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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 보성63구간

답사일자: 2023.11.26

코스: 부용교.동단(시점)-소화다리-벌교.홍교-부용산M1고지공원-벌교.행정복지센터-보성여관

-부용교.서단-칠동천.보행교-벌교천.데크탐방로-벌교대교.영암·순천 고속도로 밑-순천만.둑길끝지점

-대포항.방파제-범등고개/보성군 벌교읍·고흥군 동강면 경계-죽림마을회관-응암교차로

-죽암방조제-화담양수장-망주리.팔영농협망주지소(종점)

인원: 나홀로 (이사. 곽차)

거리: GPS 21.79km (두루누비기준 21.1km)

시간: 널널.촬영&휴식포함/ 6시간10분

▶ 갈때 : 순천62구간 마치고, 현지숙박으로 인해 63구간 들머리 대중교통편 확인못함

▶ 올때 : 보성63구간 마치고, 망주리 팔영농협 망주지소 앞 도로에서

(13:30) 고흥군내버스를 타고, 동강 경유하여

(13:58) 벌교공용버스터미널에 하차

(14:12) 벌교공용버스터미널에서 순천行 시외버스를 타고

(14:40) 순천종합버스터미널에 하차, 근처 베스트빈커피점에서 대기하다가

(16:30) 부산行 시외버스를 타고 섬진강휴게소 경유하여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에서 16번 버스타고 양산.내송집으로 귀가

남파랑길 보성 63코스 궤적

11월26일

(05:20) 기상하고, 어젯밤 (22:10) 취침에 들어가 한번도 안깨고 7시간10분 푹 잤다.

집에서 자면 새벽에 꼭 한번씩은 깨는데 나오기만하면 이렇게 잘자니 역시 체질이다~ ㅎ

이후 컵라면을 끊여 햇반과 함께 이른 아침 해결후 씻고 볼일(?)보고~ ㅎ

(06:30) 하룻밤 숙박했던 '그랜드모텔'을 나와 남파랑길 63코스 시점으로 도보이동이다.

(06:35) '부용교' 동단 입구를 지나고~

'부용교' 동단 입구 우측 하단부에 세워져 있는,

남파랑길 보성 63코스 안내판 앞이 남파랑길 순천62코스 종점이자 보성63코스 시점이다.

(06:40) 두루누비&트랭글 앱 켜고 '벌교천변' 좌측 탐방로로 들어서서,

남파랑길 보성 63코스 시작이다.

'벌교의 인물' 패널을 지나고~

'벌교'의 인물로 민족종교 대종교의 중광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홍암 나철',

민족 음악가 '채동선', 소설 태백산맥 저자 '조정래',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창간자 '한창기',

시인 '박기동' 5명을 소개하고 있다.

'벌교천변' 탐방로 우측은 '국화꽃'이 만발해 있다.

'태백산맥' 포토존 조형물을 지나고~

(06:45) 소설 '태백산맥' 글귀가 적힌 각진 아치형 구조물 밑을 지나는데~

'못 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하는 구절을 통해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설 '태백산맥'을 아주 살짝 엿볼 수 있다.

-태백산맥은 없다-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2005.1.1 시행, 2009. 3. 5 개정)」에서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산(병사봉)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천왕봉)으로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고,

2005년 국토연구원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총 길이가 1494.3km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다고 입증했다.

백두대간의 개념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10세기 초 고려 승려 도선이 지은 《옥룡기》로서

『아국(我國)은 백두에서 일어나 지리에서 끝났으니, 물의 근원· 나무줄기의 땅이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백두대간이란 개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을 의미하는 '대간'이란 단어를 처음 쓴 문헌은 이중환이 쓴 《택리지》(1751)로서,

『대간은 끊어지지 않고 옆으로 뻗었으며 남쪽으로 수천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에까지 통하여

하나의 맥령(脈嶺)을 이루었다』라고 적고 있다.

백두대간과 백두정간이란 단어를 처음 쓴 문헌은 이익이 쓴 《성호사설》(1760)로,

백두산을 우리나라의 조종산이며 대간의 시작 산으로 보았으며, 백두대간, 백두대맥(白頭大脈),

백두남맥(白頭南脈), 백두정간(白頭正幹) 등을 혼용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백두대간과 정간·정맥은 1770년경(영조)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것으로 추정하는 산경표(山經表)를 기본으로 한다.

이 산경표는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잊혔다가,

1980년에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李祐炯)이 인사동에서 영인본을 발견하여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산경(山經)'은 ‘산의 흐름’, 즉 산의 경과(經過)를 뜻한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족보(族譜) 기술 식으로 정리했으며, 산경(山經)을 바탕으로 거리[里數]를 부기해서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도표화했다.

즉,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사실에 근거하여 15개 산줄기(백두대간, 장백정간, 13정맥)로 나누고 1,650여 개의 지명과 1,500여 개의 산과 고개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하고, 10대 주요 강줄기를

유역별(流域別)로 나누어 수록해 놓은 우리 민족의 전통 지리서이다.

이 산경표에 기록된 백두대간은 북쪽의 백두산(2750m)에서 시작하여 낭림산, 금강산(1638m)을 거쳐

설악산(1708m), 태백산(1567m)까지 내려와 속리산(1058m)에서 지리산(1915m)까지 뻗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류하며 큰 획을 긋는 도상거리 1625km의 한반도에서 제일 긴 산줄기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산경표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구한말 조선 광물탐사사업의

학술 책임자였던 일본인 지질학자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1856-1935)가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4개월 동안 한반도를 답사하여 지질을 조사한 뒤, 1903년에 이 조사를 토대로

조선의 산악론, 지질구조도를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 마식령산맥 등 산맥 명칭과 분류를 처음 명명· 사용하였고,

야스 쇼에이(失洋昌永)라는 일인 학자가 이를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 수록하면서부터 조선 땅에

산줄기 개념이 사라지고 국토 단절의 산맥(山脈)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은 고토의 논문 이후 조선 전래의 땅 위 지형의 개념인 「산줄기 체계」가 아닌, 당시 유행하던

지질학에 근거한 지질개념(地質槪念)인 산맥(山脈)을 강제로 도입시켰고, 일제 강점 후 1910년부터

18년까지 9년 동안 수탈 목적으로 고토의 논문을 바탕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조선의 세밀한

지형도를 그렸고 쌀과 곡물을 가져가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냈으며, 금 등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계속 지질조사에 광분했다.

이후 우리는 1백 년 가까이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 등 지질 개념을 배우는 비운을 맞았고,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산줄기 체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일제가 만든 '태백산맥'이란 개념이 일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조차도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고, 아직도 교과서나 각종 안내판 등에서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06:46) '나, 벌교 살아요'란 글자가 달린 '미리내 다리'를 지나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며,

광양 가서 끈기 자랑하지 마라』라는 말이 회자되어 왔는데, 벌교에 산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캐치프레이즈다.

(06:48) 좌측 벌교천 너머로, 특이한 형태의 건물인

'벌교 꼬막웰빙센터'를 바라보고~

운동시설을 지나, 영문자 '벌교' 글자 조형물을 지난다.

(06:50) 줄지어 도열해 있는 기둥 조명 사이를 지나서,

'I ♥ B' 조형물 포토존을 지나고~

(06:52) 데크 다리를 건너,

또 다른 벌교 영문자 'BEOLGYO' 조형물을 지나면~

(06:54) 역사적인 다리인 '소화다리' 앞에 도착이다.

'소화다리' 시비 앞을 지나면, '소화다리' 설명 패널과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소화(昭和)다리'

부용교(芙容橋)의 옛 이름은 '소화(昭和)다리'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단기 4264년) 6월, 소화 6년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여서

‘소화다리’라고 불렸다.

벌교천 위에 놓인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 ·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좌우로 나뉜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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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바로 저곳이다.

지금은 난간이 있지만 해방 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를 조달한다고

쇠 난간도 뜯어갔기 때문에 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 난간이 없었던 저 다리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여순 반란사건을 일으킨 14 연대가 벌교를 장악했을 때는

수많은 우익인사들이 저 다리에서 죽었고, 반대로 토벌군이 들어온 다음에는 좌익을 처형한 곳이다.

난간이 없으니 총살을 하면 사람들은 강물로 그대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누가 우익과 좌익을 구분하고 판단하는가???

그 갈등이 21세기인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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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백산맥>에는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 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태백산맥 1권 66쪽)라는 표현과 함께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소화다리' 우측에는 대형 꼬막 조형물과 함께

'태백산맥 꼬막거리'로 명명되어 있다.

(06:57) '소화다리' 아래를 통과하고~

그렇게 '소화다리'를 지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회정리'에서

'벌교읍 봉림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벌교읍 봉림리(鳳林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리(里)이다.

벌교천이 흐르는 평야지역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봉림마을이 있다.

봉림마을은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세미(稅米) 운송에 필요한 선박출입이 용이하여 양곡창고가 있던 곳이다.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그 후 여러 성씨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마을에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 하여 사창(社倉)으로 불리다가,

뒷산이 봉(鳳) 형국으로 되어 있다 하여 봉림(鳳林)이란 지명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별교천변'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 벌교천 너머로 '채동선 음악당' 건물이 보이고~

벌교천(筏橋川)

벌교읍 추동리 금화산에서 발원하여 중간에 낙안읍성(樂安邑城) 쪽에서 내려온

낙안천(樂安川)과 합쳐진 뒤 남동쪽으로 흘러 벌교리에서 여자만(汝自灣, 순천만)으로 유입된다.

유역에 고읍평야(혹은 '고읍들')가 형성되어 있다.

『여지도서』(낙안)에 『개곡천(開谷川)은 금화산(金華山) 산중에서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곡천은 벌교천의 옛 이름으로 보이며, 지금의 이름 '벌교천'으로 굳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 것으로 추정된다.

(07:01) '조정래길' 도로 우측으로,

'벌교중학교' 입구를 바라보면서 진행이다.

그렇게 진행하면 정면 좌측으로 아치형 돌다리인,

'벌교 홍교'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07:06)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홍교' 앞에서 '조정래길' 도로를 벗어나 좌회전하여 '홍교'를 건너간다.

벌교 홍교(虹橋)

벌교천 위에 걸쳐진 세 칸의 무지개다리다.

전체 길이 27m에 높이는 약 3m, 폭은 4.5m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1963년에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홍교는 모양이 공중에 떠 있는 구름 또는 무지개와 같으므로 구름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운교(雲橋), 무지개다리의 뜻으로 홍교(虹橋)· 홍예교(虹霓橋)라고 하였다.

원래 조선시대인 1718년(숙종 44)에 당시 낙안현(樂安縣) 주민들이 이곳 벌교천에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다리를 놓았는데, 지역의 이름도 이 다리에서 따 와

뗏목 벌(筏) 자를 써서 '벌교(筏橋)'가 되었다.

1728년(영조 4)에 대홍수로 이 뗏목다리가 무너지자, 이듬해인 1729년 선암사의

초안(楚安)과 습성(習性) 두 선사禪師)가 석교를 세우기 시작하여 1734년에 완공되었고,

그 뒤 1737년에 다리를 다시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가 만들어졌다.

불교에서는 다리를 놓아 사람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을

중요한 보시로 꼽고 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수공사를 하면서, 홍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다.

그렇게 '홍교'를 건너고~

'홍교' 중간즈음에서 이제까지 이어오던 '봉림리'에서

'벌교읍 별교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벌교읍 벌교리(筏橋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리(里)이다.

칠동천이 흐르는 평야지역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계두, 신성, 계성, 선근마을 등이 있다.

계두마을은 한일합방 이전에는 바다로서 소형 꼬막 배가 드나드는 지역이었으나,

1930년경에 바다를 매립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존제산의 주봉이 동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려 마을에서 머무른 형국이

마치 닭머리와 비슷하다 하여 닭머리로 불려 오다가, 현재는 닭머리의 한자음인

계두(鷄頭)로 부르고 있다.

신성마을은 1959년 세망동에 있었던 시장을 이곳으로 이설하여 사람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새로 탄생한 마을이라는 뜻의 신성(新盛)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계성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옆 마을인 계두가 닭의 머리에 해당되고,

이곳은 몸의 중심 부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계성(鷄盛)이란 이름이 붙었다.

선근마을은 옛날 효성이 지극한 선근(善根)이의 효성을 기념하기 위해

다리를 축조하여 선근교(善根橋)라 부른 후부터, 마을이름도 선근(善根)이 되었다.

 

 

 

좌측으로 '별교천' 바라보고~

(07:08) '홍교' 다리 끝 지점 우측으로 보면,

'벌교 홍교 중수비군(重修碑群)' 5기가 나란히 서 있다.

홍교 앞 도로변에는 모두 5기의 중수비군(重修碑群)이 서 있다.

홍교가 낡고 헐어 다시 고친 내력과 참여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중수비(重修碑)와

단교명비(斷橋銘碑)들이다.

이곳 홍교는 예전에는 단교(斷橋)라고 불렸는데, 큰 물이 나면 다리가 끊어지고

사람의 통행이 끊어진 데서 유래되었다.

비문은 대부분 마모가 심하거나 훼손되어 내용 판독이 어려워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1737년, 1844년, 1899년에 건립한 3기의 중수비만이 연대가 밝혀졌을 뿐이다.

이 비군은 홍교의 역사와 지역의 연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07:10) 이후 '채동선 생가' 방향으로 진행하여,

'보물 제304호 홍교 7주갑 기념비'를 지나고~

(07:11) '고운기' 시인의 시비가 있는 삼각지 갈림길에서,

우측 '태백산맥길' 도로를 따라 우측의 '벌교 포교당'을 보면서 진행이다.

다시 벌교에 와서 -고운기-

부용산 오리길에 그늘이 지네 / 사람은 가도 노래가 있어 /

좀체 사라지지 않는 땅의 역사를 그대 아는가 /

벌교천 따라 오르는 밀물이 담아 온 / 좀체 사라지지 않는 바다의 역사를 그대 믿는가 /

들몰 들녘으로 저녁 먹으러 가는 기러기 / 우리도 바짓가랑이 흙을 털고 /

매운 솔가지 피워 밥 짓는 어머니 만나러 가자 /

제석산 부엉이 울음에 두렵던 옛 밤이 깊어지고 / 낮은 지붕 밑 작은 등불 아래 /

검붉은 얼굴 맞대 먼 이야기 피워 내면 / 사윈 밤이 새벽을 걷는 소리 그대 듣는가

(07:13) '채동선' 생가 입구에서 우회전하고~

담장 너머로 복원된 '채동선' 생가 바라보고~

민족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

선생은 전라남도 보성 벌교 출생으로 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 제일 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에 매료되어 바이올린을 사사 중,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감시가 심해지자 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졸업 후 1926년 독일 베를린 슈테른쉔 음악 학원에 입학,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전공한 뒤

1929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악리(樂理)와 실기를 가르치면서,

4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1932년에 가곡 <고향>을 발표하였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은둔생활을 하면서 민요 등

민족음악 채보에 힘써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등을 남겼으며, 광복 후에는 작곡에 전념하다가,

1953년 부산 피난 생활 중에 신병을 얻어 5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주요 작품 중 가곡으로 <고향(그리워, 망향)>과 〈향수〉,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으며,

합창곡 〈또 다른 하늘〉, 교향곡 〈조국〉, 〈한강〉, 〈현악 4중주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이 있고, <개천절>, <한글날>, <3.1절>노래 등을 작곡하였다.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 가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이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07:16) '채동선' 생가 앞에서 우회전하여,

'부용산 M1 고지 공원'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올라간다.

'별교읍내' 바라보고~

(07:21) '충혼탑'이 있는 '부용산 M1 고지 공원'에 오르고~

일제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었고 해방 후 공원이 되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온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이곳에 지휘소를 세우고 M1고지라 이름한다.

(07:22) '부용산 M1 고지 공원'에서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는데,

영사기 형상의 이정표가 이색적이다.

(07:24) 데크 전망대에 도착하고,

우측으로 '월곡 영화골'로 들어서는 길이 보이지만 남파랑길은 좌측 아래로

이어지는 데크 계단길을 따라 내려서도록 안내되고 있다.

월곡 영화골 벽화마을은 영화의 낭만을 이색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민간단체 주도로 조성된 영화를 테마로 한 문화마을이다.

부근에 부용산 등산로가 있으며. 벌교역에서 걸어서 10분, 벌교 중심가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벽화마을로 접근성이 좋은 관광지이다.

이후 '벌교읍 행정복지센터'를 바라보며,

데크 계단길을 내려서서 우회전하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청년단이 있었던 곳'

스토리텔링 패널 읽어보고~

(07:27) '벌교읍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우측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따라 진행이다.

(07:29) '태백산맥 문학공원'으로 들어서면 대리석 벽면에 소설 태백산맥 1부 ~ 4부

줄거리 패널과 함께 작가 '조정래' 상과 친필 사인을 비롯 약력이 전시되어 있다.

(07:31)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의 '계두마을회관'을 바라보면서,

'태백산맥길' 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이곳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해 나가면,

'벌교 여자중학교'를 지나 '월곡 영화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07:32) 좌측으로 '조선 정조' 때 유행했던 '책가도(冊架圖)'를 연상시키는

'태백산맥' 책 조형물과 쉼터 정자를 지나는데~

정자 쉼터 맞은편 우측에는,

'벌교 금융조합'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벌교 금융조합(筏橋金融組合)은 벌교읍(筏橋邑) 벌교리(筏橋里) 512-16번지에 있는

근대 건축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226호이다.

1919년에 금융 시설로 지은 2층의 붉은색 벽돌 건물로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전면에

크게 창이 나 있으며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이룬다.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따른 건축물이다.

1919년 일제강점기에 벌교금융조합 건물로 사용되다가, 1926년 농촌지도소 벌교지소,

벌교지역 '농민상담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당시의 금융 시설을 살펴볼 수 있으며 건축적 가치가 있다.

'추억부자' 포토존 바라보고~

이후 계속해서 '태백산맥길' 도로를 따라

'보성여관' 방향으로 진행하고~

제가 사는곳에는 볼 수 없는 '삼화목공소'와

옛날식 문방구점인 '개구리 문구점', '벌교 초등학교' 정문 앞을 차례로 지나고~

(07:40) '보성여관 앞을 지나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보성여관(寶城旅館)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속에서 반란군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의 숙소로

묘사된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여관으로, 1935년 한국인 강활암이 한옥과

일본식을 혼용해서 지어 당시 가장 멋진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벌교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위치하여 일본인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그들을 상대로 숙박 영업을 하기 위해 일본풍으로 지었다.

당시 근현대 역사 문화환경을 형성하는 중요 거점 역할을 했던 보성여관은

2004년 역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문화재청이 매입하여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보성여관의 관리단체로 지정된 후,

2년간의 17억 원을 들여 옛날 모습 그대로 복원 사업을 거쳐

2012년 6월 예전 모습을 되찾은 보성여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복원된 2층 건물의 1층에는 카페나 소극장 등 이벤트 공간과 벌교와 건물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공간이 있고 2층은 다다미 방으로 다목적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1층 안쪽의 한옥 부분에는 소설 속 남도여관을 느낄 수 있는

온돌방 7개의 숙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07:42) '벌교역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고,

우측 건너편의 '벌교역'에 들려 생리고민 해결하고~

(07:50) 이후 '별교역'에서 나와 '홍암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좌측으로 '벌교시장'을 지난다.

(07:53) 어제밤 하루 유했던 '그랜드모텔'을 지나고~

(07:55) '부용교' 서단 입구에서 남파랑길(63코스 종점 18.7km→)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우회전이다.

(07:56) '경전선' 철교 밑을 통과하고,

연달아서 철교 아래쪽에 작은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을 지난다.

'벌교천' 바라보고~

(08:00) '벌교천'과 '칠동천'이 합류하는 곳에 놓인 데크 탐방 다리 앞에서,

우측 '칠동천변' 둑길을 따라 진행하고~

데크 탐방 다리 앞에서 우회전하지 않고, 앞쪽 갈대밭 사이로 이어지는

데크 탐방 다리를 따라 건너편으로 바로 이동하면, 우측 칠동천을 크게

우회하여 진행하는 길보다 약 1.3km 정도 길이가 줄어든다.

남파랑길 63코스가 21.7km로 상당히 긴 거리인데,

이런 구간에서 약간이라도 거리를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ㅎ~

이후 '칠동천' 둑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고~

(08:08) 우측 아래로 '벌교 숲공원' 바라보고~

(08:10) 좌측으로 '칠동천'을 가로지르는 '보행교'를 건너간다.

우측으로 '칠동천'을 가로지르는 '경전선 철교'와

그 뒤편 '선근교' 바라보고~

칠동천(七洞川)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옥전리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

벌교리에서 남해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섬진강권역 섬진강 남해권 수계의 지방하천으로 하천의 수계는

본류인 칠동천과 지류인 마동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연장은 9.34㎞, 유로연장 14.29㎞, 유역면적 33㎢이다.

『여지도서』(낙안)에 "백정천(白亭川)은 보성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금화산(金華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며 선근교(善根橋)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금화산은 큰봉 서남쪽에 있는 존제산(尊帝山)을 가리킨다.

또 선근교는 지금도 다리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백정천'이 칠동천의 옛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백정천'이라 한 배경은 알 수 없다.

한편, 『대동여지도』와 『조선지지자료』에는 선근천(善根川)으로 나온다.

선근교 다리 아래로 지나는 하천이라 해서 '선근천'이라 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이름은 '칠동리(七洞里)'에서 유래된 것인데,

일제강점기 이후 공식지명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보행교'를 건너면 중간즈음에서,

이제까지 이어지던 '별교리'에서 '벌교읍 장좌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벌교읍 장좌리(長佐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리(里)이다.

칠동천 남쪽 유역에 위치하여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장좌, 분포, 무만, 월곡 등이 있다.

장좌마을은 이곳이 옛날에는 조그만 섬으로 신선과, 사람, 부처가 서로 돕고

생활한다 하여 장좌라고 하였다는 설과 이곳에 부자(장자)가 살았다 하여

장자 또는 장좌(長佐)라 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무만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사(武士)가 만명이 난다 하여 무만동이라 했다 하며

분토마을은 뒷산이 형성될 당시에는 풀과 나무는 없고 하얀 흙으로 되어 있어 분토라 했다 한다.

월곡마을은 지형이 달이 골짜기에서 솟는 형국이라 하여 '달곡'이라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 마치 땅굴처럼 생겼다 하여

'땅골'이라 불리다가 1964년 행정구역 개편과 동시 무만리에서 분구되어

월곡(月谷)이라 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08:11) '보행교'를 건너서 좌회전하는데, 남파랑길 이정표가

63코스 종점까지 17.7km 남았음을 알린다.

이후 좌측으로 '칠동천' 갈대밭 사이로 이어지는

데크탐방교를 바라보면서 진행하고~

(08:22) 데크 탐방다리 출구를 지난다.

약 22분 전 지났던 건너편 데크 탐방다리 입구에서,

우측 '칠동천변' 둑길이 아닌 직진 방향의 데크 탐방로로 진행하면

이곳으로 바로 건너오게 되는 곳이다.

계속해서 '벌교천' 둑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고,

(08:24) '2번국도 녹색로' 도로가 지나는 '벌교대교' 밑을 통과하고~

'보성 벌교갯벌 습지보호지역' 안내판 바라보고~

(08:26) 직진 둑길과 좌측 데크 탐방길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데크 탐방길을 따라 진행이다.

일반적인 데크길에는 빗살무늬의 방부목을 까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에는 아주 두꺼운 통나무를 깔아 놓아 걷는 느낌이 남다른데 좀 더 자연적인 느낌이다.

갈대숲 사이를 관통하는 환상적인 산책로는 이후

'벌교 생태공원' 건너편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갈대밭 사이 데크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는데,

건너편으로 계속 산책로가 보수됨이 확인되고~

(08:37) '벌교천'을 가로질러 건너편 '벌교 생태공원'으로 연결되는

데크 산책다리를 지나는데, 현재 공사중이라 데크산책로가 폐쇄되었다.

(08:38) 데크 산책로 출구로 나와 좌회전하여,

콘크리트 포장 둑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고~

그렇게 콘크리트 포장 둑길을 진행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장좌리'에서

'별교읍 영등리'로 행정구역이 바뀌는데 정확한 경계지점은 잘 모르겠다.

벌교읍 영등리(永登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리(里)이다.

벌교천 동남쪽 유역에 위치하여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등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영등, 두평, 박석, 봉황 등이 있다.

영등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등(連等)이라 불려오다 일제시대에

마을의 주령이 길게 내려왔다 하여 영등(永登)이라 했다 한다.

두평은 지형이 삼보산의 월악산을 안고 있어 들이 협소하고 들의 형상이 옛날에 사용하였던

사각곡용두(四角穀用斗)와 같다 하여 두평(斗坪)이라 했다 한다.

박석은 이곳의 지하에 넓은 암반이 형성되어 박석(薄石)이라 했다 한다.

봉황은 봉황이 먹이를 찾아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봉황이라 했다 한다.

(08:42) '보성 별교갯벌 습지보호지역' 안내판을 지난다.

순천만 국가 정원과 함께 순천만 갯벌이 유명하지만, 실상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된 것은 순천만 갯벌과 보성 벌교 갯벌도 함께 등재되었다.

벌교읍 호동리, 장암리, 대포리, 장도리 일원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이미 2006년부터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에는 해양수산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갯벌 보전을 위한 이중 삼중의 제도적 준비는 되었으나 실행하는 것은 사람이니,

마음이 모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풍경이 유지되고 이곳 사람들에게

풍성함을 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08:45) '국가지점번호 다라 8754 4865'를 지나고~

'벌교천' 강물이 좌측으로 굽이쳐 나가는 곳을 바라보고~

(08:48) '국가지점번호 다라 8774 4853'를 지나는데,

뒷편으로 '새우 양식장'이 시작된다.

'벌교천' 건너편의 '제석산' 바라보고~

(09:07) 남파랑길 이정표(↓63구간 시점 7.2km, ←종점 14.5km)가

있는곳에서 좌회전하여 길게 진행하고~

(09:15) 우측으로 '보성군농어촌 폐기물종합처리시설'을

바라보며 진행이다.

오늘 바람은 별로 안 부는데,

얼음이 언것을 보니 날이 춥기는 추운가보다 ㅎ~

'벌교천' 바라보고~

(09:22)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가 지나는 '벌교대교' 건너편은,

어제 진행했던 남파랑길 62코스가 지나가는 '장양항' 이다.

(09:26)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가 지나는

'벌교대교' 아래를 통과하고~

좌측으로 '벌교천' 기수역을 바라보고~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보성 갯벌인데,

람사르는 사실 카스피해 남부에 있는 이란의 도시 이름이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도 멀지 않은 도시인데 1971년 줄어드는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국제 환경 조약이 람사르에서 이루어졌다.

공식 명칭은 '물새 서식지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다.

우포늪이나 보성 갯벌처럼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철새 서식지나

생태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지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느지막이 가입했는데 협약에 가입하면 지정한 습지 보전하고,

습지의 적절한 사용을 위한 지침을 두며 습지를 자연보호구로 지정하는 등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09:37) '보성 벌교갯벌 습지보호지역'

안내판이 있는 배수문을 지난다.

이후 남파랑길 빨간화살표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둑길을 따라 계속 진행하고~

호수처럼 잔잔한 '순천만' 바닷가 바라보고~

(09:51) 좌측으로 이어지는 둑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측 농로로 진행하고~

그렇게 농로를 따라 진행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영등리'에서

'별교읍 장암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벌교읍 장암리(長岩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리(里)이다.

벌교천 남쪽에 위치하여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장, 하장, 대룡, 제두 등이 있다.

상장마을은 조선 병자호란 당시 밀양박씨의 처인 오씨부인이 남편이 김천 싸움에서

사망하자 아들 형제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이 지역을 감싸고 있는 산맥의 한쪽 끝이 긴 바위로 형성되어 있어

장암이라 하였으며 첫 마을이라 하여 상장(上長), 그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장이라고 하였다.

제두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돼지형태와 같이 생겼다 하여 제두라고 했다 한다.

대룡마을은 뒷산이 와령분주(臥龍奔株)형국이라 하여 대룡(大龍)이라 했다 한다.

 

 

 

우측 산기슭에 '태양열 발전단지'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09:53) 농로사거리 갈림길에서 좌회전하면,

정면 산기슭에도 '태양열 발전단지'가 설치되어 있다.

(09:58) 정면으로 대단위 축사를 보면서 진행하고,

축사앞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완만한 임도를 따라 언덕위로 올라간다.

(09:59) 그렇게 언덕에 올라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고~

(10:01) '장암길' 도로를 만나 우회전하는데,

63코스 종점까지 10.1km 남았다.

그렇게 '장암길' 도로를 따라 약 100m 정도 진행하면 나오는,

(10:03) 'ㅏ자' 갈림길에서 우측 길로 진행하고~

이후 '역C자' 형태로 크게 반호를 그리며 진행하여,

앞쪽 산 아래 길을 따라 우측에서 좌측으로 진행하게 된다.

(10:07) 대형 비닐하우스 단지를 지나는데,

이넘들이 얼마나 짖어대는지 대략난감!!!

(10:10) 다시 '장암길' 도로와 만나고,

도로를 건너 우측으로 몇 발자국 진행하면 나오는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길에서,

바로 좌회전하여 '제두길'로 진행이다.

그렇게 '제두길' 도로를 따라 길게 진행하고~

(10:17) '제두길' 도로 삼거리 도착전 한창 도로공사중인데,

알고보니 '벌교 지음소하천' 정비사업중이다.

(10:19) '제두길' 도로 삼거리에서 우측 '대포리 제두마을' 방향으로 진행하고,

좌측 길은 '하장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곳을 지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장암리'에서

'별교읍 대포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벌교읍 대포리(大浦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리(里)이다.

한때 낙안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큰개가 있다 하여 '한개' 또는 '항개',

'대포'라 하였는데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로 대포 선착장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포, 제두마을이 있다.

대포마을은 본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연꽃이 마치

호수에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연호동(蓮湖洞)으로 불렸다.

후에 교통과 통신이 불편할 때 여수, 삼천포, 부산을 비롯한 목포, 완도,

군산 등지에서 상선을 이용하여 생선을 구입할 뿐 아니라, 동부6군은 물론

전북 남원에서도 쪽지게를 지고 상인들이 몰려들어 큰 포구를 이루었다 하여

대포(大浦)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제두마을의 이름은 지형이 돼지 형태와 같이 생겼다 하여 제두(猪頭)라고 했다 한다.

그렇게 우회전하여 '대포리 제두마을'로 들어서서

마을 앞 길을 따라 길게 진행하고~

마을의 지형이 돼지 모양을 닮았다고 '제두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제육볶음(豬肉)의 제자는 사실 돼지 저(猪)인데 제라고 읽기도 하는 경우이다.

돼지를 의미하는 한자는 이외에도 돼지 시(豕), 돼지 돈(豚) 외에도

많이 쓰이지 않지만 돼지 체(彘)도 있다.

'유자' 맞제???

(10:30) 남파랑길 갈림길을 만나고,

이곳에서 '제두길' 도로를 벗어나 좌측 농로로 들어서서 해안 방향으로 진행이다.

(10:33) 우측으로 '제주양씨 참봉공파 추모당'을 지나,

정면 멀리로 비닐하우스와 빈 축사를 바라보며 진행하고~

(10:37) 농로 'T자'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빈 축사를 바라보며 '대포마을' 해안길로 길을 이어간다.

 

그렇게 진행하다보니 농로를 지나 해안으로 나왔는데,

해안은 키 큰 갈대숲 덕택에 해안선 보기도 힘들다.

(10:40) 우측으로 '대포마을 하수처리시설'을 지나고~

(10:42) 'Y자' 갈림길에서 마을로 직진하지 않고,

좌측 해안길로 진행이다.

넓게 들어나는 '여자만'의 이름을 알수없는 섬들...

그리고 뻘밭... 칠게를 잡는 건강망도 무수히 설치되어 있다.

(10:46) '대포마을'로 들어서고,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사당이 당산제를 지내는 당집인 모양이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갯귀신제'라는 당산제를 지낸다는데,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어촌마을에는 여전히 이런 문화가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는 생선을 사러 '부산'과 '목포'에서도 배를 몰고 이곳을 찾아

큰 포구를 이루었다고 '대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그 옛날의 영화는 없을지언정 마을은 넉넉하고 포근함이 느껴진 마을이다.

(10:50) '벌교갯벌 도립공원' 안내판을 지나,

'대포항'에서 좌측의 '대포방파제'를 바라보고~

(10:52) 앞쪽 '할미섬'과 연결된 방파제로 이어지는

데크 탐방로 갈림길에서 우회전하고~

좌측 해변 멀리 '죽암' 방향 바라보고~

(10:54) '갯마을가든펜션' 마당 안으로 들어서서,

뒤 뜰로 진행이다.

이후 잠시 제방길을 따르다,

'T자' 농로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진행하고~

(10:59) 다시 'ㅏ자' 농로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대포들' 사이 농로를 따라 길게 진행이다.

(11:01) '남하로' 도로를 만나고,

이후 남파랑길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좌회전하고~

(11:04) 그렇게 '남하로'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다,

좌측 사잇길 농로로 진행이다. (계속 도로를 따라가도 되는데...)

(11:08) '범등고개' 사거리에 도착하고~

'범등고개' 직전에서 이제까지 이어오던 '보성군 벌교읍 대포리'에서,

'고흥군 동강면 죽암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고흥군 동강면(東江面)

전라남도 고흥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면이다.

북쪽은 벌교읍에 가깝고 서쪽은 보성군 조성면(鳥城面), 남쪽은 고흥군 대서면(大西面)과

남양면(南陽面)에 접하고 동쪽은 순천만에 면한다.

북쪽에는 병풍산이 있고, 서쪽에는 봉두산이 있다.

북서지역에서 유둔천, 대강천, 매곡천, 와우천이 발원하여 동쪽의 순천만으로 흘러나간다.

이들 하천을 따라 농경지가 분포하고, 특히 죽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에는

넓은 간척평야가 분포한다.

고려 시대에는 보성군 태강현(泰江縣) 지역이었다.

1441년(세종 23) 태강현은 지금의 매곡천(梅谷川)을 경계로 동면(東面)과

대강면(大江面)으로 나뉘어졌다.

『호구총수』의 동리를 살펴볼 때 조선 후기에도 동면 · 대강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두 면을 합하고, 두 면에서 한 글자씩 따서 동강면(東江面)이라고 하였다.

현재 면 소재지인 유둔리(油芚里)를 비롯하여 10법정리 33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강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쌀·보리를 비롯하여 참깨·목화 등을 산출하며,

그 밖에 오이·딸기 등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여 주요도시에 공급한다.

죽암리 여자만 개펄에서는 피조개·꼬막 등 패류의 양식이 성하다.

교통은 벌교읍과 고흥 남양면으로 이어지는 15번 국도가 지나며 면의 북쪽에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며 고흥IC가 있다.

문화재로는 신여량 장군 정려(申汝梁將軍旌閭:전남기념물 111), 송대립(宋大立) 정려,

용흥사(龍興寺), 고흥 유둔리 덕암지석묘군, 가교마을 고인돌군[支石墓群],

원매마을 고인돌 등이 있다.

동강면 죽암리(竹岩里)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에 위치한 리(里)이다.

농촌 지역이며, 마을 앞으로 매곡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죽림, 죽동, 옹암이 있다.

죽림마을은 마을 앞이 강변이라 모래가 많이 밀려왔으므로 마을 명을

“모리목”이라 불러 왔으나 일제 초기에 마을전체가 대나무로 울창하므로

竹林(죽림)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옹암마을은 마을연안으로 접한 포구 남쪽에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마치 홀로 서 있는 형태라 하여 독암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 때 제방을 막아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전경이 항아리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마을 명을 옹암이라 칭하여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죽동(竹洞)마을은 옛날에는 동네 전체가 죽림(竹林)으로 우거졌다 하나

마을 명을 한때는 '모랫등목넘개'라 불렀고, 또 시누대가 많아

'신죽'이라고도 하였으며 그 후 일제강점기에 죽동(竹洞)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산 김씨 상호군공파 세천비'와 '죽림마을' 표지석을 지나

몇걸음 내려서면 'Y자' 갈림길인데~

도로 좌측에 있는 '남파랑길 고흥 63코스' 안내판 바라보고~

(11:10) 도로 우측 입구의 '죽림마을. 竹林' 표지석을 바라보며,

'죽암안길' 마을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11:13) '죽림마을회관' 앞을 지나 좌측으로 휘어지며 진행하고~

(11:14) '범등고개'에서 바로 내려오는 '죽암안길' 메인도로를 만나고,

도로건너편에 있는 깔끔한 쉼터 벤치에 배낭을 내리고~

준비해온 햄버거와 테라 캔맥주 큰거 1캔으로

이른 점심을 해결하며 13분 쉬었다가 간다.

(11:28) '죽동마을' 표지석을 지난후, 연달아 '해선정' 정자를 지나고~

(11:29) '죽동마을회관' 앞 갈림길에서 정면위에 위치한

'죽암보건진료소'를 바라보며, 좌측 해안 방향으로 진행이다.

'죽암리.죽림마을' 앞 바다 바라보고~

(11:33) '옹암마을' 표지석을 지난후

도로는 우측으로 휘어지며 '옹암마을'로 진행이다.

(11:35) '죽암리.옹암마을회관'을 지나고~

'옹암마을'이란 이름은 원래는 마을포구 앞바다의 바위산 때문에

'독암'이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쌓아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모양이 항아리 같다고 '옹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죽암리.옹암마을' 앞 바다 바라보고~

(11:44) '옹암마을' 끝자락에 있는 '옹암쉼터'와

'옹암포구'를 연달아 지나고~

(11:45) '옹암교차로'에서 좌측 '죽암방조제'로 진행이다.

좌측으로 '대강천' 기수역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호수처럼 잔잔한 '대강천' 바라보고~

그렇게 '죽암 방조제길' 중간을 넘어서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동강면 죽암리'에서, '남양면 월정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고흥군 남양면(南陽面)

전라남도 고흥군 북부에 있는 면이다.

북쪽으로 동강면(東江面), 남쪽으로 과역면(過驛面)에 접하고, 동쪽으로 순천만(順天灣),

서쪽으로 득량만(得粮灣)에 면한다.

해발고도 100m 내외의 구릉지가 면역(面域)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면의 남부에는 방조제를 구축하여 조성한 농경지가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다.

순천만을 따라서는 신망방조제, 오도방조제, 죽암방조제가 있다.

지명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양폐현은 본래 백제 조조례현(助助禮縣)이던 것을

신라에서 충렬(忠烈)이라 고쳐서 분령군(分嶺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에 소속시켰으며, 우리 세종 23년에 와서 붙였다."라는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내용은 고려 시대의 남양현이 오늘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민호 367호, 남자 714명, 여자 713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흥군 남양면이 되었다.

1973년 과역면 도천리 우도가 편입되었다.

현재 면 소재지인 장담리를 비롯하여 8개 법정리(里)와 34개 자연마을을 관할한다.

이들 중에서 장담리(長潭里)는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는 장담(長談)에서 유래하였다.

『구한국행정구역일람』에서부터 한자가 장담(長潭)으로 바뀌었다.

장담은 진대미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긴 제방이라는 뜻이다.

진대미는 음운변화를 통하여 뒤에 진담이 되었다.

장(長)은 진의 훈으로 쓰인 것이고, 담(談, 또는 潭)은 음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망주리의 잠두(蠶頭) 마을은 누에머리처럼 뭉쳐 있는 지형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침교리의 침교(沈橋) 마을은 바닷물이 드나들 때마다 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는

돌다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탄포(炭浦) 마을은 숯개와 관련이 있다.

숯개는 숲이 우거진 나루이며, 탄포는 이것의 한자식 표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탄포원은 흥양현 북쪽 60리에 있다."는 내용이 있고,

『조선지지자료』에는 탄포주막이 기록되어 있다.

쌀·보리 중심의 농업이 성하고, 그 밖에 비닐하우스 재배에 의한 고등원예작물의

원교농업(遠郊農業) 및 야산개발에 의한 잎담배 재배가 성하다.

면의 서쪽 득량만 해안섬 우도에서는 꼬막·굴의 산출이 많다.

우도 주변에 무인도인 각도섬,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 오리섬, 꼬리섬, 행계섬, 해섬이 있다.

벌교와 고흥읍을 연결하는 15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고 있고

보성군 조성면으로 이어지는 77번 국도가 분기하기 때문에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고흥 중산리 지석묘군(전남기념물 160), 장담리(長潭里) 지석묘군,

남양리(南陽里) 지석묘군, 심교리(沈橋里) 지석묘군, 아평제(鴉坪堤) 지석묘군, 남양산성 등이 있다.

남양면 월정리(月亭里)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에 위치한 리(里)이다.

이웃하는 망주리와 함께 여자만에서 잡는 꼬막이 유명하며

특히 선정마을이 꼬막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해안가에 조성된 방풍림이 볼거리이며 수종은 이팝나무와 팽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자연마을에는 선정마을, 주암마을, 왕주마을이 있다.

월정(月亭)이란 이름은 마을 앞 바다인 여자만(汝自灣)을 건너 멀리 바라보면

여천군 화양면 산정에서 떠오른 달(月)이 마을의 정자(亭子)나무에 비치는

광채가 아주 화려하다 하여 '월정(月亭)'이라고 했다 한다.

선정(仙亭)은 조선 세종 때 현감이 순찰차 들렀다가 마을 앞의 울창한 수목을 보고

「그 수려한 경치는 신선이 놀 만한 별유천지」라 하여, 예전 이름인 전포(電浦)에서

선정(仙亭)으로 고쳐 부른 것이라고 전한다.

주암(周岩)은 ‘진등’ 혹은 ‘두룸바우’라 불렀는데, 진등은 망주산(望珠山)의 뒤 산맥이

길게 뻗어내려 왔다 하여 '진등'이라 하였고,

'두룸바우'는 마을 주변에 바위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 '두룸바우'를 음차 하여 '주암(周岩)'이라 부른 것이다.

왕주(王蛛)는 옛날 지형이 왕(王) 거미 머리라 하여 '왕주머리' 혹은 '왕지머리'라 하였고,

이를 음차 하여 '왕주두리(王蛛頭里)' 혹은 '왕지두리(王蜘頭里)'라 하다가

일제강점기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왕주(王蛛)라 하였다.

 

 

 

 

(11:53) '죽암 배수갑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좌측으로 소형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 바라보고~

(11:55) '죽암방조제' 끝에서 우회전하여 '배수갑문'을 바라보면서'

'대강천' 둑길을 따라 길게 진행이다.

대강천(大江川)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대강리에서 시작하여 유둔리·침교리를 지나

남양면 월정리에서 남해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섬진강권역 섬진강 남해권 수계의 지방하천으로 하천의 수계는 본류인 대강천과

소하천인 유둔천·덕암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연장은 3.61㎞, 유로연장 4.28㎞, 유역면적 4.9㎢이다.

(12:02) '왕주양수장' 옆을 지나면 이제까지 이어지던 '월정리'에서

'남양면 망주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남양면 망주리(望珠里)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에 있는 리(里)이다.

남해 바다를 향한 곳에 있는 해안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부도마을, 망동마을, 와야마을, 평촌마을, 잠두마을이 있다.

부도는 마을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 물에 떠있는 오리와 같다 하여 부도란 이름이 붙었고,

망동은 망주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망동이 되었다.

와야는 이 마을의 지형이 기와를 덮어놓은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고

평촌은 과거부터 들마을이라고 불렸으므로 한문으로 평촌으로 바꾸었다.

잠두마을은 서쪽의 산이 누에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망주리(望珠里) 망동(望東)마을의 옛 지명은 '골몰' 혹은 '동편'이라고 불렀는데,

'골몰'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골마을' 즉 '골몰'이라 했으며,

'동편'이라 함은 「망주리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편(東便)'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망주리(望珠里)의 동(東)쪽 마을」이라 하여

'망동(望東)'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2:11) '화담양수장'이 있는 'ㅓ자' 갈림길에서

둑길을 버리고 좌측 농로로 진행하고~

(12:13) 농로 'Y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이후 남파랑길 빨간화살표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진행이다.

(12:17) '증 가선대부 이공 기적비'를 지나고,

1분후 'T자' 농로 삼거리 갈림길에서 '망월로' 농로로 우회전하고~

(12:20) 또 다른 'Y자' 농로 갈림길에서

우측 '망월로' 농로를 계속 진행이다.

(12:25) 남파랑길 이정표(↑종점 1.9km, 시점 3.8km→)가 있는 갈림길에서 직진하고,

남파랑길 이정표 '시점의 방향과 거리 표시 3.8km'가 오류다.

(12:29) 대규모 축사를 지나는데 사육 소는 거의 보이지 않고,

축사를 지키는 개들만 심하게 짖어댄다.

(12:32) 또 다른 대규모 축사를 지나는데,

이곳도 사육 소는 거의 보이지 않고~

이후 남파랑길 빨간화살표 시그널이 가르키는 방향의

농로를 따라 진행이다.

(12:36) 'Y자' 농로 갈림길에서 좌회전하여,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언덕으로 오르고~

(12:41) 그렇게 언덕 정점에 올라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오늘 구간의 종점인 '망주리 망동마을'이 조망되고~

(12:44) 마을 입구에 산악회 리본들이 가득 붙어 있다.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하랴~ ㅎㅎㅎ

(12:48) 2차선 포장도로인 '망월로' 도로를 만나고,

우회전하여 '팔영농협 망주지소' 방향으로 내려서서 진행하고~

좌측으로 '망동마을회관'과

'망주 학구경로당'을 차례로 지나 도로를 건너고~

(12:50) '팔영농협 망주지소'앞 도로에 세워져 있는

남파랑길 고흥64코스 안내판 앞이 남파랑길 보성63코스 종점이자 64코스 시점이다.

남파랑길 고흥64코스 시작점 패널 바라보고~

오늘 남파랑길 진행은 여기까지...

목표했던 남파랑길 보성 63코스도 무사히 도착했다.

두루누비&트랭글 앱 끄고 남파랑길 보성 63코스를 종료한다.

어제 남파랑길 62코스와 오늘 남파랑길 63코스를 마쳤는데,

'순천'에서 시작하여 '벌교'를 거쳐 '고흥'까지 3개 군을 지나왔다.

갯벌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었던 코스였다.

이후 '팔영농협 망주지소' 입구 계단에 배낭을 내리고,

땀에 젖은 상의 갈아입고...

남은 음식 떨이하고...

망주리 팔영농협 망주지소 앞 도로에서 (망주.버스정류장은 보이질않는다.)

(13:30) 도착한 고흥군내버스를 타고, 동강 경유하여

(13:58) 벌교공용버스터미널에 하차

(14:12) 벌교공용버스터미널에서 순천行 시외버스를 타고

(14:40) 순천종합버스터미널에 하차, 근처 베스트빈커피점에서 대기하다가

(16:30) 부산行 시외버스를 타고 섬진강휴게소 경유하여

부산 서부(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하차,

사상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고~

지하철2호선 타고 종점인 양산역에 하차, 양산역에서 16번 버스타고 양산.내송집으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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