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맥

땅끝기맥11차 (닭골재~문바위재, 하산:미황사)

일자: 2014.11.2

산행코스: 닭골재~작은닭골재~225~바람재~달마산(達馬山)~문바위재 (하산:미황사)

인원: 맥클럽(19)

GPS거리: 7.4km 널널4시간20분

 

닭골재의 전경

 

해남군 현산면과 북평면을 잇는 13번국도가 지나간다.

이 고개 아래로 4차선 新13번 국도가 지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산꾼이나 다니는 고개가 되었다.

해남地誌에 기록되어 있는 ‘닭골재’의 지명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동네 지명이

‘딱골’이라하여 그 마을의 지명이 이 고개의 지명이 된 듯하며 딱골  닥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해남지지에는 “저동(楮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이 고개의 지명은  “저동치(楮洞峙)”인데 지역민들이 딱골재라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닭골재 변음이 되어 이렇게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도로 절개지 배수로 철책을 따르다 쪽문을 통과하고~

 

경주김씨 쌍묘 우측 2시방향으로 올라 능선에 오르니 마루금은 좌측으로 틀어지고,

첫번째 ×139봉은 마루금을 피해 우측사면으로 우회하여 내려선다.

 

우측 매화마을에는 대규모의 양계시설이 있는 공장지대인데~

이 지역을 지날 때 고약한 닭똥냄새가 많이난다.

 

매화마을 뒤쪽의 달마산 농바위를 땡겨보고~

 

좌우로 가시잡목이 무성한 희미한 등로를 따라 안부에 내려서니 건너편 우측사면은 벌목지대다.

 

그렇게 벌목흔적을 따라 오르면 해남군수 명의로 된 출입금지표지판을 지나고~

 

다시 고만고만한 잡목이 무성한 봉우리를 넘어 내려가면 편백나무 숲이다.

 

시멘트길이 넘어가는 작은닭골재에 내려서고~

 

우측으로 서부지방 산림청장의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경고판을 지난후 좌측으로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그대로 임도를 따라 임도탐구에 들어간다.

 

호젓하게 한동안 계속 이어지는 임도길을 따르고~

 

갈림길을 만나고, 좌측으로 방향을 바꾼다.

 

은근한 임도 오르막길를 진행하면 우측으로 지난구간 지나온 마루금이 잘 조망된다.

 

북평면 남창리와 달도의 전경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와 완도 사이에 있는 섬 달도는 배의 닻을 닮아

닻도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변음이 되어 달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 남창리에는 조선 중기까지 달랑진이라고 불리운 수군기지가 있었는데 조선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가고 달랑진 남쪽에는 조운창을 지어 남창(南倉)이라 불렀다.

남창은 조세로 거둔 대동미를 싣고 한양으로 가거나 먹거리가 부족했던 제주도로

식량을 공급햇던 창고가 있던 곳이다.

 

다시 땅끝기맥 마루금이 지나가는 바람재에 도착하고~

 

 

바람재라는 지명답게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이곳은 해남. 현산면 월송리와 북평면 이진리를 연결하는 잊혀진 고개인데

작은 닭골재에서 이곳까지 임도가 연결된다.

 

정면으로 달마산 농바위가 선명하게 보이고~

가야할 능선은 송곳같이 뾰쪽하게 솟은 암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회한 225봉을 뒤돌아보고~

 

곧바로 능선으로 오르니 이곳 또한 억새와 가시잡목이 갈길급한 사람의 발길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입에서 육두문자가 절로 나온다.

 

잡목을 헤치고 힘들게 올라 달마산 입구에 들어서니 농바우가 마치 사열을 하듯 서있다.

 

 

 

지나온 땅끝기맥 마루금(1)

 

려말선초 왜구의 침략이 유난히도 많았던 이곳 해남

 

특히 조선 명종 때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불렸던 달랑진 사변(을묘왜변)이 터졌던 곳으로

왜구의 침략으로 해남, 강진, 영암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그때 조선의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인해 민초들의 안위보다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해

국력을 소비한 터라 왜구에 대해 선제 공격보다는 교린을 통한 달래기 작전으로 일관했고

민초들에겐 공도정책 (섬 주민은 육지로 해안가 주민들은 내륙 깊숙한 곳으로 이주)

통해 소극적으로 대응 하였다.

 

더 이상 오를수없는 농바위 꼭대기

 

 

이곳 농바위에서 도솔봉까지 멋진 암릉구간이 시작되지만 이 구간은 너무 등로가 험하여

암릉 아래로 우회하여 급하게 내려섰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암릉을 우회하여 흙길이 밟히는 안부에 내려서니 이정표에 바람재라 적혀있는데~

 

지나온 임도가 있는 곳이 지도상 명기된 바람재인데, 이곳도 바람재라니 약간 혼란스럽다.

우측으로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은 이진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 역시 바람재라는 지명답게 바람이 상당히 세차게 불어대고 있다.

 

바람재 주위의 기암괴석들

 

 

 

 

 

 

우측에 있는 암릉의 사열을 받으며 좌측으로 돌아 올라서면 너덜지대인데 아무렇게나

포개진 바윗돌을 밟으며 지나는데 발목이 아파 한발한발 디디기가 조심스럽고 속력도 나지않는다.

 

지나온 땅끝기맥 마루금(2)

 

좌측으로 완도가 잘 조망된다.

 

이후 달마산을 향해가는 등로는 바위암봉과 돌무더기 너덜지대의 연속이라

잠시라도 긴장감을 늦출수가 없다.

 

우측 암릉사이로 뾰쪽하게 보이는 가공산(334.8m)의 전경

 

가공산은 우리나라 산 이름중 가나다 순으로 맨처음 등장하는 산이다.

 

등로좌우로 아름다운 단풍이 산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고~

 

 

지나온 땅끝기맥 마루금(3)

 

정면으로 가야할 달마산 정상부가 보인다.

 

우측으로 바라본 해남군 현산면 월송리의 모습

 

좌측으로 바라본 이진진(梨津鎭)의 전경

 

이진리 마을 뒷쪽에 있는 이진산성은 정유재란 이후인 1598(선조21)에 진()이 설치됐고

1627(인조5)에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는데 성이 축성년대가 이때쯤으로 추정된다.

이진리(梨津里)는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고하여 배진 또는 이진이라 하였는데

서전리를 일부 병합하여 이진리라 부른다고 한다.

 

관음봉 능선 삼거리를 지나고~

 

관음봉 능선 삼거리 주위전경

 

 

마치 수석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 달마산의 암릉구간...

길이가 13km가 되는 환상적인 암릉전시장이다.

 

또 다시 암릉구간을 오르지 못하고 우측으로 우회한다.

 

 

이곳은 암릉구간인데다 바위가 이슬에 젖어 한순간 방심하면 다치기 딱 좋은 곳이다.

조심~~~ 또 조심

 

숨어우는 바람소리에 가을은 더욱 가까이 우리곁으로 다가오고...

 

다시 달마산으로 향한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주위의 기암괴석들은 거대한 수석을 세워 놓은듯하다.

 

 

 

우측으로도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도열해 있는데~

마치 산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

 

지나온 땅끝기맥 마루금(3)

 

능선 위로 올라서니 누군가가 돌탑 하나를 멋지게 쌓아 놓았다.

 

또 다시 등장하는 단풍이 무척 아름답다.

 

단풍 드는 날   -도 종환ㅡ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지나온 땅끝기맥 마루금(4)

 

누가 이렇게 쌓아놓았을까?

 

봉수대(돌탑)가 있는 달마산(達馬山 ×470) 정상부의 전경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다 하는데,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어느 학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어느 학자는 12세기 중반인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곳 달마산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으로 연결하던

봉수대인데, 밤이면 횃불, 낮에는 연기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긴급함을 알렸다.

그래서 달마산 정상의 봉우리가 불선봉 또는 불썬봉이라 불렀는데 이는 전라도 사투리로

불을 켜다”,”불을 써다라는 유래에서 따온 지명으로 봉수대와 관련된 지명인듯 보인다.

 

인증샷 한장 남기고~

 

달마산의 최정상인 돌탑이 있는곳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몇걸음 내려간 아래에 달마산이 아닌 달마봉이란 표시석이 서있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대사가 머무를 만큼

산세가 뛰어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기록상으로 고려의 무외 스님이 처음으로 이 산을 달마산으로 불렀는데, 그는 달마산

정수리의 바위들은 사자와 용,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불썬봉을 불선(佛仙), 불성(佛聖)봉으로도 부르고, 미황사 스님들은 달마봉으로 부른다.

 

달마(達摩)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다르마에서 유래되어 경전또는 진리의미한다.

달마(達摩)는 조사선의 초조(初祖)로 본래 인도 파사국(波斯國)의 왕자였다.

6세기 전후에 북위(北魏)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고, 이 선맥(禪脈)

육조 혜능조사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계종맥으로 연결되는 스님이다.

 

그는 당시 주류를 형성한 강설불교(講說佛敎)의 모함을 받아 여섯번이나 독약을 받았고,

결국 중국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이 전설에 대한 우리나라 땅끝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달마는 고향인 인도로 가지 않고 해남으로 왔다고 믿고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때 무외스님이 쓴 글에 “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다”라며 그림으로 그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 달마산 지명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달마대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만 아쉬운 점은 현재 지명인 달마산(達馬山)이 옛 문헌인 해동여지도”(해남)에는

달마산(達磨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등에는 달마산(達摩山)으로

표기되어 한자가 각기 다르고, 달마대사의 달마(達摩)와도 다르다.

 

달마산 이후 도솔봉으로 연달아 이어지는 암릉구간

 

아래에 있는 미황사를 땡겨보고~

 

땅밑 이정표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우측으로 진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로프구간을 지나고~

 

현기증이 날 만큼 급경사의 데크목을 내려간다.

 

현재위치?

 

우회한 바위암봉

 

문바위재 암봉사이로 보이는 완도앞바다가 한폭의 그림이다.

 

문바위 아래에 있는 통천문(일명: 개구멍)

 

겨우 한사람이 빠져나갈 만큼의 구멍으로 등로가 이어지는데 뚱뚱한

나 같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려면 많이 힘이들것 같다.

 

또 다른 이정표가 있는 작은금샘 삼거리

 

작은 금샘은 금서동굴 쪽으로 10분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금샘을 찾기가 쉽지 않으며

해남군에서는 금샘을 보호하기 위해 이정표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는 다시 높은 데크목을 올라간다.

 

미황사갈림길을 만나고~

 

오늘 땅끝기맥길 원래코스는 도솔암주차장까지인데 수술한 발목상태가 좋지않아

이곳에서 스톱하고 미황사로 하산한다.

 

문바위 근처 암봉을 지나고~

 

웬 바위구멍?

 

전망대를 만나고, 북평면 월송리 일대와 미황사가 잘 조망된다.

 

이후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미끄러운 바위암봉을 로프에 의지한체 조심. 또 조심이다.

 

현재위치?

 

고도를 낮출수록 등로가 좋아진다.

 

현재위치?

 

미황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등로

 

미황사(美黃寺) 전경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위치한 전통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 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 749(성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속에는 ≪화엄경≫·≪법화경≫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

1660(현종 1) 성간(省侃) 3창하였으며, 1751(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

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

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응진당(應眞堂)

 

미황사의 副佛殿 응진당(보물 1183)은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이며,

건축연대는 대웅보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1993년 도지정 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고 2001년 보수공사를 마쳤다.

 

응진당 주위 담장

 

대웅보전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982년에 보수 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

(1754년 작성)의하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

오랜 세월에 씻겨 건물 외부의 단청이 지워지고 나뭇결이 보드랍게 살아 대웅보전을 찾는 이에게

소박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전해주며, 이곳이 부처님의 집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듯 장엄화려하며,

법당 안에는 소종과 법고, 법고대, 괘불등이 봉안되어 있다.

 

미황사 대웅보전에 모신 삼세불(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대웅보전 천장에 쓰여진 범어(인도 산스크리트어) 글자

 

아잔타 석굴 벽화를 연상케 하는 대웅보전 내벽 일천불의 벽화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부처님 때문에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천 분이니 세 번만 절을 올리면 삼천 배가 되니 어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현재 미황사 대웅보전은 단청이 없는데,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원래는 단청을 했었다.

1754년 건물을 중수할 때 단청을 했으나 260여년이 넘는 동안 바닷바람 등의

영향으로 그 고운색이 많이 바랬다.

 

그리고 대웅보전의 기둥은 느티나무이다.

느룹나무과 낙엽송인 이 나무는 우리나라, 일본, 몽골, 중국 등지에 분포해 있다.

주로 동네 어귀에 심어 마을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느티나무이다.

미황사의 배흘림기둥의 초석을 보면 연꽃봉오리가 활짝 핀 연화문과 거북, 게 모양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대웅보전 앞 배례석

 

대웅보전 주위전경

 

명부전(冥府殿)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은 짓지 말며

衆善奉行(중선봉행)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自淨其意(자정기의)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한다면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인과(因果)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괴로움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나도록 하는 법문이다.

이 인과법(因果法)에 무지한 사람은 지옥에 나게 되는데 이 지옥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자신의 성불을 미루신 분이 바로 지장보살님이다.

이런 지장보살님을 모신 곳이 명부전이다.

 

세심당(洗心堂)

 

대웅보전 앞마당을 두고 육화당과 마주보고 있는 형태이고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자로 되어 있다.

세심당과 일심관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인데 일심관은 ‘ㄱ'자로 되어 있다.

다만 세심당과 일심관은 참배를 금하고 있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향적당(香積堂)

 

육화당(六和堂)

 

만세루(萬歲樓) 자하루 후면에 걸린 편액이다.

 

물맛 좋습니다.

 

달마대사 상

 

자하루(紫霞樓)

 

달마선다원(達摩禪茶苑) 전통찻집, 불교용품도 취급하고 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현재 불사 중에 있으며 아직 편액도 없고 단청도 안되어 있고, 건물 형태만 완성된 상태다.

 

미황사 일주문(一柱門)

 

기다리고 있는 차

 

산행마무리를 하고, 차를 타고 선두팀을 맞이하러 도솔암으로 간다.

 

도솔암주차장 주위전경

 

 

 

진도가 희미하게 조망된다.

 

잠시후 회원들이 도착하고~

곧바로 해남읍내로 이동하여 대흥사우나에서 하룻동안 땀냄새 제거하고~

근처 식당에서 추어탕으로 저녁을 해결후 꿈나라에 들어가고, 이후 눈을 뜨니 부산이 지척이다.