6구간 안내판
(17:20) 해파랑길 38구간을 마치고, 물 한잔하고 잠시 쉬었다가 오늘 하룻밤 묵어갈 숙소가
해파랑길 39구간 초반에 있어, 해파랑길 39코스 출발 스탬프 찍고,
두루누비&트랭글 앱 켜고~ (17:30) 해파랑길 39구간을 연속으로 이어간다.
솔바람 다리 위에 올라서 강릉 '남대천' 위를 지나고,
정면의 나지막한 산이 '죽도봉'이다.
좌측으로 '남대천' 너머로 발원지인 대화실산을 비롯한 '백두대간 마루금'이
실루엣으로 희미하고~
우측으로 '남대천' 기수역을 바라보고~
(17:33) '솔바람 다리'를 건넌후 우측 아래로 내려서고,
강변길 앞에서 해파랑길은 좌측으로 '죽도봉'을 끼고 해안도로를 따라서 이어진다.
(17:35) '죽도봉'으로 오르는 테크 계단길이 있지만, 현재 시간이 일몰시간이라 죽도봉은 패스다.
죽도봉(竹島峰)
그동안 군사지역으로 묶여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2009년 산책로가
조성되어 일반인에게 환원되었다.
죽도봉(竹島峰)은 남대천 하류인 송정동 내의 견소동 아래 끝부분에 있는 봉우리로서
일명 ‘견조봉(堅造峰)’ 또는 ‘젠주봉’이라고도 한다.
죽도봉은 이 봉우리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젠주봉(峰)’은 원래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인 전주에 있던 봉우리가 떠내려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그 주변 일대는 ‘젠주염전’이라고 불린
강릉 지방의 유명한 염전 지역이기도 하였는데, 매년 전주 사람이 이곳에 와서
도지를 받아 갔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전한다.
(17:42) '강릉항' 표지석
강릉항
강릉시 송정동 안목해수욕장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로, 조선 후기까지는
견조도(堅造島)라는 섬이었으나, 현재는 육계도(陸繫島)가 되었다.
2008년 강릉항으로 개칭되기 전까지는 ‘안목항(安木港)’으로 불렸는데, ‘안목’은 원래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라는 뜻의 ‘앞목’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앞목’의 발음이 어려워 ‘안목’으로 고쳐 부른 것이라고 한다.
강릉의 주요 하천인 남대천 하류에 있는 항구로 백사장과 해송으로 유명하다.
황어, 숭어, 보리멸, 멸치, 고등어 등의 낚시 장소로 인기가 많고,
연안에서는 명태, 가자미, 넙치, 오징어, 우럭, 도루묵, 임연수어, 문어 등의 어류와
해조류, 조개류 등이 조업된다.
강릉항에는 여객터미널 및 접안시설, 요트마리나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여객터미널은 강릉항에서 정동진 해안 간 유람선 운항을 위해 2009년에 완공되었고,
2011년 강릉~울릉도 간 정기 여객선 운항이 시작되었다.
현재 울릉도 운항 항로 중 가장 빠른 구간이 강릉항에서 저동항 구간의
약 3시간 10분 소요되는 항로로, 현재 평일 편도 2회, 주말 편도 2-4회 운항되고 있다.
참고로 현재 울릉도行 배편이 있는 항구는 총 4곳인데,
강릉항, 동해 묵호항, 경북 후포항, 포항항이다.
(17:45) 안목 해변 입구
오늘 해파랑길 진행은 여기까지다.
오늘 하루 묵어갈 숙소가 이 근처에 있어 이곳에서 해파랑길 39구간을 잠시 스톱하고~
남은 구간은 내일 진행하기로 한다. '두루누비 앱'과 '트랭글 앱' 끄고~
이후 미리 예약된 숙소로 들어가 체크인하고, 곧바로 하루동안 땀냄새 칼긋게 제거하고
안목반점 중화요리집에서 짬뽕과 공기밥& 소주 1병하며 저녁 해결하고
아메리카노 한잔 구입하여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기다가 숙소로 들어가 일찍 취침이다.
10월13일
새벽5시 기상하고, 세면후 발 테이핑하고 컵라면 하나 끊여먹고~
어제 해파랑길을 스톱한 지점으로 되돌아 나가서 해파랑길 39구간 시작이다.
(06:05) 안목 해변 & 강릉 커피거리
강원도 강릉시는 2009년 10월 국내 지방자치단체 단위에서는 최초로 커피 축제를
개최한 곳으로 1세대 바리스타인 커피 명장, 커피 박물관, 커피 거리, 커피 공장,
바리스타 아카데미 등 다양한 커피 콘텐츠를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커피 전문점
대부분이 로스팅을 하는 로스터리 카페로 성업 중인 명실 상부한 커피 도시다.
강릉은 1,000년 전 신라 화랑들이 차를 달여 마신 유일한 차 유적지 한송정(寒松亭)이
있는 곳으로, 예부터 차를 즐겨 마시는 고장으로, 지금도 다른 지역에 비해 다도 인구가 많은데,
이는 일찍부터 커피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강릉 커피 거리로 회자되는 강릉항 일대는 1980년대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으나
커피 자판기 5~6대가 생겨나면서 강릉은 물론 영동 지역 청춘 남녀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았고,
바다 동네에 자연스럽게 커피 마을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세대 바리스타로 손꼽히는 박이추(朴利秋)가 손으로 커피를 직접 볶아 내려
마시는 커피를 선보인 뒤로 강릉 커피 문화는 꽃 피기 시작하였다.
특히 최초의 상업용 커피 공장, 커피 박물관과 커피 농장 등 쟁쟁한 커피 명인들과 함께
커피 템플 스테이, 커피 힐링 캠프, 커피 공원, 커피 갤러리, 한옥 카페 등 특화된 커피 명소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커피 관련 인구와 문화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안목 해변'
'강릉 커피 거리'를 지나면서 ANMOK 포토존을 지난다.
안목 커피콩 탑 & 커피잔
2012년 제4회 강릉 커피축제를 기념하여 제작된 조형물로서
안목 커피거리를 대표하는 조형물이다.
커피잔과 커피콩을 형상화하여 만들어졌으며, 커피거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포토존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안목 해변' 전망대
(06:20) 그렇게 '커피거리'를 지나고, 우측 소나무 숲 사잇길을 따라서 간다.
군부대 건물인 듯한 담장에는 글씨를 포함한 예쁜 벽화가 포토존을 형성하고 있다.
도로 맞은편에는 강릉지역 해수욕장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해변 방향 끝 지점에는 초당두부 그림이 그려져 있다.
(06:32) '송정 해변'에 도착이다.
송정 해변(松亭海邊)
강릉시 송정동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길이 700m, 면적 2만 8천여㎡의 백사장과
주변의 송림이 유명한 해변이며, 이들 소나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 강릉이
왜군들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고려 충숙왕의 부마 최문한(崔文漢)이 송도에서 강릉으로 올 때, 소나무 8그루를 가져와
이곳에 심고 '팔송정'이라 하였다. 그 후 마을 이름이 송정으로 바뀌었고,
송정 해변은 마을 이름을 따른 것이다.
해변 입구 바로 옆 우거진 소나무 숲에 아주 잘 형성된 산책로[딴봉마을 산책로]가 있어
피서객들이 해변과 숲속 산책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매력적이다.
송정해변 바로 옆에 인접하여 있는 안목 해변과 강릉항 일대는 커피거리로 조성되어 있어
연중 수시로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송정 해변에서 10분간 일출을 즐기고~
(06:42) 이후 해파랑길은 '송정해변' 도로 건너 '딴봉마을 산책로'로 들어가서 진행이다.
딴봉이란?
예로부터 강문 가는 곳으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봉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는 것에서 유래된 지명이라 한다.
그렇게 딴봉마을 소나무 숲 산책로로 들어서면 시원한 산림욕을 즐기면서 진행하고~
(06:46) 산림 한가운데 공터에 정장 차림의 좌정한 인물상이 얹힌 돌탑을 지나고~
앞면의 비문을 살펴보니 '송림 처사 경주 최공 봉조(鳳祚) 유적 기념'이란 비문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랫단에는 '三生餘年 精誠으로 육성하신 송림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 송림을 조성하는데 평생을 바친 최봉조 선생의 비석인 듯하다.
강릉바우길 이정표를 지난다.
해안도로를 건너 계속 송림 사이를 지나면 조각 작품들이 보이는데,
이들 조각품들은 맞은편 '세인트존스 경포호텔'에서 조성한 조각 공원이다.
거꾸로 선 청동 남자상과 이를 외면하고 뒤돌아 가버리는 청동 여인상인데,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수가 없다.
알몸 상태로 마주보고 서 있는 청동 남녀상
말 청동상
(07:16) '강문 해변'
강문해변[江門海濱]
백사장의 규모는 길이 680m, 면적 3,200㎡이다.
경포호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경계로 북쪽은 경포 해변, 남쪽은 강문해변으로 구분된다.
여름에는 경포여름 해변축제도 열린다.
근처의 강문항에서 새벽에 싱싱한 횟감을 싸게 살 수 있고, 주변에 횟집 단지도 형성되어 있다.
낚시꾼들은 항구에서 황어, 노래미 등을 낚기도 한다.
경포호를 끼고 있는 초당동에는 바닷물로 만드는 유명한 초당두부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강문 해변 포토존
(07:23) '강문 솟대다리'
강문 솟대다리는 강문해변과 경포 해변을 연결하는 길이 89.15m, 폭 4.1m의
아치 형태의 인도교로 2012년에 개통되어, 새로운 명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강문 솟대다리' 안내판을 살펴보니 엉뚱하게도 '정철'의 '관동별곡' 중
강릉을 노래한 가사를 소개하고 있다.
강문 솟대다리 Ⅱ
솟대는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장대 끝에 새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서 달거나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높이 달아매는 민간신앙의 상징물이다.
강문 진또배기마을의 특징을 다리로 표현하여 강문의 최고의 포토존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강문 진또배기 마을
강문은 '강이 흐르는 문', 혹은 '강이 흐르는 입구'라는 뜻이며, 경포대를 품고 있는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흐르는 곳에 위치한 작은 항구 마을로, 앞내와 뒷내(운정천)가
경포 호수에서 만나 이곳 강문에서 바다로 빠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이다.
강문은 흔히 진또배기 마을이라고 하는데, 초당 동에서 강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강문을 상징하는 진또배기 마을이라는 대형 마을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진또배기는 솟대의 강원도 사투리로, 솟대는 보통 마을 수호신의 상징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솟대는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대'라는 뜻으로 그 자체가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데, 예로부터 짐대, 오릿대, 솔대, 갯대, 수살이, 액맥이대, 방아솔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진또배기는 이렇게 수많은 솟대의 이름중의 하나이지만 강문에서는 예로부터 솟대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고 진또배기라고 불러왔는데, '짐대박이'를 어원으로 진대(솟대)가 박혀 있다는
의미로 진또배기라 불렀다고 추정하고 있다.
좌측 강문교 옆의 가로등 위에도 솟대가 얹혀있다.
저 멀리로 백두대간의 능경봉, 대관령, 선자령 등을 가늠해 보고~
(07:27) '강문 진또배기 성황당'
'경포 해변'으로 들어서고, 해안 테크 탐방로를 따라서 진행이다.
(07:35) '경포 해변'
경포 해변(鏡浦海邊)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동해안 최대의 해변이다.
여기서 해변이라는 말은 해안선의 연속이 아니라 해수욕장(海水浴場)이란 말을 고쳐 부른 것이다.
강릉시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6km, 경포대에서 1km 지점에 있으며, 행정구역 상
강릉시 안현동 산 1번지에서 강문동 산 1번지에 이르는 지역이다.
경포호(鏡浦湖)와 바다 사이에 생성되어 있는 사빈(砂濱)으로, 6km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주위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또한 곳곳에 산재하는 해당화는 한층 아름다움을 더한다.
부근에는 경포대와 오죽헌(烏竹軒) 등 많은 명승고적이 있으며, 피서객이 많이 찾아온다.
'경포 해변' 테크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다, 갈림길에서 경포호 옆 '해안로'로 나와
'경포호'를 바라보며 좌측으로 진행이다.
(07:39) '경포호'
경포호(鏡浦湖)
경포호는 거울같이 맑은 호수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수심이 깊지 않아 사람이 빠져도 상하지 않는, 마치 선비와 같은 덕을 가진
호수 같다고 해서 군자호, 어진개라고도 한다.
경포호로 들어오는 경포천[정동천, 죽헌천, 앞내]은 성산면 위촌리 사실이재와 멍애재에서
발원하여 위촌천을 이루며 느릅내, 원퉁이, 뒷뜨루를 지나 군정교에 와서 홍제동 개실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 흐르다가 해운정 앞에서 운정천과 만나 경포호로 흐르고, 또 운정천은
죽헌의 뒤쪽으로 흘러 뒷내라고도 하는데 성산면 송암리 미리재에서 발원하여 거리송암,
울바위, 한밭, 날밀을 거쳐 해운정 앞에서 경포천과 만나고, 안현천은 사천면 방동리 방골에서
발원하여 산대월리, 안현을 지나 호수로 들어온다.
경포호는 경포대와 함께 2013년 12월 30일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경포팔경 Ⅱ
경포대(鏡浦臺)를 중심으로 호반에 산재한 역사적 누정[해운정(海雲亭), 경호정(鏡湖亭),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취영정(聚瀛亭),
상영정(觴詠亭)]과 경포해수욕장 및 주변에 울창한 송림지대를 일괄하여 일컫는다.
일경, '녹두일출(綠荳日出)'은 호수 남쪽 해안의 녹두정[지금의 한송정 터]에서 보는 일출이다.
이경, '죽도명월(竹島明月)'은 호수 동쪽에 솟아 있는 산죽이 무성한 죽도에서의 달맞이 광경이다.
삼경, '강문어화(江門漁火)'는 강문 입구에 고깃배의 불빛이 바다와 호수에 비치는
아름다운 밤의 모습이다.
사경, '초당취연(草堂炊煙)'은 초당마을 저녁 무렵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다.
오경, '홍장야우(紅粧夜雨)'는 경포호 북안(北岸)에 있는 홍장암에 내리는 밤비로
홍장의 전설이 얽힌 장소의 정경이다.
육경, '증봉낙조(甑峰落照)'는 호수 서북쪽 시루봉 일몰의 낙조 풍경이며
해 질 녘의 구름 사이로 저녁노을이 반영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칠경, '환선취적(喚仙吹笛)'은 시루봉 신선이 바둑을 두고 피리를 부는 신선경이다.
팔경, '한송모종(寒松暮鍾)'은 호수 남동쪽 한송정에서 해 질 무렵 치는 종소리이다.
(07:42) '경호교'를 건너고~
'경포 호수광장'
'경호교'를 건너 '경포호' 방향 산책로를 따라 해파랑길은 이어진다.
예전에는 '경호교'를 건너 좌측 '생태공원'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우측으로 '스카이베이 경포 호텔'을 바라보고~
정면으로 당겨본 백두대간 마루금에는 운해가 피어오른다.
그렇게 경포 호변을 따라 진행하면 '홍길동전' 캐릭터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보기좋은 코스모스 화원...
(07:55) '허난설헌'유적지' 갈림길
경포호 산책로에서 해파랑길은 좌측 '허난설헌 유적지'로 진행하여
교산교를 건너고, 경포천 좌측 '허난설헌 유적지'에 갔다가
다시 경포호 산책로에 되돌아와 산책로따라 진행하게 된다.
'교산교'를 건너고~
'교산교'를 건너 좌회전 하여 좌측으로 보면, '쌈지 쉼터'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이야기 벽화'가 세워져 있다.
△이 름 :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크 기 : 22.2x12.0㎝
△방 법 : 종이에 채색
△시 기 : 조선시대
△소장처 : 허엽의 12대 종손
어려서부터 여신동(女神童)으로 불리던 허난설헌(1563~1589년)의 작품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에는 지팡이를 든 아버지로 보이는 인물과 손을 잡고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날짐승을 부러워하며 쳐다본다는 뜻의 이 그림은 뜰 밖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여자라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 소녀는 허난설헌이 자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의 또 다른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에서 여자가 그림에 등장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최초로 사내아이가 아닌 여자아이가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주변의 실경(實景)이 등장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야 나타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 선구적이 면이 있었다.
당시 여자아이에게 교육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안 지어 줬다는 조선시대에
천재로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 간 허난설헌은 혼인을 했지만
노류장화의 풍류를 즐기는 남편 외에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이 그녀를 괴롭혔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따른 가정의 참화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시름을 달래던 27세 어느 날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작품을 모두 태웠다.
친정집에 있던 시와 작품도 소각하라고 했지만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동생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
그녀가 죽은 후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시집 `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시 213수가 전하며,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세계적인 여류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좌측의 글씨는 허난설헌의 친필로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한가로이 옛사람의 그림을 보다)이다.
(08:00) '난설헌교'를 건너는데,
우측 교대 머릿돌 위에 거북이 등을 타고 있는 화랑도 조각이 세워져 있다.
갈림길에서 야자매트가 깔려있는 좌측 송림 숲길로 들어서고~
(08:06) '초당동 고택(허난설헌 생가터)'
강릉 초당동(草堂洞) 고택
강릉시 초당동 475-3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통 가옥으로,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許曄, 1517~1580)이 살던 집으로, 허엽의 딸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현재 가옥의 모습은 1912년 초계 정씨의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 지으면서 갖추어졌고, 1985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로 배치되어 있으며, 바깥과 구분하는 담이 있다.
본채 앞에 '一자'형의 행랑채[대문간채]가 배치된다.
대문간채와 직접 연결된 넓은 마당이 있는 사랑채는 안채의 건너편에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안채와 연결된다.
사랑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으로 이어져 있고, 전면 5칸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전면에 툇마루, 오른쪽에 대청 2칸이 있다.
사랑채의 왼쪽 끝 상노인방은 안채 출입문간으로도 드나들 수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이 앞에 있고, 사랑채 옆에는 사랑 마당과 구분하는 담을 안팎으로 쌓아
안채에서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고, 드나들 수 있는 협문이 있다.
안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물 간과 방앗간 옆으로 협문을 두어 아녀자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행랑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의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으로 3칸 크기의 광이 있고,
왼쪽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다.
솟을대문은 사랑채를 출입하는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며, 옆면의 협문은 안채로 출입하는
여자들이 사용하였다.
안채 뒤쪽의 후원과 사랑채 앞쪽의 사랑 마당에 있는 정원은 잘 꾸며져 있으며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형태가 잘 나타나 있다.
고택 주변의 소나무 숲은 전통적인 한옥의 멋을 더해준다.
이 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남녀 출입문이 다른
「내외담」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출입하는 문과 달리 여성이 출입하는 문에는 앞에 우물이나 디딜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벼락닫이창」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막대기로 고정시켜놓은 창에서 막대기를 빼면,
벼락같이 닫혀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손님이 사랑채로 들어가면 안에서는 손님을 살펴 취향에 맞는 술과 식사를 준비하였야 했기 때문에
안채에서 대문과 사랑채 마당을 볼 수 있는 창을 두었는데, 손님과 눈이 마주칠지 모를 위험이 있어
벼락닫이창을 통해 어떤 손님이 왔는지를 빨리 알아보았다고 한다.
허난설헌 상과 곡자 시.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楚姬(초희), 호는 蘭雪軒(난설헌), 자는 景樊(경번)이다.
자 景樊(경번)은 난설헌이 중국의 여 신선인 번부인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 하며,
난설헌 호는 난초의 청순함과 눈(雪)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당대 석학인 아버지 허엽과 오빠,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익혔으며
집안과 교분이 있던 손곡 李達(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8세에 '廣寒殿白玉樓上梁文(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15세에 金誠立(김성립)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했다.
그 아픔을 詩로 적은 哭子(곡자)가 전한다.
친정집에서는 獄事(옥사)가 있었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한다.
그녀의 짧은 생은 아픔과 한으로 속으로만 가슴 앓이 하다가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218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는데, 동생 허균이 누나를 추모하여
초고를 모아서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을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 38) 허균이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어 의주(義州)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일행을 마중하여 서울로 오는 도중,
사신 주지번이 허난설헌의 시에 대해 물었으므로 허균이 누님의 시집을
가져다가 주었더니, 주지번은 이를 읽으면서 칭찬해 마지않았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8 참고.)
주지번이 중국에 돌아가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하였는데, 명나라 문사들이
이 시집을 읽어보고 허난설헌을 조선 제일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허난설헌이 조선 시대 5백여 년 동안 제일의 여류 시인이 된 것은
열정과 사랑에 넘쳤던 남동생 교산(蛟山) 허균의 덕택이었다.
허난설헌은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당대의 유명한 여류시인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규방(閨房) 문학가로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허씨 오문장 시비
허씨오문장가(許氏五文章家)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허엽(許曄)을 비롯하여
그의 네 자녀를 합하여 허씨 5문장가라 부른다.
초당공과 청주 한씨 소생의 장자 허성(許筬)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냈고,
사별 후, 예조참판 강릉 김씨 김광철의 여식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허봉(許篷)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다음이 허초희(許楚姬)고,
막내 허균(許筠)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찬성을 지냈으며,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홍길동전'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관람시간 전이라 제대로 된 관람을 못하고 떠나는것이 내내 걸리지만
그래도 우야노? 후일을 기약할수밖에~
이후 '난설헌교'와 '교산교'를 차례로 건너서 경포 호반 탐방로로 되돌아 나오고,
(08:24) 좌회전하여 경포 호반 길을 따라 진행이다.
경포의 달
달 표면 500km 상공에서 촬영한 달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렇게 경포 호반 길을 따라 진행하니 시비와 조각 작품이 줄지어 전시되고 있는데,
1999년에 경포호 서편 산책로 주변에 '시비·조각 산책로'를 조성했다고 한다.
실락원
(08:37) 가시연꽃 발원지 입구
시기적으로 가시연을 비롯하여 다른 연도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조형물을 보며 잠시 쉬었다 간다.
가시연꽃의 꽃말이 청결, 순결, 번영, 장수, 그대에게 행운을 등이다.
가시연은 1년생 수생 식물이다.
전 세계적으로 1속 1관에 속하는 가시연은 줄기와 잎, 꽃 등 식물체 전체에
가시가 돋아나 있어 ‘가시연’이라고 명명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 지역에서 주로 자생하며,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야생 식물 Ⅱ급으로 지정되어 있는 보호종으로, 강릉 지역에서는
경포 가시연 습지 일원에 2010년 경포 습지 복원 사업을 통해 자연 발아되어 서식하고 있다.
가시연은 7~8월에 가시가 돋은 긴 꽃대가 자라서 그 끝에 지름 4㎝의
밝은 자색 꽃이 피어 낮에는 벌어졌다가 밤에는 닫힌다.
개폐 운동을 약 3일간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가 종자를 형성하는 폐쇄화(閉鎖花)이다.
성숙한 과실은 터져서 가종피(假種皮)를 갖는 종자가 물에 뜬다.
일정 기간 떠다니다가 종피(種皮)가 썩거나 터져 물이 들어가면,
종자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음 해 4~7월에 발아한다.
첫해에는 20%, 다음 해에는 50%가 발아하며, 3년 뒤부터는 많이 발아한다.
가시연 습지 입구 테크 쉼터에서 잠시 쉰 뒤,
다시 경포호 탐방로로 나와 조각 작품을 감상하면서 진행한다.
'고독한 동행 - 김문기'
(08:45) '삼일 운동 기념탑'
소녀상
1930년대 함호영 시, 홍난파 곡의 '사공의 노래' 원추형 시비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 안내판
(08:50) '경포로'를 건너 좌측 편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경포대'로 향한다.
'경포대'로 오르는 길에 세워져 있는 시비를 대충 바라보며 오르면,
좌측으로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08:53) 경포대
경포대(鏡浦臺)
원래 고려 충숙왕 13년(1326) 당시 강원도 안령사였던 박숙정(朴淑貞)이
신라 4선(四仙)이 놀던 인월사 옛터(현재의 방해정 뒷산)에 세웠는데, 조
선 중종 3년(1508) 강릉 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옮겨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종 36년(1899)이다.
이때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추가로 설치하고 '득월헌'과 '후선함'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5칸, 대청을 받치는 기둥 32주(柱)의
단층 팔작지붕 겹처마 기와집의 누대(樓臺)로, 내부는 각각 높이가 다른
세 분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경포 호수로 향한 전면부는 한 단 올라가 있으며, 좌우 툇간은 한 단 더 올라가 있다.
경포대(鏡浦臺) 현판은 전서체와 해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전서체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쓴 것이고,
해서체는 조선 순조 때 승지를 지낸 명필 이익회가 쓴 것이다.
‘제일강산’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 또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인 양사언이
썼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것이다.
내부에는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있던 율곡(栗谷) 이이가 10세 때에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板刻)돼 있는데, 그 중 한 구절로
“하늘은 유유하여 더욱 멀고, 달은 교교하여 빛을 더하더라”
(天悠悠而益遠 月皎皎而增輝)라고 읊었다.
또한 숙종의 어제 시 및 유명한 문장가로 알려진 강릉부사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경포대는 관동 팔경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정자에서 볼 수 있는
경포팔경과 경포월삼이 장관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경포대는 경포 호수와 더불어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이 남긴 시와 글, 그림이 많으므로 역사 문화 경관적 가치가 높아,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였다가 2013년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고,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46호로 승격 지정됐다.
※ 경포팔경(鏡浦八景) : 녹두일출(菉荳日出) · 죽도명월(竹島明月) · 강문어화(江門漁火) ·
초당취연(草堂炊煙) ·홍장야우(紅粧夜雨) · 증봉낙조(甑峯落照) · 환선취적(喚仙吹篴) ·
한송모종(寒松暮鍾)
※ 경포월삼(鏡浦月三) : 월주(月柱) · 월탑(月塔) · 월파(月波)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쓴 전서체 '경포대' 현판
‘제일강산’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 또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인 양사언이 썼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것이다.
제일강산 편액 위에 숙종 어제 시가 걸려있다.
『난초 지초 가지런히 동서로 둘러섰고 / 십 리 호수 안개는 수중에도 비치네 /
아침 안개 저녁 천만 가지 형상인데 / 바람결에 잔을 드니 흥겹기 그지없네.』
해서체 경포대 현판은 조선 순조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명필 이익회가 쓴 것이다.
'경포대' 출입구로 나서서 뒤돌아본 '경포대'
(09:15)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과 '에디슨 과학박물관', '손성목 영화 박물관'을 지난다.
'참소리축음기 박물관'
참소리축음기 박물관에서는 전시관별로 시대를 반영한 발명품과 제품을 전시해 두었다.
제1 전시관은 다양한 오르골과 나팔 축음기, 포터블 축음기 등의 250여 점이 있으며,
제2 전시관은 1920에서 1930년대 각 가정의 장식품의 역할을 한 다양한 앤티크 축음기를 볼 수 있다.
제3 전시관은 192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축과 TV, 라디오를 볼 수 있으며
영국에서 제작된 세계 최초 TV 베어드 30라인 TV는 꼭 봐야 할 전시품이다.
제3 전시관까지 전시를 마치고 나면 최대 2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축음기 레코드형의
원반형으로 설계된 음악 감상실에서 큐레이터의 설명과 다양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비교하며 감상하며 소리에 대한 이래를 높일 수 있다.
옥상 전망대에서는 박물관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경포 호수를 감상하며
강릉의 자연을 느껴볼 수 있다.
'에디슨 과학 박물관'
에디슨 과학 박물관에 들어서면 1층 제1 전시관에는 에디슨의 3대 발명품인
축음기, 전구, 영사기가 전시되어 있다.
최초의 축음기인 틴포일과, 에디슨의 대표 축음기인 엠베롤라, 오페라 등의
다양한 축음기를 볼 수 있고 에디슨의 최초 영사기 키네토스코프를 비롯한
다양한 발명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2 전시관에는 에디슨이 개발한 가전제품과 기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에디슨 일렉트릭 펜은 대표 전시품으로 꼭 한번 확인해 보길 바란다.
이외에도 생활 속에서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발명한 선풍기, 다리미, 재봉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손성목 영화 박물관'
세계 최초의 영사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한 카메라 등
각국의 영사기와 영화 관련 소품,
옛 TV 등 영화와 관련된 전시물을 함께 모아 전시하고 있다.
(09:27) 강릉 방해정(인월사 터)을 지난다.
방해정(放海亭)
경포호의 북쪽 호숫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각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 삼국시대의 고찰(古刹)인 인월사(印月寺)가
있던 곳에 세워져 있는데, 부근에 있는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 중요민속자료 제5호)의
별서(別墅) 건물로서 철종 때 통천 군수(通川郡守)를 지낸 바 있는 이봉구(李鳳九)가
관직에서 물러나 1859년(철종 10)에 이 건물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봉구의 증손 이근우(李根宇)가 1940년에 중수하였다.
이근우는 방해정 주변 수천 평을 금잔디로 가꾸어 ‘이가원(李家園)’이라 이름 붙였다.
바로 앞 홍장암(紅粧岩)에 ‘이가원주이근우(李家園主李根宇)’라 새기고
손님의 접대 장소로 사용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지금도 ‘이가원주이근우’라고 새겨진 홍장암 바위가 남아 있다.
동쪽 끝부분에 ㄱ자형으로 돌출한 한 칸 넓이의 내루(內樓)가 있으며,
서쪽 끝부분 한 칸도 마루로 꾸며져 있다.
‘放海亭(방해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120여 년 전 서승보(徐承輔)가 쓴 것이다.
마루에 올라앉으면 경포(鏡浦)의 전경과 호수 건너편 초당동의 송림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정자 앞에는 경포팔경(鏡浦八景)의 하나로 손꼽히는 홍장암(紅粧巖)이 있다.
1940년 이봉구의 증손인 이근수(李根守)가 중수하고 1975년에 보수했다.
홍장(紅粧)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동했던 강릉 기녀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홍장고사(紅粧故事)’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홍장과 박신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혜숙공(惠肅公) 박신(朴信)은 젊을 때부터 명망이 있었다.
강원도 안렴사(安廉使)로 갔을 때 강릉의 기녀 홍장을 사랑하여 정이 자못 진중하였다.
임기가 차서 장차 돌아오려 할 때 부윤(府尹)인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이
거짓으로 말하기를 “홍장이 이미 죽어서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라고 하니,
박신이 슬퍼하고 그리워하여 스스로 즐겁게 지내지 못했다.
강릉부에는 경포대가 있었는데 경관이 뛰어나 관동지방에서 제일이었다.
부윤 조운흘이 안렴사 박신을 맞이하여 놀러 나가면서 홍장에게 곱게 단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도록 은밀히 명을 내렸다.
그리고 따로 그림으로 치장한 배를 마련하여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풍채가 거룩하여
모습이 처용과 비슷한 늙은 관인 한 사람을 선발하여 홍장과 함께 배에 태웠다.
그리고 또 채색 비단 위에 『신라 태평성대의 노신선 안상 / 천년의 그 풍류 아직도 잊지 못하네 /
안렴사가 경포에 노닌다는 말 들었으나 / 목란배에 차마 홍장을 태우지 못하였네』라는 시를 써서
높이 내걸고 천천히 노를 저어 경포대로 들어와 모래톱을 배회하니 관현악 소리가 맑고
원만하여 마치 천상에 있는 것 같았다.
부윤이 안렴사에게 말하기를 “이곳에는 옛 신선의 유적이 있어서 산 정상에는 차를 끓이던
화덕이 있고 여기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한송정이 있는데 정자에 또 사선비가 있다네.
지금도 신선들이 무리 지어 그 사이를 왕래하여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에 사람들이
간혹 보기도 하는데 단지 바라볼 수만 있고 가까이 갈 수는 없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박신이 말하기를 “산천이 이같이 아름답고 풍경이 빼어나지만 마침 저는 구경할 정황이 없습니다.”
하고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조금 뒤 배가 순풍을 타고 별안간 앞에 이르러 배를 대고 서로 보니 모습이 기괴하였으며
배 안에는 붉은 옷 입은 기녀가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박신이 놀라 말하기를 “반드시 신선 중 사람이다.”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홍장이었다.
온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매우 즐거워하며 연회를 마쳤다.
박신(朴信, 1362~1444)은 조선조 개국 공신으로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 후 우부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직강(國子直講)을
지냈고 조선 건국 후 강릉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현전하는 홍장의 시조는 떠난 박신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寒松亭(한송정) 은 밤의 鏡浦臺(경포대)예 물 잔제 /
有信(유신) 白鷗(백구)는 오락가락 것만은 /
엇덧타 우리의 王孫(왕손)은 가고 안이 오는이』
한송정 달 밝은 밤 갈매기는 오락가락하는데 한번 떠난 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는 한 번 간 후 오지 않는 무정한 임과 유신(有信)하여 왔다 갔다 하는 백구를
대조시킴으로써 자신의 비애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이후 1년이 지나서야 박신은 순찰사가 되어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으며
뒤에 박신은 홍장을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가 부실을 삼았다고 한다.
조선 효종 때의 학자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홍장과 박신의 이와 같은
애정 고사를 소설화하여 〈홍장전〉을 짓기도 하였다.
(09:30) 홍장암
홍장암(紅粧岩)은 경포호 호숫가에 홍장(紅粧)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위로,
고려 말 강원도 순찰사로 강릉에 머물러 있었던 박신(朴信)이 강릉 기생 홍장과 함께
배를 타고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전하며, 경포팔경 가운데 하나인
‘홍장야우(紅粧夜雨)에 해당되는 바위다.
홍장암에는 ‘이가원(李家園)’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홍장과 박신의 러브 스토리를 테마로 하여
동상을 11가지의 이벤트 별로 만들어 줄지어 전시하고 있다.
강릉시는 경포호 산책길에 안찰사 박신과 기생 홍장의 사랑 이야기(설화)를
바탕으로 조형물을 2억 5000만 원을 들여 2013년에 설치했다.
조형물은 통상 제작이나 전시 목적이 있게 마련이데, 이 박신-홍장 조형물
제작·전시는 그 목적을 모르겠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해학적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내용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21세기 어법으로 말한다면 ‘서울에서 파견 나간 공무원이 파견 근무지에서
유명 여성에게 빠져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내용인 것을…. 지난 시기 일부다처 남성 중심의
폐습이 반영된 설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해 조형물을 만든 것이다.
또한 강릉부사 조운흘(1332~1404)은 박신보다 30세 연상으로 친구가 아니다.
조형물 안내문이 잘못돼 있다.
목민심서(1818년)는 잘 아는 바와 같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책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박신과 홍장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는데, 안찰사 박신과 강릉부사 조운흘을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수령’으로 질책하고 있다.
"생각건대 박 안찰사는 물론 허황하고 혼미한 사람이요, 조공(趙公)도 꾸며서
상관을 놀려준 것은 역시 잘못이다.
내가 서읍에 있을 때에 이와 같은 일을 만났는데, 기생으로 하여금
앓아누운 체해 모시고 놀지 못하게 하고, 놀이가 파하자 사실대로 말하니,
감사도 역시 사과할 뿐 나에게 노여워하지 않았다."
[목민심서 1권 99쪽/창작과 비평사]
경호 안내판
강원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경포(鏡浦)는 강릉시 운정동· 저동· 초당동· 안현동 일원의
호수로, 관동(關東)의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호수 둘레는 12km에 달했으나 지금은 하천에서 토사가 흘러들어 4km 정도로 줄었다.
호수 주변에는 누정이 많기로 전국 으뜸이며 경포대(鏡浦臺: 보물 제2046호)를 비롯하여
해운정(海雲亭: 보물 183), 경호정(鏡湖亭),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호해정(湖海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취영정(聚瀛亭), 상영정(觴詠亭) 등의 정자가 남아 있으며,
정자마다 시문이 남아 있다.
경포호는 수면이 거울같이 맑아 경포호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람에게 유익함을 준다고 하여
군자호(君子湖)라고도 한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바위는 각종 철새들이 찾아와 노는 곳으로 새 바위라고 하며,
조선 숙종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조암(鳥岩)’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1982년 경포를 포함하는 이 일대가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호의 적곡(積穀) 조개
전설에 따르면, 옛날 경포대 아래에 최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늙은 노승이 그 부자에게 쌀 시주를 하였는데, 구두쇠인 그 부자는
쌀 대신 쇠똥을 한 삽 떠서 퍼 주었다.
모욕을 당한 노승이 문밖을 나서자 그 부잣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폭삭 무너져
호수로 변하고 말았고, 창고에 쌓아 두었던 곡식은 모두 조개로 변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해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나는데,
이 조개는 맛이 달고 향긋하여 봄과 가을에는 먼 곳에서도 조개를 잡으러 왔다고 하는데,
그곳 사람들은 이 조개를 적곡조개라 하였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 기와 부스러기와 그릇들이 남아 있어
헤엄을 치는 사람들이 가끔 줍는다고 한다.
또한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경호에는 달 밝은 밤이면
달이 네 개가 뜬다는 말이 전해 왔다.
하늘에 뜨는 달이 하나요,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에도 똑같은 달이 뜬다는 말이다.
요즘은 여기에 하나 더 더하여 남의 눈동자에 뜨는 달을 합하여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한다.
어느새 스카이베이 경포호텔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그린 영화 '절정'의 촬영 장소 표지판
그렇게 '경포 호수'를 한 바퀴 돌아서 '스카이베이 경포' 옆 길을 따라
'경포 해변'으로 들어선다.
(09:40) '경포 해변 중앙광장'
'경포 해변 중앙광장' 포토존
'경포 해변'
(09:53) '안현천'을 가로지르는 '안현교'를 건너고~
사근진 해변 1km 전방 교통 표지판을 지나는데,
1km는 잘못 기재되었다. 약 0.2km 정도???
(09:58) '사근진 해변'
사근진(沙斤津)은 안현동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사근돌진'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어부들만 사는 사근진에 삼남 지방에서 온 사기 장수가 사기를 팔다가
사근진에 눌러 앉아, 조그마한 배를 한척 구입하여 날이 좋으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날이 궂으면 사기를 팔며 생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근진 해변'에 큼지막한 갯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멍게 바위'다.
강릉 사근진 앞바다 용왕님께 어미를 살려달라고 치성을 드린 딸이 있었다.
기도에 마음이 움직인 용왕이 단방약으로 알려준 게 바로 멍게였다.
딸이 따온 멍게를 먹고 어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자연스레 전설이 되었다.
그 후 강릉 사람들은 사진 속 해변 바위를 사근진 '멍게 바위'라고 부른다.
이 멍게 바위는 무속인들 사이에 이름난 기도터라고 한다.
옛날부터 기도빨이 강해 많은 신 제자들과 기도객이 찾는 영험도량으로, 여름 피서철에
관광객이 붐비는 시기를 빼면 사시사철 무속인들이 찾아와 기도를 한다고 한다.
(10:08) '순긋 해변'으로 들어서고~
'순긋'의 뜻을 아무리 검색해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순긋 해변
경포해수욕장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사장 길이 200m에 총면적이 6천㎡로
소규모 간이해수욕장으로 아담한 해변을 가지고 있다.
분위기는 아늑하고 조용하며 수심이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다.
해안선이 완만하며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순포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0:18) '순포 해변'
순포 해변
강릉 시가지, 경포대 기준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해변이다.
모래질이 좋고 수심이 얕아 물놀이하기도 좋고, 해변을 따라 늘어선 송림과
한적한 바다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전용 주차장은 없으나 순포해변과 순긋해변이 이어져 있어
순긋해변쪽 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근처 사천항, 순포습지, 순긋해변 등 여러 관광지도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이즈음에서 강릉시 '안현동'에서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로 행정계가 바뀐다.
산대월리(山帶月里)
강릉시 사천면의 동남단에 있으며, 경포 쪽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지역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봉인 매봉에서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들의 모양이
해와 달이 입을 맞추는 ‘일월합구형’이라 하는데, 달이 뜬 저녁에 산에 올라가 보면
산이 높지 않고 밋밋하여 달이 산을 허리띠로 둘러맨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요 지명으로는 순포동·수끝·지재 등이 있다.
(10:22) '순포교'를 건너고~
좌측으로 '순포리 표지석'과 함께 '순포 습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순포습지(蓴浦濕地)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에 위치하고 있는 습지로, 동해안 18개 석호 중 한 곳이며
경포호(鏡浦湖)와 더불어 강릉의 대표적인 석호(潟湖) 가운데 한 곳이다.
‘순포’라는 지명은 과거 이곳에 순채(蓴菜)라는 나물이 많이 자생하였기 때문에 사용되었다.
순채는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2급 생물로, 순포호는 순채를 깃대종으로 정하였다.
또 2012년 멸종 위기종에서 해제된 잔가시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또 다른 자생 식물로는 새섬매자기, 골풀, 큰고랭이, 물속연잎, 수련잎, 물별이끼, 애기똥풀 등이 있다.
순포 습지에 서식하는 대표적인 조류는 왜가리, 원앙, 흰비오리, 황조롱이 등이 있다.
어류로는 황어, 붕어, 잉어, 가물치, 잔가시고기 등이 서식하고 있다.
순포는 지난 192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면적이 8만 9000㎡였으나 세월이 흘러
약 83%가 농경지화되는 등 육상 생태계로 천이가 진행되고 남은 면적은 불과 1만 5000여㎡ 정도였다.
강릉시는 습지 복원 사업을 통해 8만여㎡ 규모로 복원하고 수심도 평균 1~2m가
유지될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순포교'를 지난후 걷기좋은 우레탄 탐방로가 시작된다.
(10:42) 인테리어가 이색적으로 멋진 카페 '온다'를 지나고~
해파랑길은 우측 숲속으로 난 우레탄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쑥부쟁이...
해국...
(10:52) '사천 해변'
사천 해변(沙川海邊)
사천천 하구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은 해변으로 해빈은 길이가 300m, 폭 50m,
면적 11,991㎡으로 모래 질은 양호하며 수질 또한 매우 청결하다.
사천천에서 토사가 원활하게 흘러들어 해수욕장의 입지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사천천 하구 북쪽에 자리 잡은 사천진리의 어촌 관광 지역과 근접하여
피서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남쪽으로는 순포 해변과 경포 해변이 인접해 있어서 매년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다.
기반 시설은 다소 미약하나 야영장 및 주차장, 샤워장, 방갈로,
상가 등 편의 시설 이용에는 불편이 없다.
기업체의 하계 휴양지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주변의 관광 자원으로는 소금강과 경포 도립 공원이 있다.
(11:00) 雙閒(쌍한) 유적지
좌측 건물은 박수량의 효행 비각이고, 우측 건물은 쌍한정이다.
쌍한정(雙閒亭)
1520년(중종 15)에 박수량(朴遂良)과 박공달(朴公達)이 관직에서 물러나
함께 소요하는 공간으로 세운 정자로, 숙질 간인 박수량과 박공달이
함께 한가로이 소요한 데서 유래한다.
겹처마에 팔작 기와지붕이며, 정면은 8쪽의 세살문을 설치하였고,
측면에는 각 2쪽의 세살문을 설치하였다.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의 기문(記文)을 비롯하여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쌍한 유적지 표지석
(11:02) '하평교'를 건너고~
좌측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가늠해보고~
사천천[ 沙川川]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매봉 밑 무릉담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용연, 사기막을 지나 미노리 후리둔지에서 바다로 흐르는 하천이다.
사천천 연변에 자리한 넓은 들에서 생산된 쌀은 사천청결미로 가공되어
영동지역에 공급된다.
2002년의 태풍 ‘루사’가 내습하였을 때 사천천은 물이 넘쳐 제방과 가옥이
유실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우측으로 '사천천' 기수역을 바라보고~
'하평교'를 건너자말자 바로 우회전하여 둑길을 따라 '사천진항' 방향으로 진행이다.
베이스캠프 글램핑장을 지나고~
'사천진 방파제' 등대 바라보고~
(11:08) '동해 해양경찰 사천출장소'를 지나고~
'사천진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11:10) '사천진항'
사천진항(沙川津港)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 있는 국가어항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분수계로부터 동으로 흘러나온 사천천과
바다가 만나는 합류 지점에 있다.
비교적 소규모 항구로서 암석해안의 발달이 미흡하여 선박의 정박이나
물양장 시설 등이 소규모로 설치되어 있지만, 다른 항구와는 달리
요트를 즐기기에 좋은 항구이다.
사천진항에서 포획되는 어종은 오징어·가자미·돌삼치·양미리·대구·문어 등이다.
사천항에서는 낚시 배를 타고 참가자미, 대구, 우럭, 놀래기,
방어, 돌삼치 등의 선상낚시를 즐길 수 있다.
'사천진항' 소공원 조형물
(11:13) '사천진리 버스정류장' 앞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이다.
'사천진 해변 소공원' 상징 표지석
사천진 해변
사천진 해변(사천 뒷불 해수욕장)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 있는 해변으로, 지역 주민들은 사천 뒷불 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른다.
백사장의 규모는 길이 800m, 면적 16,000㎡이다.
넓은 백사장과 함께 사천항이 옆에 있어 싱싱한 횟감을 싸게 살 수 있고 맛볼 수 있다.
또 바닷물이 얕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깨끗이 단장한 민박집이 있어
며칠 동안 지내기에도 좋은 곳이다.
사천진 해변은 주로 사천항에서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데
노래미(놀래기)와 가자미는 연중, 봄에는 감성돔(남종발이) 여름은 숭어,
가을은 고등어 등을 많이 잡힌다.
또한 강원도 요트장이 있어 이국적인 멋을 느낄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11:15) 해파랑길 39~40코스 안내도와 강릉 바우길 4, 5, 12구간 안내도
해파랑길 39코스,40코스 종합안내판과 스탬프는 '사천진 해변' 입구에 세워져있다.
오늘 1차로 목표했던 해파랑 39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해파랑길 39코스 완료 스탬프 찍고,
'사천진 해변'입구에서 해파랑길 강릉 39코스를 종료하고~
두루누비&트랭글 앱 끄고 물 한잔하며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해파랑길 강릉40코스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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