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자: 2023.4.1
코스: 남망산 조각공원 입구/김춘수 시비 소공원(시점)-강구안-동피랑-동포루-삼도수군통제영/망일루
-충렬사 정문-서피랑-서포루-통영 시립박물관-윤이상 기념공원-해저터널 입구-경상대 해양과학대학
-국치마을 입구-천대마을 버스정류장-민양마을-갈목마을 버스정류장-우포마을-평인일주로 노을전망대
-대평마을-평림축구장 버스정류장-소포마을 입구-무전동 해변공원(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17.85km (두루누비기준 17.6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5시간20분
▶ 갈때 : 경남 양산.사송집에서 양산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사상역에서 하차후, 사상 서부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사상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통영行(무정차) 시외버스를 타고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통영시외버스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121번 버스타고 남망산공원 입구 버스정류장 하차,
시점까지 도보이동하여 트레킹시작
▶ 올때 : 무전동 해변공원에서 무전동 한진로즈힐 버스정류장으로 도보이동,
무전동 한진로즈힐 버스정류장에서 675번 버스타고 통영시외버스터미널 버스정류장에 하차,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行(무정차)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 버스정류장에서 16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궤적
남망산 조각공원 입구/김춘수 시비 소공원
남망산 조각공원 입구/김춘수 시비 소공원內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안내판 앞에서
(08:20) 두루누비&트랭글 앱켜고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시작이다.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안내판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안내도에 의하면 난이도 보통, 거리 17.6km,
소요시간 5~6시간으로 표시하고 있다.
좌측으로 '강구안항'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현대교회'를 바라보며 진행하는데, 가로등위에 거북선이 올라가 있다.
'통영해안로' 횡단보도를 건너 '동피랑모텔' 앞 'T'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동피랑 쭈굴' 음식점 앞을 지나고~
(08:25) '남망산 충무김밥'을 지나자마자 바로 우회전하여
'동피랑→' 표지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후 '동피랑길' 도로를 따라 '통영 명가' 식당 앞을 지나고,
'카페 East Hill' 앞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오르면, 동피랑 벽화가 시작되고~
'생활 속 예술의 향기'
'최봉근, 이구호, 설희숙' 작가의 '꿈피랑'이란 작품을 보면서
'동피랑마을'을 향한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통영시의 대표적인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쪽에 위치한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으로,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다.
동피랑 마을은 통영 시가지 동쪽의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비탈
달동네 마을로 재개발 계획이 수차례 변경 수정되어 왔다.
2007년 통영시가 동포루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하자,
'푸른 통영 21 추진 협의회'는 도시재생의 색다른 시선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이라는
사업을 시행하여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마을 보존 여론이 형성되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 집 3채만 헐고
철거 방침이 철회되었고,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길의 담벼락마다 벽화가 그려졌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그림들과 강구안 바다 풍경 등이 명소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통영시의 명소가 되었다.
2008 민관 포럼 최우수상, 2008 전국 마을 만들기 대회 우수상 등을 받았다.
2014년 7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 가능발전의 모범적 사례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지속 가능발전교육 공식 프로젝트' 인증을 획득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통영시와 지속 가능발전협의회가 동피랑 벽화마을 조성 초기 당시 진행되었던
'동피랑 사생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를 계속 유지 발전하기 위해 벽화를 2년에 한 번씩
새 단장을 한다고 한다.
(08:29) '동피랑 마을 소소한 골목길' 안내판 앞 'ㅅ자' 갈림길에서
급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이 길은 '토영 이야~길' 중 '1코스 예술의 향기길' 중
'화가 김용주 살았던 곳 400m'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토영 이야~길」은 통영에 예향(藝鄕)이란 이름을 헌상한 시인과 작곡가, 화가, 소설가 등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을 찾아 그들의 고향인 통영을 두루 살펴보는 여정이다.
통영이 낳은 유명한 문화 예술인들로는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등이 있다.
「토영 이야~길」 1코스 제1구간은 문화 행사가 열리는 시민의 광장인 '문화 마당'을 출발하여
김춘수 '꽃' 시비가 있는 소공원을 거쳐 남망산 조각 공원과 초정 시비, 김춘수 생가, 동피랑 벽화마을,
청마 유치환 생가터, 화가 김용주가 살았던 곳, 북문 터, 세병관, 서문고개, 박경리 생가, 서포루,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 거주지 등을 거쳐 통영 충렬사까지 이어지는 6.1km의 걷기 길이다.
좌측 '까꾸막 나전 쉼터'에 '조개 아트 벤치'를 지나고~
'피어나라! 함께하는 동피랑' 벽화를 보면서 직진이다.
'가풀막에 핀 꽃' 시 패널을 지나고~
통영 말과 표준말을 비교해서 써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문디'란 말이 억양이나 장단 고저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는 예를 들었다.
통영에는 통영 본토박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통영을 통영이라 부르면 그는 통영 사람이 아니다.
'토영'이나 '퇴영'이라 해야 진짜 통영 사람이라는 것이다.
통영에는 '토영 이야~ 길' 이라는 걷기 길이 있다.
'이야~ 길'의 '이야'는 '이야기'의 오기가 아니라 바로 손 위 ‘누나’를 뜻하는 사투리다.
형제끼리도 아우가 손 위 형을 부를 때도 '이야'라고 하기도 하였다.
통영 말과 표준말 비교 안내판 중 재미있는 글들을 몇 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야, 내는 요새 도이 없으나이 잠바 개춤도 빵꾸가 나고, 자꾸도 고장이고
만날 천날 추리닝 추봉에 난닝구 바람으로 나 댕긴다 아이가."
→"누나, 나는 요즘 돈이 없으니 점퍼 주머니도 구멍이 나고, 지퍼도 고장이고
매일 러닝 바람으로 다닌다."
"무십아라! 사진기 매고 오모 다가. 와 넘의 집 밴소깐꺼지 디리대고 그라노?
내사마 여름내도록 할딱 벗고 살다가 요새는 사진기 무섭아 껍딱도 몬벗고,
고마 덥어 죽는 줄 알았능기라."
→"무서워라. 사진기 메고 오면 다예요. 왜 남의 집 화장실까지 들여다보고 그래요?
나는 여름 내내 옷을 벗고 살았는데 요즈음은 사진기 무서워서 옷도 못 벗고
그냥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리노이 볼게 쌔빘네."
→"그림을 온통 벽에 그려놓으니 볼 것이 많네"
"우와 몬당서 채리보이 토영항 갱치가 쥑이네."
→ "와- 언덕에서 바라보니 통영항 경치가 정말 최고네."
(08:38) '동피랑길' 도로 갈림길을 만나고~ 우측 위 골목으로 오르면,
좌측 벽면에 '조형 날개' 포토 존이 있는데 야간에 LED 조명이 더 빛난다고 한다.
TV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할머니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커피숍을 지나고~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이름을 차용해 온 '몽마르다' 카페를 지나는데,
외부 전망대는 뷰가 제법 좋을 듯 하다.
'통영여고 미술동아리팀' 작품을 지나고~
(08:41) '통영 성지'의 3포루 중 한 곳인 '동포루(東砲樓)'에 도착이다.
통영성지(統營城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06호)는 경상남도 통영시에 있는 조선시대 축조한
반산성식 성곽의 성곽터로, 지정 면적 151,695㎡, 둘레 2,800m, 높이 4.5m, 너비 4m에 달한다.
통영은 고려 때에는 고성현과 거제현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거제의 오아포(烏兒浦)에 둔 통제영(統制營)을 1602년(선조 35)에
이곳 두룡포(頭龍浦, 지금의 통영시)로 옮김으로써 한낱 포구에 지나지 않던 곳이
수군의 근거지로 되었던 것이다.
이 성은 왜적을 방어하고 거주지와 생업지를 갈라 놓는 두 가지 목적으로 1678년(숙종 4년)에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축성한 것인데, 평지와 산지의 지형을 절충한
반산성식(半山城式) 성곽으로 해발 174.2m의 여황산(艅艎山)을 등에 지고 있다.
성의 구조는 4대문(大門), 2협문(夾門), 3포루(砲樓), 동서 목책(木柵), 좌우변 내장(內墻),
좌우 석주(石柱), 좌우 여첩(女堞) 각 10타(垛) 등과 아울러, 동쪽에 춘생문(春生門),
서쪽에 금숙문(金嘯門), 남쪽에 제남루(濟南樓), 동남쪽에 암문(暗門), 북쪽에 의두문(依斗門)이
있었다고 하나, 인가가 들어서고 시가지가 확장됨으로써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성문 초석만
몇 개 남아 있다.
《고성읍지 固城邑誌》 통영조에는 통영의 설치에 대하여 “선조 37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을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로 벼슬을 올렸다.
거제 수영을 폐하고 옮겨 여기(통영)에 설치하여 통제영으로 삼았다.
산성은 둘레가 7리이고 표루(標樓)는 동·서·북의 세 곳에 있었다. 전함(戰艦)·좌선(座船) 1척,
부선(副船) 1척, 좌한선(左翰船) 1척, 우한선(右翰船) 1척, 좌탐선(左探船) 1척, 우탐선(右探船) 1척,
구선(龜船) 1척, 중군선(中軍船) 1척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남쪽 '강구안'과 '미륵산' 방향 바라보고~
좌측의 얕은 봉우리가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남망산'이다.
북쪽의 '북포루'가 있는 '여항산' 바라보고~
이후 '동포루'에서 되돌아 내려서서, '동피랑 벽화마을' 안내판 앞에서 좌회전하여
'동포루' 남쪽 성벽 밖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나간다.
(08:44) '동피랑 벽화마을' 글자가 있는 가드레일을 지나고~
골목길을 내려서는데, 낚시 배에서 검은 고양이가 큰 물고기를
낚시하는 장면을 코믹하게 표현하였다.
돌계단길과 데크 계단길을 차례로 내려서서
(08:46) '동피랑길' 도로를 만나고, 남파랑길은 좌측으로 진행이다.
'통영 동피랑' 벽화에는 책과 꽃, 나비 등이 예쁘게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2020 공공 미술 프로젝트' 가 표시된 대리석 의자가 있어 기념사진을 찍도록 되어 있다.
꺾어진 우측 벽면에는 조선시대 책가도(冊架圖)를 흉내 낸 벽화가 그려져 있고~
우리말로 책거리라고 하는 이 벽화에는 통영을 대표하는 박경리와
세계적인 음악가이지만 분단의 아픔인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했던
윤이상 선생의 오마주를 표현한 그림이 곳곳에 담겨 있다고 한다.
'리마인드 동피랑' 벽화를 바라보면서 진행하고~
그렇게 진행하다보니 '통영시 정량동'에서 '통영시 중앙동'으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통영시 중앙동(中央洞)
경상남도 통영시의 중앙에 위치한 행정동이다.
북쪽으로 여항산, 남쪽으로 통영항과 면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통제영의 통영성 안쪽과
그 인접지역이며 항남동·중앙동·문화동·태평동 4개 법정동을 관할한다.
통영성은 1678년(숙종 4) 제57대 통제사 윤천뢰가 세병관을 중심으로 100여 채의
영문(營門)을 방비하기 위해 주위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동문은 정량동, 서문은 명정동, 북문은 북신동과 경계가 되며, 남문 밖으로
통제영의 선소와 병선마당이 있었다.
『여지도서』(통제영)에는 통영성과 각 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는 춘원면 상동문내리(上東門內里)·하동문내리(下東門內里)·
북문내(北門內)·창동리(倉洞里) 등이 현재의 중앙동에 해당된다.
통제영이 폐지되고 진남군이 설치될 때 동면에 속하였고, 1914년 통영면 대화정·조일정·
길야정 등으로 나누어졌고 1931년 통영읍에 속하였다.
1946년에는 일본식 지명을 없애고, 중앙·문화·태평·항남동으로 동명을 바꾸었다.
1955년 충무시가 되었다.
이후 중앙동과 문화동은 통합하여 문화동이 되었고, 1998년 문화·태평·항남동을 통합하고
중앙동을 동명으로 하였는데, 통제영 때부터 이 일대가 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어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1872년지방지도』(통영)는 통영성 안팎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객사인 세병관, 통제사의 집무실인 운주당(運籌堂) 등을 표기하였으며
통영성 남문 밖에는 물화전(物貨廛), 미전(米廛) 등을 묘사하고 있어
조선시대 후기 이 지역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지법통영지원·마산지검통영지청·통영세무소·통영우체국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코아백화점 등 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관광 중심지로서
성광호텔·신라호텔·뉴포드호텔 등의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많다.
주요 도로는 중앙로가 뻗어 있고, 해변을 따라 도로가 나 있다.
문화재로는 문화동에 있는 세병관(洗兵館: 보물 293), 충무시 문화동벅수(중요민속자료 7),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思碑: 경남유형문화재 112), 통영성지(경남기념물 106)가 있다.
세병관은 조선시대 선조때의 목조건물로, 1603년(선조 36)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정사(正舍)에 임금님을 상징하는 전패(殿牌)가 봉안되어 있어, 여기에서 출사하는
장졸들의 맹서와 북향사배 등의 의식이 거행되었다.
(08:54) 또 다른 방향에서 '동포루'로 올라오는 삼거리에서 직진 방향으로 내려간다.
좌측 방향 벽면에 '조형 날개' 포토 존이 있고, ' I ♥ U' 벽화 방향이 '동포루'로 오르는 길로,
약 16분 전인 08:38에 이곳 갈림길에서 '동포루'로 올랐다가 빙 돌아온 셈이다.
그렇게 우측으로 벽화를 바라보면서 내려서고~
(08:57) '동피랑 벽화마을' 입구 'T자'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동문로'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08:59) '중앙로'가 지나가는 도로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고~
(09:01) '삼도 수군통제영' 앞 사거리에서 또 다시 횡단보도를 건넌다.
'병인박해'때 신앙을 지키다 통제영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 사적지를 지나고~
'삼도 수군통제영' 앞 이정표와 통제영 주차장 앞을 지나~
(09:02) '세병관/ 삼도 수군통제영' 도로 건너편에 돌 장승이 서 있는데, 통영 문화동 벅수다.
도로 확장으로 이설하였다는 이설비와 문화재 표지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통영 문화동 벅수(국가 민속문화재 제7호)는 문화동의 세병관(洗兵館)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조선시대 돌 장승이다.
벅수(장승)은 마을이나 절 입구 등에 세워 경계를 나타내거나 거리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였으며, 민간 신앙의 일종으로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벅수는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문화동 벅수는 하나만 있는 독 장승이다.
통영 문화동 벅수는 험상궂은 듯하면서도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어있고, 둥근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다.
머리 위에는 탕건을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활짝 웃고 있는 입에는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와 있어 익살스러운 모습이다.
벅수의 몸통 앞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뒷등에는
‘光武十年丙午八月 日同樂洞立(광무십년병오팔월일동락동입)’이라고 음각되어 있어
동락동 주민들이 고종 10년(1906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문화동 벅수는 지금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 장승이면서 건립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고,
험상궂으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민간의 독특한 장승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민속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09:04) '통영 삼도 수군 통제영'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통제사 이하는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를 지나고~
하마비 좌측 편으로 '삼도대중군아문(三道大中軍衙門)'을 지나는데,
삼도대중군아문(三道大中軍衙門)은 중영청(中營廳)의 외삼문으로,
중영청은 통제사의 참모장인 우후(虞候)의 군영으로 우후영이라고도 했다.
2011년에 중건했다.
(09:05) 통제영의 정문 격인 '망일루(望日樓)'
망일루(望日樓)는 광해군 3년(1611년) 제10대 우치적 통제사가 세웠다.
영조 45년(1769년) 제128대 이국현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세병문이라고도 한다.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있어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되었던 것을 2000년에 중건했다.
망일루 우측에 세워져 있는 '수항루(受降樓)'
수항루(受降樓)는 임진왜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1677년(숙종 3)에 건립한 누각으로,
원래 통영성 남문 밖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해안 매립 공사로 인해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수항루에서는 봄과 가을 군점 때 모의 왜병에게 항복을 받는 행사를 거행해 왔다고 한다.
'통영 VR Zone' 바라보고~
이곳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 내부는 예전에 관람을 해본터라,
오늘은 패스하고 남파랑길에 매진한다.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統營三道水軍統制營: 사적 제402호)은 1604년에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세운 이후,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지휘하던 본부였다.
임진왜란 때 초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난 정유재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져 지금의 통영시 두룡포에 자리를 정했다.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부임한 뒤,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洪南周)까지
무려 290년간 왜적에 대비하는 조선 수군의 총본부로서 오늘날의 해군 사령부와 같은 곳이었다.
1998년 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사라진 건물들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운주당, 백화당,
병고, 중영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09:08) '망일루' 밑에서, 우측으로 '산성청(山城廳)'을 끼고
담장 사잇길을 따라 진행하고~
우측 담장 너머로 '산성청'을 바라본다.
망일루 뒤쪽 좌우에 산성청(山城廳)과 좌청(左廳)이 있다.
산성청은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 44년(1718년)에
제83대 통제사 오중주(吳重周)가 건립하였으나, 이후 소실되었다가
발굴 조사와 문헌을 참고하여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후 남파랑길 적색 화살표시를 따라 골목길을 진행하고~
(09:13) '여황로'가 지나가는 'T자'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초아라' 숙박 하우스를 지난다.
(09:16) '서문로' 도로가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고~
'서피랑 문학동네' 이정표에 의하면 좌측 편에 '박경리 생가'가 있지만
'여황로' 도로를 따라 직진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 즈음에서 '통영시 중앙동'에서 '통영시 명정동'으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통영시 명정동(明井洞)
경상남도 통영시의 가운데 위치한 동이다.
서쪽은 도천동, 동쪽은 북신동과 중앙동과 접하며, 북쪽으로 북신만에 면한다.
남쪽은 통영항에 면하는데 연안여객터미널이 입지하고 있다.
명정·평림·서호 3개 법정동을 관할한다.
『호구총수』(고성)를 살펴보면 춘원면 명정동(明井洞)·동교리(東橋里)·서교리(西橋里) 지역이었으며,
『조선지지자료』(용남)에는 서면 명정동·동교동·서교동·대평동·응림동 지역이었다.
1914년 통영면이 설치되면서 명정리·신정·평림리가 되었다.
1946년 일본식 지명을 없애면서 신정은 서호로 이름을 바꾸었고, 1955년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될 때 각각 명정동·서호동·평림동이 되었다.
평림동은 이후 평림1동과 2동으로 분동되었다.
1998년 평림2동과 명정동·서호동을 통합하였고, 명정을 통명으로 하였다.
'명정'이라는 지명은 충렬사 앞에 일정(日井)과 월정(月井)이라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이를 합쳐서 '명정'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충렬사(忠烈祠)가 표시되어 있다.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데,
1606년(선조 39)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왕명을 받아 건립하였고,
1663년(현종 4)에 사액(賜額) 받았다.
충렬사 남쪽의 해안선은 1920년대 서호항 매립공사를 하면서 직선화되었다.
연안여객선터미널, 적십자병원, 비치호텔, 약수암, 명덕암, 충렬사 등이 있다.
주요 도로는 해저로가 뻗어 있고, 해변을 따라 도로가 나 있다.
충렬로(忠烈路)가 명정고개를 넘어 해변로와 이어진다.
문화재로는 충무 충렬사 팔사품(忠武忠烈祠八賜品: 보물 440)이 있는데,
중국 명(明)나라에서 내린 팔사품으로서 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다.
충무 충렬사(사적 236)는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사당으로, 1606년(선조 39)에 창건되었으며,
1663년(현종 4)에 사액(賜額)되고 여러 차례 중축하였다.
명정동에 충렬묘비(경남유형문화재 113), 충렬사 동백나무(경남기념물 74)가 있으며,
충렬사 소유이다.
(09:19) '충렬사 광장 교차로' 앞에서 남파랑길은 '충렬로'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하고~
'충렬사' 또한 예전에 관람을 해본터라, 오늘은 패스하고 남파랑길에 매진한다.
'충렬사' 정문 바라보고~
충렬사(忠烈祠)는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8년 후인
1606년(선조 39) 제7대 수군통제사 이운룡이 이순신 장군의 충절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어명을 받아 건립한 사당이다.
충렬사(忠烈祠) 현판은 현종 임금이 1663년에 내린 사액 현판으로 문정공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1670년에 제51대 수군통제사 김경이 동재와 서재를 지었고,
1681년에는 제60대 수군통제사 민섬이 충렬묘비(忠烈廟碑)를 세웠다.
조선시대 후기인 1868년 대원군이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에도 통영 충렬사는 보존하도록 했다.
'충렬사' 정문 앞 쌈지공원에 '통영 2' 백석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의 시비로, 그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18살의 통영 아가씨 '란'에게 첫눈에 반해 몇 번이고 통영을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낮술을 하고 충렬사 계단에 앉아 썼던 시가 '통영 2'이다.
통영 統營 2 - 백석(1912~ 1996)
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 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조코
패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조코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ㅅ것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십흔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십허 한다는 곳
山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 이 갓고
내가 들은 馬山客主 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갓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는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가튼 물이 솟은 明井 샘이 잇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조아하는 그이가 잇슬 것만 갓고
내가 조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가튼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언고 오불고불 넘앳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날근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안저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나즌 집 담 나즌 집 마당만 노픈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찟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갓 나는 : 갓이 나는, 통영은 갓으로 유명함. 고당 : 고장. 갓갓기도 하다 : 갓 같기도 하다,
전북 : 전복의 방언, 아개미: 아가미, 호루기 : 살오징어의 어린 것,
황화장사 : 집집을 찾아다니는 보따리 장사, 돌각담 : 돌무더기,
오구작작 : 여럿이 한곳에 모여 떠드는 모양, 녕 : 지붕의 평북 방언, 손방아: 디딜방아.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1935년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18세 이화고녀 학생이던 통영 출신인
박경련을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된다.
백석은 그녀에게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고, 후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아오지만 ‘난’이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이라 서울로 상경한 탓에 길이 엇갈린다.
‘난’의 집이 바로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고, 백석은 이 시에서 명정골의 이름과
유래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난’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그러나 이러한 백석의 사랑은 친구의 배신으로 끝나게 된다.
‘난’을 소개해 주었던 친구인 신현중이 백석과 ‘난’의 혼담을 방해하고,
도리어 ‘난’의 집안으로부터 자신과의 혼인 승낙을 받아 낸 것이다.
친구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인연마저 끊어지게 된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서 시를 통해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렇게 '충렬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다
(09:22) 'ㅓ자'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좌측 '충렬4길'로 방향을 바꾸고~
커다란 책 모양의 서피랑 이야기 약도가 중요 볼거리를 안내하고 있다.
통영 시내 서쪽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서피랑마을의 99계단에는
박경리 작가의 문학작품을 소재로 한 벽화와 피아노 계단,
그리고 200년 된 후박나무 옆 언덕에는 백록과 꽃사슴이 뛰놀고 있으며,
정상의 서포루에서 내려다보는 통영항은 또 다른 볼거리다.
또한 이중섭의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포토존 조형물과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이용해 예쁘게 꾸민 가정집 쉼터를 지나고~
(09:26) '서피랑 터널' 앞에서 남파랑길은 우측 '서피랑 공원' 방향이다.
'서피랑 공원' 초입 서피랑 공원 안내 패널을 지나고~
좌측의 문화동 배수지의 높은 담장에 쓰여있는
문학에 관한 글귀를 읽으며 '뚝지먼당길'을 따라 올라간다.
좌측으로 문이 잠겨있는 '문화동 배수지 정문'을 지나고~
(09:33) '서포루'에 도착이다.
'남망산' 바라보고~
'통영항'과 '미륵산' 바라보고~
'북포루' 바라보고~
1872년 제작된 '통영 고지도' 패널 바라보고~
'서포루'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김성술 -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를 지난다.
김성술(金成述, 1946~1971)은 통영 출신 작사가이자 가수로 22세인 1967년
〈동백꽃이 필 때면〉이라는 노래로 데뷔했다.
25세인 1970년에 자신이 작사하고 부산 출신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
황선우가 작곡한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김해일[김성술의 예명] 노래로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26세인 1971. 12. 25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때 호텔에
투숙했다가 요절했고, 그의 가족들은 사고 이후 고인을 생각나게 하는 곡을
수록한 이 음반을 모두 수거해 폐기처분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2년에 작곡가 황선우는 이 노래를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개작해 조용필, 김석일 등 여러 가수에게 다시 취입하게 했다.
결국 이 곡을 1976년 조용필이 트로트 록의 분위기로 리메이크해 히트시키며
온 국민이 애창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2004년 고 김성술의 어머니가 황선우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2007년 항소심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가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비록 원곡 시비로 소송에 휘말렸으나, 만약 슈퍼스타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지 않았다면 이 곡은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가수들이 다시 부른 국민가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1980년대 이후 수많은 일본 가수들과 대만 가수 등려군까지 리메이크한
아시아의 명곡이 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 우측에 적색 '서피랑 등대' 모형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앞으로 서피랑에서 유명한 '99계단'이 시작되는 곳이다.
남파랑길은 '99계단'으로 내려서지 않고,
'김성술 -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 좌측으로 이어지고~
(09:40) '서피랑공원'을 빙 돌아 나가는 '충렬1길' 도로로 내려서서 우회전이다.
(09:42)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좌측으로 '서피랑길'을 따라 급경사 계단길을 내려선다.
우측으로 '피아노 계단'을 보면서 내려서서,
'충렬로'와 '중앙로'가 갈리는 골목 사거리에서 직진방향으로 진행하고~
(09:47) '통영 적십자 병원' 앞 '중앙로'로 나가 우회전하여 진행이다.
'인사하는 거리' 안내판을 지나고~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마주 보고 있는 서피랑(서쪽의 비탈)을 걷다 보면
윤이상과 함께 학교 가는 길, 서피랑 문학동네, 99계단과 음악 정원,
보이소 반갑습니데이! 인사거리, 뚝지먼당 98계단, 피아노 계단 등
서피랑의 숨은 보물 길을 만나게 된다.
서피랑은 동피랑과 함께 지역 내 대표적인 달동네로, 해방 이후 집장촌이
형성되면서 지역민조차 찾기를 꺼리는 천덕꾸러기 동네로 전락했었다.
2000년대 들어 집장촌은 자연스레 정비됐지만 마을은 이미 활력을 잃은 상태였다.
2007년 동피랑이 철거 마을에서 벽화마을로 거듭날 때까지,
서피랑은 어떠한 변신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200m 길을 '인사하는 거리'로 지정하면서 활력을 점차 찾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일에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09:49) '서호시장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시내버스 대기소'를 지나고, '미륵도 관광특구'와 '해저터널'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횡단보도를 통해 도로를 건너서 '중앙로'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이다.
그렇게 진행하다 '통영시립 박물관' 도착전에 '통영시 명정동'에서
'통영시 도천동'으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통영시 도천동(道泉洞)
경상남도 통영시의 가운데 위치한 동이다.
동쪽은 명정동과 접하고, 나머지 3면은 바다에 면한다.
통영반도의 남쪽 끝자락으로 해저터널, 충무교, 통영대교를 통해서 미륵도와 연결된다.
당·인평·평림·도천동 4개 법정동을 관할한다.
『호구총수』의 지명을 살펴보면, 당동은 동당봉리(東堂峰里)·서당봉리(西堂峰里),
인평동은 대곡리(大谷里), 그리고 도천동은 도리동(道理洞)·천동리(川洞里)·천동리(泉洞里) 지역이었다.
평림동은 우억포(右億浦)로 불렀다고 전한다.
1900년(광무 4) 진남군이 설치되면서 서면 당동리·인평리·도천리·평림리가 되었고,
1902년에는 산양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통영읍이 편입되었고, 1955년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될 때 모두 리에서 동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인평동이 인평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85년 다시 합동되었고,
평림동도 평림1·2동으로 나누어졌다.
1998년 인평동과 평림1동이 합쳐서 인평동이 되었고, 평림2동은 명정동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도천동과 당동도 통합되어 도천동이 되었다. 2010년에는 도천동과 인평동이 합쳐졌고,
동명은 도천동으로 하였다.
도천이라는 지명은 『호구총수』에 수록되어 있는 도리동(道理洞)과 천동리(川洞里)가 합쳐진 것이다.
당동의 지명은 착량묘(鑿梁廟) 뒤편의 산을 사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당봉(堂峰)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착량묘와 착량교(鑿梁橋)가 그려져 있다.
착량묘는 1599년(선조 32) 주민들과 수군들이 언덕에 초옥을 지어 충무공 위패를 모시고
기신제(忌辰祭)를 지냈는데, 1877년(고종 14) 충무공의 10대 후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으로 고쳐 지은 사당이다.
착량교는 『광여도』에는 교(橋), 『청구도』에는 굴포(掘浦)로 표시되어 있다.
원래 통영반도와 미륵도는 사취(砂嘴)로 연육되었는데,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파낸 곳이라 하여
이곳을 '판데목'이나 '폰데목'으로 불렀다.
한산대첩 당시 왜군이 패주하다 이곳에서 물길이 막히자 손으로 모래를 파낸 곳이라는 유래도 전한다.
1757년(영조 33)에 도천동과 미륵도를 잇는 나무다리를 만들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철거와 재건을
되풀이 하였다가, 1932년 해저터널을 건설하고 동시에 그 위에 통영운하가 개통되었다.
1967년에는 충무교, 1998년에는 통영대교가 각각 건설되었다.
통영체육관·통영시 제일별관 등의 공공기관과 착량묘, 백운서재, 낙현사 등이 있고,
두룡·도천·한일 등의 조선소가 있다.
문화재로는 당동에 착량묘(鑿梁廟: 경남기념물 13)가 있는데, 충렬사 소유이다.
(09:53) '통영시립 박물관'을 지나는데, 현재 위치가 '옛 통영군청'이었던 자리라고 한다.
'도천 음악마을' 입구를 지나고~
도천 음악마을 걷기 길
이곳은 도천동에서 나고 자란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 선생을 기리는
윤이상 기념공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아침저녁으로 다니던
통영 심상소학교 가는 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천 음악마을이다.
(09:58) '윤이상 기념관'을 지나는데,
이곳도 예전에 관람을 해본터라, 오늘은 패스하고 남파랑길에 매진한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도천동 생가터 주변에 전시실과 프린지홀, 야외 음악광장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에는 선생이 생전에 연주하던 첼로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태극기 등
유품 170여 점과 선생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피아노 형상 조형물이 있는 '윤이상 기념공원'을 지나고~
용문달양(龍門達陽)이란 '해저터널' 입구를 지나는데,
이곳도 예전에 관람을 해본터라, 오늘은 패스다.
입구의 용문달양(龍門達陽)이란 글귀는 '용문(龍門)을 지나 산양(山陽)에 이른다'라는 뜻이다.
'용문(龍門)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잉어가 여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곳이다.
산양(山陽)은 이곳 섬 미륵도의 반대편 동네 이름을 가리킨다고 한다.
통영 해저터널(등록 문화재 제201호)
이 시설물은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는 동양 최초의 해저 구조물이다.
해저터널로 연결되기 전의 미륵도는 밀물 때는 섬이지만 썰물 때에는 도보로 왕래가 가능한 상태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어민의 이주가 본격화됨에 따라 두 지역 간 거리 단축을 위해, 1931년부터
1년 4개월에 걸쳐 바다 양쪽을 막아 바다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을 만드는 방법으로 동양 최초로
바다 밑 터널(길이 483m, 너비 5m, 높이 3.5m)이 만들어졌다.
비록 공사의 주창과 시행이 일제에 의한 것이라 해도 투입된 인력과 자재가 우리 민족에 의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이곳 해저터널은 「토영 이야~길」 2코스 미륵도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으로,
약 15km 거리에 6시간이 소요되는 걷기 길이다.
(10:07) 피아노 형태의 벤치를 지나고, '통영 해안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행이다.
'통영 서항'을 바라보고~
(10:10) '충무교' 아래를 통과하는데, 건너편 충무교 교각에 유명한 그림이 보인다.
반대편으로 보이는 교각의 벽화는 색채의 마술사 전혁림 화백(1915~2010)의 작품 〈통영항〉이다.
1983년 미륵산을 배경으로 강구안의 건물과 오밀조밀하게 정박한 선박들의 모습들을
유화로 제작하였다.
2006년에 단순한 이미지로 석판화 작업을 통해 재구성한 통영 항구의 모습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 핵심 관광지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2018. 9 김건우가 완성하였다.
전혁림 화백은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의 그림 세계는 크게
고향 통영(현 충무시)과 전통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맑은 남빛 코발트블루 색이 주조인 화면은 통영의 하늘빛과 바다 빛을
흠뻑 빨아들인 듯 푸르게 넘실거린다.
붉고 푸른 원형의 도형이나 형태는 조선 민화에서 가져왔다.
그는 "나는 민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화면의 구성법이라든가 모티브, 색채 혹은 시대성 등이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 화백은 동향의 동년배 친구 사이인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 대여(大餘) 김춘수 씨는 물론
극작가 유치진, 음악가 윤이상과 함께 1950년대'통영 문화 협회'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닷물 위로는 배들이, 바다 밑 해저터널엔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다리(충무교)에 자동차가 다니는 '통영운하'는
하늘과 바다와 바닷속이 하나로 이어진 한국 유일의 3중 교통로를 자랑하는 곳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고 있다.
(10:15) '통영대교' 밑을 통과하고~
(10:18) '당동항'을 지난다.
오늘 처음 보는(??) 남파랑길 이정표를 지나는데,
아래 개략도에 시점까지 5.8km, 종점까지 11.8km를 알리고 있다.
(10:19) '통영대교 밑'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이후 '당동항'을 좌측으로 보면서 진행하다,
'수산자원 연구센터' 앞 사거리 150m 전방 지점 교통 안내판을 지나는데~
도로 건너편 폐담벼락에 그려진 벽화가 날 웃게 만든다.
(메롱~ ㅎㅎㅎ)
(10:25) '수산자원 연구센터' 앞 사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좌회전하여 방향을 바꾸고, '천대국치길' 방파제 길을 따라 길게 이어간다.
좌측 '당동항' 포구에 정박 중인 배들을 바라보고~
(10:28)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정문 앞을 지난다.
(10:30) 좌측으로 '국치해안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직진방향 산허리로 이어지는 '천대국치길' 도로를 따라 오르고~
이후 은근한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10:36) 도로 고갯마루를 올라서니 도로 우측에 '문화유씨 묘원'이다.
그렇게 아래로 '국치마을'을 보면서 진행하는데,
'국치마을' 앞 바다 한가운데 보이는 둥근 섬은 '하항도'다.
(10:39) '국치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좌측으로 '국치1길'이 갈리는 'Y자'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이다.
'국치민박' 안내판을 지나는데, 절정기를 맞은 유채꽃에 눈길이 간다.
그렇게 진행하다 어느 독립민가를 지나는데,
화단에 가득 피어있는 수선화가 발길을 붙잡고~
(10:44) 또 다른 '국치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그렇게 도로 고갯마루를 넘어 약간 내려서고,
(10:48) '편백숲길' 글램핑장 입구를 지나는데, 저 앞으로 '천대마을'이 보인다.
(10:50) '해진수산' 입간판이 있는 'Y자'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우측 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10:51) '천대 버스정류장' bus stop을 지난다.
'천대항'의 작업용 바지선 위에는 굴 양식장용
스티로폼 부표['부자' 또는 '부이'라고 한다]가 수북이 쌓여있고~
굴 양식은 바다에 굴을 매달아 키우는 수하식과 바다 바닥에 양식하는 바닥식이 있다.
수하식은 부이의 종류에 따라 스티로폼 수하식과 뗏목 수하식,
나무 기둥을 세운 말목 수하식 등이 있다.
지금도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과 남해 일부에서 나무 기둥을 이용한
굴 양식 현장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대부분 값싸고 편리하며 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스티로폼 부이가 유행했고, 다른 종류의 양식방법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로폼 부이는 연간 약 66만 8천 개의 부이 쓰레기가 발생함으로써
해양 생태계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마저 위협하는 중이다.
스티로폼 부이로 인한 미세 플라스틱이 위험한 이유는 굴, 홍합, 멍게, 바지락 등의
수산물은 내장과 함께 통째로 먹기 때문이다.
결국 미세 플라스틱에 함유된 유해화학물질을 우리 몸에 축적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10:55) '해양수산 통영 굴' 작업장이 있는 '천대항'을 지난다.
(10:59) '천대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이 있는 '민양길'로 올라서고~
좌회전하여 10m 정도 진행하다 만나는 'Y자' 갈림길에서 다시 좌측 길로 내려선다.
좌측으로 '굴 키우는 남자' 업체 앞 도로를 따라 해변으로 내려서서,
우회전하여 '인평항' 방향으로 진행하고~
'인평항' 바라보고~
(11:03) '인평 어촌계 회관'을 지난다.
(11:04) '민양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1:06) 또 다른 '민양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11:09) '민양마을' 정자 쉼터가 있는곳에서 남파랑길은
정자 쉼터 맞은편[진행해 온 방향에서 보면 우측] 마을길로 방향을 바꾼다.
이후 남파랑길 적색 화살표시를 따라 제법 가파른 마을 골목길을 올라서는데,
두다리가 천근만근 무게감이 느껴질만큼 무겁다.
(11:12) '1021번' 도로인 '평인일주로'에 올라서서 좌회전하면, 오늘 두번째로 보는듯한(??)
남파랑길 이정표를 지나는데 아래 개략도에 시점까지 9.5km, 종점까지 8.1km를 알리고 있다.
(11:13) '사리포 바다노을 전망대'를 만나고,
잠시 쉬어가려고 했으나 선점한 객이 있어 그냥 통과다.
'목도', '장도', '필도' 바라보고~
(내 눈에는 '사량도'도 보였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 기계의 한계다.)
현재 '1021번' 도로인 '평인일주로'는 벗꽃이 만발하여
거의 절정기를 치닫고 있다.
이후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도로 고갯마루에 올라서고,
도로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완만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11:37) 'MK 1252' 카페를 지나고,
우측으로 휘어지는 도로 옆에 사각정자와 '갈목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이후 우측으로 크게 휘어져 올라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작은 갈목 앞바다에 '대망자도'가 조망되고~
(11:46) 남파랑쉼터 650m 안내말뚝을 지난다.
(11:48) 도로 건너편으로 '작은갈목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장구도' 땡겨보고~
(11:54) '청소년 해양 안전체험센터/ 해양소년단 거북선캠프'와
'남파랑쉼터'를 지나는데, 정문은 자물쇠로 꼭꼭 잠겨 놓았다.
'청소년 해양 안전체험센터/ 경남통영일반조종 면허시험장'을 지나고~
(11:56) '비치캐슬펜션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우포마을' 방파제와 '평림항' 적색&백색 등대 바라보고~
(12:00) '우포마을' 표지석을 지나는데,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는 좌측으로 크게 휘어진다.
(12:02) '평림 어민복지회관'을 지나고~
'평림항' 적색&백색 등대를 바라보고~
완만한 오르막길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12:08) '평인일주로 노을전망대'에 도착이다.
'평인일주로 노을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섬들'
전망안내도 따라 여러 섬들을 가늠해 보고~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안내도 바라보고~
'평인일주로 노을전망대' 그늘진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햄버거와 테라큰거 캔맥주 1캔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10분 쉬었다간다.
휴식후 다시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12:20) '삼광수산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2:24) 정면으로 '우포마을 버스정류장' 5m 못미친 지점
가드레일이 끊어진 곳 좌측 아래 사면길로 남파랑길은 이어진다.
할수있나??? 남파랑길 빨간 화살표시가 가르키는데로
좌측 아래 수레길로 내려서서 진행이다.
이후 남파랑길은 좌측 산허리 사면길로 빙 돌아 나가서
(12:32) 다시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로 올라서고~
약 8분 전에 좌측 도로 아래로 내려서서 진행할 필요 없이 계속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를 따라 진행해 오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이후 '남파랑길 29코스 패널'과 적색 화살표시를 따라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12:39) 도로 좌측으로 체육시설물이 있는 쉼터를 지나고~
(12:42) 저 앞쪽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건너편으로
대형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통영 체육관'이다.
(12:46) '대평마을 바다 체험장' 및 '바지락 체험장' 안내판을 지나고~
(12:48) 도로 건너편에 있는 '평림축구장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12:49) 우측 도로 건너편으로 '대평 농촌체험마을'
안내표지석이 있는 건물 앞을 지나고~
좌측으로 '평림생활체육공원'과 '통영체육관'을 연달아 지난다.
(12:54) 도로 건너편의 '대평 마을회관' 앞
'대평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12:55) '대평 버스정류장'을 지나~
(12:56) '평림 국민체육센타' 건물을 지난다.
그러고보니 '평림 생활체육공원 內 평림 축구장' 앞에서
'통영 체육관'을 지나 이곳까지 '역 C자'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12:59) '대평소공원 버스정류장'을 지난후,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며 이어진다.
'대평 소공원' 좌측 아래에 있는 작은 방파제를 바라보고~
'대평소공원'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물 한잔 마시며 잠시 호흡조절하고
출발하는데 예전 수술한 좌측 발목에 통증이 느껴진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걸었나???
(13:07) 전방 좌측 아래로 '소포항'이 보이고,
바다 건너편으로 다음구간 남파랑길 30구간때 진행할 길도 가늠해본다.
(13:11) 우측 도로 건너편으로 '극락정사'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대웅전을 향해 저두삼배의 예만 올리고 간다.)
(13:13) '소포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이름도 특이한 '열시 삼십 칠분' 카페 앞을 지나간다.
(13:15) '소포마을' 입구 삼거리 '소포마을' 표지석을 지나고~
'소포항'과 방파제 바라보고~
(13:22) '명정야구장 버스정류장' 앞을 지난다.
이즈음에서 '통영시 도천동'에서 '통영시 명정동'으로 행정구역이 바꿔지는데,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다.
(13:25) 우측으로 '67번 통영터널로' 도로가 시작되는
'명정 교차로'에 도착하고~
'명정 교차로'를 지나자마자 남파랑길은 직진 방향이 아니라
좌측 '통영 분뇨처리장'으로 이어지는 포장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13:30)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는 '통영 분뇨처리장'을 지나고~
오늘구간 종점인 '무전동 포구' 일대를 바라보고~
(13:33) 다시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로 올라서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꿔 남파랑길을 이어가는데, 이곳도 굳이 좌측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도로 건너편으로 '장골산'을 거쳐 '여항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입구를 지나고~
(13:37) 이름도 특이한 '멍게 수협 냉동냉장 공장'을 지난다.
'멍게수협'을 지나자마자 '통영시 명정동'에서 '통영시 무전동'으로
행정구역이 바꿔진다.
통영시 무전동(霧田洞)
경상남도 통영시의 가운데 위치한 동이다.
시청이 있으며 북쪽으로 용남면 동달리와 접하고 남쪽은 북신동·정량동과 접한다.
서쪽은 북신만에 면해 있다.
『조선지형도』를 살펴보면 해안선이 현재보다 1㎞ 이상 동쪽에 그려져 있지만,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북신만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진행되어
현재는 공공용지, 상업용지 및 택지 등으로 구성된 신시가지로 조성되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무전동(霧田洞), 『구한국행정구역일람』에는 무전동(武田洞)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전이라는 지명은 예전에 이곳에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어 '왕가밭골'이라 하던 것이
'안개밭골'로 변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시한 것이라고 전한다.
1900년(광무 4) 통제영을 대신하는 진남군이 설치될 때 동면에 속하였고,
1914년 무전동·장대동·송정동·서구동·장문동의 일부를 합쳐 무전리가 되어 통영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통영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분리되어 용남면에 속하였다가,
1973년 충무시 북신동에 편입되었다.
1985년 북신동에서 분리되어 무전동이 되었다.
통영시청·통영경찰서·통영보건소 등의 공공기관과 만복유스장, 기독교병원,
세종병원 등이 있고, 동쪽에 미월고개가 있다.
주요 도로는 고성군과 연결되는 14번 국도가 이곳까지 뻗어 있고,
이 국도에 연결되는 지방도가 나 있다.
(13:38) '1021번 평인일주로' 도로를 버리고,
좌측 아래 '무전동 수변공원'으로 이어지는 보행로를 따라 진행하고~
'무전동 포구'와 '카페섬' 바라보고~
(13:40) '무전동 해변공원' 남파랑길 통영 29코스 안내판과
30코스 안내판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 곳이 29코스 종점이자 30코스 시점이다.
오늘도 목표했던 남파랑길 29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이후 연속해서 남파랑길 30코스도 진행할려고 했었으나, 13:00즈음 '대평소공원'에서 휴식후
출발할때 좌측 발목에 느껴진 통증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서 남파랑길 30코스는 후일을 기약하고~
미련없이 두루누비&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통영 29코스를 종료한다.
'무전동 해변공원'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답사마무리를 하고~
'무전동 해변공원'은 현지인들은 '북신공원'이라고 한다.
이후 '무전동 한진로즈힐 버스정류장'으로 도보 이동하고,
675번 버스타고 통영시외버스터미널 버스정류장에 하차,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行(무정차) 시외버스를 타고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 버스정류장에서 16번 버스 환승하여 양산.사송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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